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의 문학 세계 관조] 정병경.
ㅡ상촌의 활약상ㅡ
율격이 있는 시조時調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정형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라 향가와 고려시대 가사 문학이 현시대에는 쓰이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온 시조는 가락을 넣어 시조창으로도 읊는다.
시조는 반드시 3장 6구 12소절 45자 내외를 고집한다. 초장은 기起, 중장이 승承, 종장에서 전轉과 결結로 마무리한다. 일정한 율격에 제약을 받는 것이 특징이어서 근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자유시처럼 음수율과 음보에 제약을 받지 않으면 시조라 할 수 없다. 중국은 절구ㆍ율시가 있고, 일본은 하이쿠가 있다. 시조는 시절 가조라는 뜻으로도 풀이한다.
고려말과 조선초로 이어지면서 최영과 정몽주, 원천석, 우탁 등은 정치와 사회상을 시조로 표현해 놓았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을 비롯해 많은 시인들도 명시조를 남겨 후대에 읽혀지고 있다. 보통 평시조를 많이 선호하는데 엇시조와 연시조, 사설시조도 짓는다. 노산 이은상은 절장ㆍ양장ㆍ4장 시조를 창안해 지었다. 근간 학자들은 학회를 자주 열어 시조의 율격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격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작금에는 자유시처럼 쓰면서 율격을 무시하여 전통이 사라질까 우려한다.
신흠은 상촌연담에서 "시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고, 문文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니 형이상이란 천天에 속하고 형이하란 지地에 속한다" 라고 한다. 고시조의 격조를 이어받아 현대에 이르러 시조 율격이 회손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인들은 노심초사한다. 현대시조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라고 일컫는데, 육당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이에 해당한다.
뜻풀이가 어렵지 않아 누구나 접근이 쉽다. 시는 독자에게 배려하는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도 풀이한다. 신흠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전국책戰國策 등에서 광범위하게 문장력을 키운 작가이다.
17세 때 종남산 아래에서 지봉 이수광과 함께 글을 읽으며 독서량을 늘린다. 많은 양의 독서에서 얻은 결과라고 여긴다. 조실부모하고 여리박빙으로 지낸 경험을 바탕해서 후대에게 남긴 명시를 교훈삼는다.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시비柴扉(사립문)를 열지마라
날 찾을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명월이
그 벗인가 하노라."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자연에 몰입해 읊은 '방옹시여' 30수 중에 속한다. 율격에서 벗어나지 않은 정통 시조이다.
본관이 평산平山인 신흠은 명종21년(1566)에 태어난다. 자字는 경숙敬叔이고 호號를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등으로 불린다. 아버지 신승서申承緖와 어머니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태어난다. 7세에 부모를 잃어 방황할 시기인데 외조부인 참찬 송인수의 양육을 받으며 올곧게 성장한다.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생으로 1585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에 좌천되나 부임을 못한다.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도 참가하게 된다.
신흠 선생에겐 관료의 길이 서서히 열린다.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해 숭정대부가 된다.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예문관 대제학을 겸대한다. 계축옥사로 인해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파란이 일어나게 된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사람이라 하여 1613년 계축옥사(광해군5) 때 파직된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시절 지은 시가 '야언집'에 실려있다. 오동나무와 매화, 달과 버드나무를 비유해 지은 시가 당시의 정서를 반영한다.
상촌은 당시唐詩와 송시宋詩를 섭렵해 한시詩에 대가이기도 하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은 늙어도 항상 곡조를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즈러져도 본질은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류경백별우신지) 버들은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교보문고 창업주 신용호 회장이 좌우명으로 삼으며 즐겨 읽은 신흠의 한시이다.
율곡 이이의 탄핵을 반대하고 동인의 정적인 송강 정철의 신의를 지킨 의리인이다. 인조반정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오르고 이어 우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5) 영의정까지 오른다. 신흠의 장남 신익성申翊聖은 선조의 셋째 딸 정숙貞淑 옹주와 결혼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진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과 함께 한문학 4문장가로 이름을 날린다. 육경을 바탕으로 다져진 신흠의 문장력은 문학가 대열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로 평가한다.
ㅡ상촌의 안식처ㅡ
문학도들의 우상인 상촌 선생은 1628년 6월29일(인조6)에 갑자기 건강 악화로 세상과 인연을 접는다. 현재 광주시 퇴촌면(영동리산12ㅡ1)에서 영면 중이다. 묘역 300여m 전前 오솔길에서 신도비(335cm)를 만난다. 경기도 기념물 제 145호로 기록된다. 효종 2년(1651)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 합장묘이다. 가파른 언덕위 중턱 능선 양지바른 남향에 자리잡았다.
묘비문은 신흠이 손수 지었다고 한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세웠다고 전한다. 봉분 앞 상석과 향로석은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복두공복형의 문인석은 수 백 년 지난 세월에 비해 조각이 정교하다. 장명등은 불켜는 부분에 돌을 깎아 세워놓아 독특하다. 산신석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벼슬에 비해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무덤에서도 겸손함을 느낀다.
신도비문은 조선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심열沈悅이 글을 썼다.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의 손을 빌리고, 7대손 신응식申應植이 1699년(숙종25)에 세웠다고 한다.
신흠에겐 광해군5년(1613)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가 서인과 남인 세력을 축출하려는 계축옥사 사건이 터닝포인트로 간주된다. 유교칠신의 한 사람으로 파직되어 3년이란 세월을 김포에 머문다. 인목대비 유폐 주범으로 몰려 춘천에서 4년여의 세월을 더 보낸다. 유배 시기에 지은 30여 수의 시조時調 '방옹시여'와 상촌집에 실린 시가와 산문, 한시 등은 후대들에게 교감을 일으킨다.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읊은 시어이다. 사계절로 이어지는 연작시로서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대명 외교 문서 제작과 시문 정리 등 각종 의례 문서 제작에 참여하며 정사 업무를 맡은 관리로서 책무를 다한 팔방미인이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가자加資되고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 한성판윤,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상촌 선생의 어록 일부를 감상한다.
"뜻을 다 표현한 다음에 말을 마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말을 마쳐도 뜻은 다함이 없어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더욱 지언至言이라 할 것이다."
대학원 석사 때 김상옥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김상옥 시조시인도 신흠에 버금가는 시인으로서 청자와 백자에 대한 명시조를 남겼다. 후대에 귀감 되는 명언 남기고 떠난 명인들이 여전히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학문ㆍ문학의 산전수전을 이룩한 대가에게 항상 배움에 대한 준비 자세로 임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신흠 선생에게 과도기가 없었다면 주옥같은 문학의 세계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영동리 묘역 산기슭에 제향을 올리는 사당과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금상첨화이다.
2024.02.28.
첫댓글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시비柴扉(사립문)를 열지마라/ 날 찾을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명월이/ 그 벗인가 하노라>
.신흠의 시조가 참 좋습니다
<학문. 문학의 산전수전을 이룩한 대가에게서 항상 배움에 대한 준비자세로 임하는 예의...>
진정한 문학인의 고마움 입니다
상촌 선생의 일대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