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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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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은 아주 가까이 너희의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이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로 만물 가운데 으뜸이시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제2독서).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응답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느 겨울,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길에,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행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괜한 참견으로 일정에 방해를 받을까 봐 안타까운 마음만 지닌 채 그냥 지나치려는데, 오지랖 넓은 동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출동 부탁드립니다.”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는 뜻인데, 통념으로는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참견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꼭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왠지 사제와 레위인이 이해되고 때로는 그들을 변호하고 싶어집니다.
그때는 하느님께 드릴 제사와 성전 봉사 때문에 너무 바빴을 것이고, 시간이 여유로웠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과연 그러하였을까요?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을 향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점점 지나치는 것이 많아지고, 참견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아집니다. 손수건을 떨어뜨린 앞 사람에게도, 어느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의 숨 가쁜 소리에도 도무지 무심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고, 그냥 지나쳐 가다가도 마음이 쓰여 되돌아가는 선택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오지랖’,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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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율법 학자들은 어디까지를 이웃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만이 이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이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더 이상 출신 성분이나 율법 규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웃이고, 자비를 베푸는 이는 누구나 이웃입니다. 그 사람이 원수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학자의 잘못된 이웃 개념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십니다. 어디까지 이웃인지 따지며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이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일부 피조물만의 맏이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일부만이 그분 안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을 향하여 같은 길을 걸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있기에 서로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든 이, 더 나아가 모든 만물이 이웃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어야 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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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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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보스코 성인과 함께 지냈던 청소년들 대부분은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각각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신비스럽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②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③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첫 번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이고, 두 번째의 답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세 번째의 답은 ‘그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도 그렇게 살았기에 수많은 청소년들 각자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완전하게 준비되었을 때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족하나마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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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노래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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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치는 비법을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하며 되물으십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는 그의 답변은 정확했습니다. 영생으로 가는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라.”
영생은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없이는 불가능한 깨달음입니다. 율법 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우리가 자주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 사람처럼 되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버거운 일이라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무척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최고봉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완벽한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랑의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박에 높은 산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잘 대해 주도록 합시다.
교통 체증이 심할 때, 앞의 차가 너무 느리게 가서 계속 다른 차들이 그 앞으로 끼어들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 화를 냅니다. 자기 앞으로 많은 차가 끼어들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차를 향해 욕을 하기도 합니다. 형편없는 운전 실력으로 길을 더 막히게 한다는 말도 합니다.
자기는 잘한다는 ‘우월함’ 환상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운전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향한 ‘뒷담화’ 역시 내가 더 낫다는 ‘우월함’ 환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해보십시오.
“운전을 못 하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인가요?”
“뒷담화로 비판하는 대상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인가요?”
나는 낫고, 상대방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보다 과장하여 터무니없는 헛된 생각을 하는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증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주님께 계속 말씀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 ‘판단’보다 ‘이해’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전개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를 묻지요.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정답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번제물 바치는 것으로만 하느님 사랑을 대신했으며, 이웃 사랑은 동족 사랑에 국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교만에서 벗어나 이웃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나 길에 버려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여관 주인에게까지 부탁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을 외면한 사제나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다(세링그레스).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냈다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참변을 당한 사람들, 혹독한 곤경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르침에 따르면 사목자로서 당장 달려가 구체적인 도움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허락하지 않아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사목자로서 맡은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수도자로서 정주(定住)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하니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제 모습과 죽을 위험에 처한 행인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간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이 어찌 그리 닮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척에 있는 동료 인간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강 건너 불 바라보듯 도외시하면서, 아무리 복음적 사랑의 실천을 큰 목소리로 외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사랑의 성체성사 역시 그것이 전례로만 이해되고 성전 안에서의 예식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 혼자만 요란스런 꽹가리, 속이 텅텅 빈 강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분향이 거룩하고 감성적인 분위기, 자기도취에만 머물러있지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나 나눔, 희생이나 봉사로 건너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큰 의미와 자극으로 다가옵니다. 그에게는 다른 무엇에 앞서 큰 불행 앞에 선 한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한 측은지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가진 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방어하다가 강도들로부터 엄청난 폭력을 당했겠지요. 여기저기 얻어터져 피범벅이 되었고 초주검이 된 상태라 스스로 거동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도 갈 길이 바빴지만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도와주겠지 하고 발뺌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강도당한 사람에 대한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준 것입니다.
참사랑은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입니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되기’는 나에게 ‘권고’인가 ‘법’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28년 미국의 한 부둣가, 산책을 하던 한 남자가 실수로 바다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지점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사람이 도와주었으면 자녀가 살 수 있었다며 그를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도와주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며 그 남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는 이 법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해주어도 자신이나 제삼자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 자는 3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과 360프랑에서 1만5천 프랑(한화 약 40만 원~1,700만 원)까지의 벌금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을 호주와 폴란드, 일본에서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 법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반발 때문에 통과가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 여중생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여중생의 구타 현장을 목격했지만, 오히려 간섭하면 안 좋아진다는 인식으로 인해 방관하였고 피해 여중생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폭행당했습니다. 신고가 늦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수없이 많습니다. 신고만 해 주어도 사람이 사는데 구해주지 않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는 종교인에게만 있습니다.
저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못한 사제였던 적이 많습니다. 사고 난 사람을 전화로 신고만 해주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차에 불이 나거나 그 사람의 출혈이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고만 해 주었으니 할 건 다 했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많이 하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잘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자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아가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소유욕, 성욕, 지배욕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노예 생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도 법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남을 도와줄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 법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은 더 높은 수준의 법이 있습니다. 우물에 빠진 형제를 구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자녀를 부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권고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가 아닙니다. 법입니다. 법이 아니면 우리는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자아는 ‘법’이고 그 법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의 명령은 ‘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저 법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법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권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권고로는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입법자로서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벌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해리 포터 – 비밀의 방’(2010)에 도비라는 집 요정이 나옵니다. 도비는 사실 좋지 않은 주인에게 속해있습니다. 아무리 해리포터를 도와주려고 해도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도비는 주인에게 새로운 옷을 선물 받았을 때는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해리포터는 자신의 양말을 주인 것으로 속여서 선물합니다. 그리고 도비는 말합니다.
“도비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해리포터를 도와줍니다. 이상하게 자유라고 하면서 해리포터를 섬깁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법을 해리포터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리포터를 구하려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입고 더는 돈과 쾌락과 명예로 우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주인이 주는 명령은 법입니다. 자아가 우리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속-육신-마귀는 법입니다. 이 법을 누를 수 있는 새로운 법이 아니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법을 이기는 것은 법입니다. 권고로는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권고는 안 해도 되지만 법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나의 법이여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을 때, 나는 지금 이미 천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나의 입법자를 하느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유를 옹호하는 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을 스스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법입니다. 이 법이 없으면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법이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스펨’전화입니다. 한국어는 거의 없고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로 전화가 옵니다. 잘 못 알아듣기도 하지만 받으면 바로 끊어버립니다. 스마트폰을 수리했더니 수리한 내용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한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간단한 줄 알았는데 5분 정도 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항공사에서도 가끔 설문조사를 한다고 문자를 합니다. 대부분 그냥 지나가는데 한번은 설문조사에 응했습니다. 출발시간을 잘 지키는지, 짐 부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지, 게이트에서는 친절했는지, 승무원의 태도는 좋았는지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상담원에 대해서, 설문조사 담당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다음에 할게요. 운전 중입니다. 지금은 바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이 상담원의 전화를 기쁘게 받아 주었다고 합니다. 질문에도 성실하게 응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상담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오랜만에 ‘사람’하고 통화했다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상담원의 이름을 입력해 놓았고, 가끔 상담원이 전화를 하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신문 홍보 때문에 신부님들께 전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제 모임에 가면 홍보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본당은 신자가 적어서 큰 도움이 안 될 겁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저를 걱정해 주는 것인지, 오지 말라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경우는 홍보 약속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한번 연락 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 한번 밥 먹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 종이 신문을 누가 봅니까? 직원들 월급은 줄 수 있나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맛 집을 찾아갔는데 내부 수리중이라는 푯말을 볼 때처럼 허탈하기도 합니다. 미주 지역에 단 하나뿐인 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2022년에 필라델피아의 홀리앤젤스와 홀리메리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버지니아의 성 정 바오로 성당과 워싱턴 디시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뉴저지의 데마리스트 성 요셉 성당에도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기회를 주신 신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레위와 사제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이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여관에 데리고 갔고, 필요하면 치료비를 더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맞습니다. 첫째가는 율법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 이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사랑은 한걸음에 달렸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람
거기 있기에
모두가
그를 본다네
누구는
그를 향하여 한걸음
누구는
그와 반대로 한걸음
누구는
이웃이 되어주고
누구는
이웃을 찾는다네
누구는
사랑을 하고
누구는
사랑을 말한다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강도만나 초주검된 위기의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 이웃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실천해야 할 사제와 레위사람은 이를 보고 못본척 길 반대편으로 지나쳤지만, 여행 중 이를 목격한 한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생명을 보듬고 보살펴 정성을 베풀었다.(루카10,30-35)
시대의 상황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공동체가 세상 속에 위기의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의 사람이 모여있는 세상이 본질과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를 오히려 더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 상황에 반토막난 교회는 회복이 어렵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강도만나 초주검된 사람을 보고도 길 반대편으로 지나쳐버린 사제나 레위인의 무관심한 마음을 세상이 읽은 것이다. 오히려 교회 밖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헌신과 수고가 교회 몫을 대신하며 세상을 살리고 있었다는 판단이 정확하다.
우리는 코로나 이후 종전대로 복구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복구를 생각하기 보다는 진정한 자기 반성과 결연한 쇄신의 의지가 먼저 필요하다. 세상은 교회를 떠나 탈종교화의 속도를 내고 있고, 교회내 신심깊은 신자들 속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사제들의 쇄신을 촉구하며 미래의 성직자들을 걱정한다.
