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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十常侍)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권력을 잡고 조정을 휘두른 환관들을 일컫는 말이다.
十 : 열 십(十/0)
常 : 항상 상(巾/8)
侍 : 모실 시(亻/6)
중국 후한 말 영제(靈帝) 때 조정을 장악했던 환관(宦官) 10여 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영제는 십상시에 휘둘려 나랏일을 뒷전에 둔 채 거친 행동을 일삼아 제국을 쇠퇴시켜 결국 망하게 한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십상시는 넓은 봉토를 소유하고 정치를 장악해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 부모형제들도 높은 관직을 얻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후한 189년 8월 25일 발생한 십상시의 난에서 2000여 명의 환관이 죽으면서 동탁(董卓)이 정권을 잡게 된다.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각각 십상시를 12명, 10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름에도 차이가 난다.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십상시는 수장인 장양(張讓)을 비롯해 조충(趙忠),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회(韓悝), 송전(宋典)이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건석(蹇碩), 봉서(封諝), 장양(張讓), 단규(段珪), 후람(侯覽), 조절(曹節), 조충(趙忠), 곽승(郭勝), 하운(夏惲), 정광(程廣)이다.
역사서 후한서(後漢書)에는 십상시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가히 대단하였다고 쓰여 있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張讓)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趙忠)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십상시와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십상시는 그들의 이름과 숫자가 약간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12명, '삼국지연의'에서는 10명이다.
이들이 처음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을 때 국부 항아리에 조등이 직인을 찍어줬고 제아무리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십상시라 하더라도 자신들을 환관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조등이기 때문에 조등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조등의 말에 절대복종했다.
이들의 기본적인 전횡은 매관매직이었다. 모든 관직에 가격을 붙여 판매를 했다. 하지만 관직만 팔았을 뿐 임기는 전혀 보장해주지 않고 수시로 독우를 파견해서 퇴출시키기를 일삼았기 때문에 지방 수령의 임기는 1년을 넘기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그 때문에 십상시에게 돈을 주고 관직을 구매한 자들은 그 돈을 본전이라도 뽑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마구 수탈했고 이 때문에 도처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 난들 가운데 제일 규모가 방대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장각을 수괴로 옹립한 황건적의 난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난이 무수히 발생하자 십상시들은 오히려 이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적(政敵)들을 황건적이나 다른 난을 일으킨 자들과 연루시키는 모함을 저질렀으며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는 지휘관에게는 싸울 의지가 없고 오히려 적과 내통한다는 식으로 무고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피해자가 과거 유비와 공손찬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던 노식이었다. 이들이 무고한 관리에게 누명을 씌워서 삭탈관직을 시키는 이유는 바로 그 관직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팔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십상시들은 관직 장사를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황보숭, 주준, 노식, 손견, 조조 등 당대의 영웅들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난을 간신히 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십상시는 정신을 못차리고 당대의 맹장 손견을 되려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의랑 관직으로 임명해 사실상 보직해임 시키거나 조조에게 진급을 빙자해 한직으로 보내버리는 등 오히려 그들의 공적을 다른 혐의를 만들어서 지워버리고 황건적의 난에 아무런 기여조차 하지 않은 자기네들이 그 공적을 가로채어 스스로를 열후에 봉했으며 조정 중신들을 모함하고 뒷돈을 받아먹는 등 만행을 저지르다가 하진과 대립하게 되었고 하진을 암살하면서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지만 원소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
십상시(十常侍)
국정을 농단한 10명의 환관, 그들은 나라를 망하게 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십상시(十常侍)라는 말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정권 시절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부터이다. 그때 안봉근, 이재만, 정호성 세 사람을 ‘문고리 3인방’이라 불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며 그 뒤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실의 인사기획관 복두규, 인사비서관 이원모, 법률비서관 주진우, 공직기강비서관 이시원, 총무비서관 윤재순, 부속실장 강의구 등을 일컬어 검찰 출신 ‘문고리 육상시’라고 지칭하며 대통령실이 이들에 장악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십상시(十常侍)라는 말은 다시 사람들의 입으로 소환되었다.
원래 십상시(十常侍)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후한 後漢)를 망하게 한 10여 명의 환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권력에 깊이 개입하여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이권을 챙기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혀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십상시(十常侍)는 오늘날에 와서 최고 권력자의 곁에서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고 국정을 농단하면서 이권을 챙기는 자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되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아보면 십상시(十常侍)가 나타나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정권이 무너지고 결국 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십상시는 대체로 최고 권력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최고 권력자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인 친척과 외척, 환관 등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명한 통치자는 그들을 늘 경계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유비 현덕이 세운 중국에서 두 번째의 통일 국가인 한나라는 한무제(漢武帝) 시절의 영광 이후로 쇠락의 길을 걸어 결국은 외척인 왕망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 왕망은 한나라를 뒤엎고 신나라를 세워 강력한 개혁정치를 통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호족들은 이에 극심하게 반발했다. 이때 평범했던 시골 청년이 혜성처럼 나타나 호족들과 연합하여 왕망을 제거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광무제가 세운 후한(後漢)이다.
광무제(光武帝)는 ‘빛나는 무공의 황제’라는 뜻이다. 그의 본명은 유수로 원래 한 고조 유방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낙양 현령이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고향인 남양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선비였다. 그는 장안에 유학하여 호족 및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정직하고 온유하며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나라 말기 호족들이 왕망의 개혁정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날 때 그들 틈에 끼어 그들을 잘 조정하고 이끌어 지도자로 급부상하였으며 호족들의 신망을 크게 얻어 왕망의 세력을 토벌하고 후한(後漢)을 세웠다. 후한은 유비 현덕이 세운 한나라인 전한(前漢)과 구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한은 수도가 장안이었으나 후한은 낙양이었다. 전한(前漢)의 수도인 장안은 중국의 서쪽에 있어 서한(西漢)이라고도 부르고, 후한(後漢)은 동쪽에 있어 동한(東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광무제의 후한은 호족 연합으로 세웠기에 늘 호족과 연대하였으며, 호족들의 지지 속에 정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인 번씨 또한 명문 호족의 딸이었다. 특히 왕망이 호족 세력을 제압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감행하려다 실패한 것을 새기며 늘 호족들과 연합하며 호족 유화정책을 펴갔기에 호족들의 힘은 날로 강해져 갔다. 광무제가 살아 있을 때는 그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광무제가 죽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강해지는 호족과 외척들의 발호로 황제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못했다. 그래서 후한은 건국 초기부터 혼란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어쩌면 건국 초기부터 십상시(十常侍)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십상시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광무제 이후의 후한의 황제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① 광무제 유수(光武皇帝 劉秀, 기원전 6년 ~ 57년; 재위25년 ~ 57년)가 죽고 제2대 황제로 등극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顯宗 孝明皇帝 劉莊, 28년 ~ 75년)은 광무제(光武帝)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잘 통치하여 약 200년 이어진 후한의 안정된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제3대 효장황제 유달(孝章皇帝 劉炟, 57년 ~ 88년, 재위 75년 ~ 88년)은 명제(明帝)의 아들로 외척들의 발호와 잦은 원정 등으로 국력이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4대 효화황제 유조(孝和皇帝 劉肇, 79년 ~ 106년, 재위 88년 ~ 106년)는 장제(章帝)의 아들로 즉위하였으나 이때부터 외척과 환관의 횡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후한은 제4대 화제 때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② 제5대 효상황제 유융(孝殤皇帝 劉隆, 105년 ~ 106년, 재위 106년)은 화제(和帝)의 아들이다. 화제(和帝) 유조(劉肇)에게는 아들이 많았으나 대부분이 요절했다. 특히 외척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하기도 했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가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구실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상제는 유아(乳兒)인지라 정치를 할 수 없어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이 쥐었다. 상제는 즉위한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외척들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횡포는 점점 커 갔다.
