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인(囚人)과 에밀리 디킨슨
사랑 --- 생명 이전이고
죽음 --- 이후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시(詩)라기 보다는 마치 경구와 같이 짧은 이 시는 영미 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작품이다. 미국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데, 놀랍게도 청송 감옥에 있는 어느 수인이 내게 보낸 편지에 이 시를 인용하고 았었다. 24세 때 감옥에 들어와 12년째 복역하고 있다는 그는 검열 도장이 찍힌 편지에서 영한사전을 보내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디선가 이 시를 보고 가슴에 와 닿아 노트마다 적어 놓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제 마음에 큰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라고 쓰고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며, ’지구의 해석자‘라고 정의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역설적으로 아주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것이었다. 1830년에 매사추세트 주의 앰허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5월, 55개년 5개월 5일 간을 살고 나서 죽을 때까지. 표면적으로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이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 골수까지 파고는 경렬하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에밀리의 할아버지는 앰허스트 대하을 건립한 지방 유지였고,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엄격한 청교도 집안이었는데, 그녀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제도적인 종교에 대한 회의는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선교사의 신부감을 양성하는 특수 목적의 여자전문학교에 진학했지만 1년도 채 못돼 종교적인 형식의 강요에 환멸을 느껴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한 번도 앰허스트를 떠나지 않은 것은 물론, 자기 집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웃에 있었던 오빠의 집에조차 가지 않았고, 그녀가 각별히 사랑했던 조카들도 고모를 만나 보려면 그녀의 방이 있는 2층 창에 신호를 보내, ’다른 사람이 안 보는데서 너를 보고 싶다.‘는 승낙을 받아야 했다. 조카들을 위해 과자를 구우면 접시를 끈에 매달아 창 밖 아래로 내려뜨려 줄만큼 그녀의 은둔 생활은 철두철미 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이러한 철저한 칩거 생활과 30대 후반부터 죽는 날까지 고수했던 흰색 옷이다. 이러한 고립 생활과 흰색 옷에 대해 전기 작가들은 아마도 디킨슨이 몇 번에 걸쳐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그런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했던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물론 몇 몇 후보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후새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을 속속들이 파헤칠 것을 알았다는 듯, 마무런 증거도 남겨놓지 않았다.
연대 미상의 시에서 그녀는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나는 두 번 죽었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두 번 겪은 것으로 쓰고 있는데, 그녀의 흰옷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수의와 사랑하는 이와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는 순결한 웨딩드레스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입니다.
무엇으로도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고통은 오래동안 남습니다.
가치 있는 고통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법이니까요.
에밀리 디킨슨에게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1862년 그녀는 가깝게 지냈던 홀랜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사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나는 천상의 왕으로 불리우느니 차라리 사랑 받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이렇듯 지상의 사랑을 참된 신앙으로 보는 이상주의는 애당초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근의 사랑은 언제나 언제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갈증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시의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비상구를 찾게 했다.
디킨슨은 19세기 당시에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녀 생전에는 그녀를 어렵게 설득하여 또는 그녀 몰래 서너 편의의 시가 발표되었을 뿐, 몇몇 가까운 친척들을 제하고는 그녀가 시를 쓴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서랍장에는 약 2천 여 편의 시가 차곡차곡 챙겨져 있었다.
디킨슨의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래서 시의 첫 행을 제목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아주 짧고 압축적이고 전통적인 시형을 무시하는 그녀의 시들은 난해해서 때로는 마치 풀 수 없는 암호문과 같다. 게으른 나는 그래서 암호문을 푸는 것처럼 분석하며 읽는 시보다 그녀의 쉬운 시들을 좋아한다. 내가 내 홈페이지 대문에 적어놓은 다음 시는 그녀의 그런 시들 중의 하나이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라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걸핏하면 오는 원고 마감일이 부담스럽고, 없는 재주로 원고지 10여 장을 메우는게 여간 힘들지 않지만, 나도 감히 에밀리의 흉내를 내어 말해 본다.
“만약이 이 글이 감옥에서도 노트마다 ’사랑은 -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 ‘를 적어 놓은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내 어쭙잖은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첫댓글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을, 장영희 교수의 글에서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꼴(명색이)에 문학을 한다면서, 나는 책을 얼마나 읽고, 공부를 하고 있을까? 쪼매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