강도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것을 교회구성원, 특히 사제들이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까이 다가가야 함을, 길 반대편으로 가는 안이한 발길을 주님께로 돌리는 쇄신의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마음이 새겨 살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뺏기고 초죽음이 되었는데, 사제도 그를 보고 지나가 버렸고, 레위인도 지나가버렸지만,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는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다시 율법교사에게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를 물으셨고 그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나오는 세 명의 이웃, 곧 사제와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는 정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자 당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러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러한 율법을 뛰어 넘어서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오늘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경우는 정말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는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율법을 넘어서서 사랑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정말 어려운 순간에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게 이익이 되기 위해, 내가 외롭지 않고 즐겁기 위해, 내가 인정받기 위해. 내가 인간적으로 더 안락하게 살아가기 위해 서로 연합하고 서로 거래하곤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계모임을 하는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전하는 이웃은 내가 손해를 봄에도 불구하고, 내가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내가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록 다른 이들로부터 욕을 먹는다 하더라도 함께해 줄 수 있는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진정한 사도들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그것이 바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도들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에서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역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이에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모습의 삶이 아버지인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지 알려주십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 외친다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필요한 것은 단 하나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여러분들은 이해타산을 따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리에 구걸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은 구걸하는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관가해서는 않되는 것이 있습니다. 설령 구걸을 하는 사람이 가짜라 해도 우리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단돈 1000원이라도 주었다면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선행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교회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봅시다. 물론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권력 다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혹은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사람들을 배척합니다. 그것도 교회 안에서 말이지요. 제가 있는 작은 교회에서도 서로 겉으로는 웃고 지내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용서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용서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용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시간의 문제이지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사제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심으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 자신의 감정은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은 평소에 이방인이라고 멸시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이방인이라고 멸시를 했던 사람을 자신의 돈을 사용해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낌없이 주는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에 부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보다 더 많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오늘도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이근상 시몬 신부님
'가엾은 마음'의 복음적 의미: 그건 어떤 상황 앞에서 퐁퐁퐁 솟아나는 마음이 아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다인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올라오는게 아니라 당해야 할 놈이 당하는 사필귀정의 온당함이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스플랑크니조마이; '스플랑크나'는 내장기관을 뜻하는데 심장, 폐, 간, 신장을 뜻하고 인간의 감정이 거기에 담겨있다고 여겼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자신의 역사, 곧 상처와 애착의 노예가 되도록 강팍하게 움켜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놓아주었다는 것. 원수에게서도 불쌍함을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한 상태. 그리고 가엾은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주며 돌보는 것.
그러니 가엾은 마음, 복음적 연민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상처를 거슬러 하늘을 우러르며 사람을 보는 감정이며, 구체적으로 한걸음 나가는 투신.
'agere contra(거슬러 행하라)'; 민신부님이 가르쳐준 말씀. 연민의 참 내용.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한때 우리는 어렵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치 못해서 이래저래 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옷은 매일 남의 것을 대물려 입고, 고기도 명절이나 기제일이 되어서나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콩 한 톨도 칼로 잘라 나눠 먹으면서 우애를 키우며 자라났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천주교회 사회복지사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 선조들은 성당을 짓기도 전에 먼저 양노원이나 고아원, 시약소(초기 보건소)를 먼저 지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했고, 가난했지만 그나마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삶으로써 나름 행복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다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싸놓고 있다가 상해서 버리기까지 합니다. 부부가 맛벌이를 해도 남는 돈이 없다고들 하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랴 유학보내랴 엄청난 돈을 퍼부어 넣고, 정작 부모는 휴가 때 어디 가질 못해 성당에 옵니다. 도로는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고 노는 날이면 유원지마다 인산인해입니다. 비행기는 늘 만석이며, 관광지 곳곳의 숙박업소는 꽉꽉 찬다고 합니다.
현대는 삶의 질의 향상과 소비성향의 다양화와 고급화로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가지로 풍족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풍족해 졌으면서도 덜 행복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기회적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더 먼저, 더 좋은 것을 갖고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함과 박탈감이 우리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유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루카 10,28) 라고 으쓱대며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자, 그가 다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몸마저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한 사제가 그 곁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마주치고는 길 반대쪽으로 멀찌감치 지나가 버립니다. 사제는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지, 교리를 가르치러 가야 하는지, 면담을 하러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종교 일정에 맞추느라 그런지 몰라도, 마치 강도 만난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에게 해라도 끼칠까 걱정스러운지 멀리 돌아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유다인의 사제 지파라고 하는 레위인 역시 그 곁을 지나가다가 멀리서 그를 보고는 피해갑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그를 보기는 하지만, 선뜻 나서서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마치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처럼, 어느 누구 하나 찾아와 ‘많이 아프냐?’고 걱정스런 말 한마디 내 걸어주지 않고, 누구 하나 어루만져주지도 않은 채, 이러 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인생에 빠져, 어려운 이웃은 돌봐줄 틈 없이 지나쳐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 때, 평소에 유다인들과의 관계에서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는 그를 바라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몸에 손을 대며 그의 상처와 고통의 정도를 살핍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줍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가 간호해 줍니다. 밤새 그를 돌보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자기,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맡기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자기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까지 호의를 베풀며 자기 길을 떠납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는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율법 교사는 부끄러이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ㄴ)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마냥, 어려운 사람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사람이 등장했을 때, 자기가 아는 대로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가 버립니다. 어쩌면 율법 교사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르지 않았는가 봅니다. 그가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다음에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으쓱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강조하는 가난은 곧 이웃에게 나눠줌으로써 가난해지는 선택한 가난, 다른 말로 이웃 돕기로 말미암아 없어진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가난해져야 합니까? 교회는 나와 내 가정의 오늘과 내일의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여유를 남겨놓고 나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민족과 사회의 형편에 비추어 각자가 정합니다.
이웃 돕기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또 교회 내에 부자가 많아져야 합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기에 더 잘 도와줍니다. 아니 동감하고 동정하기에 누구보다 먼저 나누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 따져보면, 미래를 위한 저축은커녕 오늘 나 살기도 빠듯한데 이웃과 나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누는 것만큼 아니 어떤 때는 물질뿐만 아니라, 나누는 기쁨과 보람까지 합쳐 10배 이상을 다시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믿음을 통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다섯 번째 행복을 자기 성취와 실현 너머의 나눔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눔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나눔입니다. 없던 것이 들어와서 기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자신을 나누는 그 형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또 기쁘고 행복합니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이 성서 구절을 통해, 교회는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데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가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당대 재산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상태를 미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통해 가난을 찬미하면서,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터이니 지금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고 노동자들을 호도한다는 평가와 그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833년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6명의 동료 대학생들은 이 구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제공해주자고 나섰고, 그로부터 성 바오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설립되어 오늘날 전세계 교회의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을 외면하게 된다면, 또 다시 세상은 교회에게 도전해 올 것이며, 우리가 듣고 나누고 믿는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위선과 방해물이라고 평가하고 단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2의 니체와 제3의 니체가 나타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난은 비단 물질적인 결핍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인간 삶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을 가난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불안정과 외로움, 사회적인 소외와 고립, 제도적으로 제한된 기회와 정보, 물질만능주의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가중시키고자 하는 큰 손들의 횡포, 전통문화와 가치의 몰락과 편중 등등의 어려움에서 헤매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기쁨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를 발견하고, 다음 기회나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향한 측은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어려움을 보듬고 싸매어 돌보는 모습입니다. 누가 가난한 이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그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어려운 이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며, 주님과 나와 어려운 이와의 삼위일체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공유하며, 어려운 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녀)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자신이 한 조치와 행위가 주님 사랑 안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께서 몸소 함께해주시라고 청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일 어려운 이에 대해 조사하고 심사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일에 그친다면, 우리는 사회복지사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방법론은 먼저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며,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간직한채 그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삶과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며 함께함으로써, 주님께서 몸소 그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는 주님의 사도가 취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눈에 어려운 이들의 모습을 띄게 하고, 우리 귀에 어려운 이들의 호소를 들리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려운 이를 맡기시는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발견하고 경험하는 어려운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고 기도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의 나눔을 이어갑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생하려면 하느님 섬기고 이웃 사랑 하랬는데,
누가 저의 사랑할 이웃인지 꼬투리 잡으려고 시험문제 던졌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 예를 드시며 다시 문제를 내셨습니다.
사제나 레위인 같은 지도급들은 피했고 이방인은 잘 보살폈다했어요.
율사는 이방인이라며 정답을 말했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오늘도 그 답 그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실 겁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대인관계 참 좋고 멋있다 봅니다.
그런데 인간세상 보면 나는 살고 너는 죽으라는 것처럼 살지 않나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단순하게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가장 중요한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며, 그 계명은 높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계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고 내가 실천하려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지키며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신명 30,11-14).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단지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만은 아니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항상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의 체험은 이 어려운 계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만 주실 뿐 아니라, 실천할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콜로 1,15-20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찬가를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서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15절),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까지도 보여주는 완전한 하느님의 표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마음 그 자체로부터 사랑의 샘이 솟아올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수의 인격과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제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그 계명을 항상 실천하여야 한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구약에서 이웃이란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을 말하였다(레위 19,33-34).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집단의 그룹의 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듯이 축소되었다. 예를 들면, 바리사이, 에세네파, 열성당원, 헤로데 당원 등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테두리를 없애시면서 사랑의 개념을 무한히 확대하신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어떻게 만나든지 간에 그를 만나게 된 사람 모두에게 이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30-35절)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그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사마리아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유다인들에게 괄시를 받는 사람이었기에 그 강도 사건에 말려들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서 쓸 수도 있었지만,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주며, 자기 일처럼 처리한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더는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35절). 참으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애쓰는 분이다.
이 역할 분담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명백한 어떤 쟁점이 있다.
1.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형식주의적인 전례, 결실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신다. 구원을 위해서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구원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사제와 레위인의 잘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두 계명 사이의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일치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데 있다.
2. 선을 어떤 일부 사람들에게만 편중시키는 사회적 종교적 차별주의와 민족적 편견을 반대하신다. 유다인들에게는 외국인이며,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지 못한 사랑의 행위를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실천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선은 국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하게 되는 낯선 모든 처지에서 창조적 능력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 했듯이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대하셨다.
이 비유는 실제로 아주 지극히 실천적인 어조로 끝을 맺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6-37절).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비유는 상처 입은 사람이 반쯤 죽어, 길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웃에 대해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가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즉 목전에 두고서도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참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비록 하느님의 드높은 성전에서 내려오시지만, 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던 그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폭발적인 힘을 찾게 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는 마지막 말은 이 사랑의 실천이 다시는 생각으로나 시도해불 수 있는 비현실적이거나 공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역사와 체험 즉 우리 모두를 위해 자유롭고 인정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신(요한 8,48) 그리스도의 역사를 다시 시작게 한다.
영원한 생명의 사랑.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33년전 1989년 7월 16일, 제가 신림동 본당(서원동) 사제서품후 첫미사가 바로 오늘 제15주일 다해 미사였습니다. 이때 제가 한 강론 제목은 “사람이 되는 길”이었고 마지막 인용했던 김준태 시인의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의 강론 끝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땅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비가 내리면
땅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하늘과 땅바닥을 보지 않으면
날마다 보지 않고 살아가면
사람 몸뚱이는 총알이 돼버립니다
사람 몸뚱이는 짐승이 돼버립니다
두 눈에 하늘을 넣지 않고
가슴에 풀꽃 향기를 넣지 않으면
사람 목숨에도 늑대의 피가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제 우리는 제발!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됩시다”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땅바닥을 보면서 목숨 받아 함께 사는 이웃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웃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짐승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서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제서품후 만33년! 말그대로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예수님께 대한 물음은 아득한 2000년전 사막 수도자이후 오늘까지 하느님을 찾는 우리 구도자들의 근본적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사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의 사랑은, 진리는, 하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1.자주 고백성사를 보러 오는 착한 분에게 드린 격려가 제게는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죄도 은총이네요. 이렇게 죄를 지을 때 마다 주님을 자주 찾아 뵙게 되니 주님과 날로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이렇게 자주 주님을 찾아뵐 수 있겠습니까?”
격려 말씀드리며 새삼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 고마운 평생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중요한 인간사 일이라 하여 세가지 크고 중요한 일이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입니다.
