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
냈다.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임실 17킬로미터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대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다운 고개인 대운재를 맨 처음 제대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
를 졸업한 해였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은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그
아이들은 활기에 넘쳐 보였고 반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
롯한 몇몇 친구들은 까만 중학생 교복만 봐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고는 했다.
그 무렵 우리 집안의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 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임실
성수면과 관촌면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옷가지를 팔고
그 대가로 쌀, 콩, 보리, 서숙(조) 등을 받은 어머니는 백운에서 임실까지
그것들을 예닐곱 말씩이고 걸어가서는 다시 팔았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
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원촌에서 임실읍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갔다. 물론 버스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나는
곡식 네댓 말을 무겁게 등에 지고 4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갔다. 어쩔 도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일찍 깨워 달라고 하고는 잠이 들었지만 정
작 아침 일찍 일어나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야 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
대로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동안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
단다.”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고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
도 못 들은 척 누워 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가만
히 문을 열고 나서면 하늘에 반짝이는 별 무리가 보였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네 말
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상상해 보라. 유난
히 작았던 열서너 살짜리 소년이 네댓 말의 곡식을 등에 지고 허리를 구
부린 채 길을 걷는 모습을 말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옛 시절 창고
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 최상류에 놓인 백운교를 건너 처
음 만나는 오정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샘이 다섯 개 있어 오정五井이라
부르는 그 마을에서 잠시 쉰 여력으로 길은 다시 이어진다. 이제 오르막
이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마을
사이에 자리한 대운재는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다. 나보다 두세 말은 더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게 들렸다. 나도 힘든지라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이렇게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
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무지 그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갯
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마을에 닿았다.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마을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개들이 짖어댄다.
대운마을 아랫자락에 있는 매마우마을을 지나 수철리에 이른다. 어머니
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고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
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
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왔다”라고 해서 이름 붙
은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그곳에서도 임
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때쯤이면 또래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정류
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장에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고개를 넘어서 갈마리를 거
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40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
어온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돌
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은 얼마나 나를 주눅 들게
했던가.
그 몇 개월 뒤 진학을 못 한 채 뒹굴뒹굴 놀고 있던 마을 친구 네 명과
함께 먼 대처로 나가 성공하겠다고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해서 걷고 또 걸
어 맨 처음 넘었던 고개가 바로 대운재였다. 버스비도 아까웠고 그 고개
를 넘어가면 임실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쓰라린 기억을
나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때 걸었던 그 기억에 힘입어선지 나의 여
정은 지금도 그침이 없고, 그래서 가끔 보따리를 싸서 떠나고 또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일컬어 한 굽이 한 굽이 돌아가는 고개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
렇게 돌아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닿게 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뒤돌아
아스라이 펼쳐진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본 뒤 다시 내려가는 고갯길, 그
고개를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문경새재는 왠 고
갠고/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진도아리랑>에도 나오는 ‘고
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嶺’, ‘현峴’, ‘치峙’, ‘점岾’, ‘항項’ 등의
한자 이름과 함께 ‘고개’, ‘재’, ‘목’, ‘티’ 등 순우리말 이름이 있다. 영이
란 지형상 산줄기가 낮아져 안부(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부분)를 이
루는 곳으로,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의 이쪽과 저쪽이 통하는 것이다.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산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영은 조령鳥嶺, 차령車嶺, 마천령摩
天領, 대관령大關嶺 등을 들 수 있다. 치는 고개, 재 등과 같은 의미로 쓰
이는데 관북 지방과 영남 지방에 이러한 이름이 많다. 영남 지방에서는
울치蔚峙 또는 율치栗峙 등 하나의 접미어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데 반
해 관북 지방에선 후치령厚峙嶺, 주치령走峙嶺 등 고개를 의미하는 용
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전라도에도 웅치, 판치 등의 고개가 있으며,
점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는데 문경새재(조령)를 그 지방 사람들은 억새
풀고개, 즉 초점草岾이라고 불렀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분수계分水界를
이룬다. 고개 양편에는 골짜기가 길게 발달하므로 예로부터 이러한 골짜
기를 끼고 길이 발달했다.
우리나라의 적유령이나 죽령처럼 유럽 알프스산맥의 몽니스, 생베르
나르, 고타드, 생플롱, 브레너 등은 유럽 대륙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해 주
는 이름난 고개다. 한편 인도 북부의 카이버고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반
도 사이의 주요 통로로, 고대로부터 민족의 이동과 문화 전파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산과 강의 풍수>에서
2024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