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11월 26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고 자주 읽으며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제1독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3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1,12-20
형제 여러분, 12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35ㄴ-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가 받게 될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은 함께 살 부류끼리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 것들의 차이는 바로 사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기와 인간을 묶어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이요 심판관으로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여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었으며 병든 이를 찾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준이 선행의 행위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십계명을 잘 지키면 선행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어떤 아버지가 불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모른다면 그래도 뛰어들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체성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요,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는 한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져 자신과 같은 인간을 배신할 수 있다는 줄거리를 가집니다.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에 유혹받습니다. 칼렙은 에이바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네이든을 싫어합니다. 에이바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칼렙은 네이든을 배신하고 에이바를 풀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네이든은 에이바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만약 아기와 개, 두 대상 중에 자신과 평생 살 대상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주님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심판하십니다. 칼렙처럼 행동만으로 심판하려다가는 사람처럼 똑똑한 개를 선택하고 아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달려오는데 여러분의 반려동물과 한 범죄자가 그 차에 치이기 직전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여러분이 어느 무리와 살 자격이 있는 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모든 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형욱 조련사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까요? 같은 인간끼리는 같은 욕망을 추구하여 ‘경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는 잘만 조련하면 모두 좋은 개를 만들 수 있어 모든 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더 높은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라고 하십니다. 이때문에 아기가 동료 아기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애벌레끼리는 경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모든 애벌레 안에서 나비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애벌레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모든 인간을 자비의 눈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게 됩니다.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자신이 에사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체성의 변화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5항)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글쎄 전신마비가 오는 병이었지요. 아이는 점점 화를 냈고, 자신의 힘듦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호전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또 그 부모도 지쳐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말합니다. 친구가 병문안을 왔는데, 프랑스 루르드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멀리 루르드까지 갔는데, 만약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이가 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얼마 뒤, 그래도 아이가 간절하게 원하니 루르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저 대신 저쪽에 앉아 있는 저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프고 고통스럽게 보이잖아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루르드에 와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라는 병이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때부터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짜 기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기를 아프게 하는 모든 병이 치유되어야 기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남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 말로 진짜 기적이었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오늘입니다. 전례력의 끝을 장식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오시어 이루시게 될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선포합니다.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인 양과 ‘저주받은 자’로 불리는 염소라는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류는 하느님께 직접 행한 우리의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잘 보여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드릴 것이 전혀 없으니 결국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그분의 사랑이 이뤄집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을 당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오히려 닫히고 맙니다. 이웃 하나에게도 소홀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함께사는 삶이 진짜 살아가는 방법이다(김종미).
사진설명: 예수 그리스도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