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습명(鄭襲明)-石竹花(석죽화)(패랭이꽃)
世愛牧丹紅(세애목단홍) 세상 사람들 붉은 모란을 사랑하여
栽培滿園中(재배만원중) 집안 뜰 가득 심어 가꾸는구나
誰知荒草野(수지황초야) 누가 알까 거친 들녘 풀밭에도
亦有好花叢(역유호화총) 예쁜 꽃들 떨기져 있음을
色透村塘月(색투촌당월) 모습은 마을 연못 달에 어리고
香傳隴樹風(향전농수풍) 향기는 언덕 나무 바람에 이는데
地偏公子少(지편공자소) 외진 땅에 귀한 분 없어
嬌態屬田翁(교태속전옹) 고운 자태 시골 노인이 볼 뿐이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모란꽃은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탐스럽고 아름답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앙ㅆ고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하였다. 시인이 살았던 고려 중기에도 뜰안 가득 심어 감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그러나 예쁜 꽃이 어찌 모란뿐이겠으며, 곁에 두고 사랑할 만한 꽃이 어찌 모란뿐이겠는가?. 시인은 들에 핀 패랭이꽃, 즉 석죽화의 고운 자태를 모란에 못지않다고 말하고 있다. 자태는 달빛 아래 연못에 비치어 아름답고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향기가 묻어 나온다. 모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단지 귀한 이가 찾아오지 않는 들판에 피어 시골 늙은이의 눈에나 띌 뿐이다. 알아봐 주느냐 마느냐는 상대에게 달려 있고, 미덕은 나에게 있으니 서운해할 것이 없다는 말도 있다지만, 눈에 띄지 못하여 아름다움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시인은 안타까웠나 보다.
정습명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지냈는데, 그가 한림원의 벼슬을 제수받게 된 것이 바로 이 시 덕분이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파한집과 동사강목 등의 기록에 의하면 궁문을 지키는 관리가 이 시를 외자 당시 임금인 예종이 듣고는 감탄하여 정습명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단 40글자가 출세의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정습명은 능력은 지녔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초야에 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패랭이꽃에 비유하였는데, 결국 이를 통해 왕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겸양의 미덕을 갖춘 사람을 인정해 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잘 드러내고 포장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출세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겉으로 화려한 것과 완성된 결과만이 주목을 받고, 내재된 역량이나 결과를 이루는 과정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토대가 되어 양분을 빨아들이고 줄기가 이를 전달하는데도, 그 달콤함에 대한 찬사는 오직 열매만이 차지하고 있다. 화려함과 성과만이 가치 있는 일로 여겨져 주목받기에 기초와 기반이 되는 일들이 등한시되고 있다. 학문 분야에서도 기초 학문이 외면당하고, 산업에서도 1차산업이 천시되고 있다. 튼튼한 토대가 구축되지 않고 과정이 충실하지 않은 상태의 결실은 부실하기 마련이고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주변의 조명과 달콤한 열매의 유혹에서 우리는 쉬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듣하다.
들꽃은 들에 피어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뿌리는 땅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어도 제 역할을 다 한다. 수많은 들꽃은 이름이 없어도 또 누가 봐주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아름답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정습명[鄭襲明, ?~1151,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형양(滎陽)]-고려 전기에, 예부시랑,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 등을 역임한 문신. 영일정씨 형양공파(迎日鄭氏滎陽公派)의 시조이며, 아버지는 정후감(鄭侯鑑)으로 부호장(副戶長)을 지냈다. 주로 간관 직을 맡아보았던 정습명(鄭襲明)은 왕실의 사부로서 의종을 훈육하고 보필하는데 사명을 다하였다.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해 내시(內侍)에 보임되었다. 1134년(인종 2)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해 홍주(洪州) 소대현(蘇大縣)에 하천을 팠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다.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등과 함께 서적토벌(西賊討伐)을 도모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 · 임원애(任元敳, 任元厚) · 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며 홀로 사직하였다. 1142년 김부식의 집에 임시로 머물자 간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國子司業起居注)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예부시랑에 승진되었다. 1146년 『서경』의 「대우모(大禹謨)」를 강독하였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가 의종 대신에 둘째 아들인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이를 막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었으므로 인종이 승선으로 발탁해 동궁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왕이 죽을 때 의종을 잘 보위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148년(의종 2) 한림학사가 되고, 이듬해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 인재를 뽑았다. 1151년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는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의종은 즉위하면서 새로 내시를 발탁하였는데, 이들 중 주류가 한문(寒門) 출신이었다. 대표적으로 정함(鄭諴)과 영의(榮儀)를 들 수 있다. 의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또한 즉위 초반에 수창궁에서 격구를 관람하거나 직접 격구를 하기도 하였는데, 대간들은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며 정습명의 간언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존중(金存中) · 정함(鄭諴) 등의 무리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병이 들어 김존중이 대직(代職)을 하게 되자 자살하였다. 『동문선』에 세태(世態)를 읊은 「석죽화(石竹花)」등 3편의 시와 2편의 표전(表箋)이 전한다.
*石竹花(석죽화) : 패랭이꽃.
*花叢(화총) : 꽃떨기
*塘(당) : 못 당, 1.못(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2.연못, 3.방죽(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
*隴(농) : 고개 이름 롱(농), 1.고개의 이름, 2.땅의 이름, 3. 산(山)의 이름
첫댓글 누구를 위해 피어날까요...
돌 틈 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들이 주는 행복...
미소가 가득합니다...
석죽화라는 패랭이 꽃...꽃말은 순결한 사랑이라네요....
패랭이꽃의 꽃말이 순결한 사랑이었군요,
덕분에 꽃말 잘 배웁니다.
꽃말 배우기가 어려운데 이렇게 하나씩
공부하면 잘 기억되겠네요.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