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1. 18. 목요일.
날씨가 많이 풀렸다.
어제 고교 친구 전00 친구한테서 전화 왔다.
'내일 오전 11시에 석촌호수 놀이마당에서 만나자.'
오늘 오전 10시에 집을 나선 뒤에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놀이마당으로 나갔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바로 앞에 있기에 금방 도착했다.
무료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전00는 아들과 함께 왔다.
6명이 석촌호수 한 바퀴 반을 돌면서 이 지역의 지리 역사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역사 지식 :
나는 신00, 서00 친구한테 송파나룻터가 있었던 옛터를, 대청황제공덕비(일명 삼전도비) 위치 등을 알려주면서 역사에 관해서 조금만 소개했다.
* 삼전도비 : 병자호란(1636년 12월) 청나라 청태조 아골타는 조선조를 침략했고, 인조는 황급히 경기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남한산성에는 이렇다 할 식량 등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고작 40여 일을 버티지 못하고는 송파나룻터에 나와서 항복했다.
1637년 1월에 맨발로 서서 아홉번 굽신거리면서, 세 번 큰절을 올리면서 항복했다.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비'(삼전도 나룻터). 한국에서는 쪽팔려서 '삼전도비'라고 함
나는 1978. 5. 5. 부터 살고 있다.
나는 현재의 잠실지역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도 잠깐 설명했다.
예전 송파나루터가 있었던 강변이 지금은 천지개벽할 만큼이나 많이 변했다고 덧붙였다.
'석촌호수'가 개발 이전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본래 한강의 본류였으나 잠실지구로 개발하면서 모조리 흙으로 덮고는 한강 본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긴 곳이 현재의 '석촌호수'이다.
'송파나루공원'으로 안내해서, 예전의 '송파나룻터'를 알려주는 안내판 '빗돌' 위치를 알려주었다.
1925년 7월 대홍수 발생(을축대홍수).
현재의 송파구 신천리, 잠실리 일대의 1,000호가 물에 잠기여서 4,000여 명 주민은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지고 ....
송파나루공원 내에 있는 호수이다.
옛 한강의 본류였던 송파강을 매립하여 잠실도를 육지로 만들 때, 매립하지 않고 남겨 조성된 호수이다.
1978년 6월 28일에 완공되며, 석촌호수로 이름 지었다.
1971년 송파강을 메워서 잠실섬을 2.5㎢의 육지로 만들었다.
1973년 주변 터와 합친 11.2㎢에 잠실아파트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되었다.
잠실섬에는 새내마을(신천)과 잠실마을, 그리고 부렴마을(부리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지형도에 표시된 부리도 : 빨간 원형이다.
두 사진을 비교하면서, 오른쪽 사진에서 '석촌호수' 위치를 확인하기 바람.
개발 이전과 개발 이후는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다.
1971년 이전과 이후의 잠실 일대 비교
과거의 한강 지류와 본류가 현재와는 전혀 다르다!
송파나루(松坡津)
석촌호수 부근에 위치했던 나루.
조선후기 병자호란(1636 ~1637년) 이후부터 삼밭나루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송파라는 이름은 당초에 광주군 동부면 선리(船里)에 있던 마을이었다.
인조 25년(1647) 장마로 인해 마을이 떠내려가는 피해를 당한 이후 마을 사람들이 지금의 석촌호수 일대로 자리를 옮겨와 살면서 나루를 만들고 송파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
이 나루는 삼밭나루를 대신하면서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과 경강상인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송파장(松坡場)이 형성되었다.
한강 상류를 오르내리는 뱃길과 육로를 따라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올라오는 곡식과 목재·명주·솜·삼·과일 등
각종 토산물들이 집결되는 곳으로 늘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장소였다.
[출처] 민족사의 심장 서울이 목격해 온 大事件의 현장 Ⅱ
*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임.
사진과 설명문은 인터넷으로 검색.
용서해 주실 게다.
지나간 역사지리는 모두가, 제대로,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에.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석촌호수는 서호, 동호로 나눠지며, 한 바퀴 2,562m이다.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석촌동, 삼전동 일대에는 재래 음식물을 파는 식당 가게가 무척이나 많다.
지하전철 '석촌고분역'에서 전철을 탄 뒤에 종합운동장 쪽으로 가는 '삼전역'에 내려서 인근의 음식점에서 냠냠할 수 있다.
백00는 이 지역에서 1983년부터 살기 시작하여 이 지역을 잘 알기에 음식점을 안내했다.
석촌고분역 지하도로 내려가서 지하전철을 타고는 한 정거장에 있는 삼전역으로 빠져나왔다.
'흙과 사람들'이란 원예식물 가게 바로 곁에 있는 한식집으로 갔다.
뼈해장국 1인 8,000원, 막걸리 1병 4,000원. 아주 저렴한 가격이다.
