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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 속에서 겪은 사회생활과 해외경험에 대해 서술하십시오.
2008년 7월, 천주교 단체에서 주최한 '세계 청년 대회'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경쟁률은 아니었지만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최종 40명의 한국대표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여서 세계 각국의 친구들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레크레이션과 그들과 교환 할 수 있는 기념품을 만들었습니다. 태극기 모양의 뱃지와 두건, 함께 입는 단체티도 직접 디자인하여 제작하고 1월부터 꽤 오랜 기간을 준비하여 7월, 드디어 떨리는 마음으로 호주로 출발했습니다. 16박17일의 여정이 시작 된 것입니다.
첫째날, 브리즈번에 도착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참가자들 전원이 자신을 데려갈 홈스테이 맘을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의 홈스테이 맘이 가장 먼저 저와 저의 룸메이트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예상 밖에도 호주 사람이 아닌 스리랑카 부부였는데, 호주로 이민을 와서 20년 동안이나 호주에서 생활 했다고 했습니다. 제 또래의 자식들은 시드니의 어느 의과대학에서 유학 중이라 홈스테이를 신청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문화도 다르고 공감대가 없어서 고생하지 않을 까 했었는데 다행히도 홈스테이 파더가 저와 같은 전공의 토목 일을 하고 계셔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5일이라는 시간 중에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브리즈번의 유명한 명소 들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외국의 작은 파티문화도 체험하면서 그 속에서 그들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부색도 문화도 다르지만 함께 하는 시간에 생기는 정은 세계 모든 이들에게 공통 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브리즈번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밤 버스로 시드니에 도착했습니다. 12시간이나 버스를 타서 다리가 퉁퉁 부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드니에서는 가톨릭 학교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세계 각지에서 청년들이 모이다 보니 웃지 못 할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문화적 차이로 인해 우리에게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다른 서양 친구들은 우리보다 자유롭고 개방 적이어서 인지 샤워를 할 때 속옷만 입고 돌아다녔습니다. 우리나라 참가자들은 샤워용품은 물론 갈아입을 옷 까지 전부다 부스에 가지고 가서 모든 것을 마치고 나오는 반면에, 외국 참가자들은 속옷을 입은 채로 줄을 서 있다가 샤워를 하면서도 물건을 빌리러 움직이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자유로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나라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청년 대회’는 천주교의 큰 행사 였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참가자들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게 모두 다 같은 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똑같은 가방을 보면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또 서로가 준비한 기념품도 교환하면서 그렇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잘 알지 못한 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노력해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짧은 2주의 시간동안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다른, 또 같은 하나의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4.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십시오.
21살 여름, 뭔가 알차고 나를 위한 것을 해보고자 ‘청년 도보 성지순례’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8박9일 동안 수원에서 시작하여 경기도에 있는 각 성지를 들르는 형식 이었다. 저는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만 첫인상이 좋지 않아 제가 낮아지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조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체 참가자 중에 20살 남자를 제외하고는 21살인 제가 막내였습니다.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여러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저는 저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특히 여자 선배들이 많이 없어서 언니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도보를 하면서 편안히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앞사람과 뒷사람을 확인하고 본대에서 서로의 간격을 맞춰가면서 즐겁게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즐거움은 첫날이 끝이었습니다. 둘째 날부터는 보폭이 넓은 남자 참가자 뒤에서 걸어서 인지 허벅지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쫒다가 가랑이 찢어진 격이었습니다. 걷기 시작해서 가속이 붙으면 괜찮아 졌지만 멈췄다가 다시 걸을 때 그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힘들 때 함께 땀을 나눈 사람과는 더 빨리 친해진다 더니 처음 서먹했던 시간들은 잊은 채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100명의 참가자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갔습니다.
6일째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조별로 줄을 섰을 때 우리조가 가장 앞에 서는 날이었습니다. 100명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중간에서 조금만 뒤쳐져도 맨 뒤는 정말 많이 뛰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날 저는 아침부터 신나서 제일 앞 선두자리를 맡고 서 있었습니다. 출발 후 몇 분쯤 걸었을까,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본대 전체가 뒤로 돌아서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선두에 있던 저는 순식간에 꼴찌가 되고 말았습니다. 꼴찌에서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하고 저와 우리 조원 다른 한명이 조금 천천히 걷는‘날개 잃은 천사조’로 합류하기로 하고 날천사조를 기다렸습니다. 처음엔 쉬는 것이 좋아서 여러 이야기도 하고 힘들 때 먹으려고 챙겨뒀던 간식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작정 기다리기를 몇 시간 째, 시계와 핸드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우리는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미리 적어놨던 비상연락망으로 전화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본대는 우리가 날천사조에 있는 줄 알고 날천사조는 본대에 우리가 걷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많이 뒤쳐진 날천사조가 지름길로 가면서 우리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저는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웠던지 몇시간을 밥도 먹지 않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날은 우연히도 저의 생일이었다. 21번째 저의 생일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최고의 생일도 기억됩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주하고 제 인생에 있어 잊지 못 할 소중한 추억과 값진 사람들을 얻었습니다.
