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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장
13:1 주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이 얼마나 거대한 돌들이며 건물들인지 보소서.”라고 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거대한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것으로 창조주를 감동시키려고 하는 장면이 여기에 나온다(요 1:1-3). 그 성전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양식대로 지어졌다(히 8:5). 여러분은 하늘에 자신이 창조하신 성전의 본체를 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성전에 감동하실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은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세운 건축가에게 여러분의 식탁에 펼쳐 놓은 레고나 집짓기 장난감을 보여주면서 감동시키려는 것과 같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라. 너희가 나에게 지어 준 집이 어디 있으며, 나의 안식할 곳이 어디 있느냐?"(사 66:1). 스테판 집사가 산헤드린에서 전파할 때 인용했던 구절이 이것인데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이 모든 것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하였느냐?"(행 7:50).
본문에서 한 제자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주여, 이 놀라운 건축물을 보십시오. 이런 것을 본적 있으십니까? 모든 것이 금박으로 씌워져 있습니다. 저 보석들도 보십시오." 내가 생각 속에 그려보기로는 이때 예수께서 따분해하시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래, 그래,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만들었던 기억이 나는군." 그 제자가 감동시켜 보려 하는 분께서 성전의 모든 건축 재료들과 그 건물을 세운 사람들까지 창조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1절에서 발언하는 제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그는 탐욕스러운 자였고(요 12:6) 습관적으로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자였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다."너희는 나를 선생이라 또 주라 부르니"(요 13:13). 그 식사 자리에서 누가 주님을 "선생"이라 불렀고 누가 "주"라 불렀는가? 예수께서 열둘 가운데 한 명이 주를 배반하리라고 말씀하시자 열한 제자들이 예수께 "주"(마 26:22; 요 13:25)라 부르며 대답했으나, 유다는 주께 "선생님"(마 26:25)이라 말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할 때에도 주를 선생님이라 불렀다(마 26:29; 막 14:45).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 전에 있을 위대한 예언적 사건들에 대해 가르치시려는 참인데 주께서는 그 강론을 하시기 전에 의도적으로 유다가 대화에서 빠지기를 기다리신 것이다(3절).
2절은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가 와서 성전을 파괴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 분명한데 이는 로마가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요 2:20) 마련한 46년짜리 건축 계획에 따라 성전이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는 성전을 보존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의 군단이 성전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열심당원들이 성소에 틀어박혀 끝까지 저항하는 것을 보자 병사들이 격분하여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티투스의 명령에 반하여 로마 병사들은 성전에 불을 놓았다. 그래서 도시를 정복하고 난 후 티투스는 세 개의 망루와 성전 산의 서편 벽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겠다는 열심으로 로마인들은 성전 바닥의 모든 돌들을 뒤집어보고 성전 기반을 쟁기질하듯이 엎어 버렸고(렘 26:18을 보라) 결국 성전은 기초도 남지 않은 채 완전히 사라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이 여타 종교 경전들과 2천3백만 권의 의회도서관 장서들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점은 성경은 성취된 예언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그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인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마지막 한푼까지 일어난다는 쪽에 걸어도 된다.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에 관한 예언은 여러분이 목도하는 모든 건물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느날 그 이천만 달러 규모의 기독교 대학과 종합대학 "캠퍼스"들과 대형교회의 "뾰족탑 건물들"은 불타고 거기 투자된 모든 자산은 연기 속에 사라질 것이다(벧후 3:10-12). 도서관, 종탑, 수영장, 기숙사, 강당, 크리스탈 샹들리에, 천문관, 박물관, 대학 식당, 운동경기장, 그리고 공연장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될 것이다. 여러분이 혼들을 이겨오기 위해 투자한 것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3 그후 주께서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 위에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주께 묻기를
4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 언제 이런 일들이 있겠으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 어떤 표적이 있겠나이까?”라고 하니,
이것은 "올리브 산 담화"라 알려진 본문이다. 이것은 재림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도성을 떠나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주께서는 성전이 보이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으셨다("성전 건너편" - 3절). 올리브 산이 강론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이 곳이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이 산이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슼 14:4 참고. 행 1:11-12).
이 담화에 열두 제자 모두가 참여하지는 않았다. 주께서는 자신의 "이너서클"에 속한 제자들,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까지 포함해서 그 네 명에게만 "따로" 이 말씀을 하셨다. 그 성전 건물과 장식물이 얼마나 화려한지 자랑하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끌려 했던 그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1절 주석을 보라)은 이번 대화에서 빠졌다. 멸망의 아들(요 17:12 참고. 살후 2:3)에게는 계시가 허락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한다: 1) "언제 이런 일들이 있겠으며" 2)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 어떤 표적이 있겠나이까?"(4절).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이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때 모두 성취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첫번째 질문이 그리스도의 2절 말씀에 관련된 것임을 알기에 그들은 두번째 질문도 2절에 귀속시켜 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번 여러분은 마가가 대화의 전체 내용을 기술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로 마가는 세부 사항을 기술하지만(가다라의 마귀들린 자나 소경 바디매오의 경우처럼) 때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8:12과 10:2의 경우처럼). 전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해야 한다.
4절의 "표적"은 예루살렘 파괴 사건과는 무관하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마 24:3)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따라서 올리브 산 담화의 일부를 A.D. 70년의 티투스에 역사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교리적 적용에 있어서는 마지막 때를 다루는(7, 13절) 예언적인 내용이다. 이번 장을 설명하면서 나는 이중적 적용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제자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전 1:22)기 때문이었다. 유대 민족은 표적들과 함께 시작되었다(출 4장).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동안 주께서는 그들에게 표적들을 주셨다(막 16:17-20; 행 2:22; 고후 12:12).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다루시는 것을 멈추신 후에 표적들은 그쳤다(이를테면 목회서신서 주석서에서 딤후 4:20 주석을 보라). 그러나 교회가 지상에서 휴거된 후 대환란이 오면 주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을 다루실 것이며 표적들도 돌아올 것이다(계 11:5-6을 보라).
본문에서 언급된 표적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표적들이지 휴거의 표적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 표적들이 여러분에게 직접 해당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을 읽어볼 필요는 여전히 있다. 설교자 짐 화이트는 I-75 도로를 따라 운전해서 오하이오주 밀포드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것을 종종 예화로 썼다. 그는 데이턴까지 아주 많이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는데 그는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다. 그는 밀포드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데이턴을 향해 가까워질수록 밀포드 역시 가깝다는 것을 아는데 이는 밀포드가 데이턴보다 35마일 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재림이 가깝다는 표적을 보게 되면 휴거는 그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교회의 휴거가 환란기보다 앞서 있고 재림은 대환란 끝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적들이 크리스찬인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해도 여러분은 그 표적들을 통해 사기를 진작할 수 있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시더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또한 너희가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때 걱정하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겠지만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으며, 또 여러 곳에서 지진이 날 것이요, 기근과 재난이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은 고통의 시작일 뿐이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5절). 이 명령은 엡 5:6; 살후 2:3; 그리고 요일 3:7에서 반복된다. 이 명령과 함께 "속지 말라"(갈 6:7; 고전 6:9, 15:53),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전 3:18)는 명령이 따라온다. 여러분이 미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직전이 되면 속이는 자들이 부셸바구니를 들고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이다(딤후 3:13). 여러분이 그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이다(롬 16:18). 그들은 예레미야 시절의 거짓 선지자들과 같아서 부정적인 말은 빼고 긍정적인 말만 하는데(렘 23:16-17)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자들이다(렘 23:36). 여러분이 지옥과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고 "지금 풍성한 삶을 누리는 법"이나 "긍정적인 생각의 힘", 또는 "가능성의 신학" 같은 것을 떠벌리는 설교자를 보거든 그를 경계하라! 그는 본인이 미혹당했을 뿐 아니라 남도 속이는 거짓 교사이다.