뼈해장국은 쇠고기 뼈로 끓였다. 맛이 있는데도 나한테는 무척이나 입맛이 무척이나 매웠다.
친구들은 막걸리 술잔을 살짝 부딪친 뒤 마셨다. 나도 조금만 달라고 해서 한 모금 텁텁한 맛을 보았다.
나는 술에 아주 약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데도 오늘은 그냥 술맛을 알고싶었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집에 돌아온 뒤 전oo 회장한테 물어서 확인했다.
서00이며, 서00 씨와는 사촌간이란다. 그 분은 얼마 전에 작고하셨단다.
자주 만나지 않았기에 이제는 얼굴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세월에 와 있다.
앞으로는 더 자주 만났으면 싶다.
'재경 00고교' 회장 직위를 오랫동안 맡고 있는 전00 친구한테 늘 고마워 한다.
이런 모임을 늘 주선하고... 잘 이끌어 나간다.
귀 어둡고, 세상 물정에 어둔한 나는 덕분에 옛 고교친구들을 만나서 서로 악수하고, 서로의 안부를 알 수 있다.
귀가한 뒤 백00한테 전화를 거니... 전화번호가 틀리단다.
세상에나...
2.
'삶이 있는 문학-글'이었으면 싶다.
나는 늘 공부하려고 한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서도,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서도 배우고, 떠들고 먹으면서도 귀를 기우려서 더 자세히 알려고 한다.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컴퓨터를 켜서 방금 전 들었던 이야기 속의 낱말과 문구를 검색해서 공부를 더 한다.
나한테는 모두가 다 소중할 글감 소재가 된다.
1968. 1.에 대전에서 고교를 졸업했으니, 1965년 고교 입학한 때부터 59년기간에 걸쳐서 우정을 지금껏 이어간다.
친구 몇몇은 오래 전에 지구의 별을 떠났고...
특히나 나와 쌍둥이었던 동생은 고교 졸업 다음해인 1969년 8월에 .... 방학기간이라tj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저녁무렵에 울안 변소에 가다가 뱀 물려서 다음날 병원에서 죽었다. 남녀 고교 친구 가운데 가장 먼저 죽은 쌍둥이 동생.
오늘 고교 친구를 만나고는 죽은 동생을 떠올린다.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 앞산, 선산 아래에 작은 무덤 속에서 잠을 자겠지.
동생을 잃은 뒤에는 나는 고교동창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픈 기억도 너끈히 받아들일 수 있기에.
삶이 있는 생활일기는 나한테는 '문학-글'이 된다. 모든 게 다 .....
오늘도 일기를 쓰면서 글감으로 삼는다.
2024. 1. 18. 목요일.
첫댓글 최선생님 오늘
고등학교 친구분
들을 만나서 기분
이 좋으셨을 것 같
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는 청주에서 고
교를 졸업했으나
건강상 오랜동안
만남도 거절하고
묵묵하게 혼자서
살아갑니다.
고등학교 친구들
이 친구로 느껴지
지 않고 적으로 느
껴집니다.
고등학교 친구 중
에 지금 현재 某당
국회의원이고
중앙부처 차관과
중견시장을 역임
한 인간이 있었는
데 같은 고등학교 동기가 저하고 인사하라고 했는데 외면을 하더라구요.
그 인간은 某대법
대를 졸업하고 고
등고시를 합격했
다는 우월감 때문
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그 놈이
얼마나 잘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
다.
한번은 군대시절
rotc장교로 사단
사령부에 배치되
었는데 육사34기
출신 고등학교 동
기가 같은 소위로
근무했는데
아는 사람이 고등
학교 동기인데 인
사하라고 하니까
외면하더라구요.
계급은 같은 소위
이지만 ROTC16
기인 내가 아니꼬
왔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제대해서 사무관
이 되더니 국장
까지 승진하고
나서 젊은 나이
에 죽었습니다.
저도 송파구 석촌
동에 일찍부터 살
아서 석촌호수에
서 달리기도 하고
삼전도비도 자주
보았는데 국가적
수치심을 느꼈답
니다.
그 당시 어린 아들
은 지금 43살이 된 세월이 흘렀
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김 소설가님 스스로가 본인을 존경하면 됩니다.
국가와 사회에 죄를 짓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살면서도 자존심을 가지시면 됩니다.
몸이 성할 때에는 국가와 사회에 일했으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키운 공덕이 무척이나 소중할 겁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어 사회일꾼으로 거듭 나도록 하셨으니까요.
저 역시 직장 떠난 뒤로는 사회활동을 거의 다 접었습니다.
지금은 국가와 사회에 죄 짓는 짓거리는 안 하려고 하지요.
욕심 내지 않고도 살 수 있대요.
김 소설가님은 몸건강이나 더 챙기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