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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혼자 산것만 해도 벌써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죽어버린 내게 있어선 날짜개념따위는 상관없는데다가, 사실 세
야할 목적도 더 이상은 없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죽어버린지 오래고, 그들은 나와는 달리 이승에 머물지 않았
다. 세보진 않았으나, 대충 혼자인지 벌써 몇십년이 지났을거라고 생각된다.
내가 이승에 남은 것은 순전히 진현이 때문이었다. 우리는 많이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차마 진현이를 혼자 남겨두고 매몰
차게 떠나버릴수가 없었다. 마치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처럼, 나는 진현이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드라마에서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던 암에 걸린 나를, 그는 끝까지 곁에서 지켜주었으니
까. 말기에 발견하게 되서, 사실 나을 가능성은 없었고, 그때 한창 약혼까지 했던 우리는 절망에 빠졌다. 진현이는 수술을 시도
라도 해보자며 울었지만, 이미 그것이 틀렸다는것을 난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내가 죽을 날짜를 대충 예상할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을 간신히 넘긴 나이에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내가 죽은 후 몇년동안 진현이는 술로 나날을 보냈고, 하루
하루에 눈물이 빠지는 날이 없었는데, 그것을 보는 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처음엔 질투가 생긴건 어쩔수 없는 옛정 때문이었지만, 곧 그것도 슬픈 납득으로 이
어졌고, 차라리 이것이 잘되었다는 것도 알수 있었다. 그 둘이 약혼하던 날 나는 그의 곁을 떠났고, 그 이후로 다시는 그
를 본 적이 없다.
한번 이승을 뜨길 거부한 영혼들은 언제 다시 저승으로 갈 기회가 올지 알수 없다. 불과 몇 시간 후에 다시 기회가 오는 영혼들
이 있는가하면, 몇백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영혼들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조선시대 옷을 입은 어떤 령도 만났었으니까.
나 역시도 꽤나 오랜 시간을 이 집에서 기다렸다. 시골 중에서도 어느 산골로 어떻게 찾아 들어와 폐가 중 하나를 찾아, 줄창 기
다리기만 했다. 처음에 왔을땐 주인이 이사간지 얼마 안 되었는지 관리가 깨끗하게 되어있던 이 집도 마을이 점점 비고, 이 집
을 돌봐주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나서는 음침하게 변해버려, 이젠 구석에 거밋줄들이 지도를 그리듯이 빡빡하다.
거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초보 귀신일 적에 꼬마들이 가끔 이 집에 호기심으로 들어올때마다 그만 조금씩 들켜버렸
기 때문에, 이 곳은 귀신들린 집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의 코빼기조차 볼수 없다. 조금 남은 마을 주민들은 노쇠하신 분들이
라 미신을 많이 믿기 때문에, 이 집에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아예 요 앞으로는 다니지도 않는것이다.
철저한 외로움. 죽기 전에 알던 외로움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외로움이다. 실제로 영혼들 중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미
쳐버린 이들도 있을 정도니, 더 이상의 부가 설명이 없어도 어느 정도인지 알거라 믿는다. 그게 죽어서 무슨 처지인가 싶기
도 하고, 그저 연민뿐이다.
내게도 미칠것 같은 날들이 꽤나 있었으나, 어느 순간의 고비가 지나고, 더 이상 맘 속으로 날짜계산을 하는것도 포기해버리
는 무렵이 오자, 나름대로 꽤나 담담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때면, 가끔씩 나오지도 않을 눈물방울들이 복받쳐오는것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씁쓸한 웃음이 지어진다. 죽은 주제에 이게 뭔 청승이야, 하고.
그 날도 그런 날들 중에 하나였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차가운 가슴에서, 이젠 피도 없는데, 아픔으로 두근거리는것이 느껴
지던 아이러니한 날.
유난히 별들도 없었고, 하물며 이 시골에서 그 흔한 달조차 구름에 자꾸만 가려져서 아주 어둑어둑한 밤. 어느날부터 생긴 습관
은 별들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할수 없게 되자, 매우 지루해져서인지 청승을 떨게 된거다. 그런데, 그 날은 여느
날과는 달랐다.
