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이여, 설봉스님의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
내가 좋아하는 명구 중에 하나가 바로 맹자의 “서경書經을 온전히 믿는다면 곧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盡信書則不如無書)라는 구절이다. 특히 혜능스님 이후의 선서를 읽을 때 이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육조단경의 진위에 대한 남양혜충국사의 비판이 그러하고, 그 유명한 조주스님과 임제스님의 법거량도 또한 그러하다.
조주록에 의하면 설봉스님이 조주스님을 고불이라 연이어 찬탄하고 있지만, 정작 조당집이나 경덕전등록에는 이 공안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송대 대혜종고스님에 의하여 간화선이 확립되고 조주스님의 무자 공안이 천하를 풍미한 이후, 조사선의 위상을 고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주고불이란 호칭이 후대에 출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설봉스님이 위산스님을 추앙推仰한 고불고불은 그의 진실한 안목에서 흘러나온 수자의어隨自意語이고, 조주스님을 고양高揚한 고불고불은 조사선을 제일의第一義로 삼고자 했던 후기 조사들을 위한 설봉스님의 수타의어隨他意語라 할 수 있다. 조주록에 전하는 고간한천古澗寒泉 공안을 살펴보면 이러한 대비가 더욱 명확해진다.
원문: 남방에 어떤 스님의 내왕으로 인하여 거량한 것이다.(因有南方僧來擧)
설봉에게 물었다. “고간古澗이거나 한천寒泉일 때는 어떠합니까?”(問雪峰 古澗寒泉時如何)
설봉이 답했다. “부릅뜬 눈으로도 밑바닥을 보지 못하느니라.”(雪峰云 瞪目不見底)
학인이 물었다. “마시는 자는 어떠합니까?”(學云 飮者如何)
설봉이 답했다. “입구멍으로는 들어가지 않느니라.”(峰云 不從口入)
조주스님은 이 거량을 듣고서 말했다. “입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콧구멍 안으로 들어가겠구나.”(師聞之曰 不從口入 從鼻孔裏入)
그 스님이 다시 조주스님께 물었다. “고간이거나 한천일 때는 어떠합니까?”(其僧却問師 古澗寒泉時如何)
조주스님이 말했다. “쓰다.”(師云 苦)
학인이 물었다. “마시는 자는 어떠합니까?”(學云 飮者如何)
조주스님이 말했다. “죽느니라.”(師云 死)
설봉은 조주스님의 이 말을 듣고 찬탄했다. “고불이로다. 고불이야.”(雪峰聞師此語 讚云 古佛 古佛)
설봉은 이후에 이 공안으로 인해서는 대답하지를 안했다.(雪峰後因此不答話矣)
나의 견해: 이 거량에서 대중이 흔히 놓치기 쉬운 지점은 바로 학인이 던진 질문 속에 담긴 경계이다. 고간古澗은 태고적의 정취를 간직한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시냇물이고, 한천寒泉은 뼛속까지 한기가 돋는 샘물이다. 학인이 금백수청金白水淸하여 일점의 망념도 없다. 석간수石間水처럼 백청白淸하다. 이 경계를 묻는 것이다. 자신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수행 경계를 은근히 자랑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고간이나 한천이란 대상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묻는 학인의 현전하는 정해淨解 경계를 호지護持함에 패궐이 있다. 원각경의 다음 경구는 이 고간한천의 병폐를 정확게 짚어낸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노심초려勞心焦慮를 영원히 끊고 법계의 청정함을 얻었더라도, 바로 그 청정한 견해가 자기 수행에 장애가 되고, 이 때문에 원각에 자재하지 못하면, 이를 범부의 수순각성隨順覺性이라 일컫느니라.”(若復有人 勞慮永斷 得法界淨 即彼淨解 爲自障礙 故於圓覺 而不自在 此名凡夫 隨順覺性)
이 경문의 깊은 뜻을 밝히고자 함허스님의 원각경설의를 인용하여 해설로 삼고자 한다. 직역한다. 대의를 취하라.