2.어제 강론 쓸때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제게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의 경고였습니다.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거의 완성에 이르던 강론이 순간 컴퓨터가 작동을 멈춰 다시 시작했을 때 입력되지 않은 강론은 완전히 날라가고 만것입니다. 순간 손이 후둘후둘 떨렸습니다.
강론이 너무 길으니 다시 좀 짧게 쓰라는 주님의 사랑의 경고임을 깨닫고 다시 쓰기 시작하여 4시쯤 끝나니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이 또한 어제의 잊지 못할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3.요즘 수도원 경내의 성모자상聖母子像 앞에 참 오랫동안 피어있는 ‘첫사랑’ 꽃말을 지닌 아자리아꽃입니다. 이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멈춰 성모님과 예수님께 아자리아꽃처럼 첫사랑을 고백하며 심기일전 사랑의 여정을 살아가게 됩니다.
4.또 하나의 사랑 체험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벌써 세 번째입니다. 침방의 베개 커버가 말끔히 바뀌어져 있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바로 원장수사가 제가 없는 동안 세탁해다가 놓는 것을 외출후 돌아왔을 때 발견했고 어제 또 세탁하여 전해 줬으니 무려 3회입니다. 사랑의 행위에 감동했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서로 함께 사랑하며 살라고 공동체 삶임을 새롭게 공부했습니다.
첫째, 찬미합시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자 체험입니다. 누구나 가까이서부터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하는 찬미의 시간, 찬미의 사랑입니다. 찬미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맛을 체험합니다. 찬미의 맛, 하느님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과 기꺼이 화해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로 초대교회 신자때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고백하며 불러온 콜로새서의 참 아름답고 깊은 그리스도 찬미가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매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벅찬 감동의 노래 기도로 바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를, 미사를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사랑의 표현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는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의 우물이 됩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할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이중계명을 확인, 상기시킵니다. 멀리있지 않고 바로 가까이 있는 영원한 생명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상기시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온힘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 비로소 참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진짜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처방도 이 사랑뿐입니다. 누구나 가까이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그러면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가까이 곤궁중에 있는 이웃에 사랑을 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바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또 초주검이 된 사람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곤궁중에 있는 이웃을 구하시는 주님이자 수난受難을 받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곤궁중에 있는 이웃을 살리는 것은 바로 주님이 되어 주님을 살리는 역설적 사랑의 신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가엾은 마음에 초주검이 된 이웃을 살린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자비를 행하며 살라하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결론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셋째,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말이 아니라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께 돌아와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고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습니다.
사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당장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요 말씀을 가까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천과 더불어 운동 실천을 권합니다. 몸이 있고 건강해야 기도도, 사랑도, 말씀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마르틴 아빠스님이 당신의 노하우, 건강 비법秘法 운동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아기들처럼 틈틈이 “도리도리 잼잼”, 끊임없이 목운동과 손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와 이 “도리도리 잼잼” 운동이 영육靈肉의 건강 비법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찬미는 사랑은 실천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듯이 하느님 찬미도, 하느님과 이웃 사랑도, 말씀 실천도 한 삶의 끈에 꿰어야 보배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한결같이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우리 사랑을 북돋웁니다.
“없는 자들아, 주님을 찾으라. 너희 마음은 살리라.”(시편60,33). 아멘.
마음으로 가는 길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키엣 대주교님
영원한 행복,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염원은 시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을 만큼 얻어맞아 길가에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사제가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피해서 지나갔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그에게 붕대를 감아주었고 뿐만 아니라 여관으로 데려가 여관 주인에게 그가 회복될 때까지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주고 떠났다.”
예리코로 가는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험난한 길입니다. 언제나 강도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위협하고 시련에 빠뜨리는 험한 길이지만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타인을 보는 세심함, 타인을 보는 배려심
말을 타고 급히 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걸어가던 사제와 레위인은 쓰러진 사람을 지나갔음에도 그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보고 들었지만 닫힌 마음이 그를 향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도와주다 피라도 묻게 되면 미사를 올리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시끄러운 소음 속에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눈과 귀가 아닌 마음, 즉 사랑의 마음으로 보고 들었습니다. 세심한 사랑의 마음과 열인 귀가 있었기에 신음하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타인을 향한 열려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주님은 신기하도록 밝은 눈을 주셨기에 다른 사람의 심연에서 흘러 나오는 아픔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가가는 관심
관심은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관심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관심을 갖고 쓰러진 사람을 보자 즉시 다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관심은 다른 사람을 보살펴 줄 붕대와 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술은 모르지만 보살펴 주려는 마음으로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노새 등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다 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관심이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질 때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나와 타인을 향한 성실한 마음
성실함은 피곤하다고 그만 두지않고 끝까지 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바쁜 사마리아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그를 끝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떠나야하는 시간이 되자 여관 주인에게 그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다시 돌아와 그가 다 나을 때까지 돌봐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성실한 마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길은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길’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 길을 갈 때만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의 마음이 없기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자비롭고 배려심 많은 성실한 마음을 지닌 사마리아 사람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심 많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지니고 떠나십시오. 마음으로 듣고 마음을 따라 하고 마음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음으로 가는 길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겸손하고 어지신 예수님, 저희가 주님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제와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중 나는 어떤 사람과 비슷합니까?
2. ‘마음을 지니고 떠나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을 의미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가족과 주변에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멈춰서서 돌아보고 고개를 숙여 그를 보고, 돌봐줘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실천해보십시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공통적인 미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무엇을 잃는 것이 가난이라면 죽음은 가장 완전한 가난이고, 어떤 무리에서 멀어지거나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것이 소외라면 죽음은 가장 완전한 소외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여러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망각하고 살려고 하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장례식", "죽음"과 같은 단어 옆에 다른 사람의 사진을 놓으면, 미래를 생각하는 뇌의 부위가 활성화되는 반면, 그 단어들 옆에 자기 사진을 놓으면 활성화되던 뇌 부위가 갑자기 비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죽음"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는 "죽음"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더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장례미사에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참여하지만, 우리나라의 장례식장에서는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또 조선시대부터 조상들은 주자가 지은 "주자 가례"에 따라 장례예식을 치렀는데, 정작 "주자 가례"는 집에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지, 마치 돌아가신 조상들이 아직 묘지에 있는 것처럼, 묘지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멀리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에게 준비된 가장 확실한 미래입니다.
"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엄률 베네딕도 수도회인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매일 이 라틴어 구절을 외우며 묵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공동묘지로 가는 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고 합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지난 3월 아버지께서 죽음의 위험을 넘기시면서, 저 역시 죽음이 상징하는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여도,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인간은 누구나 젊음과 건강을 잃고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 유한함에 대한 묵상은 우리 각자가 누리고 있는 것, 욕망하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소유하고 있는 것, 욕망하는 것은 결국 도구일 뿐입니다. 땅 위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이렇게 끝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세상 삶을 마칠 때, 결국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서 가장 좋은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성경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나의 ‘이웃’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재훈 솔로몬 신부님(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은 신앙을 가지신 분들뿐만 아니라 많은 분에게도 그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비유 말씀에서 우리는 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착한 행실에 관한 내용에 주목하게 됩니다. 분명 그런 의미도 있지만, 우리는 이 복음 말씀의 시작이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드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율법 교사는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적혀있음을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대답에 긍정하시며,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렇게 살도록 격려하시죠.
이 대화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대화의 결론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한 말씀이며, 그것이 결코 우리 삶의 자리로부터 동떨어진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처럼 ‘사실 그 말씀은 너희의 입과 마음’,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매일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주님의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마태 25,40)이 바로 예수님, 당신에게 해준 것과 같은 길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자비를 입고, 목숨을 건진 바로 그 ‘이웃’이 사실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일 수 있는 것이며,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란 참으로 우리 가까이에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던 그 율법 교사는, 마주 보며 질문에 공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을 자신의 ‘이웃’으로 여겼을까요?
오늘 내가 구원에 이르는 삶을 실천할 수 있게 해줄 나의 ‘이웃’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이승환 루카 신부님(교구 복음화국장)
구약 성경에서 ‘의로움’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속성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실 때, 윤리 기준을 세우실 때, 심판하실 때 그 바탕에는 늘 의로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시편 7,7-12; 잠언 8,20; 예레 12,1 참조). 그런데 인간의 의로움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됩니다(시편 31,2; 이사 41,10; 예레 23,5-6 참조).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는 믿음의 태도입니다(창세 15,6; 하바 2,4 참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은, 특히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내용을 실현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로움을 살기 위해 율법을 선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뒤, 이스라엘은 무엇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합당한 것인지 고민했고, 그 결과 수많은 율법으로 재생산되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는 율법에 소홀했던 이스라엘의 자기반성을 위한 시간이었고, 이는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한 율법의 준수를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조금씩 이스라엘의 삶을 옥죄는 심판과 단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만 의지하고 율법이 지향하는 궁극의 존재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주받은 것’이라 비판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의로움의 개념은 신약에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그 의미는 좀 더 확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하느님의 선물인 의로움(마태 5,6; 6,33 참조)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삶의 특성을 의미했습니다(마태 23,38; 루카 18,9-14 참조). 예수님은 인간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 신뢰의 끝을 어리석고 비천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의로움을 완성시키셨습니다(로마 8,3 참조). 그런 예수님과 더불어 바오로 사도는 의롭게 되는 길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로마 1,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삶이 기쁜 소식, 복음이라 했습니다(로마 1,16 참조). 사랑하는 이들 안에 무모하게 의탁하며 무엇이든 내어주려는 믿음 안에 의로움은 싹트고 완성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사 11,6),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비천한 이들까지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세상, 바로 그곳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운 세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 가야 할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1요한 3,10).