“아 씨발 뭐가 이렇게 무거워?”
돼지 멱따는 목소리를 지닌 어떤 살이 디룩디룩 찌고 인상이 험한 남자가, 다른 남자 하나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
다. 그 남자의 얼굴엔 칼자국같은 흉터들이 자잘하게 가득했고, 손도 거친일만 한듯 투박했다.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건장
한 남자를 질질 끄느라 힘이 든지, 지방이 가득한 그 등짝엔 땀으로 셔츠가 눌러붙어 있었다. 죽어서 감각이 약해졌으니 망정이
지, 아마도 살아있었다면 땀 냄새로 인해 숨이 막혀 죽었을 정도로 비오듯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끌려 들어오고 있는 남자는 중상위 정도의 키에 구릿빛 피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운동을 하다 탄것은 아닌지, 겉으로 보기엔 근
육이 그다지 없는 몸매를 하고 있었다. 운동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높은 코에는 얇은 무
테 안경이 위태롭게 걸쳐져있었다. 이렇게 끌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천상 대학생쯤으로 보일 얼굴이어서, 무
슨 사연인지 궁금해졌다.
“야 이 새끼야, 편하게 드러누워 자고 있지 말고 일어나봐!”
험상궂은 남자가, 전혀 편해 보이지 않는데다, 자는게 아니라 기절한게 분명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
며, 그의 복부를 걷어차 깨웠다.
“억..”
“정신이 좀 드냐? 아 그러길래 그냥 말하랄때 말하라니까 왜 뻐팅기고 지랄이야 이새끼야. 그래서 얻은게 있냐?”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잘못한게 있는것 같았다. 밸이 꼬여보이는 그 멧돼지는 무테안경 남자에게 투덜거리며, 수시로 그를 걷
어찼다.
“대답안해?”
퍽.
“억..”
“그 년들 어디있냐니까?”
“몰라요.”
퍽.
“억!”
“아는거 다 아니까 말하라고.”
이쯤 되어서, 나는 멧돼지가 조폭쯤 될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몰라요. 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구요.”
“그런데 왜 숨겨줘 병신아?”
“…..”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여기 오기 전에도 꽤나 두들겨 맞았었는지, 광대뼈를 문지르며 멧돼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안 숨겨줬으면 그 여자들 지금쯤 죽였을거 아니에요?”
“이새끼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너 진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퍽.퍽.퍽!
“어어억..!”
“말하라고!”
“그 여자들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는데요!”
“킥킥..잘못? 무슨 잘못이냐고?”
조폭이 재밌다는듯, 구릿빛 남자를 바라보며 실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지방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는 내게
도 참 부담스러웠다. 저 지방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한 피가 들어있을까? 뭐가 들어있을까?
“말해주면 내가 널 죽여야하는데 어쩌지..아, 하긴 뭐 어차피 죽이려고 하긴 했구나?”
멧돼지가 낄낄거렸다. 더 이상 정보를 받아내는 것은 포기한듯,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를 몇번 더 찼다. 맞았
던 곳을 또 맞고 맞는 것인지, 남자는 힘든 신음을 잔뜩 흘렸고, 실제로 입 가에서 얇은 줄기의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어차피 죽일거니까 말해줄게, 어때?”
“…”
“사실 우리 형님이 사람을 하나 죽였걸랑. 근데 그걸 그 년들이 봤단 말이지? 죽여야하는데 어째. 도망갔잖아? 잡을수 있었는
데 니 놈이 숨겨준거야. 알지도 못한다며. 왜 숨겨줬냐? 난 사실 형님 명령보단 그게 듣고 싶어서 이 산중첩첩까지 끌고 온거
야. 알아?”
“…”
“어쭈. 대답 안해?”
퍽.
“으억!! 으으으..”
셔츠와 청바지엔 어울리지 않는 구둣발로 남자의 턱을 걷어차자, 남자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서 내굴
렀다. 보는 내가 다 화날 지경이었다. 보아하니 저 남자는 좋은 일을 한건데,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그것이 벌이 되는것이다.
