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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수도 생활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아마, 청빈, 노동, 검소, 금욕생활 등 일겁니다. 그런데 트라피스트 수도승들은 맥주를 만들고 판매합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를 따르는 가톨릭교회 수도원 중의 하나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여타의 수도원들과 달리 수도자들이 봉쇄된 구역(수도원)에서 성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에 따라 종교 생활하여 수행 생활이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수도자들의 일과는 보통 기도와 노동, 독서와 채식, 침묵 등입니다. 특히나 노동을 굉장히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타 수도원과 차이를 보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의 육체노동은 주로 농업, 혹은 농산물 가공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치즈나 빵 등의 식품류, 그 외 화장품 및 성물 등등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만듭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제품은 « 와인 »과 « 맥주 » 그리고 " 독주 "등의 주류입니다.
도대체 왜 수도원 제품 중에 주류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빵을 가리켜 자신의 몸(성체)이라 일컫고, 포도주를 가리켜 자신의 피(성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빵과 함께 포도주에 신성한 의미가 부여되게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 미사의 영성체 의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에는 바티칸에서 직접 수도원에 포도주 제조를 장려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문맹이였던 반면, 수도승들은 읽고 쓰기가 가능하였던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요. 이는 포도주 제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품질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수도원 제 포도주는 교회의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트라피스트 및 몇몇 가톨릭 수도회에서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아직까지도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다른 주종인 맥주는 왜 만드는 것일까요? 많은 수도원에서 포도주를 제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의 모든 수도원에서 다 포도주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의 지도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에서 빨간 부분은 와인생산이 가능한 지방으로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포함됩니다.
반대로 프랑스 및 독일 북부,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 서유럽 북부에 위치한 나라에서는 쌀쌀한 날씨와 많은 강우량 등으로 인해 포도 생산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보리 및 곡식을 가지고 맥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맥주를 주로 생산하는 지역에 있던 서유럽 북부 수도원들에서는 자연스럽게 생산이 불가능한 포도주 대신에 맥주를 만들게 되었고, 나중에는 돈이 되는 와인 심지어 독주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만들어지던 맥주는 현대의 맥주보다 도수가 많이 낮았습니다. 사실, 양조 과정에서 살균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물 대용으로 하루 종일 마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도주, 맥주, 독주도 만들어 수입원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미가 3장 1-12, #김영한, #성경하브루타코칭
Monastery에서 Cemetery로(Turning from 수도원 to 공동묘지)
I. 본분을 잃은 자의 특징?
1. 정의를 알지 못하는 리더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통치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자신들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금욕과 경건 생활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맥주, 와인, 독주까지 만들고,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미 2장에 1-5절에 압제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설교를 하는 것이 나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겁 없고 법 없고 개념 없는 지도자들이 판을 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겁 없는 지도자들
한국 사회가 요즘 어지럽습니다. 어제, 오늘 어지러운 것이 아닙니다. 왜? 어지럽습니까?? 지도자들이 법 없이 지도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개념 없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성인 아이로 법과 도덕과 사회의 순리대로 이끌지 못할 때 사회는 어지럽습니다.
지도자들만 그럴까요?
우리가 왜? 이렇게 서 있을까요? 여러분은 왜? 이렇게 서 있습니까? 겁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겁 없는 지도자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살기 때문에 어지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란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공의를 무시하고 살아가면 벌하십니다.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알면서도 죄를 범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법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팀켈러가 말하는 정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1. 이 책은 우리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_ 교회 안의 샬롬과 개인 구원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_ 번제보다 정의가 시급하지는 않는가?
_ 우리의 이웃을 위해 기도는 그만하고,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실제로 채워야 하지 않는가?
2. 왜 아직도 정의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에 여전히 불의와 불법과 불공평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싫어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몫이다.
기억해야 할 말씀.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를 기억해야 한다.
3. 관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명확하지 않았다. 상대적인 정의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이 시대에 팀 켈러 목사의 이 책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세상의 칼과 창 같은 날카로운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정의가 이 땅에 선포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2. 정의를 행하지 않는 리더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문제?
