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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file294.uf.daum.net/image/995439465D932434025CB2:,: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왜 양의 축적이 아니라 질적 전환을 거론하는가?
1. 양의 축적으로는 이 세상의 변화를 옳게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은 어느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 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바라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양태를 설명하는 데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양의 축적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질적 전환을 거론합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언뜻 살펴볼 때 어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양적인 축적을 거론할 때 어떤 상황과 조건을 범주로 놓느냐에 따라 세상의 변화를 양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틀, 즉 그런 범주를 놓고 보면 거기에서 양적인 축적이 이루어져서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변화를 설명할 때 양의 축적으로 그치지 않고 질적 전환을 필연코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적 변화는 거시적입니다. 거시적이어야만 그 속에서의 변화를 양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이 우주의 변화를 설명하자면 우주라는 거시적 범주가 필요합니다. 우주라는 거시적 범주가 설정되어야 이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양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가 크긴 하지만 시·공간이 있는 세계로 한정해서 우주를 놓고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한정된 부분에서의 우주 변화는 양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에 시·공간이 있는 세계만이 아니라 시·공간이 아예 없는 세계는 물론, 시·공간이 응축되거나 뒤틀린 세계도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이것은 우주의 세계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하여튼 이런 우주 세계까지 상정했을 때 그 모든 변화를 설명하자면 시·공간이 있는 세계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우주까지 포함하는 범주로 확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범주를 확장하면 결국 양의 변화 내지는 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양의 변화는 범주가 거시적이어야만 하고, 설정되는 범주에 따라서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범주를 설정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범주가 작아졌을 때 그 범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변화 양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 범주를 뛰어넘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무엇으로 이를 해명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진실로 변화 발전하려면 그 범주를 뛰어넘는 현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범주 안에서만 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기에 새로운 세상의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의 변화만으로 그쳐 버리면 이 세상의 진정한 변화 발전을 설명하는 데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질적 전환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변화를 설명한다
실상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면 새로운 범주를 계속 설정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지구에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며 설명하다가 새롭게 범주를 설정하여 은하와 우주로, 그리고 미세한 원자와 양자 세계로 파악해 나갔습니다. 지구에서는 상정할 수 없는 시·공간의 뒤틀림이 일어나는 중력의 영역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거시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양자 세계의 중첩과 얽힘 현상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파악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그러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세상의 변화 발전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설정했던 범주를 뛰어넘는 현상이 이뤄졌을 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 새로운 범주를 등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세상의 변화 발전을 옳게 이해하자면 양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질적인 전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양적인 변화는 세상의 변화 발전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제한을 갖기에 여기에서 벗어나자면 질적 전환을 필연코 거론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질적 전환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게 물질세계의 변화 발전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결부되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간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결부되면 단순히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탄생해 지구상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물질세계의 법칙이 양의 축적으로 이뤄지든, 질적 전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변화할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온 이상 인간은 자신의 운명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만을 상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이 말에 올라탄 조각상에 대해서도 만약 말이 그것을 조각했다면 도리어 거꾸로 말이 사람을 올라탄 조각상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 존재이든지 간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연적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적 전환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의 변화 발전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뤄진다는 식의 해석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속에서 질적 전환이 이뤄진다는 측면을 명확히 밝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적 전환이 이뤄지도록 하는 물질의 적극적인 활동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저절로 변화한다고 바라보는 것은 상식적인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질적 전환의 법칙은 사회적 이해관계의 변화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질적 전환은 물질의 변화 발전 과정에서도 이해관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는 더욱 그 이치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사람이라는 주체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를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양적인 변화를 위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질적 전환의 문제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지배 계급은 사회의 변화 발전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되게 물질·경제적으로 발전했고 문화적 수준이 옛날보다 높아졌다는 식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되게 양의 변화나 축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통치와 지배 체계에서는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배 계급의 통치를 받게 되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뀔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연코 질적 전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의 변화가 이뤄져 봤자 자신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질적 전환의 개념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류사를 인간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인간으로 자각하여 국가를 세워 사회적 존재로 우뚝 섰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를 놓고 인류사를 크게 구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인간으로 자각하지 못했기에 국가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적 존재로 우뚝 서지 못했을 때는 참다운 의미의 인류사로 보지 않고 단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했던 원시사회라고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참다운 의미의 인류사와 그렇지 못한 원시사회를 질적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지금의 인류사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자각하여 국가를 세워 사회적 존재로 우뚝 섰지만 그 질적 수준의 차이를 놓고 또 설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으로 자각하지 못한 사람을 짐승이나 도구로 취급하는 노예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은 하지만 신분적으로 차별하는 신분제,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천부적 인권을 가지기에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고 사는 존재라고 바라보는 자본주의 사회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관계에서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지만 인간 외적 조건의 차이는 외면합니다. 