함께 사는 기쁨
조경자 마리 가르멜 수녀님(노틀담 수녀회)
저희 밭 중에 참외를 심은 밭은 마치 안식년처럼 많은 작물을 심지 않고, 오히려 자연 농에서 권장하는 짚을 겹겹이 덮어만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끔히 풀이 뽑힌 그런 밭이 아니라, 썩은 짚 사이로 풀도 자라고 작물도 자라는 그런 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나름대로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마토와 가지가 서로 기대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이는 위로 오르고, 참외는 아래에서 능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은 기댈 말장을 박아주고, 타고 오를 줄을 띄워주면 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재촉하지 않는 공간, 그래서 땅이 쉴 수 있는 터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땅의 회복을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고, 공생의 관계를 깨닫는 자리, 순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벌레가 있고, 또 나비가 날아들어도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가만히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의 교향악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생의 관계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연이 서로에게 허용하는 이 관계, 알고 보면 거류민인 우리조차도 받아들여 준 이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계속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 우리,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물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명을 받은 우리 인류는 지금 본래의 멜로디를 무시하고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과의 협주가 아닌, 저 혼자만의 소리로 자만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른 모든 생명의 노래를 도와달라는 노랫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제 방식의 생명 돌보기에서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신명 30,10-14)는 하느님의 기쁨의 원천은 백성의 돌아섬이라고 합니다.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씀으로서 모압 땅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의미를 확인시켜줍니다(28,69-30,20).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는 일에 축복을 주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번영을 두고 기뻐하시겠다는 데,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설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세는 다섯 번(4,1; 5,33; 8,1; 16,20; 30,16)에 걸쳐서 가르쳐주는 데 오늘 제1독서가 마지막 경고입니다. 하느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율법서에 쓰인 하느님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고 싶다면,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실천해야 할 계명들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람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실천이 가능한 것입니다. 말과 마음과 실천은 인간이 회개하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백성이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도 백성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말라 3,7).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의 이름을 사랑한다면(시편 69.37) 하느님의 말씀을 단지 입으로만 주절거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 6,5)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루카 10,25-37)은 율법교사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영원한 생명”(전반부)에 대한 율법교사와 “유다의 지도자”(18,18-27)의 질문은 율법의 모든 것이 사랑(후반부)으로 집약된 것을 알면서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대해 반문하심으로써 율법교사 스스로 대답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있던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던진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셰마)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고 대답합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율법교사는 함께 붙여서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칭찬으로 시작된 이 말은 너는 율법을 잘 알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으니,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마치 자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슬며시 화가 난 율법교사는 애써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또 질문합니다. 첫째 계명으로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둘째 계명으로 주제를 얼른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교사가 도망칠 틈을 주지 않으시려고 대답 대신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과일과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예리코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과일과 채소를 약 27k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에 가서 팔고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난 것 같습니다 “사해와 예리코의 초원으로 가는 자는 입고 내려가서 벌거벗고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 길은 항상 강도들이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습니다.” “초주검”이란 “반쯤 죽여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 모범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저와 같은 사제는 무자비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무자비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어떤 주검에도 다가가서는 안 된다.”(레위 21,11)는 율법 때문에 반쯤 죽은 이를 보자 모르는 체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간 것입니다. 율법은 남의 짐을 져주는 것(갈라 6,2)인데도 이들이야말로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로마 1,31) 하느님의 말씀에 가장 가깝게 머무르면서 소위 열심하다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과 너무 거리가 멀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마귀 들린 자”(요한 8,48)로 취급하면서 상종하지 않던(요한 4,9)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자비심을 발동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반쯤 죽은 사람의 상처에 당시 치료법에 따라서 기름(세균을 차단하는 막을 형성)과 포도주(알콜로 소독)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기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떠나야 했기에, 이틀 치 품삯(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환자의 이웃이냐?” 하지 않으시고,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쉽게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합니다. 비천한 족속의 대명사로 여겨왔던 사마리아라는 말조차 떠올리기 싫었던 유다인 율법교사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린 대답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율법학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었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음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던 율법교사와 예수님 사이에 이웃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이웃이란 곤경에 처했기에 사랑과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즉시 자비심을 드러내고 그 자비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이웃은 곤경에 처한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사랑을 발생시키는 사람,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내 곁에 이웃으로 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이웃이 되어준 사람, 즉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다 내어주시면서 우리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을 이웃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제2독서(콜로 1,15-20)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업적을 찬미합니다.
바오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가를 읊으면서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세상을 다스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마련해 주셨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켜 주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으로서의 완전한 본질을 충만히 지니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신 사랑의 모범, 우리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을 내어주시고, 매일 성체로 변화되시어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가까운 이웃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이웃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은 항상 가까이 있기에 내가 어려울 때 얼른 달려오는 사람입니다. 이웃은 상처를 주고, 그 상처의 아픔을 후비고 파헤치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감싸주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는(시편 19,8) 사람입니다. 이웃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주는 사람이며, 고통 받는 이들을 멸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이웃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사마리아 사람, 아니 예수님처럼 좋은 이웃이 되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미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거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보십시오. 이것을 명령하시는 분은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면서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이웃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참된 이웃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 입에,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만 바꾼다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눈보라가 매섭게 치던 어느 추운 겨울날,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그 두 사람도 너무 지쳐서 탈진하기 직전이었지요. 한 친구는 쓰러진 그 사람을 데리고 함께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그렇게 무리하다가 다 죽는다며 말렸습니다. 결국 만류하던 이는 먼저 떠나버렸고 남은 사람이 쓰러진 이를 들쳐 업고 힘겹게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렇게 겨우 마을 입구에 다다랐는데 먼저 출발했던 친구가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들쳐 업었던 이는 더워서 땀을 흘리고 있었지요. 이웃을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에 자기도 산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나도 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그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사랑의 실천을 마치 영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존재인 내가 나보다 못한 존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만입니다. 누가 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인가를 자기 생각과 기준으로 골라서 내가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베풀고 싶은 만큼만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을 고르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이것저것 비교하며 따지느라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올바른 마음가짐을 알려주시고자 한 가지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길가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고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쳐가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더럽고 부정한 것을 본 사람마냥 길 반대쪽에 바짝 붙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예식을 마쳐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굳이 피 흘린 사람과 접촉하여 부정해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그가 쓰러진 척 위장하고 있다가 행인들을 덮치는 강도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서 헛수고를 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귀찮고 힘든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 험한 세상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현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를 보고도, 그를 돕지 못함을 미안해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 하는 차가운 마음으로 계속 살다가는 라자로를 차갑게 외면하다 그 이름까지 잊혀지고 영원한 고통 속에서 후회하던 ‘그 부자’처럼 되고 말 겁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무시하고 핍박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타인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픈만큼 나도 아프니 도저히 그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해야 해서’ 하는게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어서’ 하는 것이지요. 그는 위험과 수고를 무릅쓰고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 줍니다. 또한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그가 안정을 취하고 쉬어 회복될 수 있도록 돌보아 줍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수중에 있는 돈까지 다 내어주며 여관 주인에게 그를 돌봐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단지 ‘현재’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돕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충분히 회복되어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의 ‘미래’까지 돌보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지 모를 귀찮고 힘든 ‘미래’를 계산해가며 고통을 겪는 이웃을 ‘현재’부터 외면했던 앞의 두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나의 소중한 ‘데나리온’을 일면식 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내어줄 수 있는 큰 배포를 지녔는지, 이웃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함께 걱정하는 깊은 배려심을 지녔는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그저 ‘가엾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할 일을 다 한 것인양 안주하지는 않았는지…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사랑의 조건과 기준을 따지는게 아니라, 먼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이웃’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을 선택적으로 사랑하는게 아니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주체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조건없이 베푸는 참된 이웃이 ‘먼저’ 되어주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선택’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소명’이라는 하느님 중심 사고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걸 ‘소명’으로 알고 기꺼이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하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해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놓치지 않습니다.
고장난 그리스도인
이승현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자동차를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돈이 마련되는대로 자동차를 구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용, 장보기용, 캠핑용, 스포츠카 등 여러 자동차가 생겼습니다. 청년은 그 많은 차 중 스포츠카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차이다 보니 차고에 모셔 두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과 저녁 약속을 잡고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청년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다급함이 가득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큰 사거리에서 차가 멈춰서요. 오늘 저녁은 함께 못할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청년은 그날 스포츠카를 타고 나왔는데 운행을 안 해 엔진 오일이 다 말라버렸던 것입니다. 주행 중에 실린더가 엔진에 붙어 버려 차가 멈추게 된 것이었지요. 그토록 아끼던 스포츠카는 엔진을 교체해야 했고 부담해야 할 비용이 너무 컸던 청년은 고심 끝에 애지중지하던 스포츠카와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계속 세워 두면 고장이 나고 움직일 수 없게 되듯이, 어떠한 사랑의 실천도 없이 매일을 살다 보면 무늬만 아름다운, 고장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무리 잘 안다 해도,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해도,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서서히 굳어 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의 선물을 간직만 하다가는 못쓰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생각만 하지 않기를, 입에만 담고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온몸과 마음, 정성을 다해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음이 온다.<루카10/25-37>7/1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이 말은 사랑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만나고 모두가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생명이 살게 하심은 하느님의 뜻이며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을 전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기고 보존하고 성장하는 데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은 사람에게 사랑을 하는데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왜 사느냐? 물으면 저는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하여 산다고 말합니다. 살기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좋아하는 것 무엇을 주고받는 것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코린토 13장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외적 표현이자 본질은 안입니다.
오늘 주님은 사랑을 하려면 마음, 목숨, 힘, 정신을 다한다는 말씀은 이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사랑이 아니고 빠지면 살지 못하고 죽음이 옵니다.
사람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고 너는 곧 내가 되고 나는 곧 네가 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을 주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으면 사랑을 못합니다.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 지식으로만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한 고통을 격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고통에 시달릴 때 고통의 의미를 알고 내가 아프면 너의 아픔을 의식하고 아픔을 해결하려고 앞장서게 됩니다.
그래서 10끼를 굶어보지 않은 사람과 말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어떤 상담자가 자기는 지역아동 센타에 근무하는데 돈보다 어린 아이들 돌보는 것이 보람으로 느껴 아이들 돌봄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저도 가난을 뼈저리게 느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 일에 마음 정신 죽을힘을 사용하게 됩니다.
곰이 곰 새끼를 낳으면 높은데서 일부러 글러 떨어트리고 언덕을 기어오르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는 혼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연습입니다.
요사이 자녀들을 사랑만하고 사랑하는 법 가르쳐 주지 않아 사랑 받기만 바라고 사랑할 줄 모라서 어려움이 닥치면 절망하고 자살 율이 많아집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가 사랑을 본질로 하나이시어 가능합니다. 주님 죽음의 고통이 극심하여 이 잔을 멀리 해주시라 청하다가 “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지게하소서.” 하시며 사랑의 최고의 표정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증명하시었습니다. 이 같이 주님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 따라 사랑하라고 명하시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주시듯이 성호경을 놓으면서 하느님 사랑을 받고 하느님 사랑을 전해주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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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에서 협치(協治)를 배우라!
이지혜 체칠리아(전 CPBC 시사 작가)
2022년을 정신없이 달려와 반환점을 돌고 보니 20대 대통령선거에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직업상 올 한 해의 절반을 정치권의 빅 이벤트로 떠들썩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선거 결과를 두고 긴긴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하신다는데요. 하지만 ‘경쟁의 시간’은 지나갔고 이제는 ‘협치의 시간’입니다. 국민에게는 둘로 갈라져 반목을 거듭했던 분노를 거둘 시간이며, 위정자들에게는 그런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협치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지요.