사탄이 육화되어 등장할 때 그는 "온 세상을 미혹"(계 12:9)할 것이다. 그는 "기적들"(계 13:14)과 "거짓 이적들"(살후 2:9-10)을 통해 세상을 미혹할텐데 흑마법을 의식에 사용하는 교회(카톨릭)가 그 사기극에 동참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경고는 환란기를 통과할 유대인들에게 일부 적용된다. 그들이 "주의하"지 않으면 속아넘어가고(마 24:24) 저주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미혹에 대해 경고하신 후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미혹"할 자들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들이다(6절).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등장한다(22절). 따라서 환란기 중에 한 적그리스도와 한 거짓 선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은 "드다"라는 "이집트인"에 대해 언급하는데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그는 유대인 해방을 내세워 로마에 항거하는 폭동을 일으킨 자라고 나온다(행 5:36, 21:38). 예루살렘 파괴 사건 때 티투스가 유대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항복한 사람들은 살려주고 성전도 파괴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한 거짓 선지자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실테니 남은 자들은 성전에 집결해서 로마군과 싸우라는 거짓 약속을 했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다(2절을 보라).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이후부터였다. A.D. 132년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한 두번째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들의 구심점은 시몬 바르 코크바라는 인물이었다. 유대 백과사전(1986)에 나온 명단에는 크레테의 모세(지중해를 걸어서 건너 약속의 땅으로 보내주겠다고 크레테 섬의 유대인들을 선동한 인물), 이샤크 벤 야곱, 유드간, 서린 - 한 명은 프랑스, 한 명은 코르도바(스페인), 또 한 명은 페즈(모로코), 다윗 얼로이 - 예멘, 아브라함 아불피아, 모세 보타렐, 애셔 르믈라인, 다윗 르우베니, 솔로몬 몰코, 이삭 루리아, 하임 바이탈 칼라브레세, 아브라함 샬롬 - 코로만델(인디아), 삽브대 세비, 야곱 캐리도와 그의 아들 베레키야, 미구엘 카르도소, 모르드캐 모키아, 로벨레 프로스니츠, 이사야 하시드, 요나단 에베슈츠, 야곱 프랑크, 모세 루자토 등이 나열되어 있다. 18세기에도 그 명단은 끝나지 않는다. 셔크 쿠하일 1세와 19세기의 유다 벤 샬롬, 그리고 20세기의 모세 귀보리와 메나헴 슈니어슨.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결과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지만 어처구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이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할 자이면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주장했다. 마호메트교도들이 그런 자들 중 한 명을 체포하자 그는 자신의 목을 치면 메시아의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목이 잘려도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그의 목을 잘랐고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모세 보타렐은 스페인 카톨릭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자신을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통구이"가 되면서 생을 마쳤다. 늙은 삽드대 새비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목숨을 건졌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사 53:12("그는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으나")을 성취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변절을 합리화시켰다. 그럴싸한 얘기다.
20세기 동안 벌어진 이 허튼짓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로서의 권리를 합당하게 주장하실 수 있는 그 한 청구인을 계속 거절해 왔다는 것이다. 그 분은 자신의 출생을 통해 사 7:12과 미 5:2을 실제로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말 3:1과 사 40:3의 성취로 그의 선두주자를 실제 보내셨다. 그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병자들을 치유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했으며 말씀만 하심으로 마귀들린 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결국 그가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에 처형되셨을 때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고 자신이 부활한 증거를 일시에 500명이 넘는 목격자들에게 보이심으로 확증하셨다(고전 15:6). 유대인들은 연민과 사랑으로 자신의 날개 아래 그들을 품어주는 분을 저버리고 과대망상에 빠진 정신 나간 종교 지도자들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재앙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도다.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요 5:43). 대환란 때 "많은" 유대인들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당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유대인들이 마귀의 화신인 인물을 메시아로 영접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시던 분을 거부했기에(요 5:36 참고. 요 15:24) 주께서는 마귀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모든 불의의 속임수로"(살후 2:9-10) 그들을 속이도록 놔두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거짓말을 믿게 하심"으로써 그 "거짓 이적들"을 강화시키실 것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살후 2:11-12). 중세와 현대에 나타났던 그 거짓 메시아들이 그들의 추종자들만 파멸로 인도한 데 반해 "장차 올 그 통치자"(단 9:26)는 예루살렘과 재건된 성전을 파괴할 것이고 자기를 메시아로 영접한 그 유대인들까지 멸절시키려 할 것이다(계 12:13-15; 단 8:24).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파송하시어 그들을 계도하지 않으신다면(말 4:4-6 참고. 계 11:3-7), 또 주님 자신이 적그리스도와 싸우지 않으신다면(슼 12, 14장) 다니엘의 70째 주가 끝날 무렵에 지구상에는 한 명의 유대인도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을 알려주는 부분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7절)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조간 신문과 저녁 뉴스에서 항상 보는 내용이 아닌가? 북한이 전쟁 위협을 높이고 있고 ISIS가 칼리프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시리아는 내전 중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다. 이란은 핵무기를 개발해서 이스라엘에 쓰려고 하고 탈레반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세계 경찰"이 되려 하면서 세계 도처에 군대를 보내어 선전포고 없는 전쟁들을 수행 중이다. 어떤가?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8절)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럭크만, 전쟁은 항상 있어왔던 거죠." 지난 120년 동안은 그렇지 않았고 1900년 이전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전에 미국이 경험한 최악의 전쟁은 남북전쟁이었는데 양측의 사상자수는 191,963명이었다. 1900년 이후 우리는 20세기 이전까지 미국이 참여한 전쟁들의 총 사상자 숫자보다 많은 사상자를 낸 네 번의 전쟁을 잇따라 경험했다: 1차 세계대전 - 53,402명; 2차 세계대전 - 291,557명; 한국 - 33,741명; 베트남 - 47,424명. 우리는 1991년 이래 지속적으로 모슬렘과 전쟁 상태에 있는데(걸프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알카에다, ISIS, 그리고 조만간 이란) 그 전쟁들에서 어떤 항구적이고 만족할 만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다.
A.D. 9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수보다 20세기의 전쟁 사상자 수가 더 많다. 1945년 UN이 창립되면서 "다가오는 평화의 새 시대"를 천명했지만 그 후로 전세계에서 177회의 무력 충돌이 있었고(2008년 기준) 20세기에 7천만 명이 자국 정부의 손에 의해 죽임당했다(대량학살).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끝은 아니니라." 가장 크고 잔인한 전쟁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계 6, 19, 20장). 계 9:15-18에 보면 전체 인류의 1/3이 한 군대에 의해 살륙당한다. 지금의 세계 인구를 기준으로 그 희생자의 수는 24억이 될 것인데 그것은 계 6:8의 사망자 17억5천만 명을 포함하지 않은 수이다. 재림 이전에 지구상 인구의 족히 절반 이상이 전쟁들로 사망할 것이다.
