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열반(無餘涅槃)
마음그릇 心椀 박 찬
일체(一切)의
모든 번뇌(煩惱)가 끊어지고
나 자신의
육신(肉體)까지 멸(滅)하여
얻어진 평온(平穩)한
경지(境地)
즉,
온갖 번뇌(諸煩惱),
망상(妄想), 잡념(雜念),
집착(集着) 등(etc)이
모두 다 사라지고
죽은 후(死後)에 들어가는
열반(涅般 해탈 Nirvana)
또는
모든 상(一切相)의
존재(存在 물질 空色)가
남아 있음이 없는
열반(涅槃)의 상태(狀態)가
곧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불교(佛敎)의
열반(涅般 해탈 Nirvana)에는
"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
"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첫 번째
《유여열반(有餘涅槃)》은
최후의 몸(靈肉)을 가진 채
살아있는 아라한(阿羅漢)이고
두 번째
《무여열반(無餘涅槃)》은
그러한 아라한(阿羅漢)이
반열반(半涅槃)에 들었을 때를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여래 佛 世尊)께서
자세(仔細)하게
설(說法 이야기)하신 것이
『 이띠웃따까(如是語) 』
속의 아래에 첨부(添扶)하여
기록(記錄)한 설법이다.
반드시
유념(有念)해야 할
말씀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자기 방식으로
《열반(涅般 Nirvana)》을
해설 또는 해석하는 분들을
제법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 첨부 :
"
비구(比丘 沙門)들이여 !
열반(涅槃)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무엇이 둘(二)인가 ?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有餘涅槃)이다.
무엇이
남음이 있는(有餘)
열반인가 ?
여기
아라한인 비구(比丘)에게
동요(動搖)는 종식(終息)되었고
완성에 도달했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냈고
모든 짐(번뇌)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깨달음)을 얻었고
업(業) 형성의
발목을 잡던 족쇄(足鎖)가
종식(소멸)되었고
모든 제법(諸法)을
참되고 참되며 옳고 바르게
이해(正法正解)하여
해탈(解脫)하였다.
그(修行者 또는 大衆)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五感)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有餘)
그 것들(眼耳鼻舌身)이
온전하고 완전(完全)하므로
그(수행자)는
마음(心, 靈魂)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음을 인식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생사고락)을
느낀다.
그(衆生)의
탐욕, 성냄, 망상(貪嗔痴)이
종식(消滅)되었으므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
이라고 정의(定義)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음이 없는(無餘)
열반(涅般 Nirvana)인가 ?
여기
아라한(보살수행자)인
비구(比丘, 比丘尼, 사문)에게
동요(動搖)는 종식되었고
완성(完成 해탈 성불)에
이르러 도달(到達)했으며
그(比丘 사문)가
해야 할 일(一大本分事)을
끝냈고
일체(一切)의
짐(煩惱)을 내려놓았으며
진정한 목적을 얻었고
업(業) 형성의
족쇄(고정관념)가 종식되었고
바르게 이해(理解)하여
해탈(解脫)하였다.
그(비구 沙門)에게
모든 감각(六感)되는 것들은
맛(色聲香味觸法)이 없으며
지금 이 자리
여기(現前 當處)에서
차갑게 될 것이다.
이 것을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
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두 가지 열반(二種涅槃)은
안정적(安定的)이며
집착(執着)이 없는
보는 자(觀察 修行者)에 의해
두루 널리 베풀어 펼치고
선언(宣言)되었다.
첫 번째 하나는
지금 여기(현전 당처)에서
남음의 요소(有餘要素)가
보이지만
존재(存在 물질 空色)의
속박(束縛 집착, 고정관념)은
부서졌다.
다른 하나는
미래(未來 後世)에 대한
남음이 없고(無餘)
존재(存在 물질 空色)의
모든 형태(一切諸法, 諸相)가
완전히 멈추었다.
형성되지 않은
모든 상태(諸法無相)를
이해(理解)하면
존재(存在 물질 空色)의
속박(束縛 집착, 고정관념)이
부서진 마음(산란심)은
해탈(解脫)한다.
그(보살 수행자)들은
부처님 법(佛法, 일체제법)의
정수(精髓)를 얻었다.
