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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1서의 말씀 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안드레아의 증언을 들었는데, 오늘은 필립보의 증언과 나타나엘의 증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을까?
오늘 복음은 그들이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그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하며 핀잔을 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에 따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요한 1,47)
예수님의 신적인 전지함, 곧 ‘거짓이 없음을 보는 거짓이 없는 눈’, ‘진실을 보는 눈’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하고, 당혹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았다. 알았다”는 예지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가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측면을 말해줍니다.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진실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침내 믿음과 감격이 샘솟았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비로소 메시아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뵙는다면,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바로 이 분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나의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이를 오늘 독서에서 요한사도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3,19-20)
비로소 나타나엘은 눈이 맑아지고 환해져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생긴 것입니다.
‘진리’가 그를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까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를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니고,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시고,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친구따라 강남? 친구따라 주님?>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얘기입니다.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와서 보는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고, 이제 곧 공현 축일을 지낼 터인데 주님께서 점차 공적으로 드러나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하는데, 나자렛 출신임을 이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나엘이 부정하자 그래도 “와서 보라”고 권유하고, 나타나엘은 마지못해 그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안 좋은 말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친구 따라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친구 따라 주님께 간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이때 친구는 주님께로 가는 징검다리 또는 사다리입니다.
필립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라고 해도 껄렁껄렁한 친구였다면 도무지 갈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진실한 친구였고, 사랑하기에 주님을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믿었을 것이고, 이때까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믿을 수 없어도 친구는 믿을 수 있었고 친구의 사랑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들을 본보기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필립보처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 하고, 나타나엘처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서 보고는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길을 같이 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역사 안에는 이런 관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서로 인도자와 동반자가 되는 경우요, 홀로 성인이 되지 않고 같이 성인이 되는 경우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도 성인과 스콜라라스티카 성녀, 이냐시오 성인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클라라 성녀와 같이 수도자가 되고 성인이 된 그의 동생들이 그러했지요.
이런 관계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관계가 부러우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이런 관계인지, 저의 공동체는 이런 관계로 형성된 공동체인지, 수도 공동체뿐 아니라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만난 분들도 그저 일의 동업자일 뿐인지 주님께 함께 가는 동반자들인지 성찰할 때, 저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닮지 못해도 한참 닮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기다리시고 찾아 오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벳사이다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따라라’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 5,1).
많은 유다인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 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달라져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 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둥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진실하지 않으면 기도해도 은총을 못 받는 두 가지 이유>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로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을 보고 믿었고 증언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를 보는 것이 곧 성령을 받음입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가 표징이 되고 표징을 보고 믿는 이가 또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아무리 표징을 보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로 ‘거짓’이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진실했기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이는 더 큰 표징도 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1)
여기서 천사들은 성령, 혹은 성령을 담은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거짓이 없는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실까요?
두 가지 이유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오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 ‘오늘부터 지각 변명은 이렇게’라는 동영상을 보십시오.
학생이 강의에 20분 늦은 것을 변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변명합니다.
버스에 테러리스트가 탔다거나 코끼리가 나타났다거나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웃기자고 만든 동영상이지만, 교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 학생에게 진심이 담긴 강의가 가능할까요?
왜냐하면 나에게서 배우는 사람은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진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거짓이 있는 자에게는 내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은총의 열매는 맞지만, 진리와 하나라서 거짓이 있는 이에게는 은총도 내리지 않아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논문 표절이 예상되는 이를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교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이에게 은총이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은총을 오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비슷한 또 다른 형태의 거짓말이 있는데,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는 게 명확해지면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 싫어서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 혹은 방향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영화 <앱솔루틀리 애니씽>(2015)은 신적 존재들에 의해 신의 능력을 갖추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세상에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워 죽겠는 자기가 가르치는 반 아이들을 죽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다시 살려냅니다.
자기를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또 아래층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방을 훔쳐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자기를 좋아하게 만든 여자에게 실연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능력을 개에게 줘버립니다.
