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소쩍새 울어
진달래꽃 떨어지고
여름이면 천둥소리에
녹두꽃 피어나네.
가을 들국화 향기에 취해
고추 잠자리 하늘에서 춤추고
무서리에 오동잎이 떨어지면
초가집 굴뚝위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는
겨울이 시작된다네.
이제는 추억을 넘어
전설처럼 되어 버린
그리운 나의 초등시절이여!
저는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 벽촌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암스트롱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 여행을 할 무렵인 1968년 나의 우주와 같은 넓은 공간 풍산들을 가로질러 안동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금곡동 골짜기 언덕 집에 삼촌, 형님과 같이 3명이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중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촌놈은 안동시내에 와서도 할 수 없나 봅니다. 평화동이나 당북동 이런 큰 동네 놔두고 하필이면 금곡동 산골짜기 집을 얻을 게 뭐입니까. 그 때 평화동 철도 관사 있는 데는 요즈음 서울로 치면 강남 비슷한 부촌이었습니다.
안동시 금곡동에는 그 당시 상수도가 없어 동네 우물터에서 물을 길러 날라 밥짓고 빨래를 했습니다. 경안고등학교 뒷동산 사택에 앰뷸런스 비슷한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미국 선교사는 우물가에서 지하수를 먹는 우리를 무슨 아프리카 토인 비슷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이래 저래 안동시에서 때가 묻고 안동 아이들 비스무리하게 물들 때쯤인 1971년 안동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낙동강 강바람 맞으며 법흥교 지나 마뜰 벌판을 가로질러 다니기를 3년, 세월은 후딱 지나가고 열심이 공부한다고는 했지만 서울 법대 갈 실력이 안되고 논팔고 소팔아 육남매 교육시켜야 할 형편에 서울 사립대학은 엄두도 못내어 할 수 없이 대구로 와서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고난의 길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입니다. 사법고시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즈음은 1500명 정도 배출되지만 그 당시는 100명 내외로 선발되던 시절,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지금은 로스쿨이 시행되어 완전히 다른 제도가 되었지만, 신림동에 가면 무슨 고시학원이 있어서 족집게 처럼 잘도 가르쳐 준다는데 그때는 순전히 학교에서 좀 기본을 익히고 나면 산속 절로, 마을 정자로, 사설 고시원으로 책보따리, 이불 보따리 싸들고 다니면서 공부했습니다.
다른 대학생들은 미팅이다, 뭐다 하면서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빨면서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무렵 전 회색빛 담장 법대 부속 기숙사 청운재에서, 고향의 정자 인천서당에서, 팔공산 도학동 권씨 고시원에서, 경기도 청평 호반 송강고시원에서 흘린 땀의 대가로 1980년 6월 1일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차시험에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그래도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 없다. 3전 4기라고나 할까. 매를 맞으며 맺집이 생겨나고 떨어지면서 담금질이 되어 더욱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되었습니다.
그 때는 140명을 선발했는데난 열손가락 안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안동 풍천 시골에서 태어나 안동으로 중고등 나와 지방대 졸업하여 서울 올라와 유수의 명문대생을 제치고 상위권에 합격했던 그 짜릿함이란 몽매에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울 덕수궁 앞 사법연수원에서 2년간, 경기도 포천에서 3년간의 군법무관 생활을 마치고1985년 9월 1일 강원도 원주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원주 기차역 앞 법원에 내려 넓은 판사실에 들어갔을 때의 감회란 또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2년간 원주에서 판사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구로 왔습니다. 그 때 서울로 갈 수도 있었는데 제가 대구 사람으로 인식된 것도 그 때 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전 대구 지역 향토법관이 되었습니다. 1993년 2월 대구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98년 2월부터 2년간 경남 밀양지원장으로 근무하였고 2000년 2월부터 6년간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였습니다. 이상이 총 25년 6개월의 법원 경력 명세서입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된가 보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길을 가자.
외부와 격리되어 담장 없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생활은 이제 청산하자.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쉬고 싶을 때는 한 열흘
놀러 떠날 수 있고
가입하고 싶은 사회단체가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가입할 수 있고
좀 헐렁하게 살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법관이기에 입방아에 오르는 생활은
이제 마무리 하자.
그 길이 때론
가시밭 같은 길이라도
사막 같은 길이라도
새로운 정열을 불태우며 길을 개척하자.
이제는 법관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공직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더 늦기 전에 들판으로 나아가
재야의 법조인이 되자.
첫댓글 눈물나는 역사책을 보는듯 하다
요즘 중학생들, 이런 말하면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