하지만 인간 외적 조건에서 빈부의 격차가 이루어지면 사실상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또 다른 질적 전환이 요구됩니다.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누려야 하고, 그러자면 인간 외적 조건에 대해 주인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노예제, 신분제, 자본제라는 질적 전환의 범주 개념을 가지고 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질적 전환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자는 이해관계의 목적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주되게 물질·경제의 성장이나 문화 수준의 발전 방식으로 설명하면 사회가 질적으로 바뀌기보다는 어차피 힘 있는 사람의 세상으로 되지만, 지배받고 통치받는 입장에서는 사람의 이해관계에서 질적 전환을 일으켜야만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변화 발전을 바라보는 데서 양의 축적으로 바라보느냐, 질적 전환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의 변화나 축적은 이해관계를 사상하는 방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존립하는 물질들의 치열한 투쟁에 의해 변화가 이뤄졌는데도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진다는 식의 이해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자면 다른 물질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듯 바라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사의 과정에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를 놓고 얼마나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질적 전환은 세상의 변화를 새것이 낡은 것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예제, 신분제, 자본제 사회에서 질적 전환이 무엇에 의해 이뤄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노예제는 노예 의식을 부정하고 인간은 짐승이나 도구로 취급될 수 없다는 인간의 자각 의식에 의해 극복되었고, 마찬가지로 신분제도 신분제적 의식을 부정하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천부적 인권을 지닌 존재라는 사상의식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치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과연 노동자의 자본주의적 의식을 인정하고서 극복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노예제나 신분제는 그런 노예 의식과 신분제 의식을 부정한 가운데 극복되어 왔는데,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만 자본주의적 의식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자신은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고, 그것을 자본가에게 팔아야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의식에 빠져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서 급속도로 노동자가 양산되었습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관계없이 노동자가 없고서는 자본주의 사회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니, 노동자의 등장과 확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동자가 많이 등장하고 양적으로 축적된다고 하더라도 가진 것이 노동력밖에 없고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파는 존재라는 자본주의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극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더 확장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초기 자본주의와 달리 주식과 채권을 넘어 끊임없이 등장하는 파생상품 등은 이런 자본주의적 발전의 연장선상에 서 있습니다. 이를 보면 양적인 축적은 새로운 사회로의 질적 전환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질적 전환이 무엇에 의해 이뤄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시대적 요구는 단지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누리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외적 조건에 대해 주인의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인간상은 자기 노동력밖에 가진 것이 없기에 이를 자본가에게 팔아야만 한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의식이 아니라 주인답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자주적인 인간상에 의해 극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병폐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면에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자주적인 인간상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 명확히 지적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놓고 보면 세상사의 진정한 변화 발전은 양의 축적으로 질적 전환이 이뤄진다는 양질 전환의 원리가 아니라 새것이 낡은 것을 극복하는 질적 전환의 형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한국 사회를 바꾸자면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식민지매국사회를 극복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세상의 변화 발전이 새것이 낡은 것을 극복하는 것으로 되고, 또 이런 질적 전환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게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으로 된다면,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질적 전환을 이룩할 수 있느냐는 각도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를 바라보는 데서 핵심은 사람이 주체로 활동하여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이냐의 규정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서 누가 주인 행세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노예주가 주인 행세하면 노예제 사회, 신분적으로 차별하며 주인 행세하면 신분제 사회, 자본으로 지배하면서 주인 행세하면 자본제 사회가 됩니다. 그 때문에 사회가 이러저러하게 변했다고 하더라도 주인 행세하는 담당자가 질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면 주인 행세하는 세력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대다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제국주의 세력이 신식민지 형태로 지배하면서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신)식민지매국 사회입니다. 여기서 군사독재 정권이나 반동정권, 배신정권 간에 일정하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라는 차원에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조와 차관, 수출 지향주의 정책, 세계화 정책에 의해 경제적 규모와 형태 등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외세와 매국노 세력은 그로 인해 경제적 혜택을 누리며 살고, 나머지 대다수는 빈부 격차의 확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바꾸자면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신)식민지매국 사회를 극복해야 합니다. (신)식민지매국사회가 유지되는 형태의 양적인 축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자각한 사람은 누구나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아야 한다는 자주적인 인간상에 기초해 외세와 매국노를 응징하면서 애민·애국이라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양의 축적이 이루어지면 새 세상이 저절로 열릴 것이라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의 질적 전환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 세력이 군사독재 정권이든, 반동 정권이든, 배신 정권이든 관계없이 외세의 주권 유린 현상과 식민 정책은 물론이고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일체의 매국적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응징해야 한다는 애민·애국의 입장을 확고히 견지해야 합니다.
2026. 9. 21.
우리겨레연구소(준) 소장 정호일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