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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2요한 4-9
복 음 : 루카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
-기도와 회개, 깨어있음의 은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주 예전 목사님과의 간단히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거의 20여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지금 물어도 이 대답일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품위 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입니다. 대부분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남은 위령성월의 날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와 더불어 회개하며 깨어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깨어 맑은 정신으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요,
참으로 불행한 이들은 준비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바오로 사도의 윗 말씀은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을 위해 최고의 처방전 말씀입니다.
아마 제가 가장 많이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써드렸을 것입니다.
어제도 하루 단체 피정온 본당 자모회 6분 자매들에게 써드린 처방전 말씀입니다.
여기에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렸습니다.
시간이 되기에 역시 성호경을 바친 후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서 성화聖畫같은 사진도 찍어 드렸고
사진과 더불어 나눈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성녀聖女, --- 자매님!”
비슷한 내용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어느 자매의 다음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찬미 예수님, 인자하신 신부님 뵈니 맘이 편해지고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수도원 피정 특별한 은총과 기쁨으로 채워 주신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영광드립니다.”
요즘 만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드릴 메시지가 있으면 저는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성인聖人---형제님!’ 또는 ‘사랑하는 성녀聖女---자매님!’ 꼭 잊지 않고 써 드립니다.
사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모두가 성인성녀 같다는 생각도 들고
모두가 성인성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도 지닙니다.
정말 성인성녀처럼 깨어 사랑하면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이 최고의 선종의 죽음 준비도 될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행복한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실감나는 장면 역시 회개하며 깨어 살아야 하겠다는 경각심을 줍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나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아, 이런 준비없이 갑자기 닥친 죽음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고 불행하겠는지요.
예나 이제나 계속 반복되는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전혀 영혼을 돌보지 않고 육적 욕망에 눈먼 삶을 살다가 갑자기 닥친 불행한 죽음들이요,
오늘날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회개와 즉시 주님과 함께 앞으로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방심으로 과거의 것들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여 뒤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버리고 떠나는 회개와 탈출의 삶에 과감, 신속하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현실도 내적 삶은 판이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여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냉담으로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다음 복음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좋고 아름다운 외적 환경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지체 없는 회개가 구원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뜻밖의 사고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기도와 회개를 통한 깨어 있는 삶의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제1독서 요한 2서가 줍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의 방향 전환의 회개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실질적인 것이 가까이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을 깨어 살피고 아끼고
친절히 대하며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준 선물이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사가의 다음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화답송 후렴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해성사 보속이 아주 특이한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보속을 주신다고 합니다.
“시장에 한 시간 동안 있으십시오.
병원에 1시간 동안 돌아보고 오십시오.
공동묘지에 한 시간만 앉았다 오세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1시간만 봉사해 보세요.
장애인 집에 가서 1시간 동안 봉사하십시오.”
등등의 보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보속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주는 보속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자리에서 만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한 것만은 아닙니다.
힘든 삶 안에서도 커다란 행복으로 기쁨을 외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앞선 신부님의 보속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바라보면 힘듦의 기준을 제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을 먼저 바라보고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때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이야기하시면서
심판 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옥상에 있는 이는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집 안에 있는 세간을 챙기러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두지 말라는 것).
들에 있는 이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씨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며 손에서 쟁기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재산이 다 타 버린 소돔을 돌아다보았다가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영적인 삶에 집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
그리고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을 기준으로 내세우면 그 말씀이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사건, 그 밖에 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전영준 바오로 신부님의
‘영성신학’에 대한 글이 10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
영성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을 보내주신 전영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10월 18일 지면에는 ‘정화, 조명, 일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정화, 조명, 일치를 성서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정화, 조명, 일치는 영성의 과정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정화의 단계에서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선을 행하고,
일치의 단계에서 평화를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화의 단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조명의 단계에서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다고 말합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를 운전면허 시험을 통해서 해석해 보았습니다.
정화는 필기시험과 같습니다.
교통법규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법규와 신호를 모르고 운전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사용법을 알면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되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조명은 실기시험과 같습니다.
수영은 이론만 알아서는 수영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해봐야 합니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감독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습니다.
신호의 준수, 법규의 준수, 주차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합격했어도 실기시험에서는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치는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
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은 자격을 주지만, 책임도 요구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거나, 신호를 어기면 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심각한 위반이면 운전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늘 준법운전, 안전운전, 양보운전을 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분들은 준법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권하는 교육, 피정에 열심히 참석하고 선을 행하는 분들은 안전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은
양보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았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돈오돈수입니다.
깨달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 이어가는 것이 돈오점수입니다.
정화, 조명, 일치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날 일치의 단계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오점수의 삶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 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돈오점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낙엽도
길을 떠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떠나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이
다른 것들에 많이 빼앗겨 있다.
내려놓지 못하기에
떠날 수 없는 우리들이다.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이다.
떠나는 길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생명의 주인께 돌아가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롯의 아내같이
무너져 내리는 소돔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위령성월이다.
살아있는 ‘시체’가 안 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심판, 혹은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나 세상의 심판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칭하십니다.
아마 당신께서 ‘심판관’으로 우리 각자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여기서 ‘시체’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체의 삶과 생명의 삶과의 차이점을 알고 결코 시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가 언제 내려와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시체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1977년 4월 20일 대낮에 쇠망치로 장정 4명을 죽인 사건이 광주 무등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던 ‘박흥숙’이었습니다.
박흥숙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박흥숙은 중학교 수석 입학을 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던
작은 가장으로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흥숙은 무등산 중턱에 작은 움막을 짓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 철거 일용직 7명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흥숙은 당시 23세였고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발 불만은 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지 말고 땅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을 질렀고 3년 동안 가정부를 하며 모아둔 어머니의 돈 30만 원까지 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였고 여동생은 반항했습니다.
박흥숙은 저들도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아프신 할머니들이 사시는 다른 움막들엔 불을 지르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모든 움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었던 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육박전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보고 노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법대로 하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며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들고 온 쇠망치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철거를 지시했던 정부는 불을 지르도록 지시한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게 하고
박흥숙을 남의 돈을 빼앗아 광주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한 깡패로 묘사하도록 언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자신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남의 집 화장실이나 처마 밑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참조: ‘망치로 성인 4명을 때려 눕힌 무등산 타잔 박흥숙’, SBS NOW; 꼬꼬무 7화]
사실 그날 사망한 철거반원들도 박흥숙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철거반원들도 살기 위해 한 행위였습니다.
처음 박흥숙은 박해받는 사람으로서 죽어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죽어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면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시체가 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눈에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하느님 눈에는 시체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세상에서 죽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두 사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고 하나는 ‘소돔의 멸망’입니다.
노아는 홍수 때 홍수가 나자 노아는 침착했고 다른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여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들이닥칠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의 멸망 때입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유황불이 불타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시체입니다.
시체에겐 심판이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절대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라는 죽음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죽읍시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죽음으로 보이나 우리에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나는 죽었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해보십시오.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비로소 시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