8절: "또 여러 곳에서 지진이 날 것이요." 영어킹제임스 성경의 "divers"(여러)라는 단어는 당연히 스쿠버다이버나 심해 다이버와는 무관한 말이다. 그것은 diverse의 고어체 단어이다. 그것은 "여러", "매우 다른"을 뜻한다. 여러 곳에서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말이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는 지진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며 또 지진 계측 기술이 발전해서 예전보다 더 많은 지직이 기록되는 것과도 다른 문제이다. 미국 지질 조사국의 톰 파슨과 에릭 가이스트에 따르면 1979년 이래로 리히터 규모 7.0 이상의 강한 지진들이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그 지진들은 판과 판이 만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지진과 성격이 다르다. 최근의 지진들은 여러 장소에서 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를 태평양으로 밀어넣을 것이라 걱정하는 그 "빅원"은 다른 식으로 일어날 것이다. 계시록의 세 군데에서 성령께서는 환란기에 발생할 "큰 지진"(a great earthquake)을 말씀하신다(계 6:12, 11:13, 16:18-20). 그 지진은 예루살렘의 "십분의 일"을 파괴하고 7,000명을 죽이며(계 11:13), 그 지진은 바빌론을 "세 부분"(계 16:19)으로 쪼개놓는다. 그 지진은 지구상의 주요 도시들을 파괴할 것이며(계 16:19) 모든 섬들을 가라앉히고 모든 산들을 무너뜨릴 것이다(계 16:20). 여러분은 이것이 "유사 이래 최대의 지진"이 될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같은 지진은 일어난 적이 없다. 그 지진은 1964년의 알래스카 지진, 1906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 1811년(그리고 1812년!)의 미주리 지진, 2010년의 아이티 지진, 2004년의 인도네시아 지진, 그리고 2015년의 네팔 지진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줄 것이다.
"기근과 재난이 있을 것이니." 성경 예언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 부분에 논쟁을 걸 수 있지만 좌파, 우파, "하늘이 무너진다"고 걱정하는 기후 변화 옹호자들, 지질학자들(미국 지질조사국), 그리고 인도주의자들은 근래 들어(21세기) 기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것인데 기근의 숫자는 1800-1899년 사이 27회, 1900-1999년 사이 37회, 그리고 2000년 이후에 61회 발생했다. 세계 인구 가운데 제3세계에 속한 1/10이 영양 결핍이고 그들은 인구의 13%에 육박한다. 아시아의 인구 중 2/3이 굶주리고 있으며 아프리카는 상황이 가장 좋지 않은데 인구의 1/4이 영양 부족 상태이다. 세계에서 매년 3백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 결핍으로 사망하고 있고 1억 명의 아동이 심각한 저체중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주곡에 불과하다. 계 6:5-6에 보면 검은 말 탄 자가 지나가면서 사람이 하루 먹기 빠듯한 분량의 밀과 보리를 측량한다. 그런데 그 정도의 식량을 사는 데 하루 일당("한 데나리온")이 들어간다. 이것을 현대의 화폐 기준으로 돌려 보면, 여러분이 1/3 파운드의 밀가루나 1파운드의 보릿가루를 사는 데 약 60달러가 소요되는 상황이다. 1파운드의 밀가루를 가지고 빵 한 덩어리를 만들 수 있으므로 즉, 대환란에 처한 사람들은 하루종일 일해서 보리빵 한 덩이(저렴한 빵)나 밀가루빵 1/3덩이를 챙길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여러분이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부양자라면 무척 힘든 상황이다. 빵 한 덩어리로 24조각을 만들 수 있다면 각 조각의 열량은 70칼로리가 되는데 4인 가족이 "기아 수준의 배급"(2차세계대전 당시 게토들에서는 하루에 인당 1,100칼로리를 섭취했다)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환란 때의 기근은 "지역적" 기근이 아닌 전세계적인 것이다.
8절의 "재난"은 일상적으로 겪는 재난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오면 그들은 전례없는 재난들을 겪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은 대환란을 묘사하기를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 생긴 이래로 그 때까지 결코 없었던 것"(단 12:1 참고. 마 24:21)이라 한다. 그것은 A.D. 70년 예루살렘 파괴의 재난과 다르고 현재 세상에 일어나는 재난들과도 다르다.
여러분은 많은 설교자들과 성경교사들이 우리가 지금 대환란을 통과 중이라고 가르치면서 교회의 환란후휴거를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것을 접했을텐데 그들은 계 6:12-13, 8:7-11, 9:1-12, 16:2-11, 21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재난들"은 지금이 아닌 대환란 때 일어난다. 별들은 아직 하늘에 그대로 있다. 해는 아직 검어지지 않았고 달도 피처럼 되지 않았다(그것은 어떤 "블러드문"이나 월식과 다른 것이다). 나무의 1/3과 모든 풀들이 타버리는 일도 아직 없었고 바다 생물의 1/3이 죽고 배들의 1/3이 침몰하는 일도 없었다. 물이 피로 변하거나 운석이 떨어져서 물을 오염시키는 일도 없었다. 마귀적인 메뚜기들이 구렁에서 올라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전세계적으로 문둥병이 유행하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그 병에 감염되는 일도 없었고 50파운드 무게의 우박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해가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태우는 일이나 적그리스도의 수도인 도성에 고통스러운 흑암이 덮이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든 "재난"은 대환란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것이다.
8절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과 관련된 것이다(사 13:8; 렘 30:6-7; 호 13:12-14; 살전 5:3). 거짓 그리스도들,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그리고 재난들이 합쳐져서 "역설적"으로 결국 재림을 촉진하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가 겪는 단말마의 고통은 다음 시대를 낳기 위한 산고이다."
9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이는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들에 넘기고 회당들에서 매질할 것이기 때문이라. 또 나로 인하여 너희가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가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리라.
10 그리하여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 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하리라.
11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도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거나 생각해 놓지 말고, 그 시각에 너희에게 주시는 대로 말하라. 이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심이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며, 또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일어나서 그들을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묘사의 일정부분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과 초기 성도들의 사역에 적용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실제로 공회에 소환되었고(행 4:1-21, 5:26-40, 6:12-16, 23:1)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가"(행 12:1-3, 16:19-20, 24:1, 25:1-23)기도 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 앞에서 증거했다(행 7:51-53, 8:20-23, 13:8-11, 45-51, 18:5-6, 28:23-28). 그러나 본문의 주제는 사도행전이 아닌 재림이다.
교리적으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이것을 실제로 과거의 사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과 함께 예언적으로는 주께서 144,000명의 환란기 유대인 사역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계 7:1-8). 그러나 다른 해석 역시 가능한데 혹시 "열두 사도"가 "재림"하여 대환란 기간 중에 그들의 사역을 재개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건 모세와 엘리야도 돌아올 것이고(말 4:4-6 참고. 계 11:3-6) 유다도 복귀할 것이며(요 17:12 참고. 살후 2:3; 계 9:11)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다시 오시는데다(요 14:3) 어쩌면 사도 요한도 돌아올 것이다(계 10:11).