③ 제6대 효안황제 유호(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는 장제(章帝)의 손자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래서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고 모후의 오빠 등즐(鄧騭)이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등 태후가 죽자 장성한 안제는 환관과 연합하여 등씨 일가를 축출했다. 안제는 외척을 물리치고 권력의 인정을 꾀하려 했으나 오히려 외척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환관이 득세하여 나라가 더 혼란에 빠졌다.
④ 제7대 소황제 유의(漢 少皇帝 劉懿, ? ~ 125년)는 제북혜왕 유수(濟北惠王 劉壽)의 아들로 제3대 황제 장제의 손자이다. 제6대 황제 안제가 죽은 후 황후 염씨(閻氏)가 옹립했다. 소제가 즉위하고 200일 만에 안제가 병사하자 환관 손정이 염씨 일족을 척살했고, 유의는 황제의 지위가 박탈되어 왕의 예로 매장되었다. 외척과 환관의 싸움에서 환관의 승리하여 환관들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⑤ 제8대 효순황제 유보(孝順皇帝 劉保, 115년 ~ 144년, 재위 125년 ~ 144년)는 125년부터 144년까지 재위했지만, 125년부터 126년까지는 안사황태후 염씨(安思皇太后 安氏)가 섭정하였고 126년부터 132년까지 손정(孫程)이 섭정하였으며 132년부터 144년까지만 친정하였다. 섭정과 외척 등의 발호가 심해 황제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⑥ 제9대 효충황제 유병(孝沖皇帝 劉炳, 143년 ~ 145년, 재위 144년 ~ 145년)은 2살에 황위에 올라다가 2년 만에 죽었다. 그래서 묘호도 없다. 제10대 후한 효질황제 유찬(漢 孝質皇帝 劉纘, 138년 ~ 146년, 재위 145년 ~ 146년)은 장제의 서자 천승정왕의 증손이며 낙안이왕의 손자이고 발해효왕의 아들로 출생과 신분이 복잡하였지만 총명했다. 선왕 충제가 죽자 양기와 양황후가 그를 황제로 세웠다. 질제는 양기를 건평후로 봉했지만, 양기의 전횡을 알고 조회에서 양기를 질타했다. 이에 분노한 양기는 질제를 짐살(鴆殺)했다. 외척과 환관들은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황제의 권한이 강해지면 황제와 그 주변 인물을 짐살(鴆殺) 등의 방법으로 척결했다.
⑦ 제11대 효환황제 유지(漢 孝桓皇帝 劉志, 132년 ~ 168년)는 하간효왕 유개(河間孝王 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 유익(蠡吾侯 劉翼)의 아들이다. 환제는 36년간이나 재임했지만, 환관과 외척들에 의해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했다. 묘호로 위종(威宗)이 올려졌었으나,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⑧ 제12대 효령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장제(章帝)의 고손자다. 환관들은 본격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농락하였으며 황제는 이들의 틈에 끼어 주색에 빠지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재위 중에 재난이 빈번했으며 민생이 도탄에 빠져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후한을 멸망시킨 ‘황건적의 난’도 이때부터 일어났다. 그의 사후 군웅이 할거하고 삼국 시대가 열린다. 황건적을 소탕하겠다고 나선 군웅할거의 혼란 속에 황제에 오른 제13대 소황제 유변(少皇帝 劉辯, 173년 또는 176년 ~ 190년 1월(음력))은 189년 황제에 올랐으나 동탁은 그를 폐위하고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하였으며 이듬해에 살해했다.
⑨ 제14대 효헌황제 유협(孝獻皇帝 劉協, 181년 ~ 234년)은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헌제는 조조가 죽은 후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폐위되었다. 헌제가 폐위되었을 때 유비는 헌제가 조비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여기고 시호를 효민황제라 칭하고 제사를 지냈지만 조비는 헌제에게 황위를 선양을 받고 그를 실권없는 황제로 예우했기에 헌제는 천수를 누린 것으로 전해진다.
위와 같은 후한 황제의 면면을 보면 후한은 외척과 환관들이 극심하게 발호한 나라였다. 거기다가 어린 황제의 등극과 수렴청정도 이어졌으며 황제를 등극시키는데도 황후와 외척들의 영향이 컸다. 그런 과정에서 환관과 외척들의 세력 다툼은 끊임없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환관이나 외척 어느 쪽이 실권을 잡아도 황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제11대 환제 때부터는 환관들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황제는 이들의 음모와 간사한 말에 가려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 환관들은 자기들끼리 공모하여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매관매직하였으며 어진 신하들을 음해하여 제거했다. 환제는 환관들의 말만 듣고 나라를 걱정하는 어진 신하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했다. 이후 황제는 계속하여 환관들에게 놀아났다. 그것은 12대 영제(靈帝)까지 이어졌으며 영제 때부터는 나라는 회복 불능의 도탄에 빠졌다. 환제와 영제 때 십상시들의 음모를 삼국지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환제가 죽고 영제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나라를 걱정하던 대장군 두무(竇武)와 태부 진번(陳蕃)이 곁에서 황제를 보필했다. 이때 환관 조절(曺節)이 국정을 농락하고 있었다. 이에 진번이 나서서 그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 오히려 조절 등 환관들에 의해 진번이 죽임을 당했다.
영제가 즉위하고 2년(서기 169년)이 지난 4월 보름에 황제가 은덕전(恩德殿)에 나와 용상에 오르려 할 때였다. 전각 모퉁이에서 갑자기 광풍이 불더니 푸른 구렁이가 나타나 대들보를 타고 내려와 용상에 똬리를 틀었다. 이를 본 황제는 졸도하여 쓰러졌다. 이를 본 좌우 시중들은 황제를 침소로 모셔 갔지만 신하들은 모두 도주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곧바로 구렁이는 사라지고 갑자기 우레가 치며 큰비가 쏟아지고 우박까지 내렸는데 밤까지 쏟아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집이 무너졌다. 민심이 흉흉해져 갔다.