‘협치’(協治)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힘을 합쳐서 잘 다스려 나간다’라는 뜻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협의와 공감대 조성을 선행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의견이나 주장이 서로 맞아서 일치하는 결과에 중점을 둔 합치(合致)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인다고도 하고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좁은 정치적 의미로서의 협치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하며 국민을 위한 주요 현안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지역사회에서 국제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공조직의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정치, 경제, 행정적 권한을 행사하는 국정 관리체계 전반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정책 시스템을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의제를 만들고 정책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낱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가톨릭교회의 화두가 되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가 그것입니다. 주교 회의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위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의 구조와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공동합의성’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기도 했지만 공동합의성, 공동 식별 여정, 함께 가기 등등의 단어로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라는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어 라틴어 발음 그대로 그냥 ‘시노달리타스’로 사용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서의 협치를 돌아보면 소통, 협력, 국민통합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야합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치권이 보여준 협치의 작동방식이란 것이 여당의 주장에 반대하는 야당에 어떤 보상을 주고, 야당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받는, 일종의 교환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과정엔 당사자들에게 중요한 명분이라는 게 따르기도 하지만, 그 그럴싸한 명분의 협치가 과연 국민을 위한 협치였느냐 하는 점은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단순히 외형적 협치가 아닌, 갈라졌던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협치였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지난 5월 말, 한국천주교회의 네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된 유흥식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은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국민통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합은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 다른 면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복음 말씀에서 보면 주는 삶을 살 때 통합이 이뤄집니다. 사회에서 특별히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어려운 분들과 나눔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인디언 속담 중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요. 지난 대선을 통해 여당은 야당이 되었고 야당은 여당이 되었으니 서로의 신발은 바꿔 신은 셈입니다. 여당의 묵직한 책임감도, 야당의 예리한 견제력도 새롭게 배우고 익히며 국민통합을 위한 협치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인 거지요. 그리고 ‘주는 삶’, ‘나눔의 삶’은 유흥식 추기경의 말처럼 ‘지도층에 있는 분들’, 곧 권력을 가진 사람이 먼저 내어주고 나누어야 협치의 길이 보일 겁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먼저 그리고 기꺼이 양보하려는 마음은 없으면서 상대방에게 화해를 요구하고 협치를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협박이며 폭력일 뿐일 겁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 즉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그리고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진 여당이 협치를 위해 통 큰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통 큰 리더십이 협치를 이룰 수 있는 친교의 장을 마련해야 할 테고요.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교회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한다’(『시노달리타스』, 최현순, 바오로딸 2022)고 합니다. 위정자들이 가톨릭교회의 ‘시노달리타스’에서 ‘진정한 협치’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육식이 초래하는 인류위기
이원정 아가토니카(바로 VARO 대표)
수많은 TV 채널에서 ‘먹방’ 예능이 나옵니다. 요리하고 식당을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상품으로 삼아 게임을 하거나 자급자족을 하는 등 ‘먹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 인기 소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도 유행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먹는 것을 과시하고 자극적으로 연출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채널을 넘겨 볼까요. ‘세계 식량 위기’에 대한 뉴스로 세상 곳곳이 혼란스럽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과 기후 위기가 맞물려 중동과 유럽의 옥수수, 밀, 비료의 값이 크게 상승했죠.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진국이 겪는 문제는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에서 더욱 심화됩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식량위기를 예고하는 현 상황에서 당장은 주가 폭락 등 재정적 문제가 명료하게 눈에 띄지만, 식량난은 더욱 가속화되며 인류의 위기까지 초래하고 있습니다.
혀끝의 달콤함. 그리고 전 지구적 영향. 이 상상하기 힘든 거리를 가장 약한 자의 편이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지구 반대편 국가와 이웃들에게 가 닿아 보려고 합니다. 음식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서로 다른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일용할 양식이 육식일 때는 어떨까요? 육식 위주 산업의 막대한 토지와 물 사용은 불평등한 식량 분배에 기여하고 기아 문제를 심화시킵니다. 전 세계 곡식의 40% 이상(미국은 70%)이 소,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고 도살하기 위해 쓰입니다. 햄버거 하나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때, 두 달 반 동안 샤워할 수 있는 물이 절약됩니다.*
수년간의 습관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과정입니다. 익숙함을 새로운 행복으로 대체하는 것마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아무리 가뭄이 심해지고 꿀벌이 사라진다고 한들 저는 수도꼭지만 틀면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고, 꿀벌은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며 가장 성가신 벌레인 모기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쏘아대는 위기 경보음은 우리를 둘러싼 콘크리트 벽을 뚫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는 재난은 한순간에 찾아옵니다.
지금 앞에 놓인 한 끼의 편리함은 수많은 생명의 희생입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배우고 행동하는 것이 곧 사랑이 아닐런지요. 그곳에는 희생이 아닌, 희망과 지속 가능한 연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진부하지만 여전히 와 닿지 않는 진리를 가늠해 보는 하루입니다.
*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호프 자런, 김은령 옮김, 김영사 2020 “과학저널 ‘미 국립학술원 회보’(PNAS, 2012) ‘인류의 물 발자국’ 연구(2012), 국제환경단체 ‘물발자국 네트워크’(Water Footprint Network)”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웃은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
이웃은 이웃의
아픔에 마음으로
반응하며
실천의 길을
따라간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복음의 참된
이웃이다.
공동체의식을
깨닫게하는
가장 좋은
공통어
이웃이다.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이웃이다.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이 삶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 된다.
좋은 이웃은
실천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좋은 이웃은
수 많은 이유와
핑계를 멀리한다.
좋은 이웃의
시작은
예수님이시다.
좋은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상처난 손으로
우리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신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이웃이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좋은 이웃을 통해
전달하신다.
자신에게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살아있는 이웃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있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복음이다.
어느 책을 읽다가 “사...랑...해...”라는 구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랑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줄임표를 사용하면 어떻습니까? 저자가 말하는 사랑에 잠시 머무르면서 한 번 더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사랑을 선택했는지, 사랑 고백의 힘듦에 대해 느끼게 됩니다.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이렇게 말줄임표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는 것 안에서 사랑은 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머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빨리빨리’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할 때를 떠올리면 이런 부분은 분명해집니다. 앞 차가 너무나도 너무 천천히 간다고 경적을 울리고 앞 차에 바짝 대어서 위협을 하듯이 운전합니다. 그런데 앞 차의 운전자가 지금 운전을 힘들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앞 차 운전자의 마음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앞 차 운전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과속하며 앞으로 갈 때에도 역시 머무르고 생각해보십시오. ‘급한 일이 있나 보다.’라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저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만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로 잠시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이웃이 된 사람은 누구였냐고 물으시지요. 먼저 사제와 레위인은 길반대편으로 피해갑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또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만을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한 번 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유만을 내세워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버려둘 수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지 않는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유다인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상황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머물렀고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사랑을 행합니다.
우리 역시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도 나오듯이 사랑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사마라구).
여보, 당신.
자신의 배우자를 어떻게 부르십니까? 아마 ‘여보’,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그 말의 뜻을 아십니까?
우선 ‘여보’는 한자로 같을 여(如)와 보배 보(寶)자를 쓴다고 합니다. 즉, ‘보배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할 당(當)과 몸 신(身)자를 씁니다. 곧 ‘당신은 바로 내 몸이다’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말이고 아름다운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새기면서 상대방을 부르고 계십니까? 혹시 화를 내면서 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배우자에 대한 안 좋은 생각이 들 때에는 이 의미를 새기면서 천천히 불러 보면 어떨까요? ‘당신은 보배와 같아요. 당신은 바로 내 몸입니다.’라는 의미를 새기면서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서 머물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기계체조 금메달 유망주가 고난이도 기술은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된 것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9개 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로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 맞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해 주었고,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믿게 되었고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느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당시 미국에 두 명밖에 없었던 하반신 마비 장애인 의사 이승복씨는 자신도 재활을 해야만 하는 처지이면서도 겨우 눈만 깜빡이는 아이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 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묻습니다. 율법 교사는 구약의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그는 십계명의 요약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명료하게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을 거친 유다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사랑을 짐짓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엔 이미 ‘내가 계명을 아니까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되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굳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스스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구약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자녀들을 낳아놓고 그 자녀들을 주신 주님께 “주님, 제가 어떤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느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실까요? 선택을 하려는 것은 사랑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선택’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소명’이라는 하느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말씀을 다 마치시고,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이 선택하여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카인이 자신이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냐고 하느님께 대든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되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되어 주라는 말씀은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소명으로 알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이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율법이 이 부르심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만으로는 구약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주님께서 저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를 위해 오셨고 물고기 잡는 어부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이들을 사랑의 소명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아빠는 아기를 보고 구토를 했고 엄마도 처음 한 번 보고서는 더 이상 볼 용기가 없어 넉 달이 지나서야 다시 아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죽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생소경이 다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의 처지가 소명을 위한 도구로 보였습니다.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준다면 더 크게 감동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소명을 알면 모든 것이 그 소명에 맞춰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모든 조건을 이용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기부여 강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은 하고 싶다는 소명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도록 나를 부르셨는지 깨달아야 온전히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스스로 하려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나를 왜 창조하셨는지 찾아야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뺏기고 초죽음이 되었는데, 사제도 그를 보고 지나가 버렸고, 레위인도 지나가버렸지만,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는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 다시 율법교사에게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를 물으셨고 그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나오는 세 명의 이웃, 곧 사제와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는 정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자 당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러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러한 율법을 뛰어 넘어서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바라볼 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인인 주제에 소위 오지랖을 떨면서 참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때로는 그렇게 남들의 눈에 오지랖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자면 오늘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경우는 정말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는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율법의 엄격함을 넘어서는 오지랖과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상황을 넘어서는 오지랖,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하는 오지랖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모습은 과연 이 세 명의 캐릭터, 사제와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 중에 어떤 사람에 가까운지?.......
우리는 진정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연중재15주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버려진 사람을 극진히 보살펴 준다. 하루도 아니고 이튿날에도 그를 돌보아 준다. 여기서 이튿날에 촛점이 맞추어진다. 날이 새도록 함께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버려진 사람을 보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사제, 레위인)이 그냥 모른체 지나가 버렸다. 사랑을 베풀었어야 했는데 그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구원을 위해 산다는 사람이 본질적 권한과 책무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 모양세이다.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자나처버린 사제나 레위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다고 하자. 자기 합리화를 주변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자. 그러나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 대한 찝찝한 감정과 후회는 두고 두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리라. 이는 하느님의 법, 양심을 거스른 죄이다. 그는 이미 양심불량이고 권한과 책무를 잃어버렸다. 아, 이를 어쩐담, 지나쳐 버리는 순간 위기의 사람 하나를 죽였다. 돌이킬 수없는 사람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도와 줬어야 했다. 건성으로 바라보았고 사랑을 외면했다. 자신 안에 일어나는 사랑을 외면했다. 하느님의 자비를 버렸다. 이로써 그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 강도만난 사람의 생명을 돌보아 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한 이방 사람 사마리아인이다. 사제나 레위인들은 제단에서 날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격이다.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놓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말할 때 공허하고 자신이 없어질 뿐이다.
자신있게 살려면 이웃사랑을 자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자비를 베풀며 구원을 이루는 협력자로 살아야 한다.
<이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되어 주는 것
있음에도 없어야 할 이를
있기에 있어 할 이로
품는 것
사람다움을 빼앗긴 이를
온전한 사람으로
보듬는 것
나를 향한 눈빛에
나의 눈빛을
맞추는 것
내게 오려는 이에게
먼저 한걸음
다가가는 것
나에게 바라는 이에게
그가 바라는 것이
되는 것
내 밖에서 서성이는 이를
내 안으로
들이는 것
나와 떨어진 이를
나와 하나로
묶는 것
이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되어 주는 것.
