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5.06.27. -
이 작품은 나무의 생애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완성에 대해 조용히 성찰하고 있습니다. “씨앗”에서 시작해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기까지 나무는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된 태도로 묵묵히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기꺼이 누군가의 “집”이 되고 “의자”가 되어 줍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낡은 의자는 쓸모를 다하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되지요.
자아 해체를 통해 완성에 이르는 이 과정을 시인은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이라 말합니다. 말보다 더 깊은 침묵의 언어를 통해, 존재 자체로 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나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