무엇이 문제입니까? 3장 2절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과 하나님이 주신 뜻은 중요하지 않고 선을 미워하고 선을 악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어립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인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사와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혼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율법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묶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을 가두어 버립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죄에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하였습니다. 선을 미워하고 악으로 그 용도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내용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거룩하신 율법의 내용을 자신의 의와 자신의 파를 위한 내용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율법의 내용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율법을 바꿉니다.
고르반으로 부모공경 하지 못하게 함 - 악한 전통으로 선한 율법 정신 훼손
예를 들어 고르반이라 하는 율법이 있는데요. 부모님에게 드릴 것이 있는데, 그것을 드리기 싫으니, 하나님께 고르반이라 하여 드림이 되었으니 부모님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하고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데요. 글자에 매여서 글자를 적어 내려가고 글을 적은 성경을 판매하는데, 급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기록하여 널리 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합니다.
질문) 미가가 살았던 시대에는 타락한 리더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주위에 혹 우리나라에 참 안 좋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리더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종교 지도자들 바빠서 정의를 못 실행함 – 선한 사마리아 사람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강도 만난 자를 돕지 않았습니다. 정말 바빠서였을까요? 아니면, 너무나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3. 영력이 떨어진 리더
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할머니와 점쟁이가 없어지면 무서워하는 것은? 영감이라고 합니다.
질문) 공리주의자, 밀이 말한, “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미가 시대 때는 지도자들이 거짓으로 부를 축적하여 영력이 떨어졌습니다. 요즘 세상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면은 무엇이 있나요?
II. 유혹하는 선지자들의 특징?
1. 거짓 평강을 외침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안 좋은 리더의 특징?
평강만을 외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리더가 압니다. 격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알려주고, 잡아 주는 리더가 더 좋은 리더입니다.
합리화
우리도 율법사와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처럼 합리화합니다. 율법사처럼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자신을 묶고 또 다른 사람을 묶습니다. 자신의 이치와 생각과 개념으로 하나님의 원래 의도한 선과 뜻을 가두어 버립니다.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경건의 모습과 형식에 갇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의 성공의 여부에 중점을 둡니다. 서기관처럼 말씀을 간직하고 필서하여 보급하는 자가 아니라 나만 나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유혹하는 사람이 됩니다. 미가서 3장 5절에 이러한 우리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만 신앙생활을 게을리 혹은 이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내 사고와 내 틀 안에 다른 사람을 가두어 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내 사고와 내 경험에 합리화를 통해 다른 사람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호되게 욕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습니다.
미가서 3장 9절에는 이러한 사람을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을 굽게 하고 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참! 어려운 때가 있는데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거짓 선지자처럼, “모든 것이 좋지...” 하고 좋은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지 않은가?”라고 여기지 않나 고민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좋은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혼자, “그것은 좋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때가 있지 않나...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삶을 합리화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내용과 선과는 달리 내 틀 안에 가두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부부로 살기 위해서는요.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로 서로가 서려면 내 뜻을 내 중심으로 서서는 안 됩니다. 함께 서야 합니다.
예레미야, 미가, 선지자가 고통 당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진짜 선지자였는데, 그 말을 믿고, 함께 해 주는 자들이 적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많을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2. 이상을 보지 못하고, 예언하지 못했습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3. 선견자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선견자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 술객도 점을 치지 못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꿈을 해몽한 요셉, 다니엘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꿈과 환상을 해석했습니다.
질문) 미가 당시 선지자는 거짓 평강을, 예언자는 이상을 보지 못하고, 선견자는 응답을 받지 못하며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요즘 나 자신에게는 어떤 부분이 부족한 것 같나요? 어떻게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까요?
III.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
1.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심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누군가 와서 부족함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타인은 멀리서 가까이서 나라는 한 사람을 보지만, 저는 스스로 자신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질문) 하나님은 타락한 지도자들의 허물과 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언제 주님이 강하게 나의 부족함, 허물, 혹 죄를 직/간접적으로 깨닫게 해 주셨나요?
2. 말씀하심
9.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늘 각 시대마다 말씀 혹 선지자를 통해 듣게 하셨습니다.
3. 실체를 알려 주시고, 멸망을 예언
1)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함 알려 주심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선교관 완공식 때 아신대 총장님의 고백
한철하 총장님의 고백 – 선교 대학원 – 죄로 지은 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불의, 불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선교 대학원 건물을 다 짓고, 그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나 자신은 어떤 것을 불법으로, 혹 다른 사람의 피로 짓고 있지 않나요?
