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시바 히데요시도 타키카와 카즈마스도 아닌… ‘혼노지’ 직전까지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신뢰했던 ‘무장의 이름’ / 2/24(화) / 프레지던트 온라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 직전까지 가장 신뢰했던 가신은 누구였을까.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 씨는 “다케다 가문을 토벌한 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냉대했다는 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 미쓰히데가 가장 신뢰받는 실무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제1회)
※ 본고는 와타나베 다이몬의 『논쟁 혼노지(本能寺) 변(星海社 신서)의 일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 노부나가와 동행한 '관동 관광'의 진실
다음으로, 다케다 가문을 토벌한 뒤 미쓰히데의 처우를 두고, 과연 노부나가 가신단 내에서 승진 경쟁에 패배했는지 확인해 보자.
텐쇼 10년(1582년), 갑자기 시나노의 기소 요시마사(木曽 義昌)가 타케다 가쓰요리(武田 勝頼)를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 편으로 배신했다.
요시마사는 타케다 씨의 친척이었다. 놀란 가쓰요리는 요시마사를 토벌하기 위해 1만 5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가쓰요리의 출전 소식을 들은 요시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지원군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장남인 노부타다를 선봉으로 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같은 해 2월, 미쓰히데는 가이(甲斐)에 출전 준비를 명령받았다(『노부나가 공기』). 같은 해 3월, 노부나가는 미쓰히데, 츠츠이 준케이(筒井 順慶), 호소카와 후지타(細川 藤孝) 등과 함께 아즈치(安土) 성(시가현 오미하치만시)에서 가이국으로 향했다.
노부나가가 가이국으로 향한 것은 타케다 군을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를 확신한 뒤의 ‘관동 관광’이었다(『고금소식집』). 공가의 고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동행했던 것이 그 증거이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했을 때, 노부나가는 시나노 국경조차 넘지 못하고 미노국의 이와무라성(기후현 에나시)에 머물고 있었다.
■ 왜 미쓰히데만 은상이 없었는가
같은 해 3월, 신추의 군대는 텐목산(야마나시 현 코우시)에서 가쓰요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타케다 가문은 멸망했다. 군공을 세운 타키카와 카즈마스는 코우즈케(上野)국과 시나노국(소현·사쿠 양군)을 받아 ‘관동관령’이라 불릴 만큼의 지위로 도약했다.
같은 해 4월, 미쓰히데는 카이에서 귀환했지만 전혀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미쓰히데의 심경에 대해,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와 동행한 것은 ‘킨키 관령’으로서 당연한 직무였지만, 그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와다 테츠오(小和田 哲男) 씨는 지적한다(『아케치 미쓰히데 만들어진 “반역자”』 PHP 신서, 1998년).
그 이유는 미쓰히데가 타케다 씨와의 전투에서 전혀 기대받지 못했고, 전공을 올릴 가능성이 없는 출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와 동행했을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편, 미쓰히데보다 실력이 낮은 이치마스가 가쓰요리의 목을 베는 군공을 세워 ‘관동관령’이 된 것은 미쓰히데를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다고 오와다 씨는 지적한다.
미쓰히데가 카이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노부나가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 미쓰히데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그 결과, 일련의 사건들이 혼노지(本能寺) 변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쓰히데는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가이국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단지 노부나가에 동행했을 뿐이다. 미쓰히데는 전투에 나섰지만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은상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치마스는 다케다 가문을 토벌해 군공을 세웠으니, 그에 상응하는 은상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노부나가의 부하들은 역할을 나누어 맡았으며, 모든 가신에게 타케다 가문을 토벌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쓰히데는 본거지인 오미와 단바를 포함한, 기내(교토부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출전을 명령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미쓰히데가 타케다 가문을 토벌하러 나서지 않은 것은, 자신이 맡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와 동행한 것은 두 사람의 좋은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싫어했다면, 그는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타케다 씨 멸망 사건으로 미쓰히데가 뒤처졌다고 해서 큰 불안을 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굴욕
다음으로 오와다 씨는 미쓰히데가 히데요시와의 승진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텐쇼 9년(1581) 2월, 교토에서 오오기마치(正親町) 천황을 맞이해 말 정렬을 거행했을 때, 준비를 담당한 사람은 미쓰히데였다.