갈애(渴愛,
갈증, 목마름)의 부서짐을
기뻐(환희심)하는
안정(安定)된
그(비구, 비구니, 沙門)들은
모든 존재(存在 물질 空色)를
버린다.
"
그러므로
동요(動搖 고집멸도,
생사고락, 육도윤회)는
종식(끝마침)되었고
열반(涅般 Nirvana 해탈)의
완성(完成)에 도달(到達)했으며
감각적(感覺, 眼耳鼻舌身意)
욕망(慾妄 탐진치) 등(etc)
네 가지 번뇌(사제)가
아라한에게서 부서지고
끊어져 버려지며 지멸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여
지혜의 불길로
타버린 것을 말한다.
중요한 일을 실천하고
성스러운 도(成佛道)를 닦고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을 살고
자유자재하고
근신하고, 근신기간을 갖고
우안거(優安居)를 지내고
사유(思惟)의 공덕을 닦았다는
의미이다
해야 할 일을 끝냈고
짐(번뇌)을 내려놓았으며
선한 범부를 비롯해서
일곱 종류(七種)의 유학들이
네 가지 도(道)에 의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끝 마쳤다.
번뇌가 부서진 자들의
모든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고
마무리했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하여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였다.
저 완전한 해탈을
이룬 자에게
고요한 마음의 비구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다.
무더기의 짐
오염원의 짐
그리고
업 형성의 짐이라는
세 가지 짐도 내려놓고
벗어놓고
방치하고 다 던져버렸다는 뜻이다.
진정한 목적을 얻었고
업 형성의 족쇄가 종식되었고
자신의 일의
이상(理想)을 실현하였다
라는 말이다.
진정한 목적을 실현한 것이다.
진정한 목적이란
아라한이라고 알아야 한다.
자아와
무명을 포기함에 의해
자아의 궁극적 진리로
그리고 자아 때문에
감각적 욕망의 족쇄,
적의의 족쇄, 자만, 사견,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욕망, 질투, 인색,
무명의 족쇄
이 것들은
중생들이라는 존재에게
현존하는 존재로 결합되어 있어
족쇄라고 불린다.
저 공양받아 마땅한 분들
끊어버리신 분들, 버리신 분들,
지혜의 불로 태워버리신 분들이 존재의 족쇄를 끊으신 분들이다.
바르게 이해하여 해탈하였다.
바른 이해란
바른 깨달음이다.
무더기는 덩어리의 뜻으로 감각장소는 펼친다는 의미로써
요소는 공하다는 의미
괴로움은 고통의 의미
일어남은 윤회의 의미
소멸은 지멸의 의미로
도(道)는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의미로
"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
라는 분별을 바르게 있는 그대로
구경의 지혜로 알고
판단하고
세밀하게 조사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고
해석을 한다.
해탈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에 의한 해탈과
열반에 의한 해탈이다.
아라한은
모든 오염원들로 부터
해탈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로도 해탈했고
열반에 의한 해탈로도 해탈했다.
그래서
바르게 이해하여 해탈했다
라고 설하셨다.
그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 것들이 온전하므로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음을
인식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저 아라한에게
마지막 생은 뿌려놓은 씨앗
업(業)이
아직까지는 소멸되지
않아서
다섯 감관들이 아직 남아있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 형색 등의
감관 대상을 즐기고
얻는다.
저 문(門)들을 통해 얻는다.
그들은
법의 정수를 얻었다
해탈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 법과 율에서
법의 핵심을 구성하는
아라한의 증득을 통해서
라는 뜻이다.
갈애의
부서짐을 기뻐하는
탐욕 등이 소멸된 상태인
열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또한
법들 가운데서
항상하기 때문에
최상의 존재이므로
핵심이다.
핵심은
법의 진수인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설하셨기 때문이다.
"
탐욕의 빛바램은
법들에게 최고이고
그 것들 가운데
탐욕의 빛바램(버림)이
최상이라고 불린다.
"
저 법의 진수에 증득 원인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소멸이다.
이 것이 바로 멸진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같이
보고 듣고 배웠다.
- 終 -
강원도 정선 동강 변
별빛총총한
초가삼간두옥
묵우당(墨友堂 글벗터)에서
마음그릇 心椀 박 찬
(박전 상환)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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