그로부터 2년 후, 건영(建寧) 4년(서기 171년) 2월이었다. 낙양에 지진이 일어나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 바닷가의 백성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빠져 죽었다. 영제 광화(光和) 원년(서기 178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고, 6월 초하룻날에는 검은 기운이 하늘로 치솟아 은덕전으로 들어왔다. 7월에는 옥당에 무지개가 걸쳐 있었고 오원산(五原山)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후로도 기이하고 흉흉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다급해진 황제는 조칙(詔勅)을 내려 재앙이 연속되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충신이었던 의랑(議郞) 채옹(蔡邕)이 “무지개가 옥당에 내려앉은 것은 비빈(妃嬪)들이 발호한 탓이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환관들이 발호한 탓”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받아 읽고 난 영제가 탄식하면서 내전으로 들어가자 장막 뒤에 숨어 이를 지켜보던 환관 조절이 주변 환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엉뚱한 일을 만들어 채옹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런 유사한 일들은 연이어 계속되었으며 황제는 간사한 환관들의 말만 듣고 믿었다. 충신은 점점 사라지고 모든 국정은 환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장양(張讓), 조충(趙忠), 봉서(封諝), 단규(端珪), 조절(曹節), 후람(侯覽), 건석(蹇碩), 정광(程曠), 곽승(郭勝), 하운(夏惲) 등 10여 명의 환관들은 서로 모의하여 간악한 일을 꾸며 악행을 자행하였다. 뒷날 사람들은 그들을 십상시(十常侍)라 불렀다.
그처럼 영제는 충직한 신하보다 간사한 환관들의 말만 믿었다. 영제가 환관의 수장인 장양을 아버지라 부르고 부수장인 조충(趙忠)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는 것은 환관들이 얼마나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정을 농단하였는지를 대변해 준다.
십상시들의 횡포 속에 황제는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이름만 가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십상시들의 이권 쟁탈과 매관매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수탈에 시달린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곳곳에서 도적이 생겨나고 연이어 민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생겨난 도적과 민란 중에 대표적인 것이 ‘황건적의 난’이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을 망하게 하고 삼국 시대의 문을 여는 대사건이었다. 그 시발점이 바로 십상시들의 국정농단이었으며, 그 깊은 뿌리에는 호족과 외척, 환관들이 득세하게 만든 최고 권력자의 인사 정책의 구조적 모순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지는 데는 항상 측근들이 동원된다. 그 측근들은 대체로 친척, 외척, 친구, 동창, 그리고 정치적 동지 등 다양하다. 그리고 권력을 가지면 그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힌다. 그것은 그들이 권력을 갖는데 공헌한 공신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지상정이요 삶의 이치인지 모른다. 하지만 측근 정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작용이 더 크다.
측근으로 대변되는 친척, 외척, 친구, 동창 등을 핵심 자리에 기용하는 이른바 측근 정치의 긍정적인 면은 정권 초기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효율적일 수 있다. 측근들은 자연스런 헌신이 개입되어 있으며 그 헌신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는 그들을 신뢰하기 쉬우며 그들에게 쉽게 의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첫째, 측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 등에 연류되기 쉽다. 그럴 때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로 인해 그를 함부로 내치기 어렵다. 그리고 측근이기에 최고 권력자의 약점을 모두 알고 있어 이를 역이용할 수 있어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측근이 야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권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둘째, 측근들은 근원적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충성심을 발휘하여 최고 권력자가 그들의 말을 듣게 만들기 쉬우며 최고 권력자 역시 근원적인 믿음이 발휘되어 그들의 말에 더욱 신뢰를 보이게 된다. 그것이 오래가면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는 그들에게만 의존하여 다른 의견에 귀를 닫기 쉽다, 그러면 정치는 왜곡되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셋째, 정치가 발전하려면 현명하고 철학이 분명한 사람들을 기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측근들은 대체로 동류의 생각과 행동, 동류의 정책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권에 민감하다. 그러다 보면 정치와 정책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창의적인 정치를 하기 어렵다. 의사결정 이론에 의하면 최고 엘리트만 모임 집단에서 최선의 결정이 나오리라 기대하지만, 최고 엘리트만 모인 집단에서 최악의 의사결정이 나올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다양성의 결여와 최고 엘리트들의 고집이 불러오는 결과라 보여진다. 측근들이 중심이 된 정치는 최고 엘리트들만의 집단이 범할 수 있는 그런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넷째, 정치는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 ~ 1936)가 그의 저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말한 공동사회적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의 결속보다 이익사회적인 게젤샤프트(Gesellschaft) 결속이 강해야 한다. 그러나 측근들은 대체로 이익사회적인 게젤샤프트(Gesellschaft) 결속보다는 공동사회적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인 결속이 강하기 때문에 합리성보다는 온정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정치가 비합리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며 정치 농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이처럼 측근 중심의 정치는 늘 위험하며 역사상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훨씬 많다. 인류 역사상 올바른 정치를 한 지도자들은 모두 외척과 측근들을 잘 관리하였으며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나타난 십상시(十常侍)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정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십상시(十常侍)라는 말을 단순히 어느 세력을 비판하는데 활용할 일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로 삼았으면 좋겠다. 분명한 것은 측근 정치는 항상 부패의 온상을 지니고 있으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십상시(十常侍)
① 환관조고(宦官趙高) : 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가다.
어느 정권이든 권력을 얻고 지탱하는 것은 열성 지지자와 열성 충성자에 의하지만, 그 권력이 무너지는 것도 그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나라도 진시황이 통일을 이루고 천하를 호령할 때까지 충성을 다했던 환관 조고에 의해 무너졌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조고(趙高)는 조나라 왕실의 먼 친척이었다. 그 형제들은 은궁(隱宮)에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형육(刑剹: 사형)을 받는 바람에 비천하게 살았다. 그러나 시황제는 조고가 힘이 세고 옥법(獄法-형법)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기용하여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았다. 그 후 조고는 진시황의 아들 호해에게 재판에 관한 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호해는 조고를 좋아하였다. 조고는 늘 시황제의 곁에서 충성을 다했다. 시황제는 그런 조고를 끝까지 믿었다.
시황제는 통일한 다음 해부터 황제의 위업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순행했다. 순행에는 거의 환관 조고와 이사가 동행했다. 시황제 37년(기원전 210년) 7월, 시황제는 5번째의 순행에 나서 남방의 회계산을 지나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사구 땅에 이르렀을 때 병이 위중해졌다.
죽음을 감지한 시황제는 조고에게 명하여 맏아들 부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했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속히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여 장례를 지내라.”
시황제에게는 아들이 20여 명 있었는데 맏아들 부소는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고 충성심과 소신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황제가 하는 일에 간언하는 일이 많아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부소는 명장 몽염이 있는 북쪽 상군(上郡)으로 쫓겨가 변경 수비군을 감독하고 있었다. 막내아들 호해는 순종적이라 시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는데 그가 황제를 수행하겠다고 하자 황제는 허락했다. 따라서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에 동참한 공자는 호해뿐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편지가 봉인되어 사신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시황제는 죽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때까지 시황제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서한과 옥새는 모두 조고의 수중에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아는 것은 호해와 승상 이사, 시황제의 총애를 받던 조고를 포함한 환관 대여섯뿐이었다. 승상 이사는 혼란을 걱정하여 부소가 올 때까지 황제의 죽음을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명했다. 황제의 유해를 온량거(轀輬車) 속에 안치하고 평상시처럼 계속 순행했다. 황제에게 식사를 올리는 일도 관리들이 정치적인 보고를 하는 일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황제의 시신을 싣고 순행하는 수레 안에서는 시체 섞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 황제의 명령이라고 속여 소금에 절인 생선을 가득 싣게 하였다. 결재는 옥새를 손에 쥐고 있는 조고가 처리했다.
조고는 부소가 황제가 되면 자신이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졌다. 그래서 황제의 서한과 옥새를 수중에 감추고 자기를 총애하는 호해를 황제에 옹립하기 위해 엄청난 음모를 꾸며 갔다.
