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인(李純仁)-한강송퇴계선생(漢江送退溪先生)(한강에서 퇴계 선생을 전송하다)(님을 보내며)
江水悠悠日夜流(강수유유일야류) 한강물은 유유히 밤낮없이 흐르는데
孤帆不爲客行留(고범불위객행류) 외로운 돛단배는 길손 위해 머물지 않네
家山漸近終南遠(가산점근종남원) 고향이 가까울수록 종남산은 멀어지니
也是無愁還有愁(야시무수환유수) 시름 없어지다가 도로 생겨나시리라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고담일고孤潭逸稿)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권경열님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초기에는 동인의 영수인 이발의 부친 이중호에게 사사하였으며, 후에 다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나아간 뒤의 정치적 행보는 율곡 이이 등 서인들과 궤를 같이하였다. 벼슬은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나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으로 불렸다. 특히 지봉 이수광은 그의 시가 당시에 가깝다고 평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글씨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초서에 아주 뛰어났다.
퇴계가 선조의 간청에 못 이겨 잠시 조정에 나와 벼슬하다가 이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였다. 장안의 명사들이 모두 배가 떠나는 한강가로 나와 전송을 하는데, 했다. 명사들의 작별에 시가 없을 수 없는 법. 쟁쟁한 문사들이 저마다 솜씨를 뽐내어 한 수씩 읊었다. 훗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송별하는 시가 매우 많았지만 이순인의 시가 가장 훌륭하다고 평한바 있다.
이 시의 묘미는 뒤쪽 두 구에 있다. 고향 산천이 가까워지면 개인적으로야 산림에 묻혀 학문을 하는 삶을 떠올리며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한양의 남산은 그만큼 멀어진다. 나라의 중망을 받는 지식인에게는 조정을 등진다는 것이 또 다른 시름의 시작일 수 있다. 시인은 퇴계가 가졌을 이런 내면적 갈등을 이 두 구절 안에서 깔끔하게 대비시켜 보여 주고 있다.
송별시는 지나치게 이별의 슬픔을 강조하여 표현하기가 쉽지만 전통적으로 한시를 평할 때에는 상투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것을 높이 친다. 이 시는 그처럼 애절한 이별의 슬픔을 언급하지 않고도 상대의 의중과 자신의 아쉬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가 후대까지 절창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두 구절의 모티브는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라는 글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멀리 강호에 묻혀 지낼 때는 그 임금을 걱정한다. 나아가도 걱정이요, 물러나도 걱정이니, 그렇다면 언제나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인가”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범중엄은 당시에 각종 개혁을 추진하다가 조정의 반대 세력에 의해 모함을 받고 외직으로 밀려나 있던 터였다. 요즘 같으면 원망 섞인 푸념을 하거나, 비난을 가하기 쉽지만, 그는 오히려 한결같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였다. 후세의 문사들이 ‘악양루기’를 애송하였던 것은 벼슬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이상적인 자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인층,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명언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순인[李純仁, 1533년(중종 28) ~ 1592년(선조 25), 본관은 전의(全義, 지금의 충남 연기). 자는 백생(伯生)·백옥(伯玉), 호는 고담(孤潭). 서울 출생]-조선전기 형조참의, 승문원제조,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아버지는 현령 이홍(李弘)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생원 박함(朴諴)의 딸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2년(선조 5) 문과별시에 급제,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이때에 선조가 병환이 있어 궁내에서 불사(佛事)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인은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업원(淨業院)을 없애자고 청하였다.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정언·병조좌랑·부수찬·수찬·홍문관교리·사헌부지평·응교 등을 거쳐 사간이 되었으나 당시 재상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였다. 1583년 다시 종부시정에 임명,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하지만 1586년 다시 사간에 임명, 부승지·형조참의·승문원제조가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 선조를 호종하다 왕명으로 중전과 동궁을 모시고 성천에 이르자 과로로 병이 들어 죽었다. 이순인은 처음에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뒤에는 이황·조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당시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함께 ‘8문장’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고담집(孤潭集)』 5권이 있다.
첫댓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나요...
하지만 떠나 보내는 이의 마음은 아직 보낼 때가 안된 듯 합니다....
네, 회장님의 표현은 예로부터 숱하게 인용된 명구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서두에 나오는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되어 있지요.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