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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世尊은 패궐처敗闕處가 있는가?
패궐敗闕이나 패궐처敗闕處는 일상의 용어는 아니다. 특히 신미대사 이후 몽산법어의 패궐처는 난해하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한문공의 패궐을 그 어원으로 먼제 제시하고, 십일지보살의 불과이우를 패궐의 시원으로 삼으며, 수행자의 패궐처를 천명했다. 결론은 세존은 패궐이 없다.
1. 패궐敗闕의 정의
2.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보원南泉普願 스님의 패궐
3. 세존은 패궐이 있는가?
4. 나의 신심身心은 본래 패궐이 없다
5. 그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
6. 십일지보살의 불과이우佛果二愚
7. 결어
1. 패궐敗闕의 정의
당나라 한유 퇴지 선생의 ‘염법鹽法을 변개變改하는 사의事宜를 논하는 상소장上疏狀’을 인용한다. “재상이란 그 존재 이유가 백관을 감독하고, 그 우열을 평정評定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염사鹽使가 되면, 비록 패궐이 있을지라도 누구를 파견하여 그를 검거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시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唐韓愈 論變鹽法事宜狀 宰相者 所以臨察百司 考其殿最 若自為使 縱有敗闕 遣誰舉之 此又不可者也)
패敗와 궐闕의 양자兩字는 모두 과실過失의 뜻이 있다. 패궐은 결점缺點이나 착오錯誤 과실을 말한다. 위 인용문이 패궐의 시효라 한다.
선사들은 어째서 제불여래나 서가 세존에도 패궐처가 있다고 보는가? 패궐이란 무엇인가? 먼저 불교의 입장에서 패궐을 다시 정의한다. 능엄경을 인용한다.
경문: “아란이여, 이 불환천不還天은 저 모든 사선천四禪天의 사위천왕四位天王도 홀로 흠모하고 듣기만 할 뿐이요 지견知見할 수는 없느니라. 마치 지금 세간의 광야나 심산의 신성한 도량지道場地에는 모두 아라한이 주지住持하며, 이 때문에 세간의 추인麤人은 지견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아란이여, 이 십팔천十八天은 독행獨行하여 교류가 없지만 여전히 형누形累를 멸진하지 못하며, 이 이하부터 명칭을 색계라고 하느니라.”(阿難 此不還天 彼諸四禪四位天王 獨有欽聞不能知見 如今世閒曠野深山聖道場地 皆阿羅漢所住持故 世閒麤人所不能見 阿難 是十八天獨行無交未盡形累 自此已還 名爲色界)
해설: 이 불환천은 색구경천이라 색계의 최정상이다. 이 불환천의 이하는 색계이고, 이 이상 곧 위는 무색계이다. 치문緇門의 수장에 위산대원선사潙山大圓禪師의 경책警策이 있고, 그 첫머리에 있는 글이다. “무릇 업에 얽어매어 받은 몸은 여전히 형누를 면하지 못한다.”(夫業繫受身 未免形累) 형누는 바로 허물이고 패궐이다. 불환천의 아라한이나 이 욕계의 사람도 비록 청탁의 차이는 있지만 형누 곧 신형身形의 허물을 면하지 못한다. 이 형누가 바로 아라한의 패궐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패궐이다.
2.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보원南泉普願 스님의 패궐
원문: 남전이 하루는 동당과 서당이 고양이로 분쟁하기 때문에 선사께서 곧 고양이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대중이 맞게 이르면 곧 살릴 것이지만, 맞게 이르지 못하면 바로 베어버리겠노라.”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선사가 베어서 두 동강이 되었다. 다시 이전의 화제를 들어내고 조주한테 물으니, 조주가 문득 짚신을 벗어서 머리 위에 이고 나가버렸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만일 있었다면 마침 고양이를 구했겠구나.” 법진일法眞一이 대신 대답했다. “도둑이 도둑의 장물贓物을 훔치니, 곧바로 일장一掌을 돌려주겠노라.”(南泉一日 因東西堂爭猫兒 師遂提起云 大衆道得則救取 道不得即斬却也 衆無對 師斬爲兩段 復擧前話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師云 子若在 恰救得猫兒)(法眞一代云 賊偸賊物 便與一掌)
해설: 남전스님의 어떤 하루의 일이 참으로 딱하게 생겼다. 가비가통可悲可痛이로다. 시비를 일으킨 동당 서당의 당사자는 도외시하고, 어찌하여 죄과를 묻기에 애매모호한 고양이만 들어 올려서 시비의 주체로 삼았느냐? 이는 어찌 주객의 전도가 아니랴. 한 손바닥으로 남전스님의 뺨을 쳐버린다. 만일 법진스님과 조주스님이 없었더라면 그 패궐이 영원히 사장되고 말았겠구나. 그러나 남전스님은 자기의 패궐처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대가 만일 있었다면 마침 고양이를 구했겠구나.” 이는 화반탁출和盤托出이다.