2. '자신'에 대해 기술하십시오
저는 ‘운이 좋은 아이’ 이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저의 성적보다 높은 학교에 갔고, 공부하지 않은 것에 비해 좋은 점수를 받고, 뜻하지 않은 기회로 좋은 인연을 만나 도움을 받아 잘 풀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를 조금 더 많이 아는 저의 주변 사람들은 저를 ‘독한 아이’라 한다. 어떻게 보면 여우같고 얌체 같지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결과를 알고 나면 그게 더 멋있다고 생각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중, 고등학교 때도 저는 항상 야간자율학습을 도망가고, 혹시 하는 날이면 밀린 공책 필기를 한다거나 친구들과 떠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따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저의 공부법은 학교 끝나고 가는 독서실이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다닌 독서실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학원을 다닌 적이 없어서 특별한 공부법이 없었던 저는 그저 교과서를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보충하고 혼자 공부한 것이 나에게 맞는 공부법 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학기 초에 저의 겉모습과 행동만 보고 저를 판단하던 친구들은 시험을 보고 나면 놀라곤 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학교에 푹 빠져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잘 먹고 다녔습니다. 즐거운 학교 생활 끝에 남은 것은 불어나 버린 살이었습니다. 점점 맞는 옷이 없어지고 여기저기서 살쪘다는 소리를 듣게 된 후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20살 9월에 다이어트를 결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운동을 하고 야식과 술을 줄였습니다. 중요한 자리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모두 점심에 만나기를 6개월, 1년. 정말 많이 달라진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선배들은 뭘 했냐고 묻기도 하고 심지어 수술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이 저의 고통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 한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저절로, 또 운이 좋아서 저렇게 됐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말하던지 저는 내가 원하던 저를 찾고 자심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것은 경제관념입니다. 저는 지금껏 대학교에 들어와서 부모님께 용돈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받지 못 한 것 도 있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맞춰 생활해왔습니다. 과외, 마트, 편의점 정말 안 해본 알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봤습니다. 정말 ‘더럽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면서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제가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 갈 때면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번 돈으로 공부하고 외국도 가보고 했기 때문에 남들이 얻어 가는 것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려고 더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유럽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저의 꿈인데, 올해 말 배낭여행 적금이 끝나면 SK가스와 함께 그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sk 상생인턴쉽에 지원하게 된 동기와 희망직무 및 그 이유에 대해 서술하십시오.
가스건설에서 환경사업까지 종합적인 시공능력으로 국내 최고의 청정에너지 회사 SK가스 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자원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고 발견된 가치를 사용 가능하게 만들며, 쓰고 버려진 에너지를 오염 없이 환원 할 수 있는 가치창출형 회사만이 망가지고 있는 지구를 살릴 수 있는 회사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친환경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그 시장을 움직일 글로벌 에너지, 친환경 기업으로서의 sk가스의 발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 발전을 움직일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 기본이 되는 자원관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에너지 자원업무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대학 생활동안 토목, 환경에 대한 준비로 인해 현장근무에 대한 지식이 아직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책을 훔치는 도둑이 되겠습니다. 물론 업무가 생각과 달리 하루아침에 숙달되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초심자의 입장에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선배님들의 노하우를 훔쳐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목표가 아닌, 이 넓은 우주 전체를 기준으로 현재 제가 달리고 있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어려움과 힘든 것은 작게만 느껴집니다. SK 가스의 인턴사원에 임하는 각오 또한 그것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정말 작은 한걸음을 디디려 노력하는 모습이지만, 실제 제 가슴 안에는 에너지업계를 향한 긍정적인 에너지와 혁신적인 창의성, 끊임 없는 열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정열로 현재보다 내일을, 지금의 모습보다 10년 후를 내다보고 준비하겠습니다.
SK는 ‘행복을 나누는 기업’으로 ‘행복한 상생, 행복한 참여, 행복한 변화’를 3대 원칙으로 사회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교육/장학, 환경보존 등 그 분야도 매우 다양하여 어느 기업에 비교해도 가장 앞서는 회사입니다. 타사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공헌을 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것이 SK의 사회공헌을 더 값지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비해 진실되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진정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SK를 행복하게 함께하는 따뜻한 이미지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어느 다른 곳에서도 만들 수 없는 값지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에 공헌한 것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SK의 이미지와 함께하고 기업문화를 배우면서 일하고 싶고, 또 이러한 것들이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인턴쉽을 통해 함께할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첫댓글 글자수 압박!ㄷㄷ;; 읽다가 포기요~ 너무 박스 형식이에요~ 시험지도 저렇게 작성하면 감점이에욧!
윗분 말씀에 동의~ 글자수 많은 자소서들은 보기좋게 형식을 바꾸는 요령들이 있더라고요~ 다른분들꺼 참고하시면 도움 많이 되실거에요~
내용은 괜찮아 보이는데 문단 나누기를 하셔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