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집을 말한다
김용권
시간을 인화하는 마음의 현상학
<수지도를 읽다> 서정시학 (2012)
나는 기다린다. 오지 않는 것들을, 세상에 없는 것들을, 천천히 읽고 또 쓴다. 그 무념의 세계를 기다림엔 포착의 미학이 숨어있다. 북두칠성, 저 깊은 계곡을 누가 먼저 건너 갔는가? 속도에 중독된 사람들이 길을 찾아 떠난다. 배고픈 자 국자를 들고 주름상자 같은 자신을 파 먹고 있다. 비산되는 시간을 인화 하면서 선연히 떠오르는 퇴행을 못질해 놓으면 밤을 가로질러 가는 별의 궤적, 떨어진다.
오래 전부터 농수산물 공판장을 들락거렸다. 튼실한 과일과 야간작업으로 긴급히 공수된 생물들이 공판장 바닥에 줄지어 선다. 경매사가 흔드는 요령소리에 새벽이 일어서고 손가락 언어로 전달되는 굿판, 삶의 전쟁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새벽 경전을 잘못 읽으면 빈 수레로 사막 같은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은 농어민들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철공소 잡부 김씨,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모습에서 내 생의 수지도를 본다.
누구는 물의 길이냐고 물었다. 푸른 수면아래 물골을 형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물의 길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어떤 섬이냐고 물었다. 사나운 파도가 가둔 고립된 섬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칼이냐고 물었다. 휘두르면 싹둑 잘려지는 예리한 칼이라고 했다.
수지도 手指圖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
공판장 벽면에 붙어있는 낡은 지도를 본다. 손가락 하나 하나가 가리키는 돈의 향방, 그것이 바로 수지도의 길이다. 사나운 파도가 몰아친다. 깊은 곳에 자리한 물골처럼 보이지 않는다. 경매사와 중도매인의 손길에 반 토막 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삶의 보편적 조건인 고통과 절망, 욕망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다. 누구나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피하지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길인 것이다. 주먹구구식 아버지가 걸어간 길, 평행 이동된 그 길을 찾아 우리 모두가 손바닥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밤 나는 중력의 족쇄를 풀고
먼 궤도를 돌고 있는 떠돌이별 행성 찾고 있지
어느 하늘, 외진 병원을 다니는지 몰라도
통증으로 깜박이는 누런 별의 아버지
어디에도 대놓을 연줄 하나 없을 것이지 -천문대에서- 부분
오래 전부터 사진기를 들고 전국 곳곳을 다녔다. 미명의 새벽, 험한 산에 올라 일출의 장엄함도 맛보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렌즈로 왜곡되고 내 눈으로도 왜곡시키면서 아름다움과 퇴조해가는 사물의 슬픔도 보았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태백준령 산 속에서 팔다리 없는 주목과 마주선 외로움, 추전역 검은 땅에 뿌려진 슬픔의 싸리꽃은 풍경의 수지도였다. 한강 발원지 대덕산 검룡소에서 알을 품고 내리는 푸른 물을 보았고,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에서 낙동의 물비늘을 사려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은 순간, 환상이었다.
사진과 詩는 닮아있다. 자연의 한 부분을 도려와서 내 책상 앞에 놓는 것이 어울리는 일인가? 조화와 비례가 나로 인해 파괴되고 재창조 되는 것에 일그러진 눈이 생겨났다. 사물의 단순화,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사진의 생명이었다. 렌즈 속을 들여다 보면서 무의식 속에 내재한 색채를 발현시키고 사라지는 고통의 색깔을 찾아야 했다. 자연의 표정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여주지 않는 마음을 찾아내는 것이 잠재된 내 문학의식을 찾아가는 행위였다. 그랬다 난 아름다움의 색채, 고통의 색채. 사라지는 비명과 조응하면서 침잠된 문양을 詩로 박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난 마음을 찍는 사진사.