그는 호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승하하시면서 장자인 부소에게만 편지를 내리셨습니다. 누구를 후계로 지명한다는 지명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소가 돌아오면 곧 황제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공자께서는 한 치의 땅도 주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호해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 아니오. 현명한 임금은 신하를 잘 알고, 어진 아버지는 아들을 잘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황께서 승하하시면서 어느 공자도 후계자로 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소.”
호해는 생각보다 겸손하고 똑똑했다. 당황한 조고는 계속하여 호해를 설득했다. “아닙니다. 천하의 권력을 얻고 잃는 것은 공자님과 저, 승상, 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남의 신하로 사느냐, 남을 신하로 부리느냐, 남을 지배하느냐, 남의 지배를 받느냐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호해가 말했다. “안될 말이오. 형을 제쳐두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부왕의 조칙을 받들지 않고 왕위에 올라 형벌의 공포를 스스로 초래하는 그른 짓이오. 능력도 없으면서 남의 힘에 의해 높은 자리를 탐내는 것은 불의와 불효, 부덕(不德)을 쌓는 것이오. 그것에 천하가 굴복하리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오. 이 몸이 위태로워질 것이며 진나라의 사직 또한 위태로워질 것이오.”
조고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군주를 죽였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들을 불충하다고 욕하지 않고 오히려 의로운 일을 했다고 칭송했습니다. 위나라의 군주는 어버이를 죽였지만, 위나라 백성들은 그를 덕망 높은 임금으로 우러러 받들었고 공자(孔子)도 불효라 하지 않았습니다. 큰일을 행하는 자는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며, 큰 덕을 이루는 자는 사양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 작은 일에 구애되어 큰일을 잊는다면 훗날 반드시 화가 닥칠 것입니다. 결단을 내려 과감하게 실행하면 귀신도 피해가고 훗날 성공이 기약됩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호해는 탄식하며 계속 거절했다. 이에 조고는 더욱 다그쳐 갔다. “그렇다면 황제의 죽음도 아직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치르기 전인데 어찌 이일을 승상과 의논하겠습니까? 이 일은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마침내 호해의 마음이 흔들려 승상과 이일을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고는 즉시 이사를 찾아가 설득했다. “승하하신 폐하께서 부소에게 편지를 내려 유해를 함양으로 모시도록 하고 부소를 후계자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아직 보내지 않았습니다. 황제께서 승하하신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옥새와 편지는 호해 공자가 갖고 있습니다. 태자를 정하는 일은 승상과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사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이것은 신하들이 논의할 일이 아니다.”
이에 물러설 조고가 아니었다. 조고는 계속 승상을 설득하였다. “승상께서는 몽염과 비교한다면 누가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업적은 누가 더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계책이 누가 더 낫다고 보십니까? 특히 부소 왕자의 신임을 누가 더 받는다고 보십니까?”
이사가 말했다. “그런 것을 따지자면 내가 몽염보다 못하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왜 따지시오”
조고가 말했다. “저는 본래 환관이며 하찮은 출신입니다. 다행히 문서를 기록하는 일에 등용되어 20년 동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나라에서 승상이나 공신이 면직되고 난 후 그 직위가 자손까지 이어지는 예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주살되고 집안이 망했지요. 부소 왕자는 호탕하고 용맹스러운 분입니다. 신하를 신뢰하고 고무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만약 그가 등극하면 몽염을 승상으로 등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승상께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사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내가 호해에게 법을 가르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호해는 성품이 온유하고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인재를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총명하지만 경솔하지 않습니다. 공이 있는 인물에게 예의와 공경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공자 중에서 호해가 으뜸이라고 여깁니다. 승상께서 현명하게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사는 조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통을 쳤다. “그대는 썩 물러가 지신의 위치로 돌아가시오. 어찌 그런 엄청난 말을 하시오. 나는 단지 폐하의 조칙을 받들고 천명에 따를 뿐이오. 내가 무슨 결정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조고가 말했다. “아닙니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도 천하를 위태롭게 하는 것도 사람의 일입니다. 만약 승상께서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찌 세상 사람들이 승상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가 말했다. “나는 한갓 시골뜨기에 불과한 서민이었지만 내가 폐하께 다행히 등용되어 승상이 되었소. 제후에 봉해져서 다행스럽게 자손들까지 과분한 작위와 봉록을 누리고 있소. 거기다가 폐하께서 진나라의 존망이라는 중대한 일을 내게 맡기고 승하하셨소. 그런데 감히 어떻게 그런 폐하의 신뢰를 버릴 수 있겠소. 충신은 목숨을 바쳐 임금을 섬겨야 하고 이해득실을 따라서는 안 되오. 효자는 책모에 가담하여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하오. 신하는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일이오. 당신은 나를 범죄에 빠지게 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그러나 조고는 집요했다. “성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변화에 잘 대처합니다. 끝을 보면 처음을 알고 처음을 보면 끝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하의 운명과 권력은 호해 공자에게 있습니다. 서리가 내리면 초목이 시들고, 얼음이 풀리면 만물이 소생하는 법입니다. 승상께서는 이런 이치를 아직도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승상 이사는 엄중히 조고를 꾸짖었다. “진(晉)나라 헌공은 태자를 폐했다가 나라가 3대에 걸쳐 혼란을 겪었소. 제나라는 공자들이 왕위를 다투었기 때문에 황공께서 승하한 후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방치했소. 은나라 주왕(紂王)은 친척을 죽이고 간언하는 말을 듣지 않아 끝내 망해버렸소. 이 모두가 하늘의 뜻을 거역한 탓이오. 내 어찌 그런 음모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 썩 물러가시오.”
조고는 집요했다. “위와 아래가 협력하면 영원할 것입니다. 안팎에 일치하면 의혹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저의 의견에 동의해주신다면 승상께서는 영원토록 봉록을 유지하고 자손들까지도 부귀를 누리며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처럼 장수할 것이고, 공자나 묵자 같은 성인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하시면 자손만대까지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은 화를 복으로 바꿀 줄 아는 법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사는 말했다. “아아 이 난세에 태어나 이런 치욕을 겪어야 하다니.. 죽을 수도 없구나. 장차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사는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조고의 의견에 동의해 버렸다. 호해와 조고, 이사는 시황제의 유언을 승상이 받았다고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다시 작성하여 보냈다.
짐은 천하를 시찰하며 명산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장수를 빌고 있다. 그런데 부소는 몽염 장군과 수심만의 군대를 이끌고 변경에 주둔한 지 10여 년이 지났건만, 한치도 진격하지 못한 채 병력만 잃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수차 글을 보내어 짐이 하는 일에 불경스러운 비방을 일삼고 태자가 되지 못한 원망을 밤낮으로 하고 있다. 부소는 자식으로서 불효한 자이다. 이에 하사하는 칼로 자결하라. 몽염 장군은 부소와 함께 있으면서 부소의 그런 잘못을 고쳐주지 못했으니 그 음흉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참으로 불충한 자이다. 그 또한 자결을 명한다. 군의 지휘는 부장인 왕리에게 위임하라.
