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1132). 표충사삼층석탑 출토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의 보물(寶物) 지정 경위와 무이거부(無二巨芙) 스님
□ 기고자
□ 지경(地耕) 손흥수(孫興銖)
○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현) ○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현) ○ 밀양향토사연구회 고문(현) ○ 재악산(載嶽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발의 공동대표(현)
□ 허죽(虛竹) 도재국(都在國) ○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현) ○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현) ○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 운영자(현) ○ 재악산(載嶽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발의 공동대표(현) ○ 예림서원 장의(掌議)(현) ○ 성주도씨(星州都氏) 서재공파(鋤齋公派) 사우당(四友堂)종친회장(전) ○ 밀양향토사연구회 위원(전)
=== 일러두기 === ♠부호 순위 : 1 > 가 > 1) > 가) ♠대괄호 [ ] 사용 예시 : 재악산 [載嶽山, 재악산(載岳山)] ♠17번 항목 : 문장 사이 단락 구분 사선( / ) 표시
=== 차 례 === 1. 머리말 2.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봉우리 명칭 사자봉(獅子峰)] 위치 3.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충사당(表忠祠堂) 머리 위에 일제(日帝) 잔재 천황산(天皇山)이 왠말인가? 4.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산명의 혼란 5. 1995년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재악산(載岳山) 산명의 결정적 증거인 “개수탑기비” 출토 6. 국립중앙박물관 사찰석탑(寺刹石塔) 최고 권위자의 첫 탄성, “개수탑기비는 국보급이다” 7. 1995년 개수탑기비 출토 무렵, 밀양시와 표충사는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추진 8. 출토된 성보유물 중 “불상(佛像) 등 45점(點)”을 통도사성보박물관으로 이관(봉안) 9. 1995.6.2 출토 후, “개수탑기비”의 행방 묘연(杳然) 10. 손흥수.도재국, 표충사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에서 또 하나의 재악산(載岳山) 증거 발견 11. 무이거부스님, 표충사 이석(移錫)과 사라진 “개수탑기비” 발견 12. 도재국과 손흥수, “개수탑기비”를 찾아 천지사방을 헤맨 세월 13. 무이거부스님의 표충사삼층석탑 출토 성보유물 표충사로 반환 추진과 박물관 정비 노력 14. 무이거부스님, 호국성지 삼대사(三大師) 선양(宣揚)사업 전개
15. 무이거부스님『토굴(土窟)로 이석(移錫)』 16. 무이거부스님,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번역 발간 17.표충사당 년보(表忠祠堂年譜), 삼대사 봉안축문(三大師奉安祝文), 삼대사 향사축문(享祀祝文) 변개(變改) 18. 밀양시, 2015년 국토지리정보원에 天皇山을 載嶽山으로 변경 요청 19. 손흥수와 도재국, 23년간 “개수탑기비” 보물(寶物) 지정 당위성 주장 20. 표충사와 조계종 총무원, 보물지정 노력 및 표충사 중창불사 21. 문화재청, 2017년 “개수탑기비” 등 문화재(寶物) 지정 22. 밀양의 과제, 국가지정문화재 현황, 보물 관리 23. 1. 머리말 유서(由緖)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 대한불교조계종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표충사(表忠寺)”의 “표충사삼층석탑” 해체 및 중수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95.6.2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일명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또는 개수비(改修碑)]와 불상류(佛像類) 등 모두 45점 정도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맑은 새벽하늘에서 별같이 반짝거리는 수많은 아름다운 보물이 밀양 땅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 영정사(靈井寺)는 표충사의 옛 이름이며, 載岳寺라고도 했다 ※ 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를 일명 改修塔記碑, 약칭 改修碑라 한다 이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가 출토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우리나라 사찰 석탑의 최고 귄위자는 “우리나라 사찰의 석탑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국보급 비(碑)이다” 라고, 탄성을 자아내었으나, 출토된지 얼마지 않아 불상류(佛像類) 등 45점 정도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으로 이관.봉안되었고, 어찌된 영문인지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는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무려 7년만인 2002년 청명한 봄날(陽曆 4월 5일)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영욕(榮辱)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2017.10.30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는 다량으로 출토된 불상류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944호(28건 34점 일괄)』로 지정되었으니, 보물의 정식 명칭은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출토 유물 일괄(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出土 遺物 一括)』이다 국가보물 제1944호 지정은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호국성지 표충사』로서는 성보(聖寶) 문화재로서의 국가 보물(寶物)을 갖게 되었으며, 밀양으로서는 자랑스러운 향토문화재로서의 성보문화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그야말로 한꺼번에 다량의 빛나는 보물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민족적으로 영광스러운 민족문화유산의 보물을 보유하게 되어 종교적 영광을 넘어 표충사와 밀양시민. 