그 능력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식사나 한번 하자고 말합니다.
솔직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는 게 은총을 받기 위한 시작입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은총을 남용합니다.
거짓말은 은총을 오용하게 만들고 남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은총의 가장 큰 첫 번째 적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벌거벗음과 같습니다.
벌거벗는 장소가 있습니다.
목욕탕이 그렇습니다.
이런 곳에 옷을 입고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벌거벗어야 다른 이의 벌거벗은 몸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벌거벗음, 곧 가죽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가죽 옷을 입으면 에덴 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다는 뜻은 미래에 그렇게 될 예언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 했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표징이 있습니다.
그 표징 속에서 성령의 내리심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벌거벗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주님 앞에 서야 주님께서도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타나엘, 하느님의 날개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얼굴을 찾던 사람>
예수님 시대 나자렛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동네, 기대할 것이 없는 낙후된 고을이었던가 봅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나타나엘은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희자되고 있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식을 듣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즉시 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보잘 것 없는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온 필립보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나엘을 초대했는데, 나타나엘의 반응은 완전 시니컬합니다.
“나자렛에서 무든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나 필립보의 거듭된 초대와 강권에 마지못해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한 마디로 상황은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당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나타나엘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평소 좀체 사용하지 않으셨던 극도의 칭찬을 건네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런 예수님의 칭찬을 통해 우리는 나타나엘의 인간 됨됨이, 그의 깊은 신앙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나타나엘을 다른 무엇에 앞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날개 아래 서 있던 사람, 하느님의 얼굴을 찾던 사람,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생각은 물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던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을 봐서 나타나엘은 신앙의 정도를 걷던 사람, 다른 이들의 이정표요 귀감인 사람, FM 신앙인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빈말을 하신다거나 없는 것을 애써 꾸며 말씀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탁월했던 모범생 신앙인이었던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하고 꿈꾸던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약속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하늘나라의 아름다움, 감미로움, 그곳에서의 평화로움, 잔잔함, 행복을 맛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보다 더 큰 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분”, 즉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필립보의 말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메시아이신 분이오.” 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메시아는 나자렛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뒤의 7장 52절을 보면,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에 성경 좀 읽었다는 사람들은 메시아는 갈릴래아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자렛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마을이었으니 ‘나자렛 출신’으로 알려진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자렛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러면 마태오복음 2장 23절에 있는 말씀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21-23)
표현만 보면, 구약성경에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예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런 예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판관기 13장 5절에 ‘삼손’을 가리켜서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말은 있습니다.
‘나지르인’은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특별히 서원한 사람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나지르인’을 ‘나자렛 사람’으로 해석해서 예수님에게 적용했습니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서 저자 자신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이 해석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 해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든 나타나엘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말하면서도 필립보를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의심’이 아니라 단순한 ‘의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시오.” 라는 필립보의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백성이다.” 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말씀은 “저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다.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칭찬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날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너의 신앙생활과 희망과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집에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학자들이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관습에서 온 표현입니다.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전에 그를 보신 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을, 또는 영혼을 꿰뚫어보신다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은 사람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말은 “저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과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는 말은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신성을 얼마나 믿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 속을 꿰뚫어보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 금방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가 더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압도하는 ‘신적 권위’ 같은 것.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시작일 뿐이고, 아직 초보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에 도달해야 합니다(요한 1,1).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천사들의 주 임무는 하느님의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이사 6,2-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히브 1,3).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형제애의 실천 -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주님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시편 100,5)
예전 10대 말, 고등학교 시절 바둑을 좋아할 때 말 그대로 침식(寢食)을 잊을 때가 많았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는 이를 미식가(美食家)라 한다면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를 미독가(美讀家)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저는 미식가는 전혀 아니지만 미독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침식을 잊을 정도의 독서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책읽을 때는 배고팠을 때 게걸린 듯 밥을 먹듯이 좋은 책을 읽을 때는 지금도 역시 배고팠을 때 음식을 먹듯 책들도 여러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전투하듯이 읽습니다.
