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5 연중 제3주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지만 초기 사도 중의 한 분이다. 기원후 5-10년에 터키의 남부 도시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오로는 철저한 유다인으로 살았으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개종했다. 이후 그는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15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럴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했다가 다치거나 상처를 입으면 누구를 원망해야 될는지요? 그렇다고 복음 말씀을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전해 주는 ‘의미’를 묵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뱀과 독’은 상징입니다. 살면서 만나는 ‘악한 기운’을 뜻합니다. 누구나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희망을 주는 이도 있고, 활력을 뺏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고통과 함께 사람을 영악하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변해 갑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보호가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뱀’ 같은 사람을 만나도 지켜 주시고, ‘독’에 해당되는 사건을 만나도 보호해 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겁 없이,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당부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이들은 ‘하찮은 일’이 도움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몰랐기에 하찮은 일이었지 사실은 주님의 배려요 개입이었습니다. 인생에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수없이 일어납니다. 전교는 ‘그런 일’을 전하는 작업입니다. ‘하찮은 일’을 통해 우리를 살려 주신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일치 주간의 묵상 - 8일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자 목표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인 오늘로 일치 주간이 끝납니다. 그러나 일치를 위한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언제나 바쳐져야 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의 희망입니다. 비록 온갖 분열과 소외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균열과 분열을 일치와 통일로, 죽음에 이르는 증오를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항구한 원의에 우리는 희망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에서 생겨났기에 깊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 살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창조 활동은 갈라진 교회의 현실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일치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은 이러한 희망으로 고무되고 힘을 얻습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의 힘은 세상을 새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힘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도구가 되고자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열어젖히는 기도 속에서 교회 일치와, 더 나아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의 삶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혼란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세상 끝 날까지 저희와 함께 계시니, 저희가 참행복으로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치를 위하여 봉사하는 희망에 가득 찬 백성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이 있고 선택에 의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남에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상대방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정채봉 시인은 ‘만남’이란 시에서 여러 종류의 만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오니까요./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요./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요./가장 아름다운 만남은/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요.” 이렇듯 우리 인생은 갖가지 만남을 경험하면서 그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어떤 친구·스승·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또 읽은 책·직업·종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기에 만남은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의 만남은 과연 어떤 만남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는”(1,14)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으로 당신의 일을 도와줄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십니다.”(1,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당신의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하기 때문입니다.(루카 13,33) 그들은 가난한 어부들이었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하시며 부르심의 목적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1,18)갑니다. 그들이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첫째는 어떤 ‘슬픔’이 있었을 것이고, 둘째는 어떤 ‘경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슬픔’이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어떤 깊은 불만족이나 갈망, 한마디로 ‘사람이 빵만으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자각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눈망울 크고 맑은 저 사슴처럼 하늘, 곧 영원을 향해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경탄’이란 예수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인격의 힘이랄까, 정말 세상을 ‘다르게’ 사는 스승의 온 몸에서 마치 자석과도 같이 어쩔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어떤 인력(引力)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어부들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뒤를 따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호수에서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찢어진 그물을 손질하여 내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십니다.”(1,19) 주님께서는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준비하고 있었듯이(마태 25,4) 오늘 일을 마치고 내일 일을 준비하는 그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 25,21)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부지런히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도구로 쓰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마르 1,20)
분명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기 위해 이러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르심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뿐입니다. 부르심 받은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기에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이 삶의 터전과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아마도 이런 체험을 두고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을 터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데 불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움켜쥐고 있는지요? 많은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내 손에 움켜쥐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요? 무엇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한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의 것을 얻게 됩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그때 하느님의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얻으려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버리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삶이 쉬워집니다. 내 것을 내려놓는 순간 성령께서 나 대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일상 안으로 찾아오시어 “나를 따라오너라.” 