“그럼 그냥 죽게 내버려둬요? 다 당신처럼 사는건 아니야.”
남자는 이미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걸 각오한 사람처럼, 이제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썼다. 바닥에 구르느라 잔뜩 헝클어진 그
의 갈색머리카락들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야 임마.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
“여기가 바로 귀신이 나온다는 그 집이잖아. 몰라? 이 집 근방에서 꽤나 유명해. 너 여기서 아무리 소리 질러도 아무도 안 올거
야. 그거 알아?”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모든걸 체념한듯 그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표정이, 예전 암 말기를 선고받고
서 병원 화장실 거울에서 마주봤던 내 모습같아 보여 가슴이 미어졌다.
“야, 내가 형님 명령을 따라야하긴 하거든? 그러니까 그년들이 어딨는지만 불어. 그럼 내가 고통없이 빨리 죽여줄게.”
“안 말해. 죽일거면 그냥 죽여.”
저런 남자가 요즘 세상에도 있다는게 신기했다. 내 때만 해도 남들을 위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줄
수도 있다니. 그리고 죽음 앞에서 저렇게 의연할수 있다니, 새삼스러웠다. 그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옅은 머리
색, 갈색 피부, 갈색 눈동자가 참 매력적이었다.
“아 이거 또 귀찮게 하네 진짜.”
멧돼지가 혀를 끌끌 차더니 남자를 한번 더 걷어찼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읊조리는 남자를, 그는 가차없이 패기 시작했다.
“으어억!”
고통스러웠다.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버린 내겐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도, 사람이 맞아 죽는 일을 목격한다는것은 살아있을때
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끔찍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까. 내가 살아있었더라면 경찰이라도 불렀을텐데. 전화기
가 없다면 하물며 나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라도 지를수 있었을텐데!
“으아아아아악!”
맞는것보다도 더 끔찍한 비명이 온 집에서 메아리쳤다.
멧돼지가 때리는 도중에 남자의 안경알이 부서져서 그의 눈을 찌른것이다! 벌써부터 눈을 부여잡는 그의 긴 구릿빛 손가락
들 사이로 물감인것마냥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으아악……악………”
“그러길래 말하랄때 좀 말하지.”
멧돼지는 혀를 끌끌 차더니, 별 상관없이 계속 알이 큰 반지를 낀 손으로 남자의 뼈 부위만 골라 강타했다. 최대한 아프게 죽이
려는듯했다.
구둣굽으로, 아직도 안구 때문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를 강타했다.
“으어억..”
피가 끓는 듯한 소리가 남자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멧돼지는 구둣굽으로 잔인하게 남자의 목을 지
져 밟았다.
“크..크어억!”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남자의 목에서 새어나왔으나, 그는 용케 아직도 살아있었다. 그런 그를 멧돼지가 잠시 가늠
하더니, 그의 이마의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자신의 구둣굽으로 문질러 밟기 시작했다. 살이 밀리고 까져 피부가 조금씩 벌겋
게 드러나는것이 보이는데도, 멧돼지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아아..무언가 해야하는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물리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원한이라도 안고 죽었으면 악령이 될지언
정 물리적인 힘은 있었으련만,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죽은 령이라,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심지어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
던 때 있었던, 신기가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보이던 능력도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죽은지 오래되면, 처음에 존재하고 있던 살아있는 세계와의 인연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신기
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점점 보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나를 드러내서 저 멧돼지를 놀래켜 쫓아낼수 있으면 좋으련
만, 하물며 그런 작은 무기도 없다니 가슴이 아팠다.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이제 이곳 저곳에 붉은 살을 드러내놓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뼈 색깔이 보이는것 같기
도 하는데다, 눈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뭔가 해야하는데!
“야 임마, 그냥 말해. 죽여준다니까 그러네. 아주 빠를거야. 걱정마. 고통없이 죽여줄게. 이 놈 이거 독하네? 야 이새끼
야, 눈 안 아퍼?”