3. 세존은 패궐이 있는가?
불자이거나 세인을 막론하고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선문염송禪門拈頌 제2칙은 제명이 주행칠보周行七步이다. 다음과 같다.
원문: 세존께서 처음 하계下界에 탄생하실 때,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며,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시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면서,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나만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셨다. 운문문언雲門文偃이 염拈하되, “내가 당시 만일 보았다면, 한 방망이로 타살하고, 개한테 주어 씹어먹게 하며, 또다시 욕보였다면,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으리라.”라고 했다.(世尊初生下時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云 天上天下 唯我獨尊 雲門偃拈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 却媿 圖天下泰平)
해설: 서가 세존의 팔상성도八相成道는 일정하지 않다. 보는 이의 선근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일승보살은 연화탁생蓮華托生으로 보고, 삼승근기는 무우수無憂樹 아래 우협의 탄생으로 본다. 연화탁생이나 우협탄생右脅誕生을 막론하고, 갓 태어난 핏덩어리에 어떤 허물이 있느냐? 다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자후에도 또한 무슨 패궐이 있느냐? 보이면 바로 그 패궐을 일러보라.
염拈이란 잡아서 그 면목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운문스님은 일단 “내가 당시 만일 보았다면,”이라고 하며 가정법을 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매우 잔혹하다. 삼단으로 전개하며 부관참시剖棺斬屍한다. 첫째 “한 방망이로 타살하고,” 둘째 “개한테 주어 씹어먹게 하며,” 셋째 “또다시 욕보였다면”이라 할 만큼 악랄하다. 이에 내가 다시 묻는다. “운문스님이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으리라.’라고 하니, 이 핏덩어리의 행위에 어떤 패궐이 있느냐?”
남전참묘에 법진스님과 조주스님은 남전스님의 그 패궐을 남음이 없이 잡아서 드러냈다. 어느 누가 세존의 주행칠보에 그 패궐을 드러냈느냐? 우리나라 속담에 “개 한 마리가 헛짖으면 동네 개가 다 따라 짖는다.”라고 한다. 세칭 조사교祖師敎의 조사라는 이들의 양태가 또한 그러하다. 운문스님을 동네 개처럼 뒷 따라서 찬탄만 하지 말고, 근본에 눈을 부딪치라. “이 핏덩어리의 행위에 어떤 패궐이 있느냐?” 부연한다. 탄생하시고, 출가하시며, 정각을 이루시고, 49년 동안 법륜을 굴리셨는데, 여기에 어떤 허물이 있었기에 천하가 태평하지 못했느냐?
여기서 내가 운문스님의 패궐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운문스님이 세존을 비방하면 공덕이 되고, 내가 운문스님을 비방하면 죄과가 된다는 그러한 법은 없다. 남전스님은 염치라도 있지만, 운문스님은 말하자면 몰염치한沒廉恥漢이다. 패궐이 아닌 패궐을 남발하니, 운문의 끽구자喫狗子는 그림자를 보고 채찍질한 형상이다. 어찌 어리석지 않는가? 시도 때도 없이 살불살조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니, 진실로 정명正名도 모르는 철부지로다. 갓 태어난 적자에게 무슨 패궐이 있으랴. 세존의 허물이 아니고 허물로 보는 이들의 허물이다. 자문자답한다.
“운문은 다소간 불제자佛弟子이냐? 다소간 마군魔軍이냐?”
“운문은 전신이 마군이니라.”