마 10:23에 보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인자가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다 다녀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초림 당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녀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것은 미성취된 구절이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남겨진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의 "열두 제자"를 144,000명의 모형으로 적용하던지 혹은 사도들 자신이 돌아온다고 보던지 둘 중 하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환란 때 로마로 와서 그의 가짜 "후계자"와 맞닥뜨리는 상황은 볼만하지 않겠는가? 그들 사이에는 모종의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10절은 선교 사역과 문서, 성경, 전도지, 기독교 서적 보급 사역에 종사하고 싶은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구절이지만 물론 본문 자체가 그것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본문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몸이 휴거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당시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신 예수님 자신 뿐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그것은 갈보리 이후에 시작되었다(엡 2:16).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율법 하의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1:1, 14-15에서 지적했듯이 본문에 언급된 복음은 "왕국 복음"이고 그 사실은 평행 본문인 마 24:14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가복음의 불완전 진술에 대해 신경써야 하는 또 하나의 사례를 보게 된다(10:2, 11 주석을 보라).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성취하는 데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16:15을 보라). 만일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성도들이 최소 한 명씩 죄인들을 구주께 인도했다면 오래 전에 온 세상이 복음화되었을 것이다. 이 지구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그들의 모국어로 된 전도지나 성경 구절 하나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현실에 대해 교회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인간 집단들"에 지역 교회가 생겨야 휴거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휴거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언제든 일어날 것이지만 지상 재림은 대환란에 처한 모든 민족들이 "왕국 복음"을 듣기 전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왕국 복음"은 바울이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다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대환란 때의 구원이 믿음과 행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2:17, 14:12). 얼마나 많은 근본주의 침례교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구원 방식이 아니다(엡 2:8-9; 딛 3:5). 대환란에 처한 성도들은 "한 몸"(계 7장 참고. 고전 12:13; 엡 4:4) 안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죽을 때는 여러분이 죽어서 가는 곳에 가지도 않는다(계 6:9). 근본주의 침례교도들은 교회시대의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가르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성경이 말씀하면 그것은 거부해 버린다.
다시 한번, 11-13절은 교회시대에 실제적인 적용이 가능하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말할 수 있다(고전 2:4, 13).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와 그의 믿지 않는 가족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드시는데 그들이 친족일지라도 믿음으로 인해 원수가 된다(마 10:35-36). 또한 불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전혀 아끼지 않는다(요 15:18-19, 17:14; 요일 3:13). 그러나 본문은 여전히 예언적으로 대환란의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13절의 끝과 다음 구절의 시작 부분을 통해서이다. 13절의 "끝"은 사람의 생애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간의 끝, 곧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7절)인 대환란의 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 어떤 내용이 따라오는지 보라. 그때는 성전이 재건된 때이고 적그리스도가 희생제를 중단시키고 성전에 자기 형상을 세운 때이다(단 9:17, 12:11; 계 13:14-15; 살후 2:3-4). 그래서 다시 한번 여러분은 본문에서 환란에 처한 유대인들을 보는 것이다.
대환란 때에는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유대인들이 있는데(부활한 사도들 아니면 144,000명, 혹은 양쪽 다이건) 그들은 유대인 회당들을 찾아가서 전파한다. 그들과 그들의 개종자들은 동료 유대인들과 그들의 유대인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그들은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가는데 그들이 전파하는 것, 왕께서 돌아오시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다가 미쳤다는 말을 들으며 사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이 구절의 교리는 휴거 이전에 구원받은 크리스찬들 중 선행을 통해 자기 구원을 유지하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과 무관하다.
본문의 "끝"이 개인의 삶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막 13장 본문에는 어떤 "크리스찬들"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이전의 유대인들에게 대환란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게다가 주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약속을 하셨기에 그는 구주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 없이" 보존될 것이다(고전 1:7-8).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에(엡 4:30) 그는 주께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빌 1:6).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근본주의 침례교도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에 대해 완벽히 숙지하고 있지만 모든 시대의 구원 방식이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가 알고 있는 교회 시대의 교리와 다른 점을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3절에 언급된 구원이 육체적 구원이라고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대환란을 통과한 모든 사람들을 살려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텅빈 의미없는 해석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환란 때 죽지 않으면 계속 살 것이다" 정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당"하여 "제단 아래" 있게 된 "혼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부활할 것이고 거룩하고 축복받은 상태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동참할 것이다(계 20:4-6). 여러분은 그것을 "구원"이라 부르지 않을 것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환란 시대에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거저 받는 선물 같은 구원이 아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지니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계 12:17) 구원받을 수 있다. 여러분이 이 구절과 쌍을 이루는 계 14:12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봤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
여러분은 환란 시대의 성도들이 지켜야 하는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예수의 믿음"도 지켜야 한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 끝무렵에 말했던 그 믿음이 아니다. "내가...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바울이 언급한 믿음은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말하는 것이지 혼의 구원이 아니다(딤후 4:8). 계 14:12은 다르게 말씀하고 있으며 그 사실은 하기 인용한 히브리서("유대인크리스찬"이 아닌 히브리인들에게 주어진 말씀)구절들에 의해 확증된다. 거기서 보면 구원 문제가 대환란 때와 같이 조건부로 서술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히 3:6).
"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히 3:14).
"이는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잊으실 만큼 불의하지 아니하심이라. 그 사랑은 너희가 성도들을 섬겼고 또 지금도 섬김으로써[마 25:34-40; 약 2:14-17] 그분의 이름을 향해 보인 것이라. 우리는 너희 각자가 끝까지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향하여 같은 부지런함을 보여 주기를 바라노니"(히 6:10~11).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 누군가 그의 "확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과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데 이는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는 항상 신실하시니,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딤후 2:13)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후 "믿음의 실족"에 빠졌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의 구원이 영향받거나 취소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 그 분 때문에 보장된다(벧전 1:5).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너희 자신들을 지켜"(유다서 21절)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데 이는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8-39).
따라서 13절의 구원은 육체적 구원 이상의 것을 뜻한다. 그것은 대환란에 처한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약 계명들을 지키면서 그의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때까지 견지하던지(계 12:11)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자신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붙들"(히 10:23)지 못하면 "진리의 지식을 받고 난 후에도 고의적으로 죄를"(히 10:26) 짓는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확신"(히 10:35)을 잃고 뒤로 물러나 "멸망"에 들어갈 수도 있다(히 10:39).
대환란 때에는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었을지라도 그후에 그가 짐승의 표를 받으면 구원을 상실하는데, 즉 그때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그때는 "주의 손의 못자국 안에서 나는 안전하네"(요 10:28-29)의 상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히 10:31)이 되는데 이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이 백성은 "크리스찬"이 아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뜻한다)하시고 신 32:35-36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원수들에게 복수하실 것(히 10:30)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자신이 알고 있는 교회 시대의 지식에다 성경 전체를 짜맞추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교회만이 아닌 더 많은 인류를 위해 쓰여진 책이다.
