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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히브리서의 말씀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 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이는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고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살인적인 일정을 초인간적인 힘으로>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은 꼭 어느 한 날 있었던 얘기가 아닙니다.
매일 이런 일정을 소화해내는 주님의 일상이라는 얘깁니다.
외딴곳에 가서 기도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새날이 되면 다른 곳으로 가시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일상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 저의 일상은 어떤 것인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저의 일상은 여러분이 대개 아시듯이 주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주님처럼 새벽 아직 컴컴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지는 않고 제 방에서 복음 묵상 겸 기도하고 강론을 쓰고 올립니다.
그리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답할 것이 있으면 답합니다.
그런 다음 현장에 일 나가게 되면 새벽 미사와 기도를 혼자 바치고 새벽 5시에 일 나가 저녁 7시면 돌아와 씻고 저녁기도와 식사하고 잡니다.
요즘처럼 일이 없어 일을 안 나가면 강의 준비하고 밀린 일을 하고, 운동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휴식 시간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각종 회의나 만남이나 강의와 사목으로 바쁘고요.
그러니까 주님과 저의 차이는 쉼과 운동이 저한테는 있고 주님께는 없다는 것인데, 쉼이나 운동 없이 주님께서는 그 살인적인 일정을 어떻게 초인적으로 버티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입니다.
일정이 빡빡하고 쉴 시간이 없다는 면에서 살인적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병자를 치유하고 악령을 퇴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을 빼는 일인데 그 많은 병자와 부마자를 대하시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초인적이지 않으면 살인적인 일정을 해낼 수 없는 것인데 그 초인적인 힘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게 그런 거라고 하면 얘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주님도 우리와 같이 피와 살을 나누시고 모든 점에서 같아지셔서 유혹까지 받으신 분이기에 얘기할 게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주님의 그 초인적인 힘의 원천을 우리가 잘 압니다.
삼손이 머리를 길러서 하느님의 힘을 지녔듯이 하느님으로부터 그 힘을 받았다는 것과 그것이 기도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에게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겁니다.
뭣 하러 받지 않고 힘 빠지게 뭣을 합니까?
기도를 한다면 받기 위해서 하지요.
사실 우리도 가진 것이 없기에 받기 위해 기도를 많이 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물이거나 병의 치유거나 합니다.
그런 것들도 청해 받아야겠지만 오늘 우리가 주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힘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뭘 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뜨거운 물에 잠기고 편백나무 휴양림에 머물 듯 이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거야 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 그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 안에서 우리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어렵지 않고 쉽고, 힘들지 않게 힘을 얻습니다.
이것을 주님께 배우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신 후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바람을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찾아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기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마태 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려면 외딴곳을 찾아 고요속에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Go and Stop!>
어촌의 겨울은 무척이나 황량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에 나가봐야 별 소득이 없습니다.
그리도 우글거리던 우럭이며 놀래미, 쭈꾸미나 낙지가 귀신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강풍까지 불어오면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다 아무도 찾는 이마저 없다면 쓸쓸 허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며 피정객이며 방문객들로 왁자지껄하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공동체 전체가 활기를 띱니다.
다들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른 새벽 눈뜰 때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말씀의 선포, 치유와 구마,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 그리고 그들을 위한 기도 등등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홀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백성들, 죄인인 인간들 사이에서 굳건히 현존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길어봐야 3년!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강도 높은 사도직 활동이 끝나면 한 며칠 만사 제쳐놓고 휴가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고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깃을 붙들었습니다.
제발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속 머물러 달라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 고장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코 복음 1장 36절)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의 행적에는 또 다른 독특한 측면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Go and Stop!’ 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무작정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않으셨습니다.
적당한 순간 멈출 줄 아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아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복음 1장 35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닌 모든 역량과 에너지, 카리스마와 능력을 총동원해서 사도직 활동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수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죄인들이 회개했으며 구원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쭐대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요란한 함성을 뒤로하고 또다시 한적한 것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며 지친 심신을 달랬고, 원기를 충전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로서 병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서 병을 쫓아내셨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셔서 쫓아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39).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 바로 앞에 어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간청했고(마태 8,8),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고 감탄하시면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백인대장이 한 말은 “주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병이 떠나고 제 종이 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이 믿은 것처럼 한 마디 말씀만으로 그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2-34).”
또한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악에서 구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질병과 마귀는 모두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마귀 들린 일이 병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고, 병을 마귀의 소행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입니다(마태 8,16).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40).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도 차별하지도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는 개인이 전체에 묻혀서 잊히는 일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존재로 대우받습니다.
이 말에서 ‘목자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요한 10,3ㄴ-4ㄱ)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모두 하나하나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기도를 하나하나 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말은 치유의 은총에 아무런 조건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고,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7장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거절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마르 7,27), 그것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는 ‘강아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자녀로 변화된 뒤에는 그 여자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마귀들이 당신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 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것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라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존재입니다.
믿기는커녕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적대자들입니다.
따라서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한 일입니다.
사람들 경우에도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나야 하는 분이고, 믿음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 1,35-39)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증언입니다(요한 18,36).
