다시 그리운 강진의 무위사
오래전 일이다. 김완주 시장 때의 일이니까 그때만 해도 사후에 화장火葬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화장서약 행사가 주부클럽 연합회 주최로 열렸던 일이 있었다. 김완주 전주시장을 비롯 각계각층의 사람들중 내가 나이가 젊은 편에 속했었는데 나는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화장해서 납골당에 묻히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화장하고 나서 호화분묘를 쓴다면 화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곧 바로 화장을 해서 그 남은 재를 내가 좋아하는 세 곳에 뿌려 주어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과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뒤편, 그리고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측면에다 뿌리고 추석이나 설 또는 내 기일에는 가지 말고 너희들이 그곳에 갈 때만 나를 생각해다오. 살아서 평생을 떠돌았던 내가 조그마한 무덤이나 상자에 넣어져 납골당 속에 안치된다면 얼마나 답답해할 것이냐.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남아있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곳에 가 있을 것이 아니냐.’ 내 말을 듣고 김완주 전주시장도 그렇게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짐보다 실천이리라.
남도 지역을 답사할 때면 언제나 나는 빼놓지 않고 강진의 무위사(無爲寺)에 들러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내 마음을 달래고 온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들러서 가다 보니 내게 있어 무위사는 이미 오래 전에 육친화가 된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기 때문에 무위사 천왕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 내 마음은 오래전에 떠나왔던 고향집에 들어서는 듯한 생각에 편안함으로 가득해진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내리는 빗줄기조차도 정겹고 천왕문 앞에 피어난 여름꽃들도 지친 내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듯하다.
내 영혼을 의탁하고 싶은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의 월출산(809m) 동남쪽에 있는 사찰로서 대흥사의 말사이다. 사기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진평왕 39(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고 하였고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갈옥사로 바꾸면서 수많은 스님들이 머물게 되었다. 그 뒤 고려 정종 원(946)년에 선각국사가 3창하면서 방옥사라고 개명하였고 조선 명종5년에 태감선사가 4창하면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 는 뜻의 ‘무위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기 선종사찰에서 태고종절로 바뀐 무위사는 사찰 통폐합의 와중에도 이름난 절에 들어 그 위세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어서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을 불력으로 거두는 수륙재를 지내는 수륙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절의 건물로는 극락보전, 명부전과 벽화보존각, 천왕문, 응향각, 천불전, 미륵전, 산신각 등이 남아있어 56동에 이르렀다는 옛 절의 모습을 그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그러나 무위사의「사적기」는 여러 가지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원효만 해도 진평왕 39년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창건연대가 훨씬 뒤일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또한 의문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조선불교통사>를 지은 이능화나 금서룡 같은 학자들은 “도선국사는 실제 인물이 아니고 형미대사의 행적을 바탕으로 몇 사람의 행적을 보태어 꾸며낸 가공의 인물일 것이다.”라는 주장을 폈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후삼국시대 선종과 함께 도입된 풍수도참사상이 고려시대를 풍미하였고 고려 건국이 풍수도참 사상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정당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고려의 승려였던 광운은「도선전」에서 도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선의 어머니 최 씨가 한자 넘는 외를 따먹고 처녀로 임신하여 도선을 나았으며 애비를 모르는 자식이라 하여 그 친정 부모가 화를 내고 대밭에 버렸다. 그러자 비둘기와 매들이 날라 와서 날개를 덮고 보호하였으므로 다시 데려가 길러 출가를 시켰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일행(一行)선사로부터 풍수도참설을 전수 받았다.” 도선의 출현 이후 이 땅에는 수많은 풍수가들이 나타나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조선의 선비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가을이면 피어난 상사화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요사 채 쪽의 작은 꽃밭을 느티나무, 팽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정면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무언으로 보여주는 무위사의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서있다. 김제 귀신사의 대적광전이나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의 조사당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보전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 집인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바라보면 볼수록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해체 복원공사 중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초기인 세종 12(1430)년에 효령대군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열기문에 의하면 성종 7(1476)년 병신년에 후불벽화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 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극락보전 안벽에 그려져 있는 많은 벽화들을 1974년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 채로 드러내어 벽화보존각을 지어 따라 보관하고 있다. 고려불화의 맥을 잇는 전통적인 후불벽화는 신필에 가깝다. 그 벽화에 얽힌 일화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이 절을 찾아온 한 노거사가 벽화를 그릴 테니 49일 동안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49일 되던 날 무위사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다.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극락전 옆에는 선국대사 형미의 부도비와 삼층석탑이 서 있고 미륵전에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형상의 미륵불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줄 것처럼 모셔져 있으며 그 옆에는 산신각이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지금은 선각대사 형미의 것이라고 쓰여진 탑비 앞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던 무위사도 지금은 어둠에 잠겨 있겠지,
2024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