단순히 진리의 말씀을 잘못 적용함으로 인해 많은 이단들이 생겨난다. 제7일 안식교가 안식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때를 잘못 잡았다! 안식일 준수는 대환란 때 중요해질 것이다. 침례교와 장로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믿는 자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어디서 그런 교리를 가져왔는가? 성경이다! 단지 그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성경 본문들을 교회에 적용했을 뿐이다. 그들은 구약, 대환란, 혹은 천년왕국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구절들을 가져다가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하려 한다. 그와 반대로 침례교도들과 장로교인들은 교회 시대의 구원 교리를 성경 전체에 덮어씌우려고 한다. 그 두 가지 다 틀린 해석이다. 여러분은 성경을 올바로 나눠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14 그러나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읽는 자는 깨달으라.)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15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으로 내려오지 말고, 집에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라.
16 또 들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집으려고 뒤로 다시 돌아서지 말라.
17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18 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 단락은 올리브산 담화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증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유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거기에는 재건된 성전이 있고 거기서 희생제가 드려지고 있다. 어떤 자가 유대 성전으로 들어와서 희생제를 중단시키고 거기에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우는데 그로 인해 모든 정통 유대인들은 더럽혀진 성전을 황폐하게 놔두고 떠나야 한다. 계 11:1-2에 따르면(예루살렘 파괴 후 20년이 지나 기록된) 이 일은 아직 미래에 일어날 것이며(참고. 단 9:13) 교회 시대에 일어날 일은 아니다.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올리브 산 담화는 신약 성도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되는 본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환란에 처한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다.
이제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14절)에 대해서는 다니엘서 주석서가 있으니 거기서 단 8:13, 9:27, 11:31, 그리고 12:11의 주석을 찾아 읽어보라. 다만 여기서 내가 말해둘 것은 본문의 사건은 마카비 시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린 사건이나 로마의 티투스가 주피터에게 희생제를 드린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들이 본문의 그림자요 예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사건은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14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간단히 말해 이런 것이다.
1. 유대 성전이 예루살렘의 성전 산 위에 재건될 것이다.
2. 유대인 제사장들이 그 성전에서 희생제를 드리기 시작한다. 2016년 현재 예루살렘 성전 재건 위원회는 성전에서 사용될 기명들과 제사장들의 의복을 모두 마련해 놓았고 레위인들을 선별해서 제사장 교육을 시키고 있다.
3. 적그리스도는 한 주(7년) 동안 유대인들과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 - 단 9:27. 첫 3년 반이 지난 후 그는 언약을 파기하고 희생제를 중지시킬 것이다.
4. 그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자신이 육화된 하나님이라 선언하고 자신의 형상을 세워 경배하도록 할 것이다(살후 2:3-4).
5. 그 경배에는 적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이 동원될 것이고(계 13:15) 그 숭배 의식에는 인신제사가 포함될 것인데 그들의 제사장들이 주관하는 "미사" 의식에서는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육제가 벌어질 것이다(계 6:9, 20:4; 사 6:13; 시 14:4, 16:4).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유대인들은 마귀를 피해 "광야로" 도망한다(계 12:6). 그들은 남쪽의 칼멜산, 북쪽의 에프라임, 요단 동편의 바산과 길르앗으로 도망치는데 그곳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와 민수기 당시 그들의 조상들을 기적적으로 부양하셨던 장소들이다(계 12:6; 미 7:14-16; 렘 50:19-20).
15-16절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우리가 상기 읽었던 적그리스도의 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유대인들 중에 짐승의 표를 받거나 목베임 당하여 그들의 몸이 적그리스도의 희생제에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형상이 세워지는 것을 보자마자 도망쳐야 한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옷가지와 식량을 챙기지 말고 곧장 달려야 한다.
그때 젖먹이 아기를 둔 여인은 특별히 열악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식량이 부족해질 것이기에 젖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아기들은 충분한 젖을 먹지 못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느부캇넷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상황을 이렇게 썼다.
"젖먹이의 혀가 목마름으로 인하여 입천장에 붙었으며 어린아이들이 빵을 구하나 그들에게 떼어 주는 사람이 없도다"(애 4:4).
하나님께서는 도시가 포위되었을 때 여인들이 자신의 아기들을 먹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그 일은 왕하 6:28-29; 애 2:20; 그리고 A.D. 70년 예루살렘 파괴 때 일어났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그 날이 오면 그들이 말하기를 ‘잉태할 수 없는 자와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태와 빨려 본 적이 없는 젖이 복이 있도다.’ 하리라"(눅 23:29). 왜 그런가? 여인들은 자신의 아기가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아사하기 전에 먼저 아기를 먹겠다는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예레미야이다(렘 16:2). 그 이유는 느부캇넷살(적그리스도의 모형)이 쳐들어와서 유대인 부모들을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포위 중에 기근으로 죽지 않는다면 칼에 죽을 것이었다(렘 16:3-4). 그런 일이 대환란에 처한 유대인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위에 언급한 눅 23:29의 맥락을 잘 보았는가? 그것은 계 6:16(참고. 눅 23:30), 곧 대환란이다. 그 본문은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가 될 수가 없다. 존 브레이 같은 과거학파들은 완전히 정신 나간 해석가들이다.
그 다음으로, 여러분이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이 받았던 대우를 상기해 봐야 한다. 아이들은 살해 표적이 되었고 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임당했다. 아기들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살해되었는데 일부는 물에 빠뜨려졌고 일부는 죽을 때까지 방치되었다. 어떤 아기 엄마들은 간수들에게 조롱당하면서 아기와 함께 가스실에 들어갔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불로 태우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아이들은 산채로 불태워졌고 독살이나 교살당했으며 생체 실험에 활용되었다. 대환란 때에 유대인 아기 엄마들은 이와 유사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협박이나 가학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소재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경고이다: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그 날들"로부터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고후 6:2).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친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의 아기를 굶어죽게 놔두거나 아니면 짐승의 표를 받고 음식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은 지옥에 간다(계 14:9-11).
18절: "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 "피난"(flight)이라는 말은 물론 14절의 "산들로 도망"하는 것을 말한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우리 세대주의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유대인들이 피난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날이 "안식일"(마 24:20)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을 조롱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토요일에 비행기가 뜨지 않기 때문에 그 자들의 조롱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그 "flight"는 계 12:14에 보면 실제적인 비행을 말한다, 읽어보라!
팔레스타인 지역의 겨울 날씨가 섭씨 6-15도 사이로 온화한 편이긴 하지만 2015년 이스라엘은 영하 13도의 혹한과 함께 골란 고원에 79cm의 눈이 쌓이는 기상 이변을 경험했다. 그 "flight"는 "산들로" 향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은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이는 산악 지역은 날씨가 더 춥기 때문이다. 그 유대인들은 가방에 급하게 챙겨넣은 옷가지 정도밖에 없을 것이고 비상 식량은 거의 또는 전혀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이 섭씨 4도 미만의 환경에 처하게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마태는 24:20에 이런 언급을 더한다. "안식일에."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이 골 2:16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유대인의 안식일이 다시 유효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이다(골 2:17). 이 시대에 교회는 안식일의 구속력 하에 있지 않다. 그러나 대환란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올라가 있다(계 5:9). 유대인 성도들이 지상에 있고 계명들은 다시 구속력을 가질 것인데(계 12:17, 14:12, 22:14),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와 "그 날에는 일하지 말라"(레 23:3)는 명령의 적용을 받는다는 말이다. 안식일에 지켜야 할 사항 중에는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행 1:12)가 있는데 그 거리는 1.45km 정도(눅 24:50 참고. 요 11:18)이다. 올리브 산 담화가 교리적으로 이 시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여러분은 제4 계명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이는 안식일이 교회가 아닌(골 2:16) 이스라엘을 위한 표적이기 때문이다(겔 20:12, 20). 내가 감히 말하건데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 십중 팔구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위해 "안식일에 다닐 수 있는 거리" 이상을 다닐 것이다. 어디론가 도망가야 하는데 안식일이라 못 가는 경우가 여러분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알겠는가?