4. 나의 신심身心은 본래 패궐이 없다
혜충국사와 남방선객의 대화 중에 일부를 인용한다. 아래와 같다.
원문: 선객이 또 물었다. “모든 사람의 불성은 혹은 한 종류가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류도 있습니까?”(又問 一切人佛性 爲復一種 爲復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한 종류일 수는 없느니라.”(師曰 不得一種)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째서 다른 종류가 있습니까?”(進曰 云何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되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有人佛性 全不生滅 有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誰人佛性 全不生滅 誰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耶)
국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여기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지만, 저기 남방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我此間佛性 全不生滅 彼南方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의 불성은 어찌하여 전혀 생멸하지 않고, 남방의 불성은 어찌하여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和尙佛性 若爲全不生滅 南方佛性 若爲半生滅半不生滅)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의 불성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아서 몸 밖에 다른 것이 없나니, 그래서 전혀 생멸하지 않느니라. 남방의 불성은 몸이 무상하고 심성은 상주한다고 하니, 그래서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師曰 我之佛性 身心一如 身外無餘 所以全不生滅 南方佛性 身是無常 心性是常 所以半生滅半不生滅也)
해설: 이 몸은 마음과 같이 일여一如하다. 이 마음이 생멸生滅이 없으면, 이 몸도 또한 생멸이 없다. 이 마음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 이 몸도 또한 불생불멸한다. 법신法身은 불생불멸한다. 이 몸이 바로 법신이다. 신수대사의 신시보리수身是菩堤樹는 이 몸을 법신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6조 혜능대사는 심시보리수心是菩堤樹라 하니, 이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며, 한참 그 격이 떨어진다. 여래의 몸을 법신이라 일컫고, 중생의 몸을 육신이라 말한다. 혜충국사는 이 육신을 법신으로 본다. 불신은 어째서 중생신과 동일한가? 불신과 중생신이 모두 함께 일성一性이기 때문이고, 이른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이르러 다시 운문스님처럼 이 핏덩어리의 몸에도 패궐을 찾고자 하느냐? 감당하는 근기에 맡겨둔다.
5. 그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사바세계라 한다. 비로자나불의 사바세계는 정토와 예토 곧 정예가 섞여 있다. 이에 부사의하다. 유마경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보적이여, 만일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그 마음의 청정을 따라서 바로 불국토도 청정하니라.”(是故寶積 若菩薩欲得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則佛土淨”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 “만일 보살의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도 청정해진다면, 우리 세존께서는 본래 보살이 되었을 때 그 뜻이 어찌 청정하지 못하여 이 불국토도 청정하지 못함이 이와 같을까?”(爾時 舍利弗承佛威神作是念 若菩薩心淨 則佛土淨者 我世尊本爲菩薩時 意豈不淨 而是佛土不淨若此)
부처님께서는 그의 의념疑念을 아시고, 곧바로 그에게 타일러 말씀하셨다. “너의 뜻은 어떠하냐? 설마 일월이 청정하지 못하기에 바로 맹인이 보지 못하느냐?”(佛知其念 卽告之言 於意云何 日月豈不淨耶 而盲者不見)
대응하여 사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맹인의 허물이고, 일월의 허물은 아닙니다.”(對曰 不也 世尊 是盲者過 非日月咎)
“사리불이여, 중생의 죄업 때문에 여래 불국토의 장엄청정莊嚴淸淨을 보지 못하니, 여래의 허물은 아니니라. 사리불이여, 나의 이 불국토 청정을 또한 너는 보지 못하느니라.”(舍利弗 衆生罪故 不見如來佛土嚴淨 非如來咎 舍利弗 我此土淨 而汝不見)