조서는 이렇게 조작되어 옥새를 찍어 봉인한 후 부소에게 전달되었다.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몽염이 제지하고 나섰다. “폐하께서 궁전을 떠나 밖에 계시며 아직 태자도 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폐하께서는 저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변경을 지키게 하셨는데 저는 이 조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확인하고 난 후 자결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부소에게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 천성이 착하고 충직한 부소는 몽염에게 “아버님께서 죽음을 명하셨는데 어찌 확인을 할 수 있겠소?”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남쪽을 바라보고 절하고 난 후 자결했다. 그러나 몽염은 자결을 거부했기에 사자가 옥리에게 넘겨져 감옥에 가두어졌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호해, 조고, 이사는 기뻐하며 즉시 함양에 도착하여 황제의 죽음을 발표하였고 호해는 나이 21세에 2세 황제로 즉위했다. 조고는 황제의 최측근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최고 관직인 낭중령(郎中令)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조고는 황제의 곁에서 법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하였으며 2세 황제는 점점 조고에게 권력을 넘기고 향락에 빠지기 시작했다. 조고는 황제의 명이라 하며 몽염 장군을 비롯한 왕자 12명을 시장에서 공개 처형하였으며 공주 10명은 기둥에 묶인 채로 창에 찔려 죽었다. 그에 연류되어 죽은 자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조고는 자기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해 갔다. 법과 형벌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백성들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져 갔다. 2세 황제는 아방궁을 짓고 황제의 전용 도로를 건설하는 바람에 세금은 더욱 가혹해졌고 군대 징발과 노역 또한 갈수록 심해져 갔다. 곳곳에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반란의 조짐이 보였다. 그럴수록 조고는 법을 더 강하게 시행했다. 공포정치였다.
2세 황제 원년인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산둥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호걸들이 일어나 왕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사는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여러 차례 반란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나는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영원히 즐기고 싶으니 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이사를 책망할 뿐이었다. 그때 이사의 아들은 삼천의 태수였는데 진승․오광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탄핵의 위기에 있었다. 황제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 이사는 황제에게 아부의 글을 올리고 황제는 이사의 말을 들어 더욱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등 학정이 심해져 갔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신체 일부가 잘린 처벌을 받은 자가 반이나 되고 처형으로 죽은 자의 시체가 길바닥에 쌓여 갔으나 2세 황제는 “감독이 잘되고 있구나.”하고 가혹한 관리들을 칭찬만 할 뿐이었다.
반란군은 장한 장군이 겨우 몰아내기는 했으나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조고는 점점 더 음모를 꾸며 갔다. 그는 2세 황제에게 ‘황제를 짐(朕)이라 하는 것은 천자의 소리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다는 소리이므로 폐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마시고 음성도 들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황제를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향락을 즐기게 하고 정사는 오직 조고 자신과만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조고는 승상 이사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이사는 조고의 전횡을 막기 위해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황제는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조고를 두둔했다. 결국 이사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사는 그동안의 충성심과 자신이 죄가 없음을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올렸으나 조고는 이를 가로챘고, 황제는 이사에게 5형(五刑-매를 때리고 코를 베고, 다리를 자르고 귀를 베고 혀를 자르는 형벌)을 갖춘 요참형에 처하고 삼족을 모두 처벌하였다. 이사의 아들 이유는 반란군의 대장인 향랑(항우의 숙부, 항우와 함께 거병하였으며, 후에 진나라 장수인 장한에게 패하여 죽었다)에게 살해된 후였다.
이사가 죽자 조고는 승상이 되었다. 모든 국정은 조고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느날 조고는 황제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며 말했다. “폐하 제가 좋은 말 한 마리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고개를 흔들며 “이것은 사슴인데..”하고 말했다. 그러나 조고의 권세에 눌린 신하들은 모두 “그것은 말입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당황하여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아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기도 했다. 그 틈을 타서 조고는 황제를 농락하였다. 조고가 일을 꾸며 황제를 위협하니 2세 황제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틈을 타서 조고는 2세 황제를 망이궁(望夷宮)에서 주살하고 옥새를 차지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조고는 할 수 없이 시황제 형의 아들인 자영에게 옥새를 넘겼다.
자영이 즉위하고 닷새가 되는 날 두 아들을 불러 조고를 제거할 논의를 했다. 자영은 병을 핑계로 의식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조고는 황제를 부르려고 궁을 찾아갔다. 그때 자영은 미리 숨겨놓은 자객에게 조고를 죽이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부모 형제와 처자들을 모두 처형하여 함양 장터에 목을 매달았다. 그렇게 조고와 그의 일족은 사라졌지만, 진나라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든 상태였다.
자영이 즉위한 지 46일째 되는 날이었다. 유방의 군대가 무관 지방을 점령하고 함양으로 진격했다. 이에 많은 신하가 유방이 덕망이 있음을 듣고 진나라를 배반하고 유방의 군대에 항복했다. 유방은 황제의 항복을 요구했다. 자영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처자식들과 함께 상복을 입은 후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옥새를 받들고 지도정(軹道亭)에 나아가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은 궁전과 창고를 봉인한 다음 패상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제후 연합군이 함양에 도착했다. 맹주는 항우였다. 항우는 장남에서 진을 치고 극원에 진을 치고 있는 장한의 군대와 싸워 승기를 잡았다. 장한은 항우에게 패하자 조고의 전횡을 눈물로 호소하며 맹약을 맺은 후 황우의 장수가 되었다. 항우는 많은 장수가 의기를 합치는 바람에 세력이 커져 맹주가 된 것이었다. 항우는 함양에 도착하자 자영을 비롯한 진나라의 공자와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 함양을 파괴하고 불살랐으며 백성들을 살육했다. 후궁의 여자들을 잡아들였고 보물과 재화를 약탈하여 제후들과 나누어 가졌다.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의 자리에 올랐으며 국토를 3분 하여 제후들을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에 봉하고 3(秦) 이라 불렀다.
그렇게 진의 통일 제국은 통일 후 불과 15년 만인 진시황 사후 3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환관 조고의 엄청난 국정농단의 결과였다. 진시황은 조고의 충성심을 과도하게 믿었다. 그러나 조고는 깊은 곳에 엄청난 야심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건, 최고 통치자가 특정 신하의 충성심만 믿고 과도한 권력을 주고 자신은 뒤에서 세월을 즐기면 그 특정 신하의 권력 남용과 국정 농단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오너가 특정의 부하에게 경영권을 과도하게 넘기고 자신은 즐기기만 하면 그 기업도 망한다. 과도한 충성심은 과도한 욕망의 산물이기 쉽다. 그러나 최고 통치자는 언제나 그 과도한 충성심에 빠져들기 쉽다. 그리고 그 과도한 충성자는 믿음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권력을 얻는 것도 열성적인 지지자와 충성자에 의하지만, 그 권력을 부패시키고 무너지게 하는 것도 그들에 의한 경우가 많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의 과도한 충성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의 과도한 권력 남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무너졌다. 최고 통치자는 항상 최측근, 자기가 권력을 가장 많이 준 자를 잘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환관 조고의 국정농단 사례는 오늘에도 깊이 새겨 볼 만한 사례다.
십상시(十常侍)
② 지록위마(指鹿爲馬) : 사슴을 말이라 하다.