오와다 씨는 히데요시가 츄코쿠 정벌에 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쓰히데에게 역할이 넘어갔지만, 히데요시가 출전하지 않았다면 준비를 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이 팽팽히 맞섰다고는 하지만, 말 정렬을 담당하는 역할을 히데요시가 맡는다는 예측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며 명확한 근거는 없다.
텐쇼 10년(1582) 5월, 노부나가 미쓰히데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신장공기』). 당시 히데요시는 비추 고마쓰성(오카야마시)을 수공(물공격)으로 공격하고 있었으며, 전투는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다른 장수들과 함께, 히데요시의 지원군으로 출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 오와다 씨는 『아케치(明智)군기』의 기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쓰히데가 비츄코쿠(備中国)에 출전한다는 것은 곧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미쓰히데가 ‘히데요시에게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히데요시에게 졌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 '킨키 관령'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미쓰히데의 생각은 나중에 혼노지(本能寺) 변을 일으키는 부수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오와다 씨는 말한다.
오와다 씨는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에게 이즈모·이시미 두 나라를 주고, 대신 탄바와 오미국 시가군을 빼앗는다는 『아케치 군기』의 기록을 인용하며,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고 전한다.
미쓰히데의 배치 전환은 혼노지(本能寺) 변의 원한설과 연결됐지만, 오와다 씨가 원한설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순이다.
오와다 씨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쓰히데가 두 나라의 다이묘가 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승진이다. 하지만 이시미와 이즈모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킨키 관령’으로서 정권의 중심에 있던 미쓰히데에게는 좌천이었다는 것이다.
즉, 미쓰히데는 햇빛이 비치는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고,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응원하러 가게 되었으니, 그 처우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이다.
『아케치 군기』는 사료로서 질이 떨어지는 것이며, 오와다 씨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서술 내용을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긍정적으로도 해석하는 이중 기준을 취하고 있다.
■ 최강의 지원군으로 선택된 실력자·미츠히데
『아케치 군기』는 내용에 오류가 많고, 역사 자료로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근본적으로 검토 자료가 되지 않는다.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히데요시의 지원 부대로 파견한 것은 그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미쓰히데는 나가오카의 지시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큰 공을 세워 왔다.
최대의 적인 모리 가문과의 한 전투에서 상황이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장 힘 있는 가신을 파견해 노부나가가 승리를 확실히 하려는 생각은 당연한 일이다.
좌천을 생각하고 있던 무장을 파견하는 등 역효과가 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
와타나베 다이몬 / 역사학자
1967년생. 1990년, 관서학원대학 문학부 졸업. 2008년, 불교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 후반 과정 수료. 문학 박사. 현재, 주식회사 역사와 문화 연구소 대표이사. 주요 저서에 『관케하라 전투 전사』 1582‑1615(초시샤), 『전국대명의 전쟁 상황』(카시와 서방), 『여기까지 알았다! 진짜 신장,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50가지 수수께끼』(지혜의 숲 문고), 『키요스 회의, 쇼기 천하 장악 스위치는 언제 켜졌는가?』(아사히 신서) 등 다수.