2) 지도자의 타락
a. 우두머리는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b. 제사장은 삸을 위하여 교훈하며,
c.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쳤습니다.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사짐 센타 목사님
예전 유학 때, 이사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사를 할 때 친한 전도사님에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도 주위 친한 목사님에게 절친한 분들에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친한 목사님 중 한 분이 요번 8월 말에 이사를 하게 되는데,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삿짐센터에서 전문적으로 이사 일을 하기 때문에 부르면 저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편하게 잘 아는 전도사님과 목사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그분들이 그냥 한 번 도움을 줄 수 있기에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하는 목사님은 부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과 일이 있는데, 다른 것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망설일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복음? 혹은 단순 구제? 교회 혹은 건물?
이는 마치 오늘 교회가 복음의 사명을 선교의 사명을 중점으로 해야 함에 다른 사람에게 밥을 퍼주는 구제에 치우친 나머지 복음의 메시지는 전하지 못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교회의 본질과는 달리 건물과 교회 유지에만 급급합니다.
우리가 체육 대회를 위해서는 하루에 4-5시간 주말에 연합을 하여 준비하고 땀을 내지만, 기도와 찬양과 선교를 위해서는 모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집중이 되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매주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역을 게을리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친구가 학교에서 기독교 동아리가 있는데 말씀을 전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바빠서 안 된다”말이 되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인데요. 그 친구에게 말씀을 전 할 수 있겠다고, 필요하다면 말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이 없기는요. 힘이 들기는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주님의 일이라면 계산하고, 따지고, 주저하지 않나요?
우리의 부르심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뀌어 갑니다. 시간이 없다고, 힘이 들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시간을 비우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하지 않나요?
때로, 주님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가서 3장 11절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두령이 하나님 앞에서 잘 못 서게 된 것은 그 두령이 좋아하는 뇌물을 바라면서입니다. 두령이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이 눈을 멀게하는 뇌물인데, 자신이 그것에 빠져서 그것을 원하고 판결이 바르지 못하게 됩니다. 제사장의 문제는 삯을 좋아한 것이 문제입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이 기쁨이 아니라 자신이 받을 삯을 보고 기뻐합니다. 부처가 불공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문제는 돈을 좋아해서는 안 되는데, 돈을 좋아 한 것이 문제입니다.
돈에 초월해서 살아야 하는데, 돈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저도 유학 때,“돈이냐? 하나님이냐?”를 무척 고민했습니다. 유학 때,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 쉽지 않습니다. 혼자서 한국에 살 때 돈 걱정을 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학 가서 돈이냐,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느냐하는 것에 많이 넘어지고 힘들었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을 근심시키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가려고 하니,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문제가 되고, 주위 사람들이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본인도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마음과 원하는 것을 향해 가기 원하니 문제입니다.
3. 시온과 예루살렘의 결말:
12.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1)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2)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3)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될 것이었습니다.
질문) 미가 시대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온,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산은 파괴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중 다 무너트리셨습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 절대 하나님이 무너트리면 안 되는 것 혹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때도 주님을 신뢰하고, 섬길 수 있나요?
거룩한 시온과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믿은 예루살렘이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온, 예루살렘, 성전의 산은 진멸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교가 무엇인지?
아프가니스탄 선교를 위해 간 친구들이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상이 어떤 존재인지 교회가 어떤 존재로 서야 하는지, 선교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선교 봉사나 단기 선교는 목숨을 내걸고 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선교를 위한 한 형태로 자리 잡았었습니다. 선교 탐방과 선교를 위한 사역보다 청년들에게 선교 여행에 가까운 모임으로 둔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직분도 감행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소득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특히 선교를 갈 때, 무엇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저 주님의 복음이 우리를 통로로 해서 뿌려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가야 합니다. 금식을 왜? 합니까? 우리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 뜻에 맞도록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사는 계명도 잘 지키고 사람들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앙의 삶이어야 합니다. 성인 아이는 사람과 보이는 것에 따라 행동합니다.
질문) 오늘 말씀 중 주신 도전과 은혜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