멧돼지가 친절한척,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눈에서 피가 멎을 때도 됐을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어디
서 그렇게 피가 많이 나왔는지,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양이 많았다. 그의 신음 소리는 챈트처럼 변
해 집을 가득 채웠다.
집이 드문드문한 산골도 원망스러웠고, 아무것도 할수 없는 나 자신은 더더욱 원망스러웠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요새는 보기도 드문 심성을 가진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외로움을 덜어가고 나니 남
은 것은 무력함과 공포밖에 없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모조리 다시 살아나, 피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을 잃어간다
는 슬픔으로 변환되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다시 뛰었고, 피가 없음에도 얼굴이 분노로 붉어지는것이 느껴질 정도
였다.
“이 씨발새끼. 엄살이야 왜.”
퍽.
“으아악!!!!!!!!!”
멧돼지는 잔인하게도 남자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짓밟았다. 알을 빼지 않은 상태라서 분명히 더 깊이 박혔을것이다. 피가 분
수처럼 뿜어나오더니, 남자의 온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발작처럼 온 몸이 바닥에서 몇번 생선처럼 튕겨오르다가, 파르르, 하
는 떨림과 함께 잦아들었다. 남자는 이제 신음할 힘도, 안구를 가릴 힘도 없는지, 손을 내리고 풀린 눈으로 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죽기 직전의 눈빛이다. 더 이상 고통을 느낄수도 없는, 죽음의 바로 직전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말해 이새끼야.”
남자는 침묵했다. 하기사 이제 고통을 느낄수도 없으니, 말할 필요성도 못 느꼈으리라. 사실 아직까지 안 죽었다는게 신기할 정
도였다.
“말하라고!”
죽어가는게 분명해 보이는 남자를, 멧돼지가 이번엔 반쯤 웃으면서 걷어찼다. 더 이상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도 아닌것 같았
고, 그저 즐기는것이다. 즐겨? 저렇게 착한 사람의 고통을 즐겨?
몇십년동안 간직해오던 한기가 점점 강해졌다. 삶, 아니 삶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잃고 이승에서도, 저승에서
도 멀어지던 내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몸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내면에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나친 분노에 의해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서는 생각할수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갖고 있는지 몰랐던 냉기가 온 몸에서 발산되기 시작했다.
변화가 오고 있었다. 내 죽음을 예견했듯이, 이 변화가 어떤 것인지 알수 있었다.
영이 어떤 이유로서든지 원한을 품게 되면, 그 정도가 심하면, 죽은지 오래 되더라도 악령으로 변할수 있었다. 이미 한번 목격
한 적이 있었다.
진현이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시골로 찾아들어오는데, 골목에서 어떤 중학생쯤 되는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 옆에는 엄
마로 보이는 영이 하나 서있었는데, 그 영은 자신의 딸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왕따였다. 그 아이를 둘러싸고 딱 봐도 불량스러워보이는 아이들이 몇명 서 있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
을 주고받으며 그 여자아이를 줄곧 걷어차고 있었다.
“강아지야. 기어봐. 킥킥”
그 중에 한 남자애가 말했고, 그러면서 여자애의 교복 위로 더듬었다. 움츠러드는 여자아이를 다른 아이가 담배로 지져버렸
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아이, 그리고 옆에서 분노하고 있는 영혼 하나.
그 엄마로 보이는 영혼은 점점 푸르러지더니,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죽은게 아니라면 보통 사람과 똑같아 보이던 그 모습은 사
라져버렸다.
그녀의 죽은 눈에선 핏줄이 서서 온통 빨개졌고, 입이 찢어졌다. 멀리 서 있는 나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한기를 발산하던 그녀
는, 어느 순간 담배로 지졌던 남자애 하나에게 달려들어 그의 볼을 물어뜯었다.
