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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자체도 워낙 좋고, 토론도 좋아서 댓글정리를 합니다. 이것도 어렵네요^^;; 누군가 주석까지 달면 대박일듯...
+_+
淸風溪 님 최초 답글
고구려 후기의 정치세력이 국내성 출신과 평양성 출신으로 구분된다는 논리는 '임기환' 선생님의 주장 이후 주류적 논지가 되
고 있긴 하지만 학자들 스스로가 인정하듯 '편의상' 구분지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그것이 커다란 흐름인 듯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내성 지역 벽화고분이 여전히 수준높게 조성되는 것은 맞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 평양지역
고분벽화의 영향력이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양의 정치적 위상이 우월하다는 사실의 단서임과 동시에 양지역
간 교류가 적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섣부른 이분법적 구도의 형성은 정치사를 단조롭게 만들수 있을 것 같은데요.
★明治好太王★
저도 편의상 구분 지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 귀족들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만큼 당연히 국내성쪽과 평양성쪽 간
에도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淸風溪
'을지문덕'은 그 등장과 활약상, 생몰년 등 어떤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때문에 '김원룡' 선생님 같은 경우 이를 중
국의 '위지경덕'과 같은 출신의 인물로 설정해보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자체의 전승자료가 전하지 않는
까닭이지, 정치적 사건을 통한 제거 따위로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낙랑 계열 중국유민세력의 경우 역시 다양한 해석이 상존
하고 있습니다만 대수 전쟁시대까지 이들을 '낙랑 왕씨'로 칭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 합니다. 낙랑이 고구려로 흡수되고 평양이
수도가 된 이후의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 가설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明治好太王★
을지문덕 같은 경우는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 하고, 그의 관한 민중설화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성들과 비교적 가까이
있던 계층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의 신흥 무장 세력 중 하나로 온달 같이 무로써 출세한 부류
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더 추론해보면 이러한 을지문덕은 전쟁 등이 있어야 공을 세워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기에 그의 정
치적 성향은 대외강경파라 여겨집니다. 낙랑계열은 제가 잘 모르겠으니, 좀 더 공부를 해야 겠습니다.
淸風溪
연태조와 고식의 연대는 어느쪽이 선후시대의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체로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추정하며,
따라서 막리지 자체는 여러명의 인물이 병임할 수 있는 직책이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식 세력의 위세가 연씨를 능가하였
다는 근거는 성급한 주장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이리거세사'는 '연개소문'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명백한
오류인 듯... 다른 사람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만, 신중한 검토가 있은 이
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본문 가운데 1번에 해당하는 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너무 많은 오류가 보여 더
이상은..
신농
음... 연개소문은 <<일본서기>>의 '이리가수미'가 맞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리가수미가 정변을 일으켜 이리거세사를 제거
하고, 도수류금류를 대로로 세웠다는 내용 아니던가요?
★明治好太王★
연태조는 신흥 귀족출신으로 강경파로 추정되며, 이리거세사는 이리가수미(연개소문)에게 제거된 것으로 볼 때 대외온건
파인 것을 알 수 있고, 전통귀족인 고식 가문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 살아남고 일정 이상의 권력을 지닌 것으로 볼 때 연씨
가문과 정치적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거나 혹은 중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추론을 해보면 영류
태왕은 고식가문을 통해 연태조와 이리거세사를 대립을 중재하였다고 추정되며 천리장성의 정치적 성격도 중재의 한 일환
으로 보이며 적어도 환권태자의 당나라 입조가 있기 전까지의 대대로는 고식으로 보이고, 환권태자의 입조는 이리거세사
가 대대로직에 오른 후로 봅니다.