이때 나계범왕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이 불국토는 청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저는 서가모니 불국토의 청정을 비유하면 자재천궁과 같이 봅니다.”(爾時螺髻梵王語舍利弗 勿作是意 謂此佛土以爲不淨 所以者何 我見釋迦牟尼佛土清淨 譬如自在天宮)
사리불이 말했다. “저는 이 국토를 언덕이나 구덩이 가시나무 모래 자갈 흙 돌과 온갖 산 등 더러운 물건이 충만한 것으로 봅니다.”(舍利弗言 我見此土 丘陵坑坎荊蕀 沙礫土石諸山 穢惡充滿)
나계범왕이 말했다. “인자仁者의 마음은 고하高下가 있고, 불지혜佛智慧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 불국토를 청정하지 않다고 볼 따름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모두 다 평등하시니, 심심深心이 청정하여 불지혜를 의지하면, 바로 이 불국토의 청정을 볼 수 있습니다.”(螺髻梵言 仁者心有高下 不依佛慧 故見此土爲不淨耳 舍利弗 菩薩於一切衆生 悉皆平等 深心清淨 依佛智慧 則能見此佛土清淨)
이때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바닥을 누르시자, 즉시 삼천대천세계에 약간의 백천 가지 진보로 엄식嚴飾하니, 비유컨대 보장엄불의 무량한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불국토와 같으니라. 일체 대중은 일찍이 있지 못한 일이라 찬탄하고, 바로 모두가 보련화寶蓮華에 좌정한 것을 몸소 보았느니라.(於是佛以足指按地 即時三千大千世界 若干百千珍寶嚴飾 譬如寶莊嚴佛 無量功德寶莊嚴土 一切大衆歎未曾有 而皆自見坐寶蓮華)
해설: 사리불 존자는 일체 아라한 중에 으뜸이고, 지혜가 제일이다. 이에 목련 존자와 함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어 대중을 이끌었다. 그러한 사리불 존자도 여래의 청정한 국토를 보지 못한다. 마음에 차별의 견해가 있어서 평등하지 못하고, 평등의 표상인 불지혜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연한다. 인지법행하실 때의 보살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평등하셨다. 일체 중생도 당인의 심심深心이 청정하여 불지혜를 의지하기만 하면, 바로 이 불국토의 청정을 볼 수 있다. 심심이 청정한 곳이 바로 불지혜이다.
원각경의 청정혜보살장에서 부처님은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된다.”(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라고 말씀하신다. 무량한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이 국토를 안목이 청정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고 국토의 패궐만 보인다. 청정하지 못한 안목으로 어찌 중생과 국토를 동일한 법성으로 볼 수 있으며, 지옥과 천궁을 모두 정토로 볼 수 있겠느냐?
6. 십일지보살의 불과이우佛果二愚
초지에 악취잡염우惡趣雜染愚와 집착아법우執著我法愚가 있고, 이지부터 구지에도 또한 각기 이우二愚가 있으며, 십지에 대신통우大神通愚와 오입미세비밀우悟入微細秘密愚가 있고, 십일지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어일체소지경극미세착우於一切所知境極微細著愚와 극미세애우極微細礙愚가 있다. 이를 이십이종우치二十二種愚癡 또는 이십이우二十二愚라 한다. 불과佛果를 장애하는 십일지의 이 이우 곧 불과이우를 통현장자는 아승지품阿僧祗品과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을 의거하여 광대산수우廣大算數愚와 수호광명공덕우隨好光明功德愚라 호칭한다. 불과이우를 불지이우佛地二愚라 일컫기도 한다. 약석신화엄경론을 인용한다.
원문: 넷째는 부처님의 과위에 들어가는데 장애를 나타내어 과위를 이루는 문이란 것은 심왕보살心王菩薩이 불아승지품佛阿僧祇品을 묻고 여래가 몸소 설하신 것이며, 그 수數는 경에서 스스로 밝힌 바와 같다. 이 수는 오직 부처만이 보고 알며 나머지 지위에서는 알 바가 아니다. 만약 지혜의 눈으로 이 광대한 수법數法과 여래수호공덕如來隨好功德의 다소간의 양을 알 수 없으면, 곧 오히려 이러한 두 가지 장애가 있어서 일체지一切智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불과이우佛果二愚라 일컫는 것이며, 이 두 가지 우치의 장애를 지나야 비로소 일체지를 원만하게 구족하는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법은 하위보살과 천룡과 외도가 알 바가 아니며, 산법筭法을 가감하여 아는 것은 보살의 법이고 여래의 지안은 산법을 쓰지 않고도 안다. 십지로 오면서 11가지 추중麤重과 22가지 우치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장애는 불위佛位에서 안다. 심왕보살이 물은 것은 그 마음이 자재를 얻으므로 바야흐로 질문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11가지 추중이란 초지에서 십일지에 이르기까지 보현행이 원만하지 못하므로 위위마다 하나의 미혹이 있어서 11가지가 되기 때문이며, 일위 가운데 인과에 정위正位와 향위向位가 있어서 22가지 우치가 됨을 밝힌 것이다.
