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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60,1-6>
예루살렘아,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2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고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 온다.
5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6 낙타 무리가 너를 덮고 미디안과 에파의 수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라.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3,2.3ㄴ.5-6>
형제 여러분,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들었을 줄 압니다.
3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의 별”>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 계시되었습니다.”
(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
(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분의 별”
(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께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기 때문에 가진 것을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닙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헤로데로서는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고 생각되면 다 죽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늘 근심합니다.
남의 탓만 하는 오늘의 정치판도 다르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
(야고 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야고 4,2)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은 그나마 지금 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길을 마다않고 예물을 준비하여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사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 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으니 신앙의 기쁨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서 더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 60,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찬송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하는 이유>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남았습니다.
바로 ‘경배’의 조건입니다.
지금까지 한 주일 동안 묵상한 것을 다 잊어버려도 오늘 것만 기억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경배’에 모든 조건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경배하다’란 단어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직역하면 ‘~ 앞에서 무릎을 꿇다’란 뜻입니다.
전에도 체나콜로에서 만난 페데리코 청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체나콜로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세 달만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으로 미사 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거의 마지막 미사에서 자신도 무릎을 꿇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때 체험한 느낌은 ‘평화’ 자체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그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나가고 싶었던 공동체에 3년 이상 머물고 있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미하려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실까요?
단순합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자신을 의사로 인정하는 이에게 의사가 됩니다.
한 번은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러저러한 것을 의사 앞에서 아는 척을 했더니 의사는 당신이 의사냐며 그러면 왜 찾아왔느냐는 듯이 기분 나빠했습니다.
그러면 그 의사의 능력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황금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황금을 봉헌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모든 것의 주인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십일조로 주님을 찬미 하는 이에게 당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더 많은 은총을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유향은 ‘기도’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하느님으로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몰약은 ‘죽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으려면 그 상대가 생명이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동시에 봉헌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다윗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할 때입니다.
다윗이 은총을 받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찬양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찬양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남들이 찬양할 때 졸면서였습니다.
신학생 때 창세기 연수에 들어가서 남들이 찬양할 때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컴컴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 이런 가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저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처음으로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다시 받고 싶어서 지금도 찬양을 듣고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찬양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이것에 비해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그레고리안이나 모차르트의 곡에 가사를 붙여 부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새롭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의 하느님 체험을 위해 주님을 경배하는 분위기를 더 많이 더 자주 더 정성껏 조성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로만 주님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고백해봅시다.
그러면 주님을 만납니다.
<지식채널e>에서 ‘엄마가 울었다’의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입니다.
한 중학교에서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쓰고 오라는 실험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해 하다가 나중엔 부모님의 보지 못하던 면을 보고 집이 행복한 곳이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한 아이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난 엄마 아빠와 같이 산다. 너무 당연한가?
우린 같이 산 지 얼마 안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엄마 아빠는 오랫동안 같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돌아오셨다.
난 너무 기쁘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실 때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행복해요’
엄마가 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아, 양파 때문에 그래.’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다.”
자녀가 부모를 칭찬하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같습니다.
부모를 칭찬하니 부모의 참 모습을 보게 된 자녀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을 찬양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뵈옵게 됩니다.
그러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에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억지로라도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모를 칭찬해 드리십시오.
그분들의 진정한 면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이 당신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
태안 와서 산 지 벌써 만 3년이 다 되어갑니다.
도심에서 살 때도 좋았지만, 시골 와서 사니 참 좋은 게 많습니다.
아담한 3층 소성당 밖으로 찬란한 일출도 볼 수 있습니다.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일몰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밤만 되면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잔치를 벌입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산골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주님 공현대축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별>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는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을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동방’은 페르시아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일 수도 있습니다.
‘박사’ 라는 말은 원문 단어의 뜻대로 번역하면 ‘점성술사’인데,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천문학자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별’이라는 말은, 실제로 어떤 별이 아니라 메시아 강생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징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묵시록을 보면,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의 신비는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이다.”(묵시 1,20) 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본 별은, 어쩌면 별처럼 보이는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별은 왜 베들레헴으로 직행하지 않고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을까?
또 왜 예루살렘에서는 모습을 감추었을까?
그것은 박사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 임금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통치자로서 메시아 강생을 공식 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놀라기만 하고 그것으로 그쳤을까?