어떤 권력이든 권력을 잡은 후 절대 권력을 꿈꾸는 순간부터 부패와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권력을 잡은 최고 권력자는 그 휘하의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절대 충성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휘하의 모든 사람을 절대 충성으로 몰아넣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절대 충성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숙청해 나간다. 그 조짐이 보이는 순간부터 권력은 부패 되기 시작하며 그것이 먹혀드는 순간부터 권력은 남용되어 극한이 이르게 된다. 휘하 모든 사람은 그 절대 권력 앞에 아부하는 충성을 발휘하거나 납작 엎드려 충성하는 시늉만 낼 뿐이다. 따라서 그 절대 권력은 실현되는 순간부터 그의 세상이 된 것 같지만, 점차 망하는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절대 권력자는 거짓 충성자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자기의 역량을 벗어나는 잘못된 야망을 점점 더 키워간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무리수를 자행한다. 그것은 권력이란 야망 속에 숨어 있는 자아도취란 꽃뱀 때문이다. 그 꽃뱀은 참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권력적 야망에 대한 극도의 자기 과신이며 자긍심이다. 모든 권력자는 그 꽃뱀에 빠진 순간부터 점점 더 깊이 권력의 낭만적인 나르시즘에 빠져들며 충성을 요구하고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 절대 권력을 향유(享有)해 간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하여 끊임없이 충성자들을 확대 재생산하며 불충이라 여기는 자들을 제거해 간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룬 진시황이 그 대표적인 유형의 하나였다.
진시황은 진나라를 중심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자신의 제국을 꿈꾸었다. 그래서 자기를 시황제, 다음은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도록 했다. 이를 위해 진나라에 절대 충성하는 자들, 특히 진시황의 사상과 통치이념에 부합하는 자들만 남겨 놓으려 했다. 이를테면 절대 충성자들만 남겨 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상과 통치 철학에 반대하는 수많은 학자와 백성들을 죽이기도 했다<분서갱유>. 그는 그런 세상이 이룩될 때까지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들을 동방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을 순행하며 그 절대 권력을 확인하며 구축해가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고 관리들의 수탈은 심해갔다. 진시황의 그러한 절대 권력은 통일되는 순간부터 부패와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그것을 모르고 아부하는 자들을 충성하는 자들로 착각하고 있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진시황을 늘 수행하며 충성심을 발휘했던 환관인 조고는 애초에는 진시황에게 충성을 바쳐 살길을 구하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환관이 되어 진시황에게 모든 충성을 바쳤다. 그 결과 그의 집안은 융성하고 가문은 성장해 갔다. 그는 진시황의 최측근이 되어 진시황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진시황의 절대 권력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점점 그 절대 권력에 대한 환상에 빠졌다.
그러나 진시황은 조고만은 자신과 진나라에 절대 충성할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죽는 순간까지 그를 데리고 순행에 나섰으며, 그에게 옥새와 모든 문서 작성 권한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 오산이었다. 조고는 진시황이 순행 도중 갑자기 객사(客死)하자 그 숨겨진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야심은 자기가 가르쳐 자신을 잘 믿고 따랐던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 공자를 황제로 세우고 뒷날 그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었다. 조고는 황제의 유언을 숨기고 절대 권력자가 되기 위해 진시황과 함께 순행에 나섰던 호해 공자와 승상 이사를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하였다. 호해 공자와 승상 이사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으나 그 야심도 모르고 조고에게 넘어가 황제의 조서를 조작하여 충성스러웠던 맏아들 부소를 자결하게 하고 끝내 호해를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부소 왕자에게 충성을 다했던 몽염 장군과 그 일족 및 휘하들까지 척살했다. 그리고 자기가 황제가 되기 위한 반란의 음모를 계속 꾸며 갔다.
호해가 황제에 오른 지 3년, 즉 이세 황제 3년의 봄이었다. 조고는 승상인 이사까지 모함으로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든 황제를 죽이고 자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해 8월의 기해일, 조고는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신들과 황제를 시험했다.
그는 사슴 한 마리를 몰고 와서 황제에게 바치며 아뢰었다. “폐하, 신이 아주 튼실하고 쓸만한 말 한 마리를 바치겠나이다.”
이세 황제는 의아했다. 그러나 허허 웃으며 말했다 “승상, 그대는 어찌 된 것 아니오. 이것은 사슴이 아니라 말이지 않소?”
황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심하게 노여워하거나 승상을 질타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조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것은 사슴입니까?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미 조고의 전횡을 알고 있는 대신들의 반응은 세 갈래로 나뉘어 졌다. 한 부류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또 한 부류는 말이라고 하면서 조고에게 절대 아부를 했다. 나머지 한 부류는 사슴이라고 하면서 조고의 의견에 반대표시를 했다.
이 일로 조고는 두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는 황제가 자기를 크게 의심하지 않으며 의심하더라도 자기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대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낸 것이었다. 뒷날 조고는 그 자리에서 사슴이라고 말한 대신들을 모두 죄를 씌워 죽였다. 대신들은 그런 조고가 무서워 모두 숨을 죽이며 충성을 다 하는 모습을 보였다.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候群臣皆畏高. -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을 지록위마(指鹿爲馬)라 하였다. 이 지록위마 사건 이후 조고는 완전히 자기 세상이 된 착각에 빠졌다. 이를테면 권력이란 야망 속에 숨겨진 자아도취란 꽃뱀에 빠진 것이었다. 그는 그 꽃뱀에 빠져 끊임없이 권력을 농락해 갔다. 조정의 권력이 이렇게 농락되는 사이에 관리들의 수탈은 점점 심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져 갔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곳곳에서 도적이 들끓었고 반란이 일어났다. 조고는 관동의 도적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말하며 황제를 기만해 갔다. 그러나 항우가 거룩의 교외에서 황리(王離)를 사로잡고 진격을 계속해오자 상황은 급변했다. 명장 장한 등의 부대는 패퇴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장한은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연․조․제․한․위의 제후들은 각기 봉기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함곡관 동쪽 지방 백성들도 제후들에게 호응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패공(沛公, 훗날 한 고조)인 유방이었다. 유방은 봉기한 제후들과 민중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진격해 왔다. 그는 함양에 인접한 무관을 함락시키고 조고에게 은밀히 사자를 보내어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고는 황제의 책임 추궁이 두려워지자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어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음모를 꾸며 황제를 죽이고 자기가 옥새를 거머쥐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를 따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시황제의 형의 아들인 자영을 황제에 올리고 다시 자영을 능멸하려 했다.
그러나 자영은 즉위하고 닷새 되는 날 두 아들과 모의하여 조고와 일족을 처형했다. 그로써 환관 조고의 국정 농단 사건은 끝이 났지만, 진나라는 이미 회복 불능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교활한 충성자가 자기에게 반대할 수 있는 자들을 골라내어 미리 처단하기 위해 벌이는 교활한 수법이지만 오늘날도 유효한 고사이다. 절대 권력 앞에서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른 것이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진실을 왜곡한 극도의 아부와 권력을 보존하고 살기 위한 위장된 충성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는 그 충성심에 몰입하고 감동하게 된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할까?
