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 사람: 정예서 <
wast47@hanmail.net>
날짜: 2010년 11월 10일 오후 2시 3분 40초 KST
받는 사람: 회원 <
spring@kt.co.kr>
제목: [함께성장연구원] 예서의 수요편지/용맹한 투사같은 당신답장받는 사람: <
wast47@hanmail.net>
햇빛이 너무나도 투명한 날씨군요. 당신이 막 차를 운전해 아파트 광장을 빠져 나가는 것을 봤어요. 십 오 년도 넘은 차를 당신 애마라며, 고집을 피우며 타고 있는데 저는 가끔 그 차가 복잡한 도심 한 복판에서 서 버릴까 봐 불안해집니다. 비라도 쏟아지는 날에 그렇게 된다면, 큰 낭패 아니겠어요.
삼 십여 년을 하루처럼 회사로 출근하는 당신 모습이 오늘따라 더 든든하게 여겨져요. 다들 불경기라고 하는데 일이 밀려 바쁘다는 말을 들으니 더 고맙구요. 서방님과 함께 시작한 비록 소규모이지만, 당신과 서방님의 성실한 모습이 몇 십 년 고객을 만들어 오늘이 있는 거겠지요.
원두커피를 한 잔 내려 습관처럼 별이의 방에 들어 왔어요. 시간순대로 걸려 있는 그 아이의 사진들은 언제 봐도 근사해요. 저를 닮아 오똑한 콧날, 당신을 닮아 단정한 입언저리, 길다란 팔과 다리. 이렇게 별이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우리의 멋진 작품이라며, 그 아이를 키우며 함께 웃던 우리의 웃음소리들도 어디선가 들려와요. 별이의 야구복, 모자, 방망이를 한 번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이렇게 앉아 있는 이 시간은 아직도 마음이 천 갈래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 우리 손녀딸, 돌잔치에서 혜인이는 정말로 예뻤지요. 우리 첫째 딸, 해님이만한 미인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어요. 사위도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잘하구. 겪어 볼수록 해님이는 결혼을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날 당신이 혜인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 봤는데, 아이가 칭얼대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사위가 혜인이를 받아 들 때까지 당신은 한동안 십팔 층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말은 안 해도 우리 부부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겠지요. 작년 이맘때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먼저 가버린 불효막심한 막내아들, 별이. 그 아이가 있었다면 제 누이를 좋아하던 별이는 제조카 생일 날. 그 잘 생긴 얼굴로 삼촌 노릇 한다고, 꽤나 바쁘게 그곳을 오갔겠지요. 당신도 저처럼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찌 모른다 하겠어요. 그렇게
애면글면, 오토바이를 타며 부모 속을 태우다가 드디어 취직을 했던 별이.
사고가 나던 그날 아침. 첫 직장 들어가서 첫 월급 탔다며. 자고 있는 당신을 깨워 며칠 후에 다가올 생일 선물 사라고 굳이 봉투를 내밀고 간 그 아이의 늠름한 어깨가 떠올라서 자꾸 눈가가 매워져요.
언제든 당신이 없는 틈을 타 별이 방을 말끔히 치워 보려구요. 그 아이 물건들을 보니 자꾸만 생각이 나서 안 되겠어요. 그러지 말라고 극구 말리는 당신이 없을 때 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연포탕을 끓이려면, 싱싱한 낙지와 박을 사러 노량진 수산시장에 다녀와야겠어요. 며칠 전에 당신 정기 검진 결과가 궁금해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당신 식사량을 더 늘려 체중을 좀 늘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군요. 제법 예전처럼 보기 좋았던 당신 모습이 별이가 가고 난 후, 식사량이 줄면서, 체중이 다시 많이 준 것을 걱정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정상 수치랍니다.