제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만 보고서 예수님의 활동을 성공적인 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은 ‘세속적인 성공’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요구를 들어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영적으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병자 입장에서는 치유 자체가 구원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몸의 치유는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몸이 치유된 것으로만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버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본질에 충실한 삶 - 중심과 질서>
“거룩하신 주님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시편 105,3)
아직은 겨울이지만 큰 추위는 지난 듯 웬지 모를 봄기운도 느껴집니다.
밤공기도 상쾌하고 밤하늘의 별들도 또렷합니다.
우선 숙소를 나와 맨 먼저 바라보는 밤하늘의 북두칠성 그리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이렇게 또 선물같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하루생활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본질에 충실한 100%의 삶,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린 삶, 오로지 이웃을 위한 삶이었음을 봅니다.
아마도 하루하루 날마다 본질에 충실한 반복적 삶이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몇%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오늘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참 치열합니다.
본질에 충실한, 아주 중심과 질서잡힌 삶입니다.
혼란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아주 물흐르듯 순조롭게 전개되는 단순하고 투명한 삶입니다.
마침 충실한 일상을 살아내는 어느 자매의 카톡을 받았습니다.
힘든중에도 깨어 의식있는 삶을 살아가는, 정말 살 줄 하는 자매입니다.
“지난 12월초 김대건 ‘탄생’ 영화와 성탄절 오후 비오씨와 함께 ‘영웅’을 관람하면서 신앙과 참부모 역할, 진정한 애국과 거룩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며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렇게 사는게 잘 사는 게 올바른 삶인데 많이 찌질이로 사는 저희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연말이었습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이 정도의 삶이면 평범한 일상을 알차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 2.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 3. 전도여행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100% 삶이요, 아마도 예수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반복적 삶을,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의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중심과 질서잡힌 본질에 충실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한결같이 외딴곳에서 바친 기도일 것이며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바로 날마다 외딴곳에서의 이 새벽 기도가 예수님 삶의 중심이자 모든 활력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이런 삶의 중심없이, 하느님 의식없이, 일상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잊고 유령같이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어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주석을 읽을 때 다음 평범한 대목이 깊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죽음, 즉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영원히 분리시키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악의 세력이다.”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어도 주님과 무관無關한, 주님을 잊은 삶이라면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막교부들 역시 늘 명심했던 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중심의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일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음도 바로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외딴곳에서 기도하시자 즉시 예수님께 유혹이 뒤따릅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마자 전하는 말입니다.
“모두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들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고 흔들림없이 계속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사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자세가 단호하고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예수님의 본질에 충실한 참 멋진 삶을 요약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날마다 외딴곳에서 기도하며 삶의 중심을 잡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묘사도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복음 선포에 곧장 이어지는 구원의 치유활동입니다.
참으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복음선포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자랑과 고마움은 파스카의 예수님과 늘 함께 살면서 하느님 중심의 본질에 충실한 질서 잡힌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참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입니까!
이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악마를 파멸시킨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삶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겸손한 사랑이 참 은혜롭고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인생 광야 순례 여정도 성공적일 수 있겠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날마다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성전미사 은총이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본질적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시편 105,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화 아바타('물의 길')에서는 인간이면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나비족과 함께 살면서 나비족의 철학과 가치를 배운 제이크입니다.
다른 한 명은 나비족이 되었지만 인간의 가치와 철학을 간직한 마일즈입니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가족들 돌보는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마일즈는 몸은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큰 키와 강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으로 나비족을 탄압하고, 나비족의 마을을 불살랐습니다.
마일즈가 나비족이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빼앗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제이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겉모습이 닮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과 함께 내면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면서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탐욕, 분노, 질투, 음탕, 시기, 교만, 게으름, 원망’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 우리의 몸을 부정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상석에 앉으려하는 사람,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단식한다는 표시를 드러내는 사람,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정하셨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품격을 높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도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들 또한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썩을 몸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예수님의 치유가 여러 마을에 전해지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들 또한 겉모습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히 전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비신학생을 보면서 과연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 맞느냐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큰 장점은 ‘착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점도 ‘착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적도 낮고, 자기 주관이 없고, 또 자존감도 너무 낮았습니다.
이 상태로 어려운 신학교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 또 자존감 없이 신학교 기숙사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성소자가 매우 부족하고, 또 신학교에 들어가서 바뀌지 않을까 싶어 추천했지만, 신학교 입학한 학생 대부분은 결국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기는 엄청 착한데, 왜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둘까요?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스페인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빌라에서 데레사 성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도자가 너무 착하고 온순해서는 내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내적으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이지 않고 또 온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또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다른 이웃 고을로 이동하셨습니다.
바쁜 전교 활동의 일과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늘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러 외딴곳에 가신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당신 뜻을 세워 다른 고장으로 가십니다.
악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착하기만 한 점을 보였다면, 마귀들이 말하는 것도 경청해주고 당신을 찾고 있는 사람도 만나주면서 그 고장에 더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하느님 뜻에 맞춰 사는 내적으로 성장하는 삶이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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