착한 사마리아 사람
곽승룡 비오 신부님
율법교사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를 묻는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루카10,36)는가?를 질문하신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누구에게 내가 이웃이 되어주었는가?
“벗의 선택은 가족, 경제, 나라, 재산에 의하지 않고, 영적인 표시에 의해 인도되도록 두는 것이 낫다.”고 증거자 막시모가 해석하였다.
“사제, 레위인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10,31.32)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루카10,33)
예수님은 국가나 민족의 감정들을 뒤집어 차별하지 않고, 히브리인들의 우선권을 사마리아인들에게 주장하려는 지향이 없었다. 구체적인 삶에서 우리의 이웃은 정말 모든 사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우리는 모두 이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들이 세운 편견의 벽을 사회에서 계속 허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들 사이의 벽은 시간과 돈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이 무너뜨릴 수 있고, 적을 이웃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메시지이다.
누군가 우리 가까이 있고 그를 도울 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그가 우리의 이웃이 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언자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1열왕 17,1 참조).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안 오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특별히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던 ‘바알’신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 년’(1열왕 18,1)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21절) 그리고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습니다.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습니다.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31-35절) 그리고 나서야 엘리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37절)
엘리야의 기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봉헌과 연관하여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우제를 준비시키는 가운데, “물을 네 동이씩 세 번 제물 위에 부어 제단 주위로 넘쳐흘러 옆 도랑에 가득 괼” 정도로 제물 위에 부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 삼 년이나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남은 물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고이고이 신주 모시듯이 아끼고 아껴야 할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니! 그것도 엘리야가 제단을 쌓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면, 네 동이씩 세 번 부은 물은 이스라엘에 남은 물 모두를 주님께 바치라는 요구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까워서 그리고 불안해서 못 내놓는 이들에게 한 번 더, 한 번 더해서 결국 열두 지파의 것 모두를 바치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신약에서도 행실 나쁜 여인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요한 12,3)을 때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4-5) 만일 엘리야와 함께 하느님께 기우제를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믿더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 물마저 다 말라 버릴 줄 알고 아까워했더라면, 엘리야의 지시대로 물을 주님 대전에 가져다 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참조) 주님은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1열왕 18,45)
이러한 봉헌의 자세는 같은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서도 드러납니다. 가뭄 중에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과 빵 한 조각을 달라고 하자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2절) 라고 답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 놓으라고 하자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15절)
우리는 미사 전례에 드러난 봉헌의 전형적인 모습을 창세기 22장 1절에서부터 18절까지 나오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대로 그의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세에 얻은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창세 22,5)의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아들 예수님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또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등에 지고(6절 참조) 야훼이레로 올라가는 이사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 그리고 또 한편 인간에게는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치 않으셨던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 봉헌을 가능케하고 이루는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냥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정말로 옳은 것이기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ㄱ) 하느님 아버지께 향한 아들 예수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그리고 그 희생 제사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라는 희생 제사이며, 미사 봉헌의 의미이며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봉헌은 그냥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아니 그칠 수도 없는 부활의 영광을 향한 희생 제사이며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러한 봉헌이 이웃을 구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6-18)
이제 봉헌의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눈앞에 닥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또 우리가 섣불리 응답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알아서 살아 나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강변하며, 엄두도 나지 않고 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오늘도 부담 속에서 자신을 애써 합리화하며 지나치려고 하십니까?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 14,15)
아니면, 매일 나와 우리 한 가족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지만 “이것이라도 써 주십시오.” 하며 바치겠습니까?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 주님께 다시 드리오니 써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우리의 봉헌은 하늘 나라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9.11.13) 그러므로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기도의 기술
서동신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그리스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BC 460-375)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을 그의 <잠언집>1권에 남겼습니다. 의사였던 그가 사용한 그리스말 ‘테크네’(tekhne,라.Ars)는 우리나라에서는 ‘예술(Art)’로 번역되지만 본래 의술 곧 ‘기술(technics)’로 번역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기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테크닉 즉 ‘사랑의 기술’ 곧 ‘기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몇 주 전 성체성혈대축일에 조규만 바실리오 교구장 주교님을 모시고 <태백지구 신앙대회>를 가졌습니다. 1부 미사봉헌 2부 한마음체육대회를 통해 영적으로 거룩해지고 육적으로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성체성혈로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교우들에게 ‘세 가지 사랑의 기술’에 대하여 강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장 29절)라는 말씀이 이웃을 사랑하는 기술을 전제하듯, 주교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울까요? 라고 질문하자, 대부분은 원수를 사랑하는 기술이 제일 어려울 것이라며 손을 들었습니다.
교우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주교님의 답변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쉽고 그 다음은 이웃,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왜 쉬운지 조목조목 이유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 날 때마다 490번만 용서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웃사랑인데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내 몸을 덜 사랑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는 비법을 알려 주셨습니다.(웃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왜 가장 어려운가? 라는 답변으로는 신명기 말씀에서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신명기 4,29)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므로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우들은 주교님의 세 가지 사랑의 기술을 언급한 강론에서 활짝 웃으면서 납득하였습니다.
중세 독일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71-1327)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기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훈련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서예가가 붓글씨를 끊임없이 연마하듯이 기도하는 것 사랑하는 것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는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삼라만상을 제대로 보려면 소유하고자 하는 아집을 버리고 떠나 초연하게 그대로 놓아두는 기도의 기술을 활용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을 때 비로소 거기서 하느님을 맛보고 하느님 신성의 바다에 하나 되어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 종일 마음 안에서 되뇌어 볼까요?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하십시오.” 하루가 끝날 때, 하루의 근심을 내려놓아 지나가게 하십시오. 오늘 만났던 사람 일어났던 사건을 잘 관찰하면서 거기에 집중해 보십시오.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했습니까? 오늘 삶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여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은총의 주님, 제가 만날 모든 이웃과 사물 안에서 버리고 떠나 그대로 놓아두는 기도의 기술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저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예수님의 답변 놀랍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교사의 시험문제로 착한 사마리아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지만요.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답 알고도 남는 율법교사가 말입니다.
답을 모르는 척 누가 이웃이냐고 하느님말씀 예수님께 시험 내다니요.
워낙 영원으로부터 머리회전 우주최고이신 예수님의 답변 놀랍습니다.
사제 교사 등의 지도층들은 하늘가기에 자격 없다고 야단치신 겁니다.
그걸 본인이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하셨으니 창피하게 역공당한 겁니다.
정치인들 그간 늘 평화를 말했지만 정치경쟁 전투장 지금이 아닙니까.
어른들이 행복하라고 말들 하지만 자식들은 불행 널려진 세상 봅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신명 30,10-14)는 하느님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지혜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는 일에 축복을 주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번영을 두고 기뻐하시겠다고 한 이유를 말합니다. 결국 바빌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이 또 다시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기본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섯 번(4,1; 5,33; 8,1; 16,20; 30,16)에 걸쳐서 가르쳐주는 데 오늘 제1독서가 마지막 경고에 앞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율법서에 쓰인 하느님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번성하고 싶다면,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실천해야 할 계명들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람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방법은 매일 최소한 두 번(아침, 저녁), 집을 들고 나서면서 만져야 하는 문틀에 붙여놓은 말씀의 통에 적혀 있듯이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신명 6,5)
오늘 복음(루카 10,25-37)은 율법교사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율법교사와 “유다의 지도자”(18,18-27)의 질문으로 시작되면서 똑같이 계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하여 반문하심으로써 율법교사 스스로 대답하도록 유도하십니다.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묻는 것이고, 뒤에는 앞부분의 결론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여럿 가운데 있던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율법(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셰마)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고 대답합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말하지 않았는데, 이 율법교사는 함께 붙여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은 칭찬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너는 율법을 잘 알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이제부터 그렇게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마치 자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은 율법교사는 슬며시 화가 났으나 애써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율법교사는 첫째 계명으로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둘째 계명으로 주제를 얼른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교사가 도망칠 틈을 주지 않으시려고 대답 대신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예리코에서 생산한 과일과 채소를 예루살렘에 팔고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난 것 같습니다 과일과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약 2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사해와 예리코의 초원으로 가는 자는 입고 내려가서 벌거벗고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 길은 항상 강도들이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고 합니다. “초주검”이란 “반쯤 죽여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 모범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제는 무자비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무자비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어떤 주검에도 다가가서는 안 된다.”(레위 21,11)는 율법 때문에 반쯤 죽은 이를 보자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율법은 남의 짐을 져주는 것(갈라 6,2)인데도 이들이야말로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로마 1,31) 하느님의 말씀에 가장 가깝게 사는 이들이, 열심하다고 하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너무 거리가 멀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마귀 들린 자”(요한 8,48)로 취급하면서 상종하지 않던(요한 4,9)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자비심을 발동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반쯤 죽은 사람의 상처에 당시 치료법에 따라서 기름(세균을 차단하는 막을 형성)과 포도주(알콜로 소독)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기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떠나야 했기에, 이틀 치 품삯(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누가 환자의 이웃이냐?” 하지 않으시고,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쉽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자존심이 무너진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비천한 족속의 대명사로 여겨왔던 사마리아라는 말조차 떠올리기 싫었던 율법교사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린 대답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율법학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었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음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자기중심적으로 이웃을 생각했던 율법교사와 예수님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이웃이란 곤경에 처했기에 사랑과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즉시 자비심을 드러내고 그 자비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이웃은 곤경에 처한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사랑을 발생시키는 사람,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내 곁에 이웃으로 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풍요롭겠습니까?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이웃이 되어준 사람, 즉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이웃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콜로 1,15-20)에서 바오로 사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고 세상을 다스릴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다고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와 사랑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마련해 주셨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켜 주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넘기셨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으로서의 완전한 본질을 충만히 지니고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신 사랑의 모범, 우리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예수님을 가까운 이웃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이웃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웃은 항상 가까이 있기에 내가 어려울 때 얼른 달려오는 사람입니다. 이웃은 상처를 주고, 그 상처의 아픔을 후비고 파헤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감싸주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마음에 생기를 주는 사람입니다. 이웃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주는 사람이며, 고통 받는 이들을 멸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이웃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아니 예수님처럼 좋은 이웃이 되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다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의 입에 있고, 여러분의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미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거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보십시오. 이것을 명령하시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분이십니다.” 이런 이웃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은 늘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참된 이웃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 입에,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에 생각만 바꾼다면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
한민택 신부님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어원을 따져 보면 ‘어머니 태속이 쓰린 아픔’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이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반면,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비참한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사랑에서 비롯된 쓰린 감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가끔 등장하는 이 표현은(마태 18,23-35; 루카 15,11-32 참조) 예수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어 병을 고쳐주십니다.(마르 1,40-45 참조) 예수님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외아들을 잃고 장례를 치르는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에게 “울지 마라” 하시며 위로해주시고 아이를 살리십니다.(루카 7,11-17 참조)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마음을 아울러 표현하는 ‘가엾은 마음’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비천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굽어보시어 인간에게 몸소 다가와 구원해주는 분이시다.’ 자비로운 하느님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체험은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그에게 답하시는데, 비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 말씀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 우리가 직접 만나고 그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분이십니다. 강도를 만나 상처 입고 초주검이 된 사람은 비천한 인생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저 먼 하늘 위에서 멍하니 내려다보거나 내버려두지 않고, ‘가엾은 마음’으로 몸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 상처를 나누고자 하시며, 우리의 병고와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삶을 굽어보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예,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방문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우리도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열쇠
장재봉 신부님
바야흐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어떤 휴가를 계획하셨는지요? 교우님 모두가 어디에서나 주님을 모시고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며 하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제발 매일미사 책이라도 꼭 챙겨가 주십시오! 교회는 매일미사 책에 무려 열 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원하는 이 간절한 원의를 팽개치지 말아주시길 바라고 바랍니다.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조우하는 행복을 누리시는지 여쭙고 싶고 참으로 그리 살아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큰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매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탄이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사탄과 맞설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 굉장한 것이나 대단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선의 무게와 악의 무게를 비슷비슷한 중량감으로 위장합니다.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괜찮아서 탈이 없을 것처럼 포장합니다. 모호하게 느껴서 불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마음에 올무를 놓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결과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믿음이 희미해질 때, 삶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대상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주님의 ‘돌직구’가 매섭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니까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엾은 마음”만 잃지 않아도 몸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십니다.