우선 충성심이라는 것을 보자. 충성심은 진실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하는 충성심이 있고 자기의 권력과 지리를 보존하기 위해 하는 아부하는 충성심이 있다. 그리고 그 아부하는 충성심의 이면에 권력을 향한 엄청난 야망의 이빨을 숨긴 권력적 자아도취란 꽃뱀의 음모를 숨긴 교활한 충성심이 있다. 진실한 충성심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아부하는 충성심은 권력자의 비위만 맞추며 아부한다. 꽃뱀의 야망을 숨긴 교활한 충성심은 거기다가 한발 더 나아가 절대 권력자가 지향하고 그 비위에 맞는 책략을 제안하며 그의 권력을 점점 더 광기로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권력을 무너뜨리고 자기가 차지하려고 한다. 조고가 바로 그 세 번째 유형이다. 진시황은 조고에게 그런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으며, 2세 황제는 조고에 의해 황제가 된 후 조고의 교활한 충성심과 자기 권력에 도취하여 조고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면 왜 그런 아부하는 충성자, 꽃뱀과 같은 야망을 숨긴 교활한 충성자가 활개를 칠 수 있을까? 그것은 순전히 절대 권력을 지닌 최고 통치자의 몫이다. 최고 통치자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고 나서 자기의 권력을 세워준 충성자들에게만 의존하면 그 충성자들은 점점 자기 권력을 강화하여 나중에는 남용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가 그 충성심에만 의존하면서 자기 구미에 맞는 정치에만 몰입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과정에서 진언하는 충신은 떠나거나 입을 다물고, 아부하고 교활한 자만 곁에 남아 더욱 아부와 교활함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 권력자는 그들의 충성심이란 꿀에 취하여 그들을 충신이라 여기며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절대 권력자의 귀와 눈은 멀어 가고 그 과정에서 그 교활한 자들은 자기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해 간다. 그런 상황이 되면 지록위마(指鹿爲馬)와 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권력이든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곁에 없고 그 권력자가 하는 일에 ‘옳습니다 (YES)’만 일삼는 자들이 들끓으면 그 권력은 이미 부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시행하는 정책은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다. 권력의 독점과 절대 권력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와 같으며 브레이크가 파손된 기관차와 같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 비난하며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도 대통령이 그 아부하고 교활한 충신들에 둘러 쌓여 대통령의 정치에 진실한 마음으로 ‘아니오(NO)’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은 늘 폭주를 낳는다. 그리고 그 폭주를 위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무리 역시 대단히 위험한 족속들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입법의 독주를 자행하는 무리들은 모두 올곧은 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일 수 있다.
권력이 건강 하려면, 권력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삼권분립이란 제도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삼권분립이 형식상의 삼권분립이기에 명목상의 민주주의이지 권력은 집중되고 독점되어 독재란 절대 권력이 나타나 군림한다. 건강한 권력 앞에는 ‘옳습니다 (YES)’ ‘아니오(NO)’가 구애 없이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권력자는 자기 주변에 ‘아니오(NO)’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을 심어 둔다. 그들은 저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말하는 악마의 대변인(아니오, 즉 NO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이며, 이 악마의 대변인을 잘 활용한 인물이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집권 초반에 독단적 의사결정으로 대외 정책에 대실패를 맛보고 난 후, 악마의 대변인을 잘 활용하여 최선의 의사결정을 도출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것이 유명한 쿠바 봉쇄 사건(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7월)이었다. 케네디는 젊은 나이에 짧은 정치 이력을 가지고 짧은 기간 대통령을 했지만, 미국 역사상 길이 남는 위대한 대통령이 된 것이었다.
모든 권력자는 권력을 잡고 나면 주변에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만 남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의 창출에 공헌한 충성자들은 항상 그 곁에서 함께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의 구미를 맞추고 권력을 신성시하려 한다. 그렇게 될수록 권력자는 구중궁궐에 갇히고, 정치와 정책과 권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십상시가 나타나게 되고 그 십상시들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교활함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권력자는 인재를 다양한 영역에서 고르게 구하며 측근에 의해 보호되지 않으려 한다.
최근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준석을 내치기 위해 벌이는 ‘국민의 힘’의 내홍은 보아주기 힘이 든다. 윤석열 대통령 주변의 ‘윤핵관’을 둘러싼 이준석 대표와 갈등을 빚고 있는 ‘국민의 힘’의 실상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 실체를 은밀하게 들여다보면 권력이 가진 다양한 속성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면모에 대한 여러 상황이 보인다. 며칠 전 이준석은 ‘국민의 힘이 박근혜 탄핵 당시보다 더 위험하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자기를 배척하는 국민의 힘 관계자들을 향해 주먹을 거세게 날렸다.
이준석은 대구의 김광석 거리, 김광석 동상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여러 고사성어를 동원하며 자기의 입장과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자성어만 보면 흥분하는 우리 당의 의원들 중에서 작금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지록위마’라고 했다.
그는 “윤핵관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을 때 왜 초선 의원들이 그것을 말이라고 앞다투어 추인하며 사슴이라고 이야기한 일부 양심 있는 사람들을 집단 린치하는가? 초선이라서 힘이 없어서 그렇다는 비겁한 변명을 대구에서는 앞으로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하며 비대위 전환에 앞장선 TK 지역 초선 의원들을 저격했다.
어쨌든 지금 국민의 힘에서 비상대책위원회의 출범에 동의하는 의원들이 이준석의 말처럼 지록위마에 빠졌는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권력 투쟁임에는 틀임없다. 분명한 것은 ‘국민의 힘’ 내홍에서 이기면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지면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퇴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조고가 자행한 지록위마(指鹿爲馬)와 비슷한 사건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곳곳에서 발생하였으며 그때마다 나라는 흔들리고 권력은 무너졌다. 역사가 보여주는 절대 권력자 앞에 절대 충성자는 항상 꽃뱀과 같은 교활한 야망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권력자들은 절대 충성과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위험에 빠지고 있다.
▶️ 十(열 십)은 ❶지사문자로 什(십), 拾(십)은 동자(同字)이다. 두 손을 엇갈리게 하여 합친 모양을 나타내어 열을 뜻한다. 옛날 수를 나타낼 때 하나로부터 차례로 가로줄을 긋되, 우수리 없는 수, 다섯은 ×, 열은 Ⅰ과 같이 눈에 띄는 기호를 사용하였다. 나중에 十(십)이라 썼다. ❷상형문자로 十자는 '열'이나 '열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十자는 상하좌우로 획을 그은 것으로 숫자 '열'을 뜻한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十자를 보면 단순히 세로획 하나만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나무막대기를 세워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이렇게 막대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숫자 10을 표기했었다. 후에 금문에서부터 세로획 중간에 점이 찍힌 형태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十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十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모양자 역할만을 할 뿐 의미는 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十(십)은 ①열 ②열 번 ③열 배 ④전부(全部), 일체(一切), 완전(完全) ⑤열 배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해 가운데 열째 달을 시월(十月), 충분히 또는 넉넉히로 부족함 없이를 십분(十分), 어떤 분야에 뛰어난 열 사람의 인물을 십걸(十傑), 보통 4km 거리를 십리(十里), 사람이 받는 열 가지 고통을 십고(十苦), 열 살로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소년층을 십대(十代), 썩 잘 된 일이나 물건을 두고 이르는 말을 십성(十成), 오래 살고 죽지 아니한다는 열 가지 물건을 이르는 말을 십장생(十長生), 실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켜 놓는 수를 일컫는 말을 십자수(十字繡),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뜻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여러 번 계속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면 기어이 이루어 내고야 만다는 뜻의 말을 십벌지목(十伐之木), 열 사람이 한 술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을 분량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돕기는 쉽다는 말을 십시일반(十匙一飯),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란 뜻으로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이 된다는 뜻으로 거의 다 됨을 가리키는 말을 십중팔구(十中八九), 열 번 살고 아홉 번 죽는다는 뜻으로 위태한 지경을 겨우 벗어남을 일컫는 말을 십생구사(十生九死),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십목소시(十目所視), 십년 동안 사람이 찾아 오지 않아 쓸쓸한 창문이란 뜻으로 외부와 접촉을 끊고 학문에 정진함을 비유하는 말을 십년한창(十年寒窓), 열흘 동안 춥다가 하루 볕이 쬔다는 뜻으로 일이 꾸준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중간에 자주 끊김을 이르는 말을 십한일폭(十寒一曝), 오래 전부터 친히 사귀어 온 친구를 일컫는 말을 십년지기(十年知己),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성격이나 사람됨이 제각기 다름을 일컫는 말을 십인십색(十人十色) 등에 쓰인다.