복음서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메온’과 ‘한나’ 같은 사람들은(루카 2장)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듣고서 메시아를 직접 만나게 되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헤로데의 반대쪽에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을 그냥 흘려들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금 관심을 갖다가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당황하고 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잠시 안 보였던 별이 다시 나타난 것은 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예루살렘에 선포하는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별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박사들을 안내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지만, 출산 후에는 방을 구해서 옮겨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사들이 본 메시아는 평범한 ‘갓난아기’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합니다.
박사들의 ‘기쁨’은 그들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 기쁨은 계시를 받기 전부터, 즉 표징을 보기 전부터 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자신들의 믿음과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예물이 세 가지여서 동방 박사들을 세 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후대 사람들의 해석일 뿐이고, 박사들 자신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정성을 표현하려고 가장 귀한 예물을 바쳤을 것입니다.
‘별’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필리 2,12ㄷ-15)
신앙인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과 응답은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하나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 말씀에서 아버지를 찬양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충실하게 실천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빛이신 주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등불이며 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순례 여정 - 꿈의 순례자들>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시편 72,11)
방금전 부른 복음전 화답송 시편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영화배우 나문희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영원한 현역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삶에 감동했습니다.
1941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3세, 방송인으로 데뷔한 지 만61년이니 참 대단합니다.
“배우로서 중요한 건 평소 삶이요 일상의 감각이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연기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잖아요. 나이 들수록 웃음이 있는 역할이 중요해요.”
“이렇게 힘들어도 좋아하는 연기라면 다음 생에도?”
“아우, 싫어요. 사는 거 자체가 힘든데 왜 또 태어나요.”
명랑한 할머니 배우에게서 듣는 이 말보다 더 큰 공감과 위로가 또 있을까.-
공감이 가는 일부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배우의 약력을 일별해 봤더니 참 치열한, 가열찬 아름다운 제자리에서의 제대로의 삶이였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종교를 봤더니 열심한 불자로 법명은 칠보화라 하지만 웬지 천주교 교우같은 느낌을 주는 배우입니다.
이런 삶이라면 말그대로 성공적 순례 여정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 멀리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나선 ‘꿈의 순례자들’인 동방 박사들을 생각하면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이미 9년 전 2014년 안식년 때의 순례여정이었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내적 순례여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벽 강론쓰기를 마친 후 4시부터 4:30분 아침성무일도 시작전까지 묵주기도를 바치며 수도원 경내를 걸을 때는 그대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계속임을 실감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중 가장 행복하고 설렜던 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새벽마다 일어나 강론쓰고 미사드린 후 아침 일찍 이마에 헨드랜턴을 하고 순례 여정을 떠날 때의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주님의 집을 향해 떠나는 ‘떠남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꿈의 순례자’되어 영원한 꿈을 상징하는 산티아고를 향해 도반과 함께 떠날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시편 122,1)
도보 순례 여정중 가장 많이 끊임없이 기도로 바쳤던 시편 성구 노래였습니다.
지금도 뚜렷이 각인된 순례 여정의 네 요소, 1. 목적지, 2. 이정표, 3. 도반, 4. 기도입니다.
또 그동안 참 많이도 인용했던 늘 새롭게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내 삶의 순례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계절의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자신의 현재 삶의 시점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거품이나 환상은 사라질 것이며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우리의 인생 순례 여정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꿈의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 예수님을 뵈올 베들레헴 ‘꿈의 목적지’가 분명했기 때문이요, 살아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별의 인도’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고정불변의 자명한 주님의 별, 진리의 별이 아니라, 깨어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살아 있는 이정표인 주님의 별입니다.
예수님 탄생하신 베들레헴 지근 거리에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 그 누구도 이 주님의 별, 진리의 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먼 타지에서 온 이방의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혼비백산 허둥대는 모습들을 보세요.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바, 복음의 동방박사들이요 오늘 순례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나타나는 살아 있는 이정표, 우리를 인도하는 주님 진리의 별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또 주목할 바 동방박사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혼자라면 그 먼 이방에서 끝까지 순례 여정에 충실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 꿈의 순례자들인 동방박사들은 함께 깨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주님의 별을 찾았을 것이며, 은총의 선물처럼 나타난 별의 인도에 따라 순례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했을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주님을 찾는 모든 꿈의 순례자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세대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가 이방의 동방박사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계시됨을 바오로 사도가 명쾌하게 밝힙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꿈의 순례여정에 충실한 교회내의 꿈의 순례자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산전수전, 온갖 고난의 순례 여정후 마침내 별의 인도에 따라 꿈의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흠숭의 ‘경敬’이 사라진 개탄스런 현실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중에 신학했다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회복해야 할 경배敬拜, 경애敬愛, 공경恭敬, 경천敬天, 경건敬虔이란 아름다운 삶의 자세들입니다.