“만일 심중에 노려勞慮를 영단永斷하고 바로 자성의 정체淨體가 현현함을 증득하면 일체가 진실로 청정하다. 이때 다시 정견淨見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당처에서 해탈하고 진정眞正한 수순隨順을 성취한다. 노려를 비록 영단할지라도 정해淨解가 현전하면 바로 그 정해가 뒤집혀 망경妄境이 되며, 다시 원각의 정성淨性을 저절로 장애한다.”(若得心中 勞慮永斷 則性淨體現 一切眞淨也 於是 更不起見 則當處解脫 成眞隨順 勞慮雖斷 淨解現前 卽此淨解 飜成爲妄 還自障碍圓覺淨性)
학인은 정해淨解가 현전하는 고간한천의 경계를 탐착함으로써 오히려 원각에 자재하지 못하게 된다. 설봉스님은 이 학인의 정해가 현전하는 경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 “부릅뜬 눈으로도 밑바닥을 보지 못하느니라.” “입구멍으로는 들어가지 않느니라.”라며, 되받아친다. 주객이 끊어진 그 절대경지를 눈이나 입이라는 육근을 써서 휘날린다. 이는 설봉스님의 진실한 안목이 투영된 수자의어隨自意語이다. 반면 조주스님은 학인이 빠져 있는 정해淨解의 감옥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쓰다.” “죽느니라.”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거친 일상어로 응수한다. 그 정해를 애착하고 안주하는 그 순간이 곧바로 원각의 정성淨性을 장애하는 병통임을 일깨워 준다. 이와 같이 학인의 집착과 병통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조주스님의 기봉이야말로 수타의어隨他意語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층루를 더 올라가 원각보성圓覺寶城의 진면목을 바라보자. 역대조사 중에 고간한천의 직절直截한 경계, 바로 그 온전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도 또한 오로지 그 경계를 언어와 비유로써 짐작하고 인지할 따름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인간의 사량과 언설을 초월하여, 삼라만상의 유정과 무정이 통째로 토해내는 무정설법을 온전히 알아들을 만큼 그에 상응하는 안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간에서 칭송받는 조사들마저도 정작 그 실상을 제쳐둔 채, 변상과 변죽만 건드리고 서로 힐난하며 자가도취에 빠져 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바로 또 하나의 대장경, 곧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광대무량한 조사어록의 출현이다. 이 때문에 묻는 학인도 또한 그 실상은 질문하지 않고, 그저 정해가 현전하는 그 경계만 가지고 질문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 글의 첫 화두를 거두어들인다. “서경을 온전히 믿는다면 곧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 책이란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맹목적盲目的으로 믿는다면 저자의 패궐에 함께 파묻힐 것이고, 지레 믿지 않는다면 현성이 치열하게 도달한 경계를 단 한 모금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양단의 기로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느냐?”
“바로 명경지수明鏡止水이고, 무의주지無依住智니라.”
마음은 명경지수와 같아야 하고, 지혜는 어디에도 머물거나 의지함이 없는 무의주지라야 또한 옳다. 나의 처방이 이와 같다. 이 처방은 불교수행의 핵심인 정혜의 가르침을 추호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의 정혜를 등불 삼아 후대 조사들이 덧칠한 조주고불의 허상을 명백하게 간파하여 제시한다. 이에 비로소 이 글의 제명을 “고불이여, 설봉스님의 수자의어隨自意語와 수타의어隨他意語”라 당당히 천명한 것이다. 이 글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다시 한번 원각경의 정수를 인용하여 증명으로 삼고자 한다.
“선남자여,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구幻垢와 같은 줄 알라. 구상垢相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이 청정하니라.”(善男子 當知身心 皆爲幻垢 垢相永滅 十方清淨)
“선남자여, 이 보살과 말세중생이 제환諸幻을 증득證得하여 영상影像을 제멸하기 때문에 이때 무방無方의 청정을 얻나니, 무변허공의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善男子 此菩薩及 末世衆生 證得諸幻 滅影像故 爾時便得 無方清淨 無邊虛空 覺所顯發)
불지를 증득하기 이전의 모든 행위는 결국 무명의 변죽을 울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 무명을 영원히 끊어낼 때 비로소 원각의 진면목이 눈앞에 현현한다.
무변허공無邊虛空이여, 원각의 현발이로다.
고간한천古澗寒泉이여, 원각의 현발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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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선생 께서는 수행자 이십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