▶️ 常(떳떳할 상/항상 상)은 ❶형성문자로 㦂(상)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건 건(巾; 옷감, 헝겊)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尙(상; 더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도리에 입는 속바지 위에 받쳐 입는 긴 치마라는 뜻에서 길다, 전(轉)하여 오래 계속하다, 항상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常자는 ‘항상’이나 ‘일정하다’, ‘변함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常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巾(수건 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常자는 본래는 ‘치마’를 뜻했던 글자였다. 그래서 常자는 집을 그린 尙자에 ‘천’이라는 뜻을 가진 巾자를 결합해 집에서 항시 두르고 있던 옷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집에서 항시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항상’이나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尙자에 衣(옷 의)자가 더해진 裳(치마 상)자가 ‘치마’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常(상)은 ①떳떳하다 ②항구(恒久)하다, 영원(永遠)하다 ③일정하다 ④범상하다, 예사롭다, 평범하다 ⑤숭상(崇尙)하다 ⑥(변함없이)행하다 ⑦항상(恒常), 늘, 언제나 ⑧늘 ⑨일찍이(=嘗), 애초에 ⑩도리(道理) ⑪법도(法道), 규율(規律), 통례(通例) ⑫평소(平素), 평상시(平常時) ⑬범상(凡常) ⑭길이의 단위(單位) ⑮천자(天子)의 기(旗) ⑯나무의 이름 ⑰땅의 이름 ⑱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떳떳할 용(庸), 떳떳할 이(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눌 반(班)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을 상임(常任), 항상 살고 있음을 상주(常住), 두루 많이 있는 일을 상례(常例), 늘 준비하여 둠을 상비(常備), 늘 고용하고 있음을 상용(常傭),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근무함을 상근(常勤),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을 상태(常態), 임시가 아닌 관례대로의 보통 때를 상시(常時), 일반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을 상식(常識), 날마다 보는 업무나 보통 업무를 상무(常務), 떳떳하고 바른 길을 상궤(常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설비나 시설을 갖춤을 상설(常設), 늘 하는 버릇을 상습(常習),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 또는 맡은 사람을 상임(常任),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심상(尋常), 내내 변함없이나 언제나 또는 자주나 늘을 항상(恒常), 날마다 또는 늘이나 항상을 일상(日常),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정상이 아닌 상태나 현상을 이상(異常),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특별하지 않고 예사임을 통상(通常),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범상(凡常), 괴이하고 이상함을 괴상(怪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인정 또는 생각을 이르는 말을 인지상정(人之常情),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만년이나 오래도록 항상 푸르다는 뜻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말을 만고상청(萬古常靑),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반복무상(反覆無常), 열에 아홉이란 뜻으로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이 된다는 뜻으로 거의 다 됨을 가리키는 말을 십상팔구(十常八九) 등에 쓰인다.
▶️ 侍(모실 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물건을 꼭 간직하고 있다는 뜻을 가진 寺(사)로 이루어지며 귀인(貴人)의 바로 옆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 그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侍자는 '모시다'나 '받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侍자는 人(사람 인)자와 寺(절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寺자는 사람의 발을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寺자가 높은 분을 모시며 나랏일을 했던 관청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이렇게 높은 분을 모시는 관청을 뜻했던 寺자에 人자를 결합한 侍자는 '높은 분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고대에는 왕 곁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을 뜻했다. 그래서 侍(시)는 ①모시다, 받들다 ②시중들다 ③기르다, 양육하다(養育--) ④부탁하다(付託--), 믿다 ⑤기다리다, 대기하다(待機--: 때나 기회를 기다리다) ⑥권하다(勸--) ⑦맡다, 관장하다(管掌--: 일을 맡아서 주관하다) ⑧진언하다(進言--: 윗사람에게 자기의 의견을 말하다) ⑨따르다, 수행하다(隨行--: 일정한 임무를 띠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다) ⑩이르다, 임하다(臨--: 어떤 장소에 도달하다) ⑪시중드는 사람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 로는 陪(모실 배), 반의어로는 尊(높을 존, 술그릇 준) 등이다. 용례로는 몸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여자를 시녀(侍女), 임금을 모시어 호위함을 시위(侍衛), 곁에 모셔 시중드는 계집종을 시비(侍婢), 귀인의 옆에서 시중하는 동자를 시수(侍豎), 웃어른을 모시고 섬을 시립(侍立), 친히 모시는 사람을 시자(侍者), 귀인을 모시는 첩을 시첩(侍妾), 어른이 식사하는 데 곁에 모시고 섬을 시반(侍飯), 부모를 모시어 받듦을 시봉(侍奉), 임금 옆에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시신(侍臣), 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을 시묘(侍墓), 환자를 보살펴 돌보고 그의 시중을 드는 일을 시질(侍疾), 귀인에 딸려 그 밑에서 잔심부름하는 아이를 시동(侍童), 병자 곁에서 시중 드는 일을 시병(侍病), 스승을 모심을 시사(侍師), 웃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을 시생(侍生), 웃어른을 모시고 음식을 먹음을 시식(侍食), 시중을 들며 봉양함을 시양(侍養), 웃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심을 시음(侍飮), 인질이 된 아들을 시자(侍子), 나이 많은 어버이를 보양하는 사람으로 국역을 면제 받던 사람을 시정(侍丁), 어른을 모시고 앉음을 시좌(侍坐), 부모나 조부모를 모시는 사람을 시하(侍下), 당신을 모시는 몸이라는 뜻으로 어버이와 비슷한 나이의 어른에게 쓰는 글월에 자기 이름자와 함께 쓰는 말을 시하생(侍下生),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처지를 이르는 말을 노친시하(老親侍下),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를 이르는 말을 편모시하(偏母侍下), 홀로 된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처지를 이르는 말을 편친시하(偏親侍下), 일흔 살이 넘는 부모를 모시는 처지를 이르는 말을 독로시하(篤老侍下), 어버이를 모시는 몸 또는 편지에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쓰는 말을 시봉체후(侍奉體候), 엄한 아내를 모시는 그 아래라는 뜻으로 아내에게 쥐여사는 남편의 처지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을 엄처시하(嚴妻侍下), 임금을 호위하던 신하를 이르는 말을 시위지신(侍衛之臣)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