지금도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지고 침식을 잊을 정도이지만 기도와 미사, 강론보다 엄중한 것은 없기에 절대로 독서나 그 무엇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바둑은 수도생활과 시간상 너무 아니기에 끊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좋아하여 때로 애기가(愛棋家)로서 명국(名局)은 틈틈이 감상하곤 합니다.
아마 저의 기력은 아마 5단은 될 것입니다.
요즘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진리의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무수한 강론 글들을 보며 절절히 깨닫습니다.
어제도 미구에 있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이탈리아판 출간 소식을 듣고 원장에게 영문으로 출간되면 주문해달라 부탁했고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미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문판 서문을 읽었는데 정말 핵심을 꿰뚫는 명쾌한 내용의 명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의 신학에 정통한 프란치스코 교황인지!
그분의 엄청난 기억력과 총명함에 감탄했습니다.
95세로 선종하기까지 베네딕도 교황의 의식도 매우 명료하고 투명했다 합니다.
곧 출간될 책 베네딕도 교황의 전기 영문판 제목부터 마음 설레게 합니다.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지금이시다), 얼마나 멋집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문은 구구절절 감동의 명문이지만 몇구절만 인용하여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중에 신학을 한 분이시다(Benedict did theology on his knees in prayer)”
“하느님은 사랑의 한 사건이다(God is an event of love)”
“지상에서 사랑아닌 그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What on earth could save us if not love?)”
“성서와 교회 교부들에 바탕한 요셉 라칭거 사고의 깊이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도움이 된다(The depth of Joseph Razinger’s thought, based on Holy Scripture and Church Fathers is still helpful us today)”
“온교회가 그분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The whole Church will be forever grateful to him)”
“우리에게 베네딕도16세 교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하자(Let us thank God for having given us Pope Benedict)”
내용이 너무 감동스러워 독수리 타법으로 조각하듯 영문을 병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니 이게 진정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최고의 형제애는 형제자매들을 더욱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사랑입니다.
어제 저는 자매들의 격려 글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과찬의 메시지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대로 인용합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의 영적유언을 보면서 신부님 생각이 났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주시는 신부님 역시 교황님에 손색이 없으시니 존경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에겐 신부님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이지요!
신부님께서도 지금까지의 삶은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셨지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새삼 형제자매들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 진짜 형제애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갈망이, 염원이 잠재해 있습니다.
참평화, 참기쁨, 참행복도 이런 하느님 사랑에 있기 때문이요, 이런 행복은 사람 누구나의 근원적 소망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의 말씀 역시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요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형제 사랑에 투신하게 됩니다.
성인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할 일은 형제들을 주님께로 안내하는,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요한 세례자는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를 예수님께, 또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을 직접 부르셨지만 필립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 역시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녹녹치 않습니다.
전개되는 대화를 보십시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은 물론 그 누구도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참 힘들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란 말을 보니, 제 강론집 제본소 “와서”란 이름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다면 참 기막힌 발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직접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립이요, 아, 바로 이게 진정 형제애입니다.
이에 본격적 참사람들간의 운명적 만남이 펼쳐집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을 잘 아시는 주님이듯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세상에 예수님 CCTV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참자기를 발견함으로 경악한, 또 감격한 나타나엘의 예수님 고백입니다.
참사람과 참사람의 참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의 고백을 통해 자기 신원을 새롭게 확인한 예수님 역시 감격하여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고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관계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발광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성인들처럼 우리는 더욱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이웃 형제애의 실천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한 주님의 반사체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온 세상에,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시편 100,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바르톨로메오라고도 하는 나타나엘이 부름심을 받는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에서 듣습니다.
복음 내용을 기반으로 나타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그는 필립보의 친구였습니다.