사랑은 끝까지 마음을 쏟는 최선의 배려임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희생이란 기꺼운 사랑의 결과일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기게 됩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만으로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에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만 해주고서 돌아선다면 완성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살피라는 당부로 듣습니다.
그날 사마리아인처럼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하는 마음 폭을 지녔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통 큰 배포를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라 싶습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 자신이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살아가는 양 여기진 않는지, 심중을 꼼꼼히 뜯어보라는 말씀이라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고쳐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고백이십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두 발로 걷기를 마다지 않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서 보고 싶다는 고백이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난관은 “최선의 방법을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를테면 “이번 휴가 기간에는 성경을 꼭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도 성경은 무겁다는 이유로 부피가 작은 매일미사 책으로 바꿔 넣거나 “기도를 많이 바치겠다”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저 더 먹고 더 떠들고 더 흥분하느라 손에 묵주 한 번 쥐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더딘 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는 의지가 소중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 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웅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주기만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밝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마음을 합하여 예배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은혜를 선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웃으로부터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한 복음의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믿음의 나침반이 알려주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 주십시오. 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여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시길 두 팔 벌려 축원합니다.
찢어져 열린 마음
김승태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을 이야기한 율법교사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유로써 말씀해 주신다.
그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비유 말씀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등장인물인 사제와 레위인과 달랐다.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갔을 만큼 완전히 멀어졌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치유해 줄 뿐만 아니라 초주검이 된 사람이 여관에 머물러 쉴 수 있도록 돕는다.
사마리아 사람이 초주검이 된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 번역된 희랍어는 σπλαγχνζομαι(스플랑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연민을 느끼다’는 의미도 있지만 ‘속이 쓰리다’는 의미도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팠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이 찢어져 열렸기 때문에, 초주검이 된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며 묻거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게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니, 지난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을 마치며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이 리본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교황은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이미 함께 머물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프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이웃를 사랑하자=이웃이 되어 주자
최창덕 신부님
여름철 날씨가 무덥습니다. 생각으로나마 시원한 상상을 하며 겨울을 떠 올립니다. 겨울 하면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 다. 성탄 즈음 길거리에선 흥겨운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도 들립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 큰 백화점 앞에서 “딸랑딸랑, 불우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보냅시다.”하는 자선냄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유심히 지켜보다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옆에 자 리를 깔고 “딱딱딱,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기 시 작했습니다. 자선냄비 입장에선 아주 심한 훼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 게 뭐람, 종교 간에 싸우는 것도 아니고”라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면, 아이러니한 광경에 웃음을 터뜨리며 스님의 모습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 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염불을 외며 절을 하였습니다. 스님 앞에도 차츰 돈이 모였고 추 웠던 날씨는 슬슬 눈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염불과 절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질세라 구세군의 종소리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종소리가 그치며 자선냄비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 습니다. 그제야 스님도 일어났는데, 자신 앞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모두 집어 들고 자선냄비에 ‘탁 탁’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곤 합장을 한 채 인사를 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행인 하나 가 쫓아가 자선냄비에 돈을 넣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무엇인가 도움 을 주고 싶었습니다.” 행인이 “아니, 스님은 크리스챤이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니 스님은 미 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웃을 돕는 데에 부처님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사랑 한가지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개념’ 자체를 바꾸십 니다.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이 셋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 였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동료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이웃이며, 어려움에 처 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절친한 이웃이 되어 주어서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이웃은 나와 가까운 이들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가까워지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웃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매사에 모든 이에게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구조적 폭 력에, 우리 무관심의 폭력에 쓰러진 이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들, 실직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장 애인들, 농민들 그리고 북녘 동포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이들을 두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며 여전히 우리의 이웃 사랑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하 겠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아멘.
새로운 탄생
박진수 신부님
우리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을 나를, 우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시 선에서 오늘 말씀이 새로운 삶 으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 음에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복음을 세상 안에서 나-너-우리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과정을 지나간 결과, 삶 의 자리로서의 공동체의 무한한 풍요로운 열매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와 우리를 위한 하늘 나 라의 초대에 이웃이 되어줘야 할 고통받는 이들을 보내주신 주님의 성심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와 힘 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늘 나라의 진정한 표지를 그 안에서 보고 발견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새로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 사이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습 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말씀은 일상생활에서 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성경의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충실함과 변 화를 위한 우리의 역량을 확인하는 기점이며 핵심 적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재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사회 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그들의 삶이나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을 어떻 게 만나고 있습니까? 혹시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 체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안전 을 지키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자신의 갈 길
을 가기 위해 자주 침묵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런데 침묵의 시간 중에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질 문이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를 통 해 알지도 못하는 한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오 히려 ‘형제’와 ‘적’을 구별 못하는 현명치 못한 처세 로 취급되지는 않았습니까? 어쩌면 이러한 소박한 관심은 오히려 응답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이해 를 받지 못하며 심지어 비난받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더욱 복음 에 희망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 다. 그것은 전에는 마치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었다 면, 불을 켜는 일과같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 어나려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나-너-우리 공동체는 울타리 - 스스로 만들어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떤 울타리, 곧 자 기 자신이나 가족 아니면 공동체 또는 민족일 수도 있는 울타리 - 를 열고, 밖으로 나가 고통받는 자 매 형제들에게 가까운 사람, 곧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셨고, 당신의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지 않습니까!) 이렇듯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열고 나와, 하느님 께서 우리를 위해 창조해 주신 세상을 마음껏 숨 쉬 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 바로 ‘하느님 사랑’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이르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세례 전 예식들에 대한 가르침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의 시작(Nn. 1-7: SCh 25 bis, 156-158)
성조들의 행적이나 잠언의 교훈을 읽으면서 윤리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매일 강론해 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여러분이 이런 교훈으로 교육을 받아 우리 성조들의 경지에 들어가 그들의 도를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세례로써 새사람이 될 때 세례 받은 이들에게 맞는 그런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신비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성사의 의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전에, 아직 입문 성사의 체험이 없을 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여러분에게 성사의 의미를 알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오해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사들이 지니는 빛은 성사들에 대해 미리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그것을 모르고 받는 사람들에게 더 밝게 빛납니다.
여러분은 귀를 열어 듣고 또 성사들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부어 준 영원한 생명이 지닌 달콤한 향기를 맡으십시오. 여러분의 귀를 열게 하는 예식에서 “에페타” 즉 “열려라.” 하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이 뜻한 것입니다. 이 예식을 거행한 것은 성사의 은총을 받으러 나오는 여러분들이 받게 되는 질문의 뜻을 깨닫고 또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도 벙어리를 고쳐 주실 때 이와 같은 신비의 예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이 예식이 끝난 다음 지성소의 문이 열려 여러분은 재생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받은 질문을 상기하고 여러분이 대답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그 행실을 끊어 버리고 세속과 그 허례 허식 및 쾌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한 약속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 아닌 생명의 책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레위와 사제들과 주교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외모를 생각지 말고 그들의 직분이 부여받은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여러분은 천사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제들의 입술만 쳐다보면서 인생을 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려 한다. 사제들은 전능하신 주님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속임이 없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이는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직분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수해 준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직능을 존중하며 또 그 품위를 인식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맞서기 위해 들어가서 그가 있는 앞에서 그를 끊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동쪽을 향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하고서 그분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신원철 안토니오 신부님
짧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판문점은 이제 분열과 대결의 장소가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장소가 되었다.”
“부자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은 그 달란트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멀리 있는 친척도 이웃만은 못해요”입니다.
항상 가까이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평소 왕래가 적은 먼 친척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선배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 신부~ 어떤 사제를 신자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지 아나?”
“경건하게 미사 봉헌하고, 강론도 잘하는 사제요?”
“친절하고, 웃으며 인사도 잘하는 사제요?”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재밌는 사제요?”
“다 아니라네. 성덕도 아니고 겸손이나 친절, 유머감각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히 잘 대해 주는 사제를 신자 분들은 제일 좋아한다네.”
사제를 평가하는 기준이 상대방의 언행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코린 13,1 참조)는 성경의 말씀처럼, 아무리 성덕이 뛰어나고 겸손하고 재밌어도 나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사제라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나 멀리 있는 친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도와준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그토록 존경하고 의지했던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라 평소에 멸시하고 조롱하던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참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참된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 웃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형제, 내 자녀, 내 이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
김미희 (마리 스텔라)
4년 전 여름, 로마에서 열린 ‘어머니들의 기도’ 콘퍼런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들의 기도’는 2년마다 각국 대표들이 참여하는 일주일간의 콘퍼런스를 가집니다.
일정 중에 교황님을 뵐 수 있는 바티칸 광장 수요일 일반 알현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들의 기도’ 단체석은 광장 맨 앞자리에 배치되어, 교황님을 아주 가까이서 뵈올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강론 시간 외에 따로 초대된 아픈 이들과 신랑 신부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시느라 뙤약볕 아래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교황님께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셨고, 광장도 텅 비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광장을 벗어나 베드로 성당 쪽 긴 줄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는데, 우리 단체석 쪽을 보니 몇몇 어머니들이 아직도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터져라 ‘교황님’을 연호하고 있는 스페인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황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스페인 어머니들을 보면서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이층에 간 어머니를 찾아 우는 아기처럼 하면 된다.”
지난 5월 30일 일본의 어느 소도시, 신자 수 40여 명인 조그만 성당에서 여섯 명의 어머니들이 ‘어머니들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임 신부님의 배려로 저희가 기도를 소개하며 어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산속에 사는 목수의 아내라는 한 어머니는 성당에 오려면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려 성당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다른 평일 미사는 아침 7시라 어렵지만, 오전 10시 수요일과 주일 미사에는 반드시 참석한다는 이 어머니는 어느 날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성당까지 6시간을 걸어왔다고 합니다. 미사는 끝났더라도 하느님께 가는 길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그 ‘걸음걸음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였다’고….