19 그 날들에는 고난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으며 그후에도 결코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단축시켜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나, 주께서 선정하신 그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단축하셨느니라.
19절의 "고난"은 대환란(마 24:21)을 말한다. 그 때를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 참고. 단 12:11)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교회의 고난의 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겪지만(요 16:33; 롬 5:3, 12:12; 고후 1:4, 7:4; 살전 3:4; 계 1:9)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거절한 세상에 퍼부으시는 대환란과는 다르다(살후 1:6-8).
19절에서 살펴볼 중요한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시작"이라는 표현인데, 이에 대해 10:16 주석을 볼 것을 권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론자이셨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시스코 교황 같이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지 않으셨다.
그 다음으로 대환란의 혹독함에 유의하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으며." 마태도 이렇게 말한다.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마 24:21). 그렇다면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는 대환란이 될 수 없는데 티투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 군대가 행한 파괴보다 더 잔혹한 일들이 역사에 있기 때문이다. 렘 52장과 애가를 보면 느부캇넷살이 어떻게 예루살렘을 정복하는지 나온다. 모슬렘 정복자 티무르는 도시를 정복할 때마다 그곳의 모든 남녀노소의 목을 베곤 했고(보통 한 번에 70,000-100,000명씩 그렇게 죽였다) 그는 그 해골들을 가지고 탑들을 쌓게 했다. 그는 모범적인 모슬렘이었기에 모든 생포한 여인들을 자기 병사들에게 성노예로 주었다.
폴 포트는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2백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을 죽였다. 그는 사람들을 산채로 묻어서 죽이게 하거나 아니면 목까지 묻은 다음 때려죽이게 했다. "드라큘라"(블라드 3세)는 성읍을 태워버린 다음 한 번에 30,000명을 산 채로 꼬치에 꿰었다. 바실 2세(A.D. 957-1025)는 그가 정복한 불가르인들의 두 눈을 뽑았는데 한 번에 14,000명을 그렇게 했다. 따라서 A.D. 70년에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한 짓은 창세기 1장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최악의 사건이 아니다.
둘째로, 대홍수를 생각해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방주에 탄 노아 가족을 제외한 지구상의 전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리셨다. 로마인들이 했던 일을 이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 알다시피 사람들은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A.D. 70년 당시 발생한 끔찍한 사건들에 대해 읽고 나서 "이렇게 끔찍할 수가!"라고 생각한다. 포도원을 강탈하려는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12:1-11) 그들은 계시록에 나온 두려운 사건들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올리브 산 담화나 계 6-19에 묘사된 사건들은 문자적으로 A.D. 70년에 성취된 적이 없다. 그 일들은 대환란 때 일어날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창 1:2의 상태에 비견하시는 것이다.
"내가 땅을 보았더니, 보라, 형체도 없고 공허하며 하늘들에는 빛도 없더라"(렘 4:23).
대환란을 다루는 영화들이 몇 편 있었는데(잘 만든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나 헐리우드가 만든 어떤 작품도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가져오실 대환란의 끔찍함을 묘사하기에 부족하다. 7절 주석에서 말했었지만 최소한 40억의 인구가 죽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지구상에 살았던 인구는 기껏해야 3억 정도로 추산된다. 따라서 사망자 수로만 따지면 대환란 때 죽는 사람 숫자가 대홍수 때보다 10배 이상 많다.
20절에서 날들이 짧아지는 것을 말씀하는데 이는 대환란 때 지구의 자전 속도가 빨라질 것이기에 하루가 24시간보다 짧아질 것을 보여준다. 사 24:20은 이렇게 말씀한다. "땅이 술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며." 또 "달이 치욕을 당하고, 태양도 부끄러워하리라"(사 24:23). 암 8:9은 하나님께서 "대낮에 땅을 어둡게 하리라"고 말씀한다. 대환란 때 일어날 천체 이변들에 대해서는 막 13:24-25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막 13:20로 돌아와서 보라. - "주께서 선정하신 그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무천년주의자들과 과거학파는 이 "택함받은 사람들"을 A.D. 70년의 상황에 적용하려 한다. 그 적용은 맥락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 용례도 무시한 것이다. 20절의 이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사람이나 무엇을 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언제나 조건적이다(벧전 1:2). 여러분은 칼빈의 TULIP 강령의 두번째 꽃잎을 그것이 원래 있어야 할 퇴비더미로 보내버릴 수 있다.
택함받은 자들이 천사들을 가리킬 경우가 있고(딤전 5:21) 이스라엘(사 45:4), 예수 그리스도(사 42:1; 벧전 2:6), 그리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롬 8:33; 골 3:12; 딤후 2:10; 딛 1:1)를 가리킬 수도 있다. 막 13장 문맥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택함받은 자들이 누구인 것 같은가? 물론 예수님 자신은 아닌데, 주님은 미혹당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천사들도 아닌데 그들은 27절에서 선택받은 자들을 모으러 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려주겠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아니다. 막 13장에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행 11:26 이후에나 등장한다. 그 "택함받은 사람들"이 누구든간에 그들은 유대 지방에 살고 성전 경배를 드리며 그들 앞에 나타날 "멸망의 가증한 것"을 보게 될 사람들이다(14절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땅에는 이스라엘의 택함받은 남은 자들이 있다(롬 11:25-28).
21 그때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보라, 저기 있다.’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할 수만 있다면 택함받은 사람들까지도 미혹하려고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주리라.
