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李圭報)-한천(寒泉)(시원한 샘물)
南北行人暍(남북행인갈) 오가는 행인 더위에 지쳤는데
寒漿當路傍(한장당로방) 시원한 물을 길가에서 만났네
勺泉能潤國(작천능윤국) 조그만 샘물 온 나라를 적시니
再拜迺堪嘗(재배내감상) 두 번 절하고야 맛볼 수 있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고려시대 무신 정권 시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규보가 길을 가다 지은 두 편의 시 중 한 편이가.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입신양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는 하였지만, 자연을 동경하여 호를 백운거사라 하였고, 만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무척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세가지를 너무 좋아하는 선생)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업적을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전한다.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무더운 어느 날 자신의 갈증을 해소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지만 시상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한 모금의 시원한 샘물이 더위에 지친 행인의 갈증과 더위를 해소하듯이 고단한 백성들의 많은 갈증 요소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평소 물이 넉너거할 때야 한 모금의 샘물이 고마울 것이 뭐 있을까마는 무더위에 지친 행윈에게는 그 물이 생명수와도 같다. 그러니 두 번이라도 절하여 감사를 표할 밖에, 작은 샘물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벅찬 감동을 주지도 않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가슴을 일렁이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흔히들 무심코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더운 여름 지친 행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닌 바로 시원한 물 한잔일 것이다.
어디 고마운 것이 물뿐이겠는가? 이규보의 ‘큰 나무大樹’라는 시에 나오는 나무도 물과 마찬가지로 고마운 존재다.
好是炎天憩(호시염천게) 더운 날씨에 쉬기 좋고
宜於急雨遮(의어급우차) 소낙비 피하기도 좋아라
淸陰一傘許(청음일산허) 시원한 그늘 양산만 하니
爲貺亦云多(위황역운다) 주는 혜택이 또한 많구나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큰 나무는 더위에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해 주기도 하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잘 막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도, 우리 삶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않건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항상 그곳에 서 있을 뿐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밑둥만 남았을 때에도 우리에게 편안한 쉼터가 되어 준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규보[李奎報, 1168년(의종 22) ~ 1241년(고종 48), 자 : 춘경(春卿), 호 : 백운거사(白雲居士), 지헌(止軒),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시호 : 문순(文順), 초명 : 인저(仁氐), 지금의 여주(驪州)인 황려현(黃驪縣) 태생]-고려 중기의 대문호. 그의 문학은 자유 분방하며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시에 있어서, 그는 이인로(李仁老) 계열의 문사들이 대개 형식미에 치중하고,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있으며 신의(新意)와 창의(創意)를 높이 사고 있다. 그의 일가(一家)는 그 곳의 재향지주(在鄕地主)였다. 아버지 윤수(允綏)는 개성에서 호부낭중(戶部郎中)까지 이르는 관리 생활을 했으므로 소년 시절(8~16세)을 당시의 수도인 개성에서 보냈다. 9세에 이미 신동(神童)으로 널리 소문이 났지만, 소년시절부터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여 과거시험을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 짓기만 일삼아 세 번이나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운이 오히려 그의 문학을 위해서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니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들 이를테면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화삼백운시 和三百韻詩>와, 2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천마산(天摩山)에 우거하며 지은 <백운거사어록 白雲居士語錄>, <백운거사전 白雲居士傳>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지어졌다. 술과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22세 되던 해 봄에 이르러서야 사마시에 첫째로 뽑히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노극청전 盧克淸傳>과 <경설 鏡說>도 지었다. 이규보는 많은 사람들의 천거로 직한림원에 보임되면서부터 벼슬길에 올라 최씨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렸는데 66세에 드디어 상서(尙書) 벼슬까지 이르렀다. 이 당시에도 국가적 필요에 의해 지은 글이 많은데 서장(書狀), 표장(表狀), 교서(敎書), 비답(批答), 조서(詔書) 등으로 이러한 문장 속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말년에는 7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부분 시작(詩作)에 소일하였다. 이규보의 관직생활을 정리하면 1199년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가 되었고, 1202년 병마녹사 겸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1207년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이규보를 무인정권에 협조한 문인이라 하여 권력에 아부한 문인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는 뚜렷한 국가관을 지녔으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또 외적에 대한 항거 정신이 높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민족서사시인 <동명왕편 東明王篇>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문학은 자유 분방하며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시에 있어서, 그는 이인로(李仁老) 계열의 문사들이 대개 형식미에 치중하고 있는 데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있으며 신의(新意)와 창의(創意)를 높이 사고 있다. 그는 당송 고문(唐宋古文)의 전통을 이으려 애썼지만, 그의 산문은 고문이 주는 구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스럽게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명문장가인 그가 지은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하였으며,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하기도 하였고,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이 있다.
*暍(갈) : 더위 먹을 갈, 1.더위를 먹다, 2.덥다, 3.뜨겁다
*漿(장) : 즙 장, 1.즙(汁: 물기가 들어 있는 물체에서 짜낸 액체), 2.미음(米飮: 푹 끓여 체에 걸러 낸 걸쭉한 음식), 3.마실 것
*迺(내) : 이에 내, 옮길 천, 1. (이에 내), 2.이에, 3.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