----------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
羽柴秀吉でも滝川一益でもない…"本能寺"の直前まで、織田信長が最も信頼していた"武将の名前"
羽柴秀吉でも滝川一益でもない…"本能寺"の直前まで、織田信長が最も信頼していた"武将の名前" / 2/24(火) / プレジデントオンライン
楊斎延一『真書太閤記 本能寺焼討之図』、大判錦絵三枚続、明治26年(写真=CC-PD-Mark/Wikimedia Commons)
織田信長が本能寺直前まで最も信頼していた家臣は誰だったのか。歴史学者の渡邊大門氏は「武田氏討伐後、信長が明智光秀を冷遇したという説は広く知られている。だが、その見方には無理がある。光秀こそ最も信頼された実務家だった可能性が高い」という――。(第1回)
【写真をみる】落合芳幾作「太平記英勇伝二十七:明智日向守光秀」
※本稿は、渡邊大門『論争 本能寺の変』(星海社新書)の一部を再編集したものです。
■ 信長に同行した「関東見物」の真実
次に、武田氏討伐後における光秀の処遇をめぐって、本当に信長家臣団の中で出世競争に敗れたのか確認しておこう。
天正10年(1582)、突如として信濃の木曽義昌が武田勝頼を裏切り、織田信長方に寝返った。
義昌は、武田氏の親類衆だった。驚いた勝頼は義昌を討つため、1万5000の兵を遣わした。
勝頼の出陣を知った義昌は、信長に援軍の要請を行うと、信長は嫡男の信忠を先鋒とする軍勢を派遣したのである。
同年2月、光秀は甲斐への出陣準備を命じられた(『信長公記』)。同年3月、信長は光秀、筒井順慶、細川藤孝らを引き連れて、安土城(滋賀県近江八幡市)から甲斐国へ向かったのである。
信長が甲斐国に向かったのは武田軍を討つためではなく、勝利を確信したうえでの「関東見物」だった(『古今消息集』)。公家の近衛前久が同道していたのは、その証左である。武田氏が滅亡したとき、信長は信濃国境すら越えておらず、美濃国の岩村城(岐阜県恵那市)に滞在中だった。
■ なぜ光秀だけ恩賞がなかったのか
同年3月、信忠の軍勢は天目山(山梨県甲州市)で勝頼を死に追いやり、武田氏は滅亡した。軍功を挙げた滝川一益(かずます)は、上野国と信濃国(小県、佐久両郡)を与えられ、「関東管領」というべき地位に躍進した。
同年4月、光秀は甲斐から帰還したが、まったく恩賞を与えられなかったのである。
当時の光秀の心境について、光秀が信長に同道したことは「近畿管領」として当然の職務としつつも、その心中は穏やかでなかっただろうと小和田哲男氏は指摘する(『明智光秀 つくられた「謀反人」』PHP新書、1998年)。
その理由は、光秀が武田氏との戦いでまったく期待されず、戦功を挙げる可能性がない出陣だったからだという。
しかし、光秀は信長に随行しただけであり、戦闘に加わっていなかったのだから、それは当然のことだろう。
一方で、光秀より格下の一益が勝頼の首を取る軍功を挙げ、「関東管領」になったことは、光秀を大いに焦らせたと小和田氏は指摘する。
光秀が甲斐で戦闘に加わらなかったことは、信長に対する不満あるいは不安を生じさせたのである。
■ 光秀が戦闘に参加しなかった理由
結果、一連の出来事が、本能寺の変につながったということになろう。この見解については、いささか疑問が残る。
先述のとおり、光秀は戦闘に加わるため甲斐国に向かったのではなく、単に信長に同行しただけである。光秀は合戦に出陣し、軍功を挙げていないのだから、恩賞がなかったのは当然のことである。
一益は武田氏討伐で軍功を挙げたのだから、相応の恩賞を授かったのも当然といえよう。
信長の配下の者には役割分担があり、すべての家臣に武田氏討伐を命じるわけにはいかなかった。
当時、光秀は本拠の近江や丹波を含めた、畿内を中心としたエリアが活躍の場だったので、信長は光秀に出陣を命じ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
光秀が武田氏討伐に出陣しなかったのは、自分の持ち場ではなかったからだろう。
