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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시대 이후의 안식일 준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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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 본 대로, 창조와 동시에 제정된 안식일은 기나긴 구약 시대를 통하여 단절 없이 기억되고 준수되어 왔음을 보았다.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의 포로 등 안식일 준수를 불가능하게 하는 극한 상황은 구속을 통하여 참 안식일을 주시는 안식일 주(主)가 되신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개입으로 극복되어 회복을 거듭하면서 신약 시대로 접어든다.
신약 시대 이후 현금(現今)까지의 안식일 준수 역사는 어떠한가? 앞서 살펴 본 일요일 준수의 역사적 기원이 불분명한 데 반하여 안식일의 기원과 준수의 역사는 이미 신, 구약에서 확인되고도 남았다. 이제는 아주 간단히 신약 성경을 벗어난 이후의 역사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제1세기 예루살렘 멸망 전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설교인 감람산 설교에서 서기 70년 있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이 되지 않게 기도하라”(마 24:20)는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 이후까지 계속될 철저한 안식일 준수를 확증하셨다. 마태가 서기 60년을 전후하여 마태복음을 쓸 당시까지 안식일이 지켜졌음이 논리적으로 분명하다. 십자가 직후에 안식일이 지켜진 기록과(눅 23:54, 55), 사도행전이 쓰여진 서기 61~63년경까지 안식일이 철저히 지켜졌음은 사도바울의 행적에서 뚜렷해진다(행 17:2; 13:14; 17:2; 18:4 등).
예루살렘 멸망 이후인 1세기말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켰음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는 유대인 회당의 기도문 가운데, 회당에 참석한 그리스도인을 색출하는 저주가 들어있음을 보아 확실하다. 또한 4세기 팔레스틴 출신의 감독 에피파니우스는 예루살렘 멸망시 도망쳐 나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때까지 계속하여 안식일을 준수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제2세기 바르-코케바 반란 이후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135년의 바르-코케바 반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구별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던 때 쓰여진 교부들의 문서들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요일에도 모이는 습관이 있었음이 바나바의 서신(The Epistles of Barnabas), 저스틴 마터의 글, 도마의 복음서(The Gospel of Thomas), 폴리카프의 순교(Mart-yrdom of Polycarp)등에 예시되어 있다.
제3세기 이후 제10세기까지
서기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이 반포된 후에도 안식일 준수가 계속 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동방의 많은 교회들은 일요일처럼 안식일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서방 교회들은 유대인의 제도를 반대하는 방법으로 그 날에 금식을 실시했다.”
364년경에 개최된 라오디게아 종교회의가 비록 안식일에는 일하고 일요일에는 휴식하라는 반 성서적인 결의는 했어도[29항], “안식일에는 복음서와 다른 성경을 소리내어 읽어라”[16항]고 규정하고, “사순절 동안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빵을 드리지 말라”[49항]고 한 것을 보아 안식일을 지키는 당시의 분위기를 신중히 고려했음을 알게 된다.
서기 386년과 387년에 동방의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yrsostom)이 행한 설교 내용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다나시우스와(Athanasius, 373) 키릴(Cyril) 등 여러 교부들이 계속하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신자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5세기의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Socratrs Scholasticus, 450)와 소조멘(S. H. Sozomen)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습관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그 때까지 계속되고 있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교회가, 안식일에 그 거룩한 신비를 축하하고 있는데도,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대의 관습 때문에 그런 일 하던 것을 그쳤다.”
8세기의 마지막 동방 교부 다마스커스(John Damascus, 749)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들어오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경고하는 글을 남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한 고백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단속이 심했던 서방 교회에서도 안식일을 금하는 규제가 종교회의와 교황들에 의하여 계속 강화되었음을 볼 때, 안식일을 준수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1세(Gregory the Great, 540-604)는 그의 교서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왜곡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거룩한 신앙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가르침, 곧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중지해야 한다는 그런 하찮은 교리를 여러분들 가운데 유포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내게 접수되었다. 나로서는 그들을 적그리스도의 설교자들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서기 97년 [혹은 797년]에 북아프리카에서 개최된 종교회의 (the Council of Friuli)의 결의 제 13항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농부들을 정죄하고 있다. 10세기에는 방금 개종한 불가리아인들이 교황 니콜라스 1세(Nicholas 1)에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여부를 묻고 있어, 안식일 준수의 관습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제 11세기 이후 제 15세기까지
서기 1054년 로마 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가 갈라질 때 논쟁이 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에 금식을 강요하는 로마교회의 태도였다. 교황 피우스 9세의 사절이었던 추기경 험버트(Humbert)는, “[안식일에 금식을 반대하는] 동방 교회 신자들은 유대인과 더불어 안식일을 준수하기로 선택했다.”고 비난했다. 직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루랄리우스(Michael Cerualrius)는, “그래서 우리는 주일[일요일]과 꼭 같이 안식일을 영화롭게 하고 지켜 그날에 일하지 말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썼다.