하며 초대하십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의정부] 회개와 믿음의 삶 김승범 신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똑바로 바라보라는 예수님의 권고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이 바뀌곤 합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감옥 창 밖에 있는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별을 보고 시를 써서 시인이 되었고, 다른 사람은 같은 창 밖에 있는 진흙탕을 보면서 원망하고 불평한 결과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창을 통해서 보았지만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그 십자가의 비참함만을 바라본다면 희망 없는 신앙, 무서움만 있는 신앙에 머무르게 되며 결국엔 비관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희망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고, 나아가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부였던 사람들이 부모와 전 재산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 제자가 되는 모습이나, 요나 예언자의 말을 전해들은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라는 배를 타고 그물만을 잡고 있었던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께 시선을 두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약속이 회개라는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다는 말에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믿는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것이 생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기쁨을 안고 기쁨을 전하는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을 믿는 삶은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나눔의 삶, 희생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 이전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맞이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회개의 삶과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라는 선물을 합당하게 맞이해야 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얽매고 있는 그물을 벗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 안에만 머물게 하는 배를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1월 25일 연중 제3주일 - 마르코 1,14-20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출장뷔페가 차려진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결혼식 끝나고 의례 출장뷔페가 차려진 홀로 안내가 되지요. 그리로 가시면 제일 먼저 어떤 음식에 손이 가십니까? 갈비를 수북이 담아 와서는 환한 얼굴로 신나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서글퍼지더군요.
저 같은 경우 요즘 ‘뜯는 작업’이 필요한 갈비나 고기류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제 눈에 들어오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하게도 호박죽입니다. 집에서도 늘 먹는 밥이나 김치 정도입니다.
한때 그렇게 정신없이 좋아하던 양념갈비였는데, 한때 그렇게 먹고 싶던 삼겹살이었는데, 이제 별 관심도 없습니다. 이거다 하는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절차가 복잡한 음식은 싫습니다. 그저 간단히 한 그릇 먹는 게 최고입니다.
제가 요즘 영적생활만 너무 강조하다보니 그런가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 입이 고급으로 변했나, 생각해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저 맛있는 것, 특별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시해졌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결혼식 뷔페석상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것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우리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세상 것들이 대부분 지닌 한 가지 특징은 유한성입니다.
돌이켜보십시오. 한때 우리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아다녔던 세상의 재미들이 세월과 더불어 이제는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한때 목숨조차 걸 정도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대상들이 이제 별것 아닌 것들로 전락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인 저이기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요즘 제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런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어찌 그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아이가 아픈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활짝 웃으며 일어서는 것을 볼 때면 보*탕 몇 그릇 먹는 것보다 훨씬 기쁩니다. 한 아이가 악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3만 원 짜리 뷔페 10번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기분 좋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추구해야 될 보다 항구한 대상, 보다 차원 높은 대상,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께서 남겨주신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정신인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즐겨하실 영적생활입니다. 영혼에 우위성을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만날 때 마다 새롭습니다. 그분께로 돌아갈 때 마다 뭔가 색다릅니다. 그분의 복음 역시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펼칠 때 마다 복음의 모든 페이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할 대상, 마지막으로 돌아갈 대상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입니다. 희망입니다. 구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무질서한 향락의 세계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우리만큼은 늘 단정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첫 사도 단에 가입한 제자들의 성소 여정을 묵상해봅니다. 제자들은 어제까지 지녀왔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만 했는데, 그것은 꽤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총체적인 삶의 전환을 당부하셨습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길,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인생을 새로이 시작해야만 했던 제자들은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모험을 꺼려합니다. 반면에 기존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안정된 생활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안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여행길을 떠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 과거의 생활방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옛날 사도들처럼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모두 맡기고 다시 한 번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따라나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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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Mk.1.17)
제1독서 요나 3,1-5.10
제2독서 코린토 1서 7,29-31
복음 마르코 1,14-20
몇 년 전에 성지순례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멋진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성당보다도 성당 앞의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비둘기 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깨에 또는 손바닥 위에 앉기도 하는 비둘기를 보면서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광장 한 가운데에 서서 손을 들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지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어깨에 통증을 느낄 정도까지 되었지만 단 한 마리의 비둘기도 제 곁으로 오지 않더군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줄기차게 비둘기들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것들이 인종차별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비둘기들이 저를 외면하는 이유를 광장에서 무엇인가를 파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새 모이를 팔고 있었지요. 맞습니다. 사람들은 새 모이를 사서는 자기 손바닥 위에 놓았던 것입니다. 즉, 비둘기는 그 사람이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모이를 먹기 위해서 그 사람 곁으로 가는 것이었지요.