아마도 필립보가 가장 좋아한 친구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깨달은 좋은 것을 그 친구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 친구는 예수님이 극찬할 정도로(요한 1,47 참조) 진실한 사람이었고, 건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동포들을 사랑으로 잘 대할 줄 아는 선한 의인이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살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고, 거짓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워낙 확고한 인생철학과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터라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기는 어려운 성향이었을 겁니다.(요한 1, 46 참조)
여러분이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 중에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가 있겠지요?
참 좋은 친구고 모든 점에서 훌륭한데, 신앙이야기만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종교와 종교인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주워들은 지식으로 종교를 우습게 여기고, 종교인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자기 철학과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런 친구 말이지요.
"성당 가봤자지 뭐. 교회는 뭐하러 가. 절에 가서 염불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제 딴엔 아주 유식을 떱니다.
참 답답하지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 지가 깨우쳐야 저 교만 덩어리를 깨부술 수 있을 텐데...
필립보에게 나타나엘은 바로 그런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필립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엘을 인내하며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자신이 억지로 설복시키러 애쓰지 않고 그냥 "와서 보기만 하라!"(요한 1,46)고 초대합니다.
그냥 한 번만 가 보자고 합니다.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초대하고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따라나서는 우정이 아름답습니다.
벗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고싶어 하는 그 마음과 벗의 그 마음을 아는지라 벗을 위해 기꺼이 동행해 주는 그 마음은 이미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요한 15,13) 고귀한 사랑의 전주곡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과 사랑의 실천이 큰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초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누려는 진실한 마음을 그 친구가 안다면, 분명 나의 그 진실한 마음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는데 따라나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들,
오늘 벗님의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친구와 함께 예수님을 가장 잘 만나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그분을 소개시켜 주세요.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마시고, 그냥 그 친구를 사랑하기만 하십시오.
오늘 벗님이 필립보가 되고, 벗님의 친구가 나타나엘이 될 것입니다.
그 나타나엘이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변하여,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사도가 될지 누가 압니까?
벗님의 믿지 않는 친구들을 무시하지 말고 축복해 주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벗님을 초대하여 하느님을 알게 해 준 벗님의 필립보를 위해서도 감사 기도 드리십시오.
그 친구 덕분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제자되는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자."(1요한 3,18)고 권고합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처럼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이겠지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온 사람이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죽음 안에 머물러 있다네요.(1요한 3,14)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건 내 마음이 잘 알고 있다네요.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고 찜찜하다면 아직 생명의 문으로 들어서지 못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1요한 3,19-21 참조)
여러분은 혹 누구 때문에 마음이 찜찜합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을 위해 행동으로 작은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앞에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부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줄 돈인데 몇 달씩 미루다가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약속을 정했는데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항상 일찍 도착하는 편이라 짜증이 났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타인과 소통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조급한 성격에 정해진 일을 몇 번씩 확인하곤 합니다.
상대방은 저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불을 키곤 했습니다.
상대방은 여행 와서도 일찍 일어난다고, 잠을 자는데 깨운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배려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통의 강으로 이해의 배가 하느님께로 갈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습니다.
천사 미카엘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몸으로 교회 옆에 떨어진 미카엘은 자신을 돌봐준 가난한 구두 수선공과 그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만하고 교만한 부자가 통가죽을 가져와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미카엘은 죽은 다음에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깜짝 놀라서 장화를 만들지 않는 미카엘에게 왜 슬리퍼를 만드는지 물었습니다.
슬리퍼를 다 만들었을 때 부자의 시종이 와서 장화는 필요 없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미카엘은 미리 만들어 둔 슬리퍼를 주었습니다.
부자의 옆에 죽음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앞날을 모른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미카엘은 쌍둥이 자매를 위해서 신발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은 고아가 된 쌍둥이를 돌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지만 그 아이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미카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일로 미리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기 전에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23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학자의 연구 조사로 밝혀진 결과입니다.
이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행복이 있으면 전파되어 행복 지수를 높여줍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면 내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행복하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요?
0%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6%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을 나와 직접적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예수님과의 만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자기 생각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神性)이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한다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 행복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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