12세기쯤에는 일요일이 안식일을 거의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3)때 쯤에는 일요일을 일몰부터 일몰까지 엄격히 준수될 것과 범할 경우 벌칙까지 부과되었다. 그러나 이 깊은 중세기의 암흑 속에서도 진리의 등불은 아주 꺼진 것은 아니었다.
12세기를 전후하여 북 이태리와 남 프랑스 일대를 중심으로 알프스를 요람으로 삼고 열렬한 성서 위주의 개혁 운동을 전개한 왈덴스인들(the Waldenses)은 로마 교황권이 주도한 십자군과 종교재판의 표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활동한 지역에서는 놀랍게도 안식일 준수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북이태리 지방에는 파사기니(Passgini)로 알려진 신앙 집단이 형성되어 안식일 준수를 계속했으며, 북부 프랑스 일대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된 역사적 기록들이 보존돼 있다. 이 때쯤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일대에도 안식일 준수 운동이 일어나자 놀웨이 감독 볼트(Aslak Bolt)는 1453년 종교회의를 열어 이를 저지하기에 이르렀다.
제 16세기 종교개혁과 안식일 회복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루터의 선임교수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 칼스타트(Andreas Carlstadt)는 안식일에 관한 논제를 발표하고 루터에게도 안식일 준수를 강조했으나 종교개혁의 다른 주제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곳곳에서 로마 가톨릭의 학자들과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열띤 토론일 벌어지곤 했는데, 이 때에 일요일과 안식일의 준수의 정당성이 거론되었다.
1543년 칼빈의 동료 파렐(William Farel)은 솔본느 대학의 로마 가톨릭 학자인 퍼르비트(Guy Furbety)와 토론하는 자리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인간적인 제도들을 교회에 끌어들였다고 공박했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표는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주어진 권세로 주님의 부활 때문에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명령과 법규에 따라 일요일을 지킨다”고 전제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거든 “토요일에 안식하여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에 대해 파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날이 다 거룩하기 때문에 한 날 일요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휴식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가톨릭 학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 날이나 휴식한다면 큰 혼란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반박하고, 성경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시했으며, 일요일 준수는 오직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근거했음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전통을 배격하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한 종교개혁의 원칙은 이렇듯 일요일 준수에 부딪혀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재세례파 운동과 안식일 진리를 위한 최초의 순교
이와 같이 모순되고 일관성이 없는 종교개혁은 마침내 칼빈에 앞서 스위스를 중심으로 열렬한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재세례파(Anabaptists) 개혁자들에 의하여 진리를 찾게 된다. 재세례파의 여러 분파 가운데 16세기 후기부터 안식일을 준수하는 독특한 그룹이 생겨났다.
이들 가운데 본래 가톨릭 사제들이었다가 후에 루터교로 개종했던 글레이트(Oswald Glait)와 피숴(Andreas Fisccher)는 성경을 깊이 연구한 후에 재세례파로 개종했다. 그리고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한 끝에 안식일을 변경할 수 없는 십계명에 속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인간이 교회의 권위로 바꾸어 버린 것은 다니엘서(7:25)에 예언된 대로,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한 작은 뿔인 교황권의 역사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것은 콘스탄틴 황제와 교황 빅토르(Victor)라고 선언했다. 피숴는, “성경은 안식일에 대하여 그토록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만약 일요일에 관하여 그만큼 말한 구절들이 있다면 나는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증을 폈다.
“십계명은 안식일을 포함한 열 가지 조항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신약 성경은 십계명의 준수를 명령하고 있으므로 안식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야고보나 바울에 의하여 율법이 언급되었을 때, 그 율법은 안식일을 포함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은 율법을 세우기[롬 3:31] 때문에 안식일도 세우는 것이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모두 안식일을 거룩히 지켰다. [로마교회 감독]교황 빅토르(Victor)와 콘스탄틴 황제는 일요일을 지키도록 명한 첫번째 사람들이다. 십계명은 영원한 것이다”.
피숴(Fisher)의 동료인 글레이트(Galit)의 논증도 반박할 수 없도록 조리 정연했음을 당대의 기록에서 찾게 된다.