엄청난 물리적인 힘이었다! 단 한번도 본적 없는.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근육과 함께 물어뜯을 정도의 힘! 원한의 힘이었다. 그
리고서 아직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녀석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이미 달아나고 있는 녀석들을 그 영혼은 놀라운 속도로 모두 추
격했다. 아무리 악령으로 변했더라도 원래 착한 영이었던 존재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순 없었으나, 채 1분도 지
나기 전에 다섯명의 남자아이들은 반 죽은것처럼 골목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피를 쏟으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도리도 없는채 공포로 떨며 주저앉은 여자애는 둘째치고라도, 바닥에서 뭔
가 생긴것이다.
구멍이었다. 악령이 된 엄마의 혼은 그 구멍을 혼란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딸을 돌아보았다. 구멍이 점점 커지며, 그 귀신
을 쫓아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혼의 눈에 인식의 빛이 들었다. 악령으로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지옥에서 그녀를 잡으러 온것이다.
그 귀신의 핏발선 눈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딸을 계속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
상 지켜줄수 없다는것이 한이 맺히는듯,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령에게는 눈물이 없다. 울고 싶어도 울수 없는 것이다.
구멍에서 부패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악령이 되어버린 그녀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들어가는 그녀는 끝까지 자
신의 울고 있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본 그 악령의 마지막이었다.
나도 지금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것이다. 밀려나오는 한기, 푸르게 변하는 피부, 피도 눈알에 쏠리는것이 느껴졌다. 입도 조
금 있으면 찢어질까? 변화가 다 끝나고 나면 난 저 멧돼지같은 새끼를 얼마나 다치게 할수 있을까? 그 다음에 나도 지옥으
로 끌려가버리는걸까?
그때,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의 동공이 커졌다. 그에게도 한기가 닿은것일까?
그가 정확히 내 방향을, 의지를 가지고 돌아보았다. 한쪽 눈은 아직도 안경알이 박힌채로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최대한 크게 뜨
고,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사이. 죽어가는 상태. 나를 볼수 있는것이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더더욱 커지더니, 나의 변화를 눈
치챘다.
그가 아주 자그마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변하지 말라는걸까..? 힘겹게 그가 입을 간신히 떼었다. 아까 목을 밟혀서인지, 목소리
는 잘 나오지 않았고, 죽어가는 상태라 힘든 모양이지만, 그는 최대한 애썼다.
손톱을 칠판에 긁는것 같은 애절한 노력으로 그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러지..마세요. 안 그러는게..더 예뻐요.”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려는 제스쳐를 취했으나, 그는 그러기엔 너무나 다쳐있었다. 야구 방망이로 맞아 떨어진 카나리처
럼, 그는 그렇게 누워있었다. 오히려 나를 달래주려고 애쓰면서.
순간 힘이 풀려버렸다. 변화는 곧바로 멈추었고, 모습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게 느껴졌다. 몇십년동안 흘리지 못했던 눈물
들이 쏟아져내렸다. 아니, 병신도 저런 병신이 어딨어?
그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구멍! 구멍이 생겼다! 내가 악령으로 변하던 것을 눈치채고, 지옥에서 날 잡으러 온것이다! 악령으로 변할때의 그 한기가 구멍
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안돼, 이 사람을 두고 가면 안되는데!
그런데 구멍의 하는짓이 이상했다. 저번에 봤을때는 바로 그 여자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갔는데, 이번엔 상당한 크기로 커졌
음에도 불구하고 멈칫멈칫, 나를 향하지 않고 있었다.
악령의 기운이 느껴져서 잡으러 오긴 왔는데, 내가 변화를 하다 멈추어버려서, 그 기운이 이젠 방안에서도 너무 희미하게 감지
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나왔다. 저번에 그녀의 발목을 끌어당기던 그 썩은 무언가가.
“씨발!! 저게 뭐야!!”