一方で、光秀が信長に同道したことは、2人の良好な関係を意味していると推測される。信長が光秀を嫌っていたら、同道させなかったに違いない。したがって、武田氏滅亡の一件で光秀が後れを取り、大きな不安を抱いたと考える必要はない。
■「秀吉の麾下に入る」という屈辱
次に、小和田氏は、光秀が秀吉との出世競争を意識していたと指摘する。
天正9年(1581)2月、京都で正親町天皇を迎えて馬揃えを挙行した際、準備を担当したのは光秀だった。
小和田氏は秀吉が中国攻めに出陣中だったので、光秀に役が回ってきたが、もし秀吉が出陣していなければ、準備を担当していた可能性を示唆する。
それほど2人の実力は拮抗していたというが、馬揃えの担当を秀吉が担当するという予想は単なる憶測にすぎず、明確な根拠はない。
天正10年(1582)5月、信長は光秀に出陣の命令をした(『信長公記』)。当時、秀吉は備中高松城(岡山市)を水攻めにしており、攻防は最終局面を迎えていた。
光秀は信長の命により、ほかの諸将とともに、秀吉の援軍として出陣するよう命じられたのである。
この点について小和田氏は『明智軍記』の記述をもとにして、次のように指摘する。
光秀が備中国に出陣することは、そのまま秀吉の麾下(きか)に入ることを意味する。
ここまで光秀は「秀吉に勝った」と思っていたが、ここにきて「秀吉に負けた」ことを強く意識することになった。
■「近畿管領」から地方へ左遷された
こうした光秀の思いは、のちに本能寺の変を引き起こす副次的な理由になったと小和田氏は述べる。
小和田氏は信長が光秀に出雲・石見の2カ国を与え、代わりに丹波と近江国志賀郡を召し上げるという『明智軍記』の記述を取り上げ、光秀は信長の意向を聞いて大いに落胆したという。
光秀の配置転換は本能寺の変の怨恨説につながったのだが、小和田氏は怨恨説を否定するのだから矛盾する。
小和田氏は、さらに次のようにも述べる。
光秀が2カ国の大名になるのは、形の上では栄転である。しかし、石見、出雲は京都から遠く離れており、「近畿管領」として政権の中枢にいた光秀にとっては、左遷だったという。
つまり、光秀は日の当たる栄光の座から引きずり降ろされ、しかも秀吉の応援に向かわされたのだから、その処遇に不満を持ったということになろう。
『明智軍記』は史料として質が劣るものであり、小和田氏もその点を熟知しているはずである。その記述内容を否定的に捉える一方で、肯定的にも捉えるというダブル・スタンダードというスタンスを取っている。
■ 最強の援軍に選ばれた実力者・光秀
『明智軍記』は内容に誤りが多く、歴史史料として問題があるのは周知のことであり、そもそも検討の素材にはならない。
信長が光秀を秀吉の応援部隊として派遣したのは、その実力を買っていたからだろう。これまでも光秀は、信長の指示で各地を転戦し、大いに軍功を挙げていた。
最大の敵の毛利氏との一戦で、局面は大詰めを迎えていたのだから、もっとも力がある家臣を派遣し、信長が勝利を確実なものにしようと考えたのは当然のことである。
左遷を考えていたような武将を派遣するなど逆効果で、あり得な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
----------
渡邊 大門(わたなべ・だいもん)
歴史学者
1967年生まれ。1990年、関西学院大学文学部卒業。2008年、佛教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博士後期課程修了。博士(文学)。現在、株式会社歴史と文化の研究所代表取締役。主要著書に 『関ヶ原合戦全史 1582‐1615』(草思社)、『戦国大名の戦さ事情』(柏書房)、『ここまでわかった! 本当の信長 知れば知るほどおもしろい50の謎』(知恵の森文庫)、『清須会議 秀吉天下取りのスイッチはいつ入ったのか?』(朝日新書)ほか多数。
----------
歴史学者 渡邊 大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