국민. 민족이 다 함께 큰 잔치를 벌이고 축하를 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필자(손흥수.도재국)가 밀양향토사연구회 회지(會誌)에 본 글을 기고함에 있어, 본 책이 일반시민 등에게 널리 보급함에 따라 개수탑기비가 국가보물로 지정된 험란했던 세월과 법적인 절차,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와 행방 묘연(杳然), 보물로 지정되기까지의 영욕의 발자취인 그 경위를 밝혀 성보문화재로서의 지역과 국가, 민족의 보물이 다시는 암흑의 세상으로 묻히지 않고 영원히 찬란하게 빛을 발산하여 일제(日帝)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없애고 역사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재약산(載藥山)을 없애고 해발 1189.2 미터 사자봉(獅子峰)이 민족의 산명인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임을 증명하는 표충사 산문(山門)과 일주문(一住門)에 편액된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현판과 함께 영원히 보전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2.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봉우리 명칭 사자봉(獅子峰)] 위치 낙동정맥 남단의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산군(山群)에는 해발 1000 미터 내외의 고산(高山)들이 즐비하며, 이 산군의 주산(主山)으로 불리는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해발 1189.2미터, 봉우리 명칭 사자봉(獅子峰)]은 원래부터 표충사(表忠寺)의 배산(背山, 配山)이다
[ 사진 1 ]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사자봉(獅子峰) 전경 재악산(載嶽山)은 일명 사자봉(獅子峰)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거대한 바위가 유일하게 표충사에서 올려다보면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표충사를 내려다보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형상과 같아서 사자봉이라 지어졌고, 재악산(載嶽山) 남쪽으로 수미봉(須彌峰)이 솟아있고, 그 수미봉의 동쪽 자락이 넓은 고산평원으로 이루어져 사자평(獅子坪) 또는 사자평원(獅子平原)이라 한다 3.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충사당(表忠祠堂) 머리 위에 일제(日帝) 잔재 천황산(天皇山)이 왠말인가? 가. 표충사(表忠祠, 일명 표충사당 表忠祠堂) 북쪽의 원래 산 이름은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이다. 나. 그런데 일제(日帝)가 1925년 우리나라를 강탈(强奪)하여 식민지로 만들면서 민족의 산 이름인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을 말살하고, 그들의 천황(天皇)의 이름을 따서 천황산(天皇山)으로 조작해 버렸다 다. 표충사(表忠寺)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과 싸워 풍전등화(風前燈火) 조국을 구한 호국의승장(護國義僧將)이신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기허대사(騎虛大師)님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 일명 표충사당 表忠祠堂)가 있다.
[ 사진 2 ] 표충사(表忠祠) :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라. 그런데 표충사(表忠祠, 일명 표충사당 表忠祠堂) 앞마당에서 표충사당 북쪽 너머로 올려다보면 일제로부터 해방 백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일제의 잔재, 친일의 잔재인 천황산(天皇山)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마. 호국의승장(護國義僧將) 삼대사(三大師)를 기리는 밀양의 유림(儒林)들은 해마다 봄.가을로 삼대사의 신위(神位) 앞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바. 우리는 일제의 잔재, 친일의 잔재인 천황산(天皇山)을 하루빨리, 기필코 없애야겠다는 일념으로 이 기고문을 시작한다
사. 따라서 밀양시는 말할 것도 없고, 밀양의 유림(儒林)들과 독립운동관련 단체, 교육지원청(각급 학교 포함), 공공기관, 사회단체 등은 천황산(天皇山)을 없애고 재악산(載嶽山)으로 복원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4.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산명(山名)의 혼란 옛날부터 절(寺)의 명칭 즉, 크고 유명한 절은 산(山)의 명칭과 함께 지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면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토함산(吐含山) 불국사(佛國寺)』『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팔공산(八空山) 은해사(銀海寺)』『모악산(母嶽山) 금산사(金山寺)』 『내장산(內藏山) 백양사(白羊寺)』『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도솔산(兜率山 : 禪雲山) 선운사(禪雲山)』『설악산(雪嶽山) 신흥사(新興寺)』『총본산(總本山) 조계사(曹溪寺)』『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旨寺)』『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등운산(登雲山) 고운사(孤雲寺)』『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한라산(漢拏山) 관음사(觀音寺)』『운악산(雲嶽山) 봉선사(奉先寺)』등이다. 이를 두고 그 산을 절의 『배산』이라 하는데, 배산은 한문으로 『절과 짝을 이루는 配山』과 『절을 품고 있는 背山』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 사진3 ] 표충사(表忠寺) 일주문(一柱門) 위와 같은 사유로 표충사(옛 명칭은 載岳寺 또는 靈井寺)도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지리문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 수많은 문헌(文獻)과 고지도(古地圖), 영정사(靈井寺, 표충사의 옛 이름)에서 개간(開刊)된 불교경전(佛敎經典), 표충사의 석비(石碑) 등에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또는 재악사(載嶽寺 = 載岳寺, 표충사의 옛 이름)로도 기록되고 불려지기도 했다 즉, ❶『재악산(載嶽山) 재악사(載嶽寺)』 