내가 악령이 될 적에도 신기가 바닥인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던 그 멧돼지는, 그 괴물이 나오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그
에게도 제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동물이었다. 사람의 팔을 갖고 있었는데, 수상쩍게도 팔과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엔 거슬릴정도로 서투른 실밥 자국
이 톱니 모양으로 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을 떼어다가 꼬매놓은 모양새였다. 몸은 어린아이 만한데, 팔은 성인 길이
라 움직일때마다 뒤로 끌렸고, 그것에 비해 입은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의 색은 거무튀튀했고, 눈은 없었다. 개미마냥 길지만, 달팽이처럼 무언가에 닿으면 진액을 묻히며 들어가버리는 이상
한 더듬이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눈 대신 쓰고 있는듯했다. 그것이 움직일때마다 벌레들이 한웅큼씩 떨어졌다. 구더기들이었
다. 썩은 몸을 먹는..
그것은 더듬이로 공기를 더듬었다. 나쁜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것이다. 그것이 내 쪽으로 다가오다가, 멈칫하고 고민하기 시작
했다. 분명히 내게서 영의 기운은 느껴지는데, 악령의 기운은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너..희들 중에..누구야.”
그것이 그 커다란 입을 움직이며 말을 꺼냈다. 끝이 갈라진 혀가 날름거렸다. 말을 하자마자 입 안에서 씹다만 고기같은 것
이 떨어졌는데, 그것에 긴 머리카락들이 붙어있는걸로 봐서 삼킬수 없었던 두피임에 분명했다.
“저..저게 뭐야..씨발..”
멧돼지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더니, 그것은 멧돼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듬이가 그의 방향 공기쪽을 더듬
었다.
“너구..나.”
그것이 악어같은 짧은 다리를 움직이며, 뱀비늘로 뒤덮인 듯하게 보이는 꼬리를 질질 끌고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난 아니라고! 씨발..이게 뭐야!”
그는 믿기지 않는듯 구릿빛 피부의 남자와 괴물을 번갈아보다가, 마지막 선택이었는지 어디선가에서 칼을 꺼냈다. 도대
체 그 캐쥬얼한 옷 어디에 숨겨놨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맞잖아..악..한 기운.”
괴물은 입맛을 다시더니, 내가 그 엄마의 영혼을 봤을때만큼 빠른 속도로 멧돼지에게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악!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덥썩 베어물더니, 막힌 비명을 지르는 멧돼지가 자신을 칼로 찌르든말든 관심도 없다는듯, 그것을 물고
는 구멍으로 다시 뛰어들어가버렸다. 구멍은 그것이 뛰어들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 다시 닫혀버렸다.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남자의 힘들어하는 숨소리.
마지막 경련이 그의 몸을 감쌌고, 떨 힘도 없다는듯 힘겹게 몸을 비틀던 그 남자는 곧 잠잠해져버렸다.
눈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영의 눈물이라 바닥이 젖거나 하는것은 아니었고,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조각나 금새 어디론가 사라
져버렸지만,
눈물은 눈물이었다. 눈물.. 내가 한참동안이나 잊고 살던 감정.
눈물이 눈앞을 가렸고, 한없는 절망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저렇게 천사같은 사람을 목격했으니, 이제 저 사람이 사라지고 나
면 공허할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야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머리를 내저었다. 눈물
이 흔들리는 고개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죽었다. 죽어버렸다.
그때, 가벼운 무게가 어깨에 느껴졌다. 눈물을 흩뿌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내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깨에 손을 얹
고 있었다.
“누나, 울지 마세요. 이제 안 아파요.”
그가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해져? 아.. 그는 혼령이 되었구나. 눈물을 훔치고 바라본 그의 모습은, 신체적으로 모두 치
료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슬펐지만. 그의 코에 걸쳐져있는 무테안경이 문득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혼령이 되었다면 사실 그
런건 필요없는데, 습관적으로 그걸 아직도 쓰고 있는것이다.
“누나, 아까.. 아까 누나 변했을때요. 그거 저 때문에 그런거죠?”
그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깊은 갈색 눈을 보자 거짓말할 용
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왠지 모두 알고 있을것만 같아서.
“으응..근데 니 탓은 아니야! 그냥.. 내가 화나서 그런거야.”
말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나보다 두세살은 어려보인다지만, 초면인데 이렇게 말을 쉽게 할수 있다니. 상황이 좀 웃기
긴 하지만서도..