“글레이트의 가장 강력한 논증은 십계명의 수(數)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덟이나 아홉 계명이 아니라 열가지 계명을 주셨으며[신 4:13 ; 10:4], 모든 사람이 그것들을 모두 지켜지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도록 고수했다.… [그는]안식일도 함께 지켜지든지 아니면 다른 아홉 계명도 모두 거절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나 일반 개신교 모두에 대한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피숴 부부는 1529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부인은 그 당시 재세례파를 처형하던 방법대로 산채로 물에 빠뜨려 죽였고, 남편은 피신했다가 잡혀서 1539년 그의 집 성곽에서 떨어뜨려 죽게 했다. 글레이트는 1545년 잡혀서 1년 이상 옥에서 갇혔다가 밤중에 끌어내어 손발이 묶인 채 다뉴브강에 던져졌다. 목숨과 바꾼 안식일의 진리였다.
이토록 국가와 교회의 가혹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루마니아 서북부인 트랜실바니아(Transylvania)를 비롯하여 보헤미아, 러시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모라비아, 놀웨이, 스웨덴, 핀랜드, 스페인 등 각처에 안식일 준수가 끈질기게 대두되었음이 역사에서 확인되고 있어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17세기 청교도 운동과 제칠일 침례교의 탄생
종교개혁이 성숙해 가던 16세기 말 영국에 뿌리를 내린 개혁교회 신자들 가운데 보다 철저한 성서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청교도(Puritans)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든 제도를 철저히 배격하고, 일요일도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처럼 거룩히 구별하여 지켰다.
17세기 들어서면서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 가운데 이들 청교도 가운데 실제로 일요일 대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무리들이 나왔다. 1616년 런던의 밀 야드(Mill Yard) 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개최하던 청교도 목사 트래스크(John Traske, 1583-1636)와 교사였던 아내(Dorothy Traske)는 잭슨(Hamlet Jackson)의 도움으로 회중과 함께 성경적인 안식일을 깨닫게 되고 다음 해인 1617년에는 최초로 제칠일 안식일로 지키며 물에 잠기는 성인(成人)침례를 베푸는 제칠일 침례교(Seventh-day Baptist) 가 같은 곳에 세워졌다.
그들은 직전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트래스크는 해상 감옥에 갇혀 모진 고생을 겪다가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아내는 신앙을 굽히지 않고 16년간 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겪다가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그녀의 너무나 아름다웠던 옥중생활은 같은 때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시인 러브 레이스(Richard Lovelace)로 하여금 불후의 시를 쓰게 했다.
이렇게 세워진 제칠일 침례교 밀 야드교회의 초기 목사 제임스(John James)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하던 중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26일 두 번이나 찰스 2세에게 애걸한 그의 아내의 탄원도 묵살된 채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국은 그의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서 그가 시무 하던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는 결과가 무엇임을 신자들에게 경고했다.
같은 때인 1662년 국교의 목사였던 뱀필드(Francis Bamfield)는 신앙 문제로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 연구를 하던 끝에 안식일을 깨닫고 9년 형기(刑期)동안 부단히 안식일을 가르쳐 옥중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 교회”를 세우기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른 제칠일 침례교를 세웠으나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세 차례에 걸친 투옥 후에 70세 때인 1684년 2월 18일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안식일 진리의 고상한 댓가를 목숨으로 치뤘다. 진리를 위해 바쳐진 순교자의 생명은 씨앗이 되어 다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뱀필드 목사가 목숨을 바쳐 세운 “그의 교회로부터 지칠 줄 모르는 신자였던 멈포드(Stephen Mumford)가 안식일 진리를 심기 위하여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멈포드에 의하여 미국에 전해진 안식일 진리는 초기의 재림 신자들에게 전달되어 마침내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교회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뱀필드 목사는 생전에 안식일 준수를 옹호하는 두 편의 글을 남겼는데, 아래와 같은 대목도 있다.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시내산에서 율법[십계명]이 선포되기 전, 창조당시 아담에게 주신 것이요… 아담 안에서 온 세상에게 주신 것이다… 주 그리스도께서 매주일 제칠일 안식일을 평생 동안 준수하심으로써 넷째 계명에 순종하신 것은… 온전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완전한 의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신자들은 십계명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행하심에 있어 그분과 일치해야 한다.”
그의 형제 토마스 뱀필드(Thomas Bampfield)는 크롬웰 의회의 대변인으로 안식일을 옹호하는 글까지 썼다. 그러나 후에 그러한 그의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다.
