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탁(鄭琢)-귀전원(歸田園)(전원으로 돌아가리)
朝暮一何忙(조모일하망) 아침저녁 온종일 너무도 바빠
塵中不蹔歇(진중불잠헐) 먼지 속에 잠시도 쉬지 못하네
靑山樂事多(청산락사다) 청산에는 기쁜 일 많을 터이니
歸去茅將伐(귀거모장벌) 돌아가서 띠풀을 베어보련다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약포집藥圃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약포藥圃 정탁은 문과에 급제한 뒤에 대사성, 대사헌, 이조 판서,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우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67세에는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도 했다. 이 시는 관직 생활로 한창 바쁘던 때에 귀향을 갈망하며 지은 시가 아닐까 한다.
전체 3수로 지어진 시인데 위에 소개된 부분은 그중 두 번째 시이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전원으로 돌아가고픈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잘 묘사되어 있다. 관직 생활에 분주했던 그의 행력을 살펴볼 때 전원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고자 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 시도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물러나 나아가길 구하지 않으니 退潛不求進(퇴잠불구진)
세인들 물정 모른다 말들 하네 世人或曰迂(세인혹왈우)
이 마음 어디고 매인 데 없으니 此心無係累(차심무계루)
영욕의 마음이야 본래 없다네 榮辱本來無(영욕본래무)
모두들 출세를 지향하는 세상에서 물러나려고만 하니, 세상 사람들이 많은 말을 했나 보다. 그 좋은 출셋길을 마다하니 참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하였을 것이고, 괜히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영욕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변함이 없이 청산을 즐길 뿐이다.
옛날에 벼슬한 관원들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원의 한가로운 생활을 노래하였다. 그저 욕심 없는 마음을 보이기 위해서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관직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의 제목인 ‘귀전원歸田園’은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이런 류의 시를 짓는 전통은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으로 돌아가 살리라. 歸田園居귀전원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전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절로 편해지고 한가로워지는 걸까? 농촌 생활을 노래한 시 중에는 ‘상전가(傷田家)’라는 제목의 시들도 많다.
이월에 새 고치실을 팔고 二月賣新絲(이월매신사)
오월에 새 곡식을 판다네 五月糶新穀(오월조신곡)
눈앞의 상처는 치료를 한다지만 醫得眼前瘡(의득안전창)
심장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이라네 剜却心頭肉(완각심두육)
당(唐)나라의 섭이중(聶夷中)이 지은 대표적인 ‘상전가’이다. 여름에 생산되는 고치실을 저당 잡혀 돈을 꾸고, 가을 곡식을 5월부터 저당 잡혀 돈을 꾸고 있으니, 정작 수확을 했을 때 내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결과를 알면서도 돈을 꿀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 백성들에게는 어떤 노래가 더 가슴에 와 닿았을까? ”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정탁[鄭琢, 1526~1605, 휘(諱)는 탁(琢),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약포(藥圃)]-조선 선조 때의 문신. 좌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저서에 ≪약포집≫, ≪용만문견록≫ 따위가 있다.
*蹔(잠) : 잠시 잠, 1.잠시(暫時), 2.잠깐, 3. 별안간(瞥眼間),暫(잠)과 동자(同字). 暫(동자), 䟅(동자)
*歇(헐) : 쉴 헐, 개 이름 갈, 사람 이름 알, 1.(쉴 헐), 2.쉬다, 3.그치다
첫댓글 바쁜 도시 생활과 숨 막히는 삶의 연속에서
전원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같나 봅니다....
그래서 자연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 했던 적이 있지요...
네, 저도 한 달 살기 한 번 해보고 싶네요.
회장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주 중반이 넘어가는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