“누나는 피부가 안 파랄때가 더 예뻐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까 죽어가면서도 날 안도시켜주려고 그렇게 웃었던게 기억이 나서, 목이 메였다. 바보. 그렇게 아팠
으면서도.
그때, 구멍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지옥에서 온 구멍이 아니었다. 천장에 생긴 하얀 원이었다. 영을 데리러 오는 천국의 부름.
“아..누나, 저거 나 데리러 온거예요?”
그가 자신의 눈을 살짝 덮는 갈색머리를 귀찮다는듯이 치우며 물었다.
“응, 맞아.”
“누나, 누나도 같이 가요.”
“나..난 같이 못가. 저건 본인만 들어갈수 있거든..”
“누난 어떻게 알아요?”
“난 귀신 된지 벌써 십년 하고도 더 지났을테니까.”
“아..그래요? 그럼 누나는 못가는거예요?”
“으응, 난 못가. 얼른 가, 지금 안가면 누나처럼 여기서 언제까지 머물러야 될지도 몰라.”
“아, 그럼..누나 잘 있어요. 아까 저 때문에 그렇게 화도 내주고.. 고마웠어요. 누나 참 좋은 사람 같아요.”
“그, 그래, 잘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더 묘한 종류의 슬픔을 눈에 담고, 마주 웃어주며 그 원
의 아래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눈물이 났다. 좋은건데, 저 애는 지금 가야 좋은건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시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니 귀신인 주제
에 주변에 추워졌다고 느꼈다. 아, 그래, 저렇게 가는구나.. 원에서 뿜어져나오는 하얀 빛이 그의 갈색 머리에 반사되어 눈이 부
셨다.
다시 혼자가 되는것을 실감하기 싫어서, 도저히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볼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서 걸었다. 이제 이 집에서
도 있을수 없을것 같다. 그의 핏자국과 고통을 바닥에서 항상 느낄테니까. 그럼, 이젠 다른 어느 산골로 가볼까.. 난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인데.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방에서 걸어나와, 대문으로 걸어갔다.
타다닥!
“아..”
혼령에게선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나올수 없는 온기가, 등 뒤에서부터 전해져왔다.
“누나, 나 못 가겠어요. 누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당하는거에도 그렇게 화낼줄 아는 바본데, 누나 혼자 두고 못 가겠어요. 나 그
냥 누나랑 같이 갈수 있을때까지 기다릴래요.”
내 어깨에 고개를 폭 파묻고 부끄럽다는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나 누나 처음 봤을때 그렇게 못생긴 모습 보여줘서 나 되게 놀랐어요. 그러니까 나 무섭게 만든 벌로 앞으론 맨날 웃어주기
만 해야되요?”
목이 메여서 말로는 답할수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이자, 그가 헤실거리는게 어깨 너머로 들려왔다.
그렇게해서 우리의 기묘한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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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둘의 뒷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나중에 제가 환상특급 메뉴에 올릴 로맨스 엽편소설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귀신도 연상연하커플이 대세인 건가요? ^^*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과 징그러운 묘사가 온새미로님의 글답습니다.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ㅇ^ 귀신도 트렌드죠 ! ㅋㅋ
꺄아~>_< 연하다아~ 뭔가 이쁘네요~
둘 다 착하고 예쁜 사람들이죠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귀여워요~ 꺄악~ >.<
그렇죠? ^ㅇ^
언제봐도 섬세해..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울고 싶어도 울수 없는 착한 악령들...너무 불쌍해요....ㅠㅠ 그치만 새로운 커플탄생을 축하합니다~~
불행한만큼 그 후에 온 행복은 더 기쁜 법이죠^ㅇ^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ㅇ^ 이 소설에서는 기묘한 해피엔딩이 되었네요 !
정말 기묘한로맨스의 시작이네요 뒷얘기올라오면 꼭볼게요 !!!
네 감사합니다 -
정말 아름다운 캐릭터네요~ 그들의 신비한 로맨스를 기대해봅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