엿새 동안 일하고 다시 맞은 안식일
이토록 생명까지 요구하는 희생과 수난 속에서 시작된 제칠일 침례교는 중세기 동안 무참히 짓밟혔던 안식일의 회복을 위해 피와 고난의 비싼 값을 치르며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해 나갔다.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 찰스 1세와 2세와 왕후들의 궁중 의사요, 수치료(水治療) 개발 등 의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챔블린(Peter Chamberlin, 1638)은, 주이트의 인용대로, “1651년부터 개인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여” 죽기까지 32년간 안식일을 준수했다. “후에는 안식일에 예배하는 교회[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에서 [두 번째] 목회 하였던 챔블린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참 안식일 예배가 일요일로 바뀌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해석을 지지하였다.… 챔블린은 이 본문이 넷째 계명[안식일]을 뒤엎은… 교황권에 대한”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안식일과 물에 잠기는 성인 침례를 옹호하는 논문들을 썼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의 공공연한 안식일 준수와 독립적인 신앙은 투옥 등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는 행위였으나 왕실 주치의사로서의 그의 독특한 지위와 러시아 황제까지도 그를 주치의로 초청한 대단한 명성은 그의 생명을 가까스로 보존시켰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안식일을 제창한 또 다른 명사는 죠셉 스테네트(Joseph Stennett, 1713)로 신학 박사였던 그는 뱀필드 목사가 목숨을 바쳐 세운 제칠일 침례교 피너스 홀(Pinner.s Hall) 교회에서 목회하며 신학 논문과 찬송과 작사로 신앙을 북돋았다. 그의 손자인 사무엘 스테네트의 이름으로 잘못 소개되고 있는 아래의 안식일 찬송은 그가 작사한 것으로 그의 마음에 사무친 안식일의 거룩함과 기쁨이 잘 드러내고 있다.
나 엿새 동안 일하고
1.나 엿새 동안 일하고 안식일 다시 맞으니
이 세상 생각 버리고 신령한 복을 누리네.
2. 내기도 향기 같아서 주 앞에 올라 갑니다
내 주께 받는 안식을 못 받는 자는 모르네.
3. 내 맘을 주관하시니 겁날 것 아주 없도다
구주께 속한 사람은 다 안식복락 얻겠네.
4. 이 날은 주에 날이니 일하지 말고 지키세
이같이 주일 지키면 영원한 안식 얻겠네
그의 손자인 사무엘 스테네트(Samuel Stennett, 1795)도 신학 박사였는데 3대를 거처 제칠일 침례교 목사로 봉직하며 물에 잠기는 성인 침례를 옹호하는 책들을 저술하고,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 등 여러 편의 찬송가를 써서 개혁을 밀고 나아갔다.
신대륙 미국에 옮겨진 안식일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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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한 제칠일 침례교인 멈포드(Stephen Mumford)는 안식일에 관한 진리를 전파한 결과로 1671년에는 로드 아일랜드에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1802년에는 9명의 목사와 1,130명의 신자로 구성된 총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으며, 후에는 80교회와 8천명의 신자로 불어났다.
1700년대 초반 펜실베니아주에 정착한 모라비아 형제회 신자들 가운데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모라비아 형제회 창시자인 진젠돌프(Zinzendorf) 백작도 그들의 영향으로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대륙 미국에 안식일의 진리가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843년 제칠일 침례교 총회에서는 11월 1일을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당신의 거룩한 안식일을 위하여 역사하시도록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했다. 이 간절한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가?