(第四入佛果位現障成位門者 心王菩薩問佛阿僧祇品 如來自說 其數如經自明 此數唯佛知見 非餘位所知 若不能以智眼知此廣大數法 及如來隨好功德多少之量 卽猶有此二障 不得稱一切智故 號佛果二愚 過此二愚障 方成滿足一切智佛 此之二法非下位菩薩及天龍外道所知 以加筭法知之者是菩薩法 如來智眼知不須筭法 自十地以來有十一種麤重 二十二種愚癡 此之二障佛位知之 心王菩薩問者 以其心得自在 方可能爲問主 十一種麤重者 以明從初地至十一地普賢行未滿 位位有一迷以爲十一故 一位之中有因果正向 爲二十二愚癡)
해설: 등각보살은 2개 우치가 있고, 초지보살은 22개 우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지상보살의 패궐처이다. 삼현보살에 이르러서는 그 패궐처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물며 십신보살이야 다시 말할 것이 없다. 불과이우 곧 불지이우는 불지의 이우가 아니고, 불과를 장애하는 등각보살의 이우이다. 불과이우는 십일지보살의 패궐처이다. 이에 묘각보살은 패궐처가 없다. 제불여래도 패궐처가 없고, 주행칠보한 세존도 또한 패궐처가 없다. 찾지 말라. 십지보살도 보현신을 보지 못한다. 불신은 난사하고 부사의하다.
7. 결어
내가 시간의 관념을 건너뛰고 동시대로 가상하며, 상나화수商那和修 아라한께 묻는다.
“스승의 계보는 어떠합니까?”
“나의 스승은 아란존자이시고, 스승의 스승은 서가세존이시니라.”
세존의 제2세 상나화수 존자를 중국의 육조스님 후예들은 중간에 가섭존자를 추가하여 제3세로 조작하고 말았다. 조사교를 불교의 위에 위치시키고자 조작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염화미소도 그 중에 하나이다.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이 한림원에서 열람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을 그 근거로 삼는다. 후대에 위조하여 일본의 속장경續藏經에 지금도 남아 있다.
아란 존자와 상나화수 존자 우바국다優婆毱多 존자는 보살을 참칭하지 않고 아라한의 칭호를 고수한다. 후대 마명보살과 용수보살 무착보살은 보살로 호칭되는 스님 중에 으뜸이다. 그러나 나는 삼인의 보살이 삼인의 아라한보다 그 법량이 더 탁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전등에 오른 득도자는 십중팔구 성문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좋게 말하면 십신보살에 상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패궐처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운문스님도 또한 그 중에 하나이다. 운문스님의 끽구자 법문은 관념의 패궐처이고, 만용의 산물이며, 실유實有의 패궐처가 아니다. 세존은 본래 패궐처가 없기 때문이다. 속지 말지니라. 조고각하照顧脚下하고, 반구저기反求諸己하라. 진실로 자기 분수를 알아야 옳다.
교종과 선종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러하다. 교종과 선종이여, 털끝만큼도 다를 것이 없구나. 교종은 선교후선先敎後禪이고, 선종은 표선입교標禪入敎니라. 이는 사조 도신대사와 남양 혜충국사에 국한하기도 한다. 달마대사의 일체 후손 중에 양사兩師는 물외物外에서 유희한다. 압권이다.
2026. 4. 5. 08:17, 길상묘덕일 초련원주 정덕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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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나의 답글이 무색하기 때문입니다.
@자성불 자성불님은 글의 대의를 파악할 줄 모릅니다.
위 글은 제명처럼 세존은 패궐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조주스님의 짚신 이고 간 도리를 점검한 사실이 있는가요?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습관은 좋은 유산이 되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성불 감사합니다.
이 집이나 저 집 남의 대문을 찾아다니며 동냥이나 하는 주제에,
예 아니오라고 선택하여 답변하라는 행패는 어디서 배웠습니까?
나는 견처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 번에도 깨달은 견해가 없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