얼마 전 읽은 <바이올린과 순례자>(마틴 슐레스케 지음, 니케북스)에서 저자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합니다.
“열세 살 때 나는 거장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저자는 피카소가 말한 ‘아이처럼’을 ‘유치한 퇴보가 아니라 성숙한 두 번째 천진난만’이라 표현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 18,17)
엄마를 찾아 목청껏 우는 아기처럼, 멀어도 먼 줄 모르고 달려가는 아이처럼 주님께로 향하는 어머니들. ‘어머니들의 기도’를 통해 많은 어머니들을 만나면서 저는 성숙한 ‘순진무구’ 믿음의 힘을 새롭게 배웁니다.
사랑은 완고한 마음을 극복하면서부터
이종경 신부님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다 보면, 항상 하루가 부족합니다. 시험 전에 계획을 철저히 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계획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실천이 그 계획을 못 따라간 결과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다짐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분명 다른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의 계명을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 여전히 하느님과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우선시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가장 큰 계명을 물어온 율법학자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질문을 이어갑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비유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시는데, 거기서 강도를 만난 이를 도와주고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떠나가며 여관 주인에게 치료비까지도 지불합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진짜 사랑을 베풀며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학자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만 대답합니다. 그는 결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는 부정 탈 것을 염려해 이웃을 외면한 사제나 레위인과 다를 바 없이 완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완고한 마음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거친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가난이 싫지만 두렵지는 않다.
최민석 신부님
가난도 잘만 갈고 닦으면 보석이 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가난은 다만 불편할 따름이지 창피스런 일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난은 싫다. 하지만 가난이 두렵지는 않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울 수 있다.
내가 보는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보석이다. 누가 감히 우리의 빛나는 보석을 부끄럽다 이르겠는가! 보석을 보석으로 보는 것도 마음이요, 은혜를 은혜로 보는 것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렇다. 그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럼으로 감사는 삶을 축복으로 바꾸는 연금술이다.
부함에 길들여지면 자신도 모르게 감사와 감동이 줄어든다. 가난한 삶에서 오히려 감사가 많은 것은 가난이 주는 영적 축복이다. 부자의 삶은 생활이 단순 소박함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부함은 오히려 삶이 본질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천박하게 되기 십상이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저는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나?”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10)
한 모금의 물도 감사 없이 마시지 않고 한줄기 햇살도 헛되이 받지 않아 푸른 잎 새의 순수한 마음을 본 받게 된다. 밤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던 별들을 볼 때 어둡고 소외된 긴긴 밤, 인생을 배워 가난한 맘으로 나를 아파하며 고뇌할 때도, 나 가난하므로 감사할 수 있었다.
행복은 결코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깨달은 후, 내 한 몸 벌거벗은 빈손으로도 나 지쳐 울지 않고 내일을 기다려 희망을 찾고 찾은 것이다. 가난도 잘만 길들이면 지낼 만하다. 헐벗은 가난도 꿋꿋이 견디어 진주를 키우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나 가난하므로 행복하였노라 고백하며 산 것이다. 이것이 삶의 방향과 목적과 의미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삶의 태도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린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보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루가 6,20-23)
가난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지금의 삶을 산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사랑의 지혜가 주는 행복이다. 지나치게 깊은 생각에 빠지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이 없이는 결코 행복을 볼 수 없다. 생각은 대부분 지나온 과거나 아직 오직 않은 미래에 갇혀있게 된다. 단순한 삶을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서 하느님 나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한 걸음 벗어나 고요함 속에 들어가면 진정으로 존재하는 텅 반 충만의 순간이 온다. 비록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서 해답을 얻게 된다. 해답은 언제나 스스로 나를 찾아온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텅 빈 충만함에서 오는 영적 선물이다. 생각 너머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이며 은총이다.
쾌락은 외부에서 오지만 사랑과 평화 그리고 참 기쁨은 내면에서 온다.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누리는 삶의 전부다.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어 맡기고 지금 이대로의 삶에 ‘네’라고 응답할 때 내면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어맡김은 삶의 흐름을 거슬리지 않는 가난한 삶이다.
지금의 순간 있는 그대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가난이다. 가난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마음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다. 판단 분별을 내려놓음으로서 지금의 순간에 머물고 내어 맡김이다. 상황을 변화 시키는 일은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하는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면서 내어 맡김이 가난이다.
가난은 궁핍이 길든 시간에도 소유를 고집하지 않는 따듯한 눈길이다, 명예도 부도 가까이 근접하지 못하는 가장 낮은 자리. 쉽게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비움이다. 가난은 사소한 꿈에 감사할 수 있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받을 수 있나? -사랑 실천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율법교사의 예수님께 대한 물음이 불순합니다만 질문 내용은 훌륭합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누구나의 궁극의 갈망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뭔가 늘 허전하고 부족하기에 끊임없이 찾는 인간입니다.
하여 생명의 하느님을 찾아 영적 목마름을, 배고픔을 해소하고자 이 거룩한 미사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찬미와 감사의 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바꿔 말해,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혹은, “스승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좌우간 모두가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 물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이 아닌 의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묻는 것입니다. 그대로 영혼의 갈증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이런 영적 갈증이, 갈망이 있어서 사람입니다. 참으로 영성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종파를 초월하여 공통적인 주제가 영성입니다. 때로 “영성이 없다!” 개탄하는 현실이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이런 물음에 대한 답도 참 다양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도,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도 이에 대한 답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로다.”
“없는 자들아 주님을 찾으라 너희 마음은 살리라.”
모두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구원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의 구원이,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사랑의 주님을 만나 구원을,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여 다음 행복기도의 고백에 그대로 동감합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발견하는/기쁨, 평화, 감사, 행복의 구원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얼마전 참 열심히, 치열히 살아가는 믿음의 옛 제자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제 힘으로 요즘 제 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껴요. 박사과정 한 학기 남았어요. 또 사이버 강의도 하나 맡고 다음 학기는 겸임교수도 하게 되었구요. 매일매일 기적처럼 살아요.”
“말그대로 하루하루 은총으로, 참 치열한 노력으로 기적처럼 사는구나! 바로 그것이 구원이다.”-
그렇습니다. 예나 이제나 구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물었던 하늘 나라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은, 행복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그 구체적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바로 주님을 믿는 이들인 우리의 신원과도 직결됩니다.
첫째,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얼마나 영예로운 칭호입니까?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인간입니다. 그냥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기도 역시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존엄한 인간 품위의 근거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할 첫계명이 부여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영혼도 튼튼해지고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도 확고해져 심신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코 막연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말씀 사랑과 말씀 실천으로 직결됩니다. 바로 그 말씀은 늘 오늘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생의 구원은, 구원의 행복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입당송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얼을 지니셨기에 세상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버렸도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한 비전이,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을 향한 비전이, 꿈이, 희망이 사라지면 삶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부패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방향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삶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로 바오로가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고백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목표로 향하고 있다는 장엄하고 심원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이자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이런 상상력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고백도 참 은혜롭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 참으로 웅대하고 적절합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평화의 실현에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저절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이웃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막연히가 아닌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혼자의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삶은 관계의 유대요 연대입니다. 끊어져 단절되면 죽고 이어져 연결되면 삽니다. 혼자라는 개념은 환상이요 착각입니다.
이웃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은 최종적으로 이웃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이웃의 사람으로 확증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실패했습니다. 하느님 구원의 시험에 불합격했습니다. 이웃의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습니다. 훌륭한 종교인인지는 몰라도 자비로운 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참 사람되는 공부보다 어려운 평생공부는 없습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는 말그대로 ‘누가 참사람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시험문제 였던 것입니다.
뜻밖에도 이 참사람의 구원의 시험에 합격한 이는 무시받고 천대받던 무종교인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가엾은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진정성 가득 담긴 자세로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합니다.
주님은 이 예화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내 중심의 사고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180도 발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국적, 종교, 인종, 계층, 신분을 넘어 참으로 곤궁 중에 도움을 청하는 이가 모두 나의 이웃이요 무조건 이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도움을 청하는 이웃입니다. 바로 이런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 실천이 없는 하느님 사랑,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 교회 사랑은 참 공허할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의 진정성은, 교회 사랑의 진정성은, 곤궁중에 있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 입증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이, 그리고 곤궁중에 있는 이웃의 사람이 되어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비로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삼중 사랑(하느님 사랑,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구원의 명령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내 이웃은 누구냐? <루카 10, 25-3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많은 사람을 인연으로 해서 만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아니, 누구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가?” 한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 피가 섞이고 살이 섞인 사람은 먼저이고, 혈연이나 멀리 있는 사람은 이웃 같은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나라도 다른 사마리아인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비유는 이웃은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는 사마리아인은 우선 신앙인보다 외인들이 이웃 사랑을 더 잘하고 있다는 설명도 됩니다. 멀리 있는 사람, 나와 관계없는 사람의 이웃이 먼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옛날 선교사들이 순교할 줄 알면서도 이국만리 타향 땅에 와서 죽기까지 북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깨우쳐 주고, 평화와 기쁨의 나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웃을 가까이서 찾지 말고 멀리서 찾아야 합니다. 소외된 이, 헐벗은 이, 보잘것없는 이, 나와 생각이 다른 이,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이. “나는 당신과 아무런 인연도 없고 아무 상관이 없소.” 하며 지나가는 율법학자나 레위 지파나 높은 직책인 신분으로서 이웃을 생각하지 않으면 주님이 저 멀리 억겁의 세상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이는 “나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어”라고 변명을 하지만 배려심과 작은 관심을 느끼는 사람은 줄 것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 입, 서비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처럼 따뜻한 손길로 잡아주고, 안아주고, 감싸주는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신 아버지는 영의 영역을 넘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현존하십니다. 멀리서 이웃을 찾아 주님의 평화를 주고 영원히 죽지 않는 세상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또한,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내가 필요한 사람이 가까이 옵니다.
저는 상담자에게 “하느님 아버지가 당신을 나에게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서로 도우며 협력하며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하루는 수도원 문 앞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손에 붕대를 매고 어떤 분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와야 할 형편이어서 마침 제 손에 학교에서 가르치고 받은 강의료가 있었습니다. 그 돈을 전부 주고 어려움을 해결하라고 하여 보내니 사기꾼이었습니다. 얼마 후 편지 속에 “신부님처럼 잘 속는 사람 처음입니다. 아버지라 부르고 형편이 나아지면 갚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저를 계속 돕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하느님 아버지가 보상해주십니다. 마음 놓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 열 배 백 배로 갚음을 받게 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착한 이웃이
참으로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착한 이웃은
신분과 지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모두는
자비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비는 실천으로
실천은 자비로
하나가 됩니다.
자비는 착한
이웃으로
드러납니다.
착한 이웃은
돌봄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먼저
다가갑니다.
아픔을
싸매어주고
상처를 소독합니다.
말씀은
착한 이웃으로
우리가운데
육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너를 살리는 것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비의 실천이며
착한 이웃으로
서로를 돌보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안에
서로를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고마운 이웃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주일 되십시오.
착한 이웃이
되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자신임을
잊지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