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梧柳洞)은 마을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오리울’, ‘오릿골’, ‘오류울’, ‘오류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조선시대 오류동은 ‘효자마을’, ‘효자동’이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효행심 깊은 마을로 유명했다. 오류동은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었다. 파평 윤씨 문중 가운데 정직한 윤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홀어머니를 모시 사는 효성 깊은 선비였다. 그는 엄동설한에 어머니가 먹고 싶다는 잉어를 구해 봉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윤선비의 효행이 감화가 되어 오류동은 부모 섬기기에 정성을 다하는 마을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칭송하기 위해 효자문을 내렸다고 한다.
계양구 효자마을 오류동
인천광역시 계양구 오류동(梧柳洞)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김포군 검단면의 당하리(堂下里) 일부를 합하여 ‘오류리’라 하고 김포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에 와서 김포군 계양면에서 인천광역시 북구 계양동에 되면서 ‘오류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마을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오리울’, ‘오릿골’, ‘오류울’, ‘오류동’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한편 오류동은 조선시대에 ‘효자마을’, ‘효자동’이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효행심 깊은 마을로 유명했다고 한다.
파평 윤씨 집안의 효자
조선시대 오류동은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부평 부사를 지냈던 윤명선(尹明善:1547~1608)이 오류동 일대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그리고 대대로 파평 윤씨 문중에서 자리하고 살았는데, 이 파평 윤씨 집안사람들은 모두 효성이 깊었다고 한다. 오류동에 터를 잡고 살던 파평 윤씨 문중 가운데 가장 정직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윤 선비는 비록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 깊은 선비였다. 그는 항상 “내가 잘 모시지 못해 아버님이 장수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은 잘 모셔야지!”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윤선비는 매일같이 밤이 되면 어머님 잠자리가 편안하지 꼭 여쭙고, 아침이 되면, “잘 주무셨습니까?”라며 매일 같이 문안 인사를 드렸다. 윤 선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윤 선비는 그 외에도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였다.
한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는 어머니
윤선비는 어머니의 환갑잔치에는 어린아이들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었으며, 이웃집 잔칫집에 가서는 맛있는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 어머니에게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홀어머니마저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윤 선비는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 병간호를 하였지만, 어머니의 병은 점차 깊어만 갔다. 윤 선비는 “아! 어떻게 하면 어머님을 낫게 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였다. 윤 선비는 어머니 병환에 좋다는 온갖 약을 구해다 드려보았지만, 어머니 병환은 좀체 낫지를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폭설이 내려 온통 땅이 하얗게 덮인 한 겨울날이었다. 윤 선비는 “어머님, 잡숫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라며 병환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여쭤보았다. 어머니는 “잉어를 한 마리 고아 먹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윤 선비의 어머니는 한겨울 연못과 호수가 얼어붙어 잉어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병환이 깊었던 것이었다. 윤 선비는 그러한 어머니를 보며 걱정이 되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만은 항상 웃으며 말을 하였다. “어머님, 제가 반드시 구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윤선비 앞에 튀어 나온 잉어
윤 선비는 잉어가 있을 만한 곳을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연못과 호수의 얼음을 깨고서 잉어를 잡아보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흘러도 잉어를 잡을 수가 없었다. 추위에 손과 발은 동상에 걸리고, 매일 같이 인근 마을은 물론 멀리 떨어진 곳까지도 잉어를 잡으러 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쯧쯧쯧, 노망든 노인네의 소원 들어주느라 아들이 먼저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겠군!” 이웃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윤선비는 그래도 계속해서 잉어를 잡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잉어를 잡지 못하겠구나!”라며 포기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부평들을 건넛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연못 한쪽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 선비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 잉어 한 마리가 얼음을 뚫고 나와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윤 선비는 깜짝 놀라면서도 기뻤다. 잉어는 펄떡펄떡 뛰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어서 나를 잡아다가 늙은 어머니 약으로 쓰라.”고 잉어 스스로 말하는 듯했다. 윤 선비는 잉어에게 “고맙구나, 잉어야.”라고 말을 하고, 잉어를 잡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 선비의 효성이 이어지는 오류동
윤 선비는 온갖 약재들과 함께 잉어를 고아서 어머님께 드렸다. 그랬더니, 어떠한 약도 효험이 없었던 어머니의 병이 깨끗하게 나아서 어머니가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오류동 사람들은 윤 선비의 행동을 보고는 “아들의 효성이 지극해서 하늘이 엄동설한에 잉어를 내려주셨어”, “그래서, 늙은 어머니가 병이 나았어.”라고 말을 하였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윤 선비 행동에 감화되어 부모 섬기기에 정성을 다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평 윤씨와 집안과 마을에서는 효자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조정에서는 이를 칭송하기 위해 효자문을 내렸다고 한다. 그 이후 오류동은 ‘효자마을’이라는 별칭이 생기게 되었다. 「효자마을이라는 별칭을 가진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오류동」은 ‘잉어 봉양’을 통한 효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효성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해서 ‘효자마을’이라는 마을 별칭이 생기게 된 유래를 설명해 주고 있다.
|
첫댓글 윤 선비의 효성이 이어지는 오류동 효자마을
자세한 글 잘 읽었습니다.
미션님께선
어떻게 이런 귀한 이야기들을
알고 올려주시는지 존경스럽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코로나에 지친 심신에
즐거움을 주는 코너인것같아요
감사합니다
효자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