육 년 전 당신이 위암 3기라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 모두 말은 못 했지만,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어요. 위를 잘라내는 수술과 함께 몇 번의 대수술을 치러내며, 당신이 보여준 투혼은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당신 삼형제가 똘똘 뭉쳐 살아 온 그 세월만큼 쌓인 인내심과 결속력, 우리가족도 가족이지만, 아주버님이나, 서방님, 동서들이 보여준 그 마음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잘 알아요.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예인처럼, 붓글씨를 쓰고, 가끔 시도 쓰는 당신이 얼마나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지 그 덕에 지금 이 나이에도 제가 어딜 가든 곱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남편 잘 만난 제 복이지요. 제가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과 만나 산 세월이에요. 함께 있으며 서로 충분히 사랑하며 살았다고 생각되는 삼 십 여 년의 지난 삶.
여보. 당신 말대로 별이 방을 그냥 놔둬야 할까요.
제가 그것들을 보며 별이가 생각나 자꾸 울게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산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일에 익숙한 우리문화 때문에 좀 꺼림칙했던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 말대로 죽음이 삶과 다른 것이 아닌 삶과 같은 말이라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별이 방을 치우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하기야 외국 영화를 보면, 그네들은 망자의 방을 그대로 보존하며. 죽음을 일상에 두잖아요. 당신 말대로 그대로 놔둘 게요. 지금은 울지만, 언젠가는 그 아이가 우리에게 주고 간 것을 웃으며 기억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요.
오늘은 좀 바쁘군요. 당신에게 말은 안했지만, 오늘 동서들과도 잠깐 보기로 했어요. 당신이 차를 바꾸면, 꼭 그 차로 바꿀 거라는 차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당신 차를 바꿔주려 생활비에서 따로 떼어 삼년 동안 돈을 모았었는데, 형님과 막내동서도 다들 당신차가 걱정이 되었는지 좀 보태 준다네요.
형제들이 별이를 잃고 상심한 우리 부부를 위로해 주고 싶으신 거겠지요.
영업소에 진열되어 있던 차를 할부금 없이 싸게 현금으로 살 수 있다고 해서 다들 만나 같이 가기로 했고 아주버님과 서방님도 잠깐 오셨다 가신답니다. 그러니까 당신 몰래 번개를 치는 셈인 거죠.
동서들과 차를 계약 하고, 장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들어오려구요.
아참. 오늘은 야근 하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고 당신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잊지 말아야 겠어요.
어서 저녁이 왔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새 차를 보고 괜한 짓을 했다며, 잔소리 하면서도 기뻐할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요. 이번 주말에는 별이와, 해님이네 가족을 태우고, 가까운 강가에 다녀오면 좋겠어요.
거기서 혜인이에게 지난번처럼 당신의 그 엉터리 자작시를 읽어줘도 좋겠지요.
어쩌다 저는 이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걸까요.
삶을 지독히 사랑하는 당신, 병마와 싸워 이기고, 또 다시 그렇게 사랑하던 아들을 잃은 슬픔을 삭이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은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위급한 상황에서도 저를 먼저 챙기며 남자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아침입니다.
오늘은 제 어깨에 기대어 당신이 한 번쯤 큰 소리로 울어도 따라 울지 않으며, 당신을 안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별이에게 아빠에게 드디어 새 차를 선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이제 외출을 해야겠어요. 국물이 부드러운 연포탕을 끓이려면 물이 좋은 낙지를 사야하니 서둘러야 해요.
오늘 편지의 내용은 제 가까운 지인이 주인공입니다. 전년도에 이글을 구성했는데 그 사이 편지의 주인공은 갑상선 암이 발병하여 수술을 또 받아야 했습니다. 시련에 시련이 겹친 이 가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이분의 아내나 따님, 그리고 이분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할 일을 하며 가정을 지켜내는, 그 과정에서 사소하게 마음을 다치거나 상심하는 일이 생겨도 손을 꼭 잡고 가는 그네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할 일을 찾아할 때 시련은 시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가족을 통해 배웠습니다.
가족의 힘은 함께 하는 일상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결혼을 망설이는 싱글이 늘어나는 시점, 혼자이거나 가족과 함께이거나 시간의 속도는 같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지켜봐 준 시간의 힘은 훨씬 세어 그 에너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쌀쌀한 날씨지만 맑은, 오늘 처럼 서로의 희노애락을 비추어온 햇빛 같은 당신의 가족.
오늘, 따듯한 포옹을 나누시면 서로의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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