이들 동방박사들이 얼마나 깨어 한결같이 기도에 충실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들은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참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이 우리에게도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과연 오늘 여러분은 오늘 무슨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시겠는지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보다 더 좋은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을 바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의 믿음, 희망, 사랑의 보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복음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이들 동방박사들은 새삼 기도의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꿈에 주님의 지시를 받았다니 끊임없는 기도중에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 했던 삶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자기 고장에 돌아간 동방박사들의 삶은 예전과는 정말 달랐을 것이며, 이제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외적 순례 여정이 아닌 내적 순례 여정의 ‘정주定住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좋은 날입니다.
우리는 꿈의 순례자로 '매일' 순례 여정중 주님을 만나 힘을 얻고 주님 진리의 별의 인도따라 또 새롭게 순례 여정에 오릅니다.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순례여정을 압축합니다.
매일 찾던 주님을 매일 만나고 또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더불어 형제 도반들과 다시 새롭게 내적 순례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집에 귀가할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꿈의 순례 여정에 꿈의 순례자들인 복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살아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제가 태어난 60년대에 주변에서 자주 듣던 말이 있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말입니다.
노래로도 들었습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노래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문화, 예술, 스포츠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잘될 겁니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갑니다.
“너 때문이야, 나는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우린 할 수 없어.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운동이 있습니다.
“내 탓이요.”운동입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고백의 기도에 나오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스티커로 만들어서 차에도 부치고 다녔습니다.
‘내 탓이요.’라는 말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불신과 비난 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1984년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행사 진행 요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상징하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 땅에 빛을’이었습니다.
1784년이 시작된 한국 가톨릭교회는 100년이 넘게 박해를 받았고,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습니다.
성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땅에 빛이 되었습니다.
1989년에 제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5학년이었습니다.
저는 괌에서 온 순례자들을 안내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당시 성체대회를 상징하는 표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체대회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2014년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 성소국장이었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 위원회 영성신심분과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복식을 상징하는 표어를 정하면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말이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103위 시성식의 표어가 “이 땅에 빛을”이었기에 “일어나 비추어라”는 124위 시복식의 표어로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복식의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로 확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병자를 고쳐 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비추어야 할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게으름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라는 비겁함의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서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멀리 동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보았는데,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헤로데 왕도, 율법학자도, 바리사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별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욕망의 별을 보았습니다.
교만의 별을 보았습니다.
거짓의 별을 보았습니다.
그런 별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별은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별을 보고 있다면 우리들 또한 동방박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예수님께 선물로 준비했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을 상징하는 표어는 무엇이면 좋을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는 “공동상속자”라는 표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어렸을 때 일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새 구두를 맞추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구둣가게에 갔습니다.
수선공은 레이건의 발 치수를 잰 뒤에 구두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둥근 것을 선택할지, 남들과 다른 특별하게 보이는 각진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망설이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 구두를 찾으러 오너라.
내가 만든 대로 구두를 신으면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일주일 뒤에 레이건은 완성된 구두를 보고 크게 실망했고 화가 났습니다.
완성된 구두의 모양이 한쪽은 둥글고 다른 쪽은 네모난 짝짝이 구두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 모습을 본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물쭈물하면서 똑 부러지게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짝짝이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 경험이 큰 교훈이 되어 레이건 대통령은 남에게 결정을 맡기지 않았고 스스로 신속하게 결정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결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때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미루다가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선택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일할 때이고 돈 벌 때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한가해지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뒤로 미룬 선택으로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셨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런데도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곧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그 먼 곳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헤로데는 자기 지위가 영원하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엄청난 범죄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선택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마련하십니까?
그 선물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위에 주님의 영광이 떠오를 것입니다(이사 60,1 참조).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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