23 그러므로 너희는 주의하라. 보라,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1-22절에 대해서는 6절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넘어간다. 21절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하자면 어떤 성도도 그가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할 줄 안다면(딤후 2:15) 대디 그레이스(흑인 교회 지도자), 파더 디바인(역시 흑인 교회 지도자), 레버런드 아이크(뉴에이지 사상가이자 목사), 혹은 지난 2천년 동안 군림한 모든 교황들(그들 모두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그의 "화신"이라 자처했다)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을 내려놓고 워치타워 협회, 제7일 안식교 출판사, 그리고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크리스찬 사이언스 출판부, 코란과 하디스(이슬람), 또는 카톨릭 출판부, 아베 마리아 출판사, 카톨릭 잡지 아워 선데이 비지터 등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메리 베이커 에디, 엘렌 G. 화이트, 죠셉 스미스, 찰스 테이즈 러셀, 브리검 영, 러더포드 판사, 혹은 마호메트 같은 자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데 시간을 쓰는 어떤 크리스찬도 구름의 모양, 토르티야의 형상, 교령회나 "환상" 등을 통해 그의 구주께서 오실 징조를 찾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살전 1:10, 4:16) 내려오시는 것을 기다린다. 그 전까지 우리는 "예수 부르시네"(QT집), 성좌 선언(ex cathedra), 또는 누가 보여주는 "성경의 열쇠" , "예수의 다른 복음서", 그 외 어떤 성경 외적인 허튼 소리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우리 모국어로 보존해 두신 영감받은 성경이 있다(AV 161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고후 5:17)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골 1:27) 우리가 그 분을 더 알기 원하면 주님께 대한(롬 1:1; 딤후 3:15) 진리를 찾아(요 17:17) 성경을 상고하고(요 5:39) 공부함으로써(딤후 2:15)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모든 지혜로...풍성히 거하게"(골 3:16) 만들면 된다. 우리가 따르고 믿는 그리스도는 우리들 자신의 추측과 상상("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 WWJD)으로 그려낸 예수가 아니라 오직 성경에 나온 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적 칼빈주의자들이 22절을 해석하는 방식은 "있다면" -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조건절을 지목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택함받은 사람들까지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당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에 "택함받은 사람들"은 "믿음의 견인"이 보장되어 있기에 결국 미혹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은 미혹당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신약에서 거짓 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한 말씀들은 다 무엇인가?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신다(23절). 생각해 보라, 그들이 미혹당하고 속지 않는다면(마 24:24) 그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결국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분별 사역"을 하는 자들이 "택함받은 자들"은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에게 속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의 청취자들에게 아주 공들여서 그런 거짓말쟁이들을 경계시키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이제 문제의 실상을 말하자면 그 "택함받은 자들"이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이건 환란시대의 유대인 성도건 간에 그들은 미혹당하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왜 성령께서 세 번이나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겠는가 말이다: "아무도 너희를...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6; 살후 2:3; 요일 3:7). 바울은 "흉악한 이리들"이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행 20:29)이라 경고했다. 그 이리들이 회중 가운데 "택함받지 못한 자들"만을 노리겠는가? 어떤 자가 성령을 받은 그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와서 "미혹"한 것을 보라(갈 3:1-2). 여러분은 그 미혹당한 성도들이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라 생각하는가?
휴거 이전 교회시대의 성도와 환란 성도가 가진 중요한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구원받은 성도들은 미혹당하고 넘어질지라도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란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대환란 때의 지역 교회에는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는 "여선지자"에게 속는 "종들"이 일부 있을 것이다(계 2:20). 거짓 여선지자에게 미혹당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인데 그들은 "택함받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그 미혹을 받는 누군가에게 서신을 썼고 그는 여러분이 히 3:6, 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종이 영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있으면(IF) 너희도 아들 안에, 또 아버지 안에 계속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썼노라"(요일 2:24-26).
여러분은 이렇게 영생을 받지 않는다. 여러분이 아들 안에 계속 거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영생을 얻고(요일 5:10-13)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집어넣으시는데(고전 12:13) 그러면 여러분은 구주의 살과 뼈와 일치되는 것이다(엡 5:30). 누군가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속 거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 그 누군가는 구원받기 위해 "끝까지" 견뎌야 하는 사람이다(13절).
24 그러나 그 날들에 환란 후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또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세와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27 그리고 나서 주께서 자기 천사들을 보내어 땅의 맨 끝에서부터 하늘의 맨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함받은 사람들을 함께 모으시리라.
대환란이 종국에 가까워질 무렵 태양계에 이변이 발생한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사건에 대해 선지서 몇 군데에서 다루고 있다: 사 13:10; 렘 4:23, 28; 겔 32:7; 욜 2:31; 암 5:20; 슾 1:15. 그 일은 계 6:12, 16:10에도 묘사되어 있다.
무천년주의자들과 과거학파들은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 때 욜 2:30-31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도(행 2:19-20) 요엘이 예언한 것들 - 성령께서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것을 포함하여(행 2:17) - 이 행 2장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행 2장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도들과 그들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회개한, 또 회개한 징표로 물침례를 받은 그 유대인 회심자들 뿐이었다(행 2:36-38). 베드로가 이야기한 내용은 이렇다. 그는 사람들에게 성령 강림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넓은 의미에서 유사한 구약 본문을 인용하면서 "요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재림 전까지 성령은 "모든 육체"에 부어지지 않는다(소선지서 주석서에서 슼 12:10의 주석을 보라).
25절: "또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우리 태양계의 태양 같은 항성들이 실제로 땅에 떨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리우스, 악투루스, 혹은 베텔게우스나 알파 센타우리, 리겔, 폴라리스 같은 별들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런 항성들 가운데 단 하나만 지구에서 백만 마일 거리 안에 들어와도 지구를 태워버릴 것이다.
주께서 문자적 별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가? 한 별이 계 9:1-2에서 땅으로 떨어지는데 그 별은 인격체이다("him" - 계 9:1; "he" - 계 9:2). 계 1:20에 보면 "일곱 별"이 그리스도의 손 위에 있는데 그들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로 불린다.
현자들이 아이 예수를 찾아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 우리가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디서 그 근거를 얻었는가? 민 24:17에 보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라 되어 있다. 그 "별"은 한 사람을 뜻하며 그 사람은 왕이다("홀"). 하나님의 아들은 "빛나는 새벽별"(계 22:16)이라 불리신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은 집단적으로 "새벽별들"(욥 38:7)이라 불리는 것이다.
대환란 때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 마귀에 의해 땅으로 떨어진다(계 12:4; 단 8:10). "하늘에 있는 권능들(powers)"에서 그 "권능들"은 엡 6:12의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과 관련된다. 거기서 말하는 "높은 곳들"은 지구상의 권력 "실세들"과 무관하고 저 높은 하늘에 있는 장소들이다. 그래서 재림 때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 있는 높은 자들의 군대와 땅 위에 있는 땅의 왕들을 벌하시"(사 24:21)려고 오시는 것이다.
막 13장으로 돌아와서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재림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인자"라는 칭호를 쓰고 계신다. 이것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물리적, 가시적 유대 왕국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칭호이다(마 19:28을 보라). 이방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바울 서신서들에서는 한 번도 주님을 그렇게 호칭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 이는 신약 성도가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공중에 오셔서 성도들을 휴거시키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살전 1:10, 5:9).
26절의 "구름"은 첫째 하늘 대기권에 있는 비구름, 층운, 권운, 적운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구절의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다. 출 19:9에 보면 주께서 시내 산에 내려오실 때 "짙은 구름 속에서" 오셨다. 모세가 성막을 세웠을 때 "주의 영광"이 구름처럼 그것을 덮었는데(출 40:34-35)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왕상 8:10-11; 대하 5:13-14). 앞서 막 9:7에서 구름이 내려와 변형산을 덮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예수께서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고(행 1:9) 돌아오실 때에도 그럴 것이다(행 1:11 참고. 계 1:7).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알곡들을 곳간에 들이시기 위해 오실 때(마 13:30) 그는 구름에 앉은 채 나타나실 것이다(계 14:14-16).
27절은 교회의 환란전 휴거와 무관한 내용이다(계시록 주석서에서 계 4:1을 보라). 20, 22절과 마찬가지로 27절의 "택함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이것은 유대인 성도들의 환란후휴거를 보여주는 장면이며 여러분은 우리의 "휴거 이후에 있을 일들"(The Two Raptures)이라는 책에서 이 주제에 관한 상세 설명을 볼 수 있다.