표준은 안돼
너무 평범하잖아
광각도 안돼
한 단씩 자라는 환상이 왜곡되어 보이잖아
초점거리를 심도 깊은 가슴에 두고
줌렌즈 장축으로 끌어당길 거야
바람에 날아가는
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살짝 겨누기만 하여도 팡팡 터지는
심경을 보여다오 - 구름 사진관- 부분
사진은 너무 정직하였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확연한 경계의 모습을 두르고 나왔다. 그것은 강요였다. 눈먼 자들을 끌고 와서 한 곳으로 몰아 부치는 의식이었다. 수사학적인 기교, 심미론적 방법이 가득한 풍경 속에서 조선낫을 든 농민의 모습과 망치를 들고 내려치는 노동자 작업복은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 고독이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 사진보다 더 정직한 리얼리즘 실용문학이었다.
파도의 방향을 보아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끝을 보겠다고 몰려갔지만
추락하는 바람을 줍거나
뭍으로 들이미는 칼날 같은 파도에 쓰러졌다
끝에 서서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끝이 가까워져 오면서
조용함만 더해질 뿐,
계약기간이 끝나는 일용직노동자
땅끝으로 간다고 했다 -몰沒- 부분
마음의 내부 공간으로 통하는 길은 이질적인 요소들과 소통하면서 詩로 만들어 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름다움과, 고통과, 비명에 던졌던 무수한 질문과 해답이 이제는 강렬한 글 이미지로 살아났다. 사진 속에 살고 있는 종이거울 속 슬픈 얼굴들이 슬며시 살아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만큼 선명하지는 못했다. <수지도를
읽다>에 실려있는 시편들을 선명하고도 확고한 이미지의 사상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노출부족으로 나왔다. 주체와 객체의 조화, 미적 구성에 있어 창조적인 고투가 자연과 사람 속에 있음을 이미 사진은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내지 못한 것은 수지도의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난 길을 찾아 또 떠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분명 다를 것이니까.
시집 출간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미미하게나마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인데 좀더 치열하게 내 생을 다잡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더한다.
[내가 뽑은 대표시]
화포花浦메기
국밥집서 보았네
뚝배기 속에서 승천하는
입 큰 메기
방천에 걸려
실족사한 달이 바닥을 짚는 사이
강물은 환해져서
떠도는 구름의 말로 몸을 풀었다
물때 놓친 고기의 기억은 투명한 것
발라놓은 연한 가시가
화포花浦 혈맥으로 일어서고 있다
가마솥에서 솟구치는
더운 시간들,
식탁 위에 둥둥 떠다니며 꽃이 되고 있다
때만 되면, 우글우글 달라붙는
메기탕집
깊은 강물에 입 맞추는 소리가 난다
김용권
경남 창녕 남지생
2009년 <서정과 현실> 등단
시집 <수지도를 읽다> 2012 서정시학 시인선
첫댓글 어제와 오늘은 분명 다를 일들과 내면의 소용돌이가 시의 원천이 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이 산에 가 닿으면 그리움도 헹궈진다고 ~
시심이 앉은 자리마다 꽃을 피워낼 말씀들
더 더 정진하시길요^^
화이팅~ ~
어디까지 가볼까요? ㅎㅎ
지금의 내모습이 가장 행복합니다. 이만만 한 것도 과분한 것이지요.
천천히 천천히...... 다지면서
마음이 그 산에 닿아서 활화산처럼 분출될 때......
미명의 새벽은 하얀 눈에 점령당하고 내마음은 수지도를 읽다 에 압수 당했다.
저자의 카메라 촛점은 시를 찍고 세상을 찍고 있겠지.
그러나. 탈고 후 저자의 그 빈 마음 그대로 갑시다 채우려 하지말고 ㅎㅎㅎ
채울거야.
채워줘......
아아, 참 좋습니다.
나도 결락이 좋아요 ㅎㅎ
시를 향한 님의 사랑이 참 깊다고 느낀 때는 거제도 몽돌해수욕장의 밤에 윤영님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에서 였답니다.
일출의 광경을 소재로 시를 써보겠다는 님의 말과 시작 쪽지를 보여주며 내일 아침 일출을 보겠다고 했지요. 관찰과 탐구 탐색이 시를 낳고 있더군요.
쭉 발전하고 있는 님의 모습 참 보기 좋고 축하합니다.
역쉬~
해당화는 내편!
또 누구는 잘 못 읽어서 남편으로 읽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