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제1독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시작입니다.1,1-6.8-20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금
거룩한 수녀님들의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수녀님들과 함께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정성과 진심이 가득 담긴 거룩한 미사입니다. 잘 준비된 성가에 깨어 몰입하고 집중하는 미사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오늘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빈곤한 과부를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사제가 된 후에는 동전 두 닢조차 헌금함에 넣어본 적이 없는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수도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 송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 한 가지! 사제나 수도자로서 비록 현찰을 헌금함에 넣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헌금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 더 정성껏 집전하는 것은 또 다른 헌금입니다. 수도자로서 더 정성껏 미사를 준비하고, 더 감미로운 선율로 성가를 부르는 것 또 다른 형태의 봉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매사에 모범생이신 수녀님들께서 성야 미사를 얼마나 잘 준비하셨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교회에서 제시하는 성대한 전례 양식을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전례 성가는 라틴어로 노래했습니다. 말씀의 전례 시간에 통상 첫째, 셋째, 다섯째, 세 독서로 축약해서 진행하는데, 수녀님들께서는 일곱 독서를 다 준비했습니다. 매 독서 끝에는 잘 준비된 성가를 계속 불렀습니다.
자연스레 미사 시간은 두 시간 반 이상 길어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던 저는 적응이 잘 안되다 보니, 처음에는 꽤 불편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부활성야 미사 전례에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든 한가지 생각, 언젠가 우리가 만끽하게 될 하느님 나라는 부활 성야 미사 같지 않을까? 하느님 말씀이 계속 선포되고, 예수님의 명 강론이 이어지고, 천상에 운집한 수많은 성인 성녀들과 천사들,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의 찬미가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런 하느님 나라.
그런데 자매님 손에 강제로 이끌려 부활 미사 성야에 앉아 있는 한 형제님의 얼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 분이어서 그런지 세상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그분의 얼굴은 마침내 지옥 불 속에 앉아 있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어떤 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나라에 초대받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천상잔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평소 천상 잔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평생토록 소비향락주의, 물질만능주의에 푹 빠져 잘 먹고, 잘 놀고,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 자체가 지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부터 마치 부활 성야 미사 같을 천상 잔치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슬슬 다른 쪽 한발을 천상 쪽으로 들여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가난한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연습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것 저것 너무 복잡하게 따지거나 생각하지 말고, 전폭적으로 그분께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어머니가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좀 이상하다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하신 것입니다. 아이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덜컹 겁이 났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은 자폐 아동의 특징 중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말할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면 자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며칠 뒤,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아이와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양육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정리하느라 잠시도 쉴 수 없었고, 여기에 두 살 터울의 둘째까지 생기면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소통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말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기 모습을 깨닫고 아무리 바빠도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눈 맞춤이 자연스러워진 아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눈맞춤이 불가능해집니다. 이것도 봐야 하고, 저것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상대도 내 눈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느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자기를 몰라 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항상 유심히 바라보시고, 우리의 눈을 마주치십니다. 그 점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사람을 보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유심히 바라보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선이 이 한 번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유심히 그리고 눈을 마주치시면서 보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의 부자들처럼 보여주기 위한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과 눈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요?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모두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주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서로 눈맞춤 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톨스토이).
사진설명: 가난한 과부의 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