재림운동과 연결된 안식일 진리
제칠일 침례교의 신실한 신자인 라헬 오우크스(Racher Oakes)부인은 뉴욕에서 뉴햄프셔 주의 와싱톤으로 이사했다. 때마침 침례교 신자인 윌리암 밀러(Willimm Miller)가 주도한 초교파적인 재림 운동이 미주 전역에 고조되던 때여서 오우크스 부인은 쉽사리 재림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안식일 진리를 자신이 출석하던 재림교회의 감리교 출신 휠러(Frederick Wheeler) 목사에게 전하였으며, 1844년에는 이 교회의 몇 신자가 별도로 안식일에 예배함으로서 최초로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교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제칠일 침례교회를 떠나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재림교회가 신대륙에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기반을 통하여 안식일의 진리는 같은 해 재림 교회의 뉴햄퓨셔 침례교 출신 프레불(T. M. Preble) 목사에게 전달되었다. 감격을 가지고 진리를 받아들인 프레불 목사는 다음 해인 1854년 2월에,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된 것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언된 대로(단 7:25) 교황권의 배도(背道)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소책자를 써서 보급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즉각적이어서 안식일의 진리는 재림운동에 참여했던 침례교 신학자요 목사인 쿡(J. B. Cook)과 경건한 퇴역 선장 베이츠(Joseph Bates)에게 전달되었다. 1846년에 베이츠 선장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계속하고 있는 성소 봉사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게 됨과 동시에(히 4:14-16; 8:-10:), 성소의 정결에 관한 진리를(단 8:14) 아울러 이해하게 됨으로서 1844년에 있은 대실망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깊은 연구로 확신에 도달한 그는 “제칠일 안식일, 영원한 표징” 이란 소책자를 써서 보급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이 소책자는 재림운동의 유능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화이트(James White)목사 부부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같은 해 그들 역시 안식일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형성과 안식일의 완전한 회복
침례교 지도자 윌리암 밀러가 주도했던 예수 재림의 대각성 운동은 1844년 실망으로 막을 고한 듯했으나, 이 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발견된 성소와 안식일의 진리는 마침내 인류의 유일의 소망이요 구원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는 대단원(大團圓)에 이른다.
1848년 4월, 성소제도에 관한 심오한 진리와 안식일과 재림 신앙의 확신에 도달한 일단의 신자들이 코넥티컷 주의 록키 힐(Rocky Hill)에 모여 최초의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에 존재하게 될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일찍이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인 “대언의영”(the Spirit of Prophecy, 계19:10; 12:17; 엡 4:7-13)이 감리교 출신의 엘렌 G. 화잇(Ellen G. White) 여사를 통하여 주신 바 되었음을 모든 증거에 기초하여 확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준수하며,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파할 사명을 가진 무리가 1860년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t)의 공식 명칭을 채택함으로써,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을 마무리 짓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계 12:17)로 마지막 구원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의 주류를 타고 정통적인 성서적 신앙의 역사적으로 계승한 청교도적인 회중교회, 거기서 다시 진취(進取)한 침례고, 거기서 또 다시 진취한 제칠일 침례교를 통하여 회복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출 31:13, 17)이 중세기의 암흑을 벗어나 마침내 옛자리, 본래의 영광을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예언된 재림 운동을 통하여(계 10장) 소개된 구원의 완결이요 성경의 결론이며 예언적 신앙의 궁극인 예수 재림의 진리와 극적으로 만남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종결시킬 “성도”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2)의 역사적 출현을 실현시킨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리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 56: 1, 2).
회복된 즐겁고 존귀한 날
창조의 기념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속(救贖)을 약속하는 참으로 복된 안식일의 복음이 아닌가? 이토록 축복된 안식일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범(犯)함으로써 축복을 상실했고(겔 20:10~14 ; 느 13:17, 18 ; 렘 17:20~27), 신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마 12:8 ; 막 2:28)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형식만을 고집하는 율법주의에 빠짐으로써 축복은 저주로 바뀌었다(마 23:23, 12:1~13).
그리고 사도들이 모두 떠나간 2세기 이후의 교회는 핍박을 모면하고 현실에 맞추어 살아남으려는 궁색한 방편으로 성경의 안식일을 이교적인 일요일로 대치함으로써 중세기를 암흑으로 채운 배교(背敎)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일에 앞장선 것이 신앙의 원칙보다는 정치에 몰두했던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의 교회였으며, 그것은 교회들의 머리가 되기 위한 중세기 교황권(敎皇권)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
전술 한대로, 321년 콘스탄틴 황제가 최초로 일요일 휴업령(Sunday Law)을 반포하던 당시의 로마 교회 감독[교황]은 실베스터(Sylvester, A.D. 314-335)였는데 “일요일”의 명칭을 “주의 날”로 공식화하려는 집요한 노력과 함께, 어떻게 콘스탄틴의 정책을 내조(內助)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선언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매주 일요일이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기쁨으로 준수되어야 한다면, 매주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장사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저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신 날에 그들[사도들]과 함께 기뻐하려면, [안식일에는] 주님의 장사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사실, 유대인의 관습 때문에, [안식일에] 음식을 소모하고 유대인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교의 축제인 일요일에 “감사를 드리며 빵을 먹기 위하여” 하나님의 안식일을 배고픔에 시달리는 우울하고 슬픈 날로 만드는데 성공한 로마교회의 상반(相反)된 시도에 맞서 안식일을 끝내 기쁘고 존귀한 날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임이 다음의 말씀에서 얼마나 분명해지는가?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페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데를 수보(修補 )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만일 안식일에 네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으로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 5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