그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빈손으로는 비둘기를 제 곁으로 데려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손만 내밀면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오는 것인 양 착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불평을 던지지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냐고, 왜 나는 이렇게 운이 없냐고 말입니다.
입술을 깨물고 가능한 한 오래 버티려고 노력할지라도 손바닥에 새 모이가 없으면 비둘기가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내어놓는 것이 바로 제1원칙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의 응답 방법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 “저를 제자를 쓰시겠다면,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되죠? 제가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요?” 등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물과 배와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라나섭니다.
만약 조건을 내세웠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장식하지도 못했겠지요.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내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나가는 것에 대해 조건을 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건에 앞서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은 하면서 배운다.(아리스토텔레스)
구두 닦는 철학자(유린, ‘서른한 개의 선물’ 중에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종식이 구두 밑창을 갈기 위해 구둣방에 들렀다.
“아저씨, 구두 밑창 갈려고 하는데요. 얼마나 걸리죠?”
“37분쯤 걸리니 7시 50분이면 끝나겠네요.”
구두를 고치는 아저씨의 모습을 지켜보니 신기했다. 우선 모든 기계를 자기 몸에 맞춰 개조해서 쓰고 있었다. 회전 숫돌은 왼발 앞, 쇠 받침대는 오른발 앞 페달을 밟으면 나왔다. 머리 위 끈을 잡아당기면 사포나 접착제가 담긴 통과 펜치가 내려왔다.
“아저씨,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일을 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생겼지요. 내 몸에 맞게 고치는 게 재미도 있고요. 이것도 발명이죠. 알아주지 않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내가 즐겁고 편하면 되지.“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진 않았지만, 아저씨의 말속엔 뭔가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듯 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고 머리를 지휘자처럼 흔들기도 했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클래식은 가사가 없어서 좋아요. 곡만 음미할 수 있잖아요. 근데 직장 다니고 있나?” 어느덧 아저씨는 동생에게 대하듯 말을 놓았다.
“네. 작은 여행사에서 일하는데, 죽지 못해 다녀요.”
“죽는 것과 바꿀 정도로 선택했으면 열심히 다녀야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하곤 해. 지금은 이래도 좋은 직장을 구하거나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 열심히 할 거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도 직장을 옮기고 싶어요.”
“내일 옮기더라도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거든. 자네를 보면서 ‘곧 그만둘 놈’이라고 생각할거야. 동료든 상사든 거래처 직원이든 언젠가 다 자네의 증인이 될 사람들이야. 그러니 마음 고쳐먹어.”
“그게 잘 안 돼요.”
“소풍 가는 것처럼 기분 좋게 일해.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조금 더 받는다고 팔자 고치는 것도 아니잖아. 기껏 나아 봐야 소형차와 중형차 차이겠지.”
아저씨는 어느새 수선한 구두를 내밀었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7시 5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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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뱀과 독’은 상징입니다. 살면서 만나는 ‘악한 기운’을 뜻합니다. 누구나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희망을 주는 이도 있고, 활력을 뺏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고통과 함께 사람을 영악하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변해 갑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보호가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뱀’ 같은 사람을 만나도 지켜 주시고, ‘독’에 해당되는 사건을 만나도 보호해 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겁 없이,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당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