"사방에서"는 "땅의 네 모퉁이"(계 7:1)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네 방위(동서남북)에 대한 일상적 표현이다. 성경에는 평범한 표현들이 쓰이고 있기에 어디에 사는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은 필요 이상으로 지식 과잉에 빠진 자들이 쓰는 현학적 용어로 되어 있지 않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천사들이 와서 땅의 가장 먼 데서부터("땅의 맨 끝"), 지평선에서부터 지평선까지("하늘의 맨 끝")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모아서 휴거시킬텐데 그 휴거는 재림이 있기 얼마전에 일어날 것이다. 유대인 환란성도들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성경에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환란이 끝나는 시점과 재림이 일어나는 시점에 대해서는 "유동성"이 있다(마태복음 주석서의 마 24:22 주석을 보라).
28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가지가 이미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워진 줄 너희가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가까운 줄 알라.
30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28절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우리는 11:13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 나무는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데 그들은 열매가 없으면서 있다고 자처한다. 11:1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그러자 그 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 버렸으며(11:20) 더이상 열매맺지 못하게 되었다(11:14).
그러나 본문 13:28에서 "무화과나무"는 다시 생명을 얻는다: "가지가 이미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전히 열매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의 생기가 돌아왔기 때문에 조만간 열매도 맺힐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름이 가까워진 줄 너희가 아나니." 솔로몬의 노래 2장에 보면 휴거가 봄에 일어나는 것으로 암시되었는데 휴거가 일어날 때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솔 2:13) 낸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가 이 땅을 떠나 휴거될 무렵 이스라엘은 흩어진 상태가 아니라 다시 국가가 되고 민족적으로 열매맺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가지"와 "잎"을 내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재건되는 것을 뜻한다. 그 일은 1948년 5월 14일에 시작되었다.
여기서 즉시 배교한 신학자들은 본문을 망쳐놓으려 한다. J. 버논 맥기 같은 주석가들은 20세기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본토 귀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 - 유대교 랍비 추종자들이건 불가지론, 무신론을 공언하는 유대인이건 -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이 가진 문제점은 성경에서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두 번 뿐이지(사 11:11) 세 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귀환했을 때 그들은 불신 가운데 있었는데 이 사실은 에스라 9-10장과 느헤미야 13장에 잘 나온다. 두번째로 귀환할 때 그들은 불신 가운데 있을 것이고 이 사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찬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 참고. 눅 21:24)는 말씀에서 확인되는데 그 때는 재림 때이다(롬 11:26; 슼 12:10).
주께서는 비유를 들어서 무화과나무에 잎이 나오는 것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사건들의 연관성을 가르치고 계신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지진, 기근,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 가운데 전파되고, 환란성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고 등과 연관해서 말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그들은 주님의 오심이 "가까이 곧 문들 앞에 가까운 줄" 알게 될 것이다(29절). 그 일들 중에 28절에서 무화과나무가 잎을 내는 것 - 이스라엘 국가가 다시 세워지는 사건 - 도 포함된다.
이제 30절을 보라: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기계 속으로 몽키 렌치가 던져진다. 주께서 단지 5-25절 사이의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켜본 세대를 여기 포함시키신 것이다. 본문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사건을 보았던 어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을 말씀한다. 이제 여러분은 그 때로부터 68년째 되는 때에(2016년 현재) 살고 있다. 이 연수에 의미심장한 뭔가가 있다고 여러분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 "세대"를 성경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에서는 한 세대가 33년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수이다(사 53:8). 그 기준을 적용하면 1981년도에 재림이 왔어야 하지만 이미 그때는 지나갔다. 마 1:17에 근거하면 한 세대가 42년이 될 수 있다. 그것대로면 1990년에 재림이 왔어야 하는데 역시 아니었다. 모세는 시 90:10에서 70년을 연수로 제시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2018년이 재림의 해가 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니엘의 70째 주 기간의 후반부(3년 반)를 떼어놓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휴거는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에 일어났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여러분이 시 90:10의 80년을 잡는다면 재림이 2028년에 있을 것이고 이것은 아직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한 세대가 100년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창 15:13, 16에 근거한 기준이다. 그 기준에 따르면 재림은 아무리 늦어도 2048년까지는 일어날 것이다. 물론 재림은 그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나도 그렇기를 바란다. 어쨌건 휴거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나는 94살이 되었고 건강을 잃어가고 있기에 살아서 휴거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는 살아서 그 때를 맞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위대한 구절을 만나게 된다.
31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이해했는가? 주께서는 어떤 생각이나 원칙, 혹은 근본사항들이나 (단수) "말씀"을 언급하신 게 아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말들"(WORDS)이 보존된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그러한 보존된 주의 말씀들을 갖고 있는가, 갖고 있지 못한가?
나는 성경을 실제로는 전혀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배교자들의 위선을 벗겨내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단수)임을 믿습니다." 그들은 신정통주의적 표현인 말씀(단수)이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성경의 모든 단어들이 "영감으로 주어진 것"(딤후 3:16)임을 믿지 않고 피해 간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어떤 모호한 메시지나 "성경의 사상들"(테네시템플의 어떤 배교자가 말한 대로)을 보존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하나님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것이 주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주의 "말씀들"(시 138:4)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분 주변의 모든 것들은 결국 불에 탈 것이다. 여러분은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는가? 그것은 불에 탈 것이다. 고급 주택에 사는가? 그것도 불탈 것이다. 번화가에 서 있는 저 큰 빌딩들도 다 불타버릴 것이다. 슬럼가, 게토, "저소득층 주택단지", 그것들은 결국 타버린 재로 남을 것이다. 자동차들, 쇼핑몰들, 음식점들, 비행기들, 나무들, 풀들, 사막들, 산꼭대기의 만년설들, 대양들, 강들, 별들, 행성들, 태양, 달, 그것들도 결국 화염 속에서 형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10).
볼테르는 백년 후에 성경은 오직 박물관에만 남아 있을 것이라 공언했다. 볼테르는 1778년 죽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2011년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인쇄 권수가 10억 권을 넘겼다. 사실 볼테르가 죽은 후에 그의 집이 제네바 성경 공회의 본부로 쓰였다.
1891년 불신자인 밥 잉거솔은 10년 내로 성경이 죽은 책이 될 것이라 떠들어댔다. 잉거솔은 8년 뒤에 죽었는데(1899년) 성경은 계속 살아있다(히 4:12).
1920년 소련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알버트 핑케비치라는 교수는 "이 세상은 성경을 감당하기에 너무 좁아져 버렸다. 성경이 없어지던지 아니면 세상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아~멘! 좋은 설교다, 친구! 그대가 공산주의자였다 해도 이번에는 잘 맞췄다. 그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할텐데 내가 알려주자면 사라지는 쪽은 세상이 될 것이다(요일 2:17).
"우리가 해처럼 빛나는 그곳에서 만년 동안 지낸 후에" 여러분은 이미 오래전에 펜사콜라, 플로리다, 바퀴벌레, 최저임금 일자리, 수도 요금, 전기 요금, 자동차 관련 서류 뭉치들, 그 외 모든 시시한 잡동사니들을 잊었을 것이고 여러분은 새 예루살렘의 보좌 앞을 지나가는 중에 성경을 보면서 여러분이 옛날에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혹은 성경교실에서 배웠던 성구들을 떠올릴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벧전 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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