중재를 하려면 적어도 연씨가문이나 이리거세사 보다는 세력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식가문이 중재 역할을 했
더라도 영류태왕대의 대외정책은 대체적으로 온건적이었던고, 이리거세사가 결국 대대로직에 오르는 것으로 볼 때 온건파
인 이리거세사와 고식가문의 세력 차이는 많이 차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씨가문이 카귀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연개
소문이 직접 머리를 숙이고 정변을 일으켜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현실을 보면 연씨가문은 이리거세사와의 세력차이
는 컸을 것입니다. 당시의 세력 구도는 고식가문>=이리거세사>>연씨가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성법맨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 많이 다른 점도 있어서 몇 자 씁니다. 일단 1,2,3번은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4
번은 분명 차선책으로 전쟁을 선택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일단 고구려 여건상 당의 인정이 필요했다고 전 봅니다. 영류태왕
정권동안 일단 당을 형식적이나마 상국으로 인정한 것은 사실이고 내부 불안정이 상당할 정도로 이른 이상, 일단 전쟁을 피
하고 싶었겠죠. 신라에 대해서도 김춘추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속은것처럼 할 정도니까요. 그러니 분
명 소수파 정권으로써 전쟁보다는 단기간이나마 당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5번은 분명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백제의 우위가 절정으로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전 봅니다.
신라입장에서는 방어전이고 전장도 신라영토에서 주로 벌어진 전투긴 하지만 대야성 전투를 제외하고 큰 전투는 전적비교
상 거의 다 신라가 이겼습니다. 즉 백제는 소규모 국지전에서는 압도적 우위를 보였지만 신라에게 대규모 전면전투에서는
연전연패를 하다시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전적 비교하면 23승 12패긴 하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2승 4패입니다.) 즉 제로섬
게임수준이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서 국력에서 절대우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 수군이 강하다고 해도 고구려 수군에 비해 절대우세라고 할 수 없고 육상에 의한 보급로와 해상에 의한 보급로
는 당시로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와 접한 국경이 백제와는 거의 3배 이상 길었습니다. 백제와는
오모리산성이나 낭비성 정도에서나 접경하거나 대륙백제 일부지역이나 접하지만 신라와는 추가령 구조곡이나 임진강 백리
장성 전체를 국경선으로 합니다. 단순 비교해도 투입해야 하는 병력 규모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배이상이 됩니다. 신라와
동맹을 한다면 백제전선을 감안해도 대당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병력수가 늘어납니다.
6,7,8번은 저와 의견이 같습니다. 특히 7번과 8번은 연개소문 개인 능력보다는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의 경제력 쇠퇴가 결정
적이었죠. 25년간 10회의 회전을 치른 마당에 고구려의 국가총동원 능력은 분명 642년경보다 떨어지게 됩니다. 잦은 대량전
사자 발생과 내투는 국력자체 소모정도가 극심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전략이 좋아도 국력소모가 심
각해지면 결국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2차세계대전 독일제국이 잘 보여줍니다.
간단히 봐도 645년경에 주필산전투와 661년 압록강 도하전 당시 전사자가 3만이 넘게 나오는데 지휘관 잘못도 있지만 결정적
으로 이미 고구려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주필산전투야 지휘관 잘못이 크지만 압록강전투는 지휘관보다 분
명 고구려 국력 쇠퇴의 단적인 예라고 전 봅니다. 도하전에서 그것도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기병대를 못 막았다는 것은 이미
전투력 저하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475년경 한강도하전에서도 백제군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아차산의 고구려군이 몽촌과 풍납토성으로 도하하는 것을 막지 못했적도 있습니다. 당시 백제군도 막장까지 갔으니까
요그리고 제 생각이지만 연개소문정권은 이미 해상방위에서 수세적인 입장을 결정한 것으로 봅니다. 수나라 수군과 달리 당나
라는 로테이션식으로 전투를 치렀지만 고구려군은 그런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대서양방벽과 같
은 사고를 가졌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상륙하면 무찌른다.(롬멜장군의 사고)식으로 해안방비체계를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선박소모량이 건조량을 따르지 못하는 655년 이후에는 수군활약상이 거의 나오지 못합니다.(대서양전투와 같은 상황)
첫댓글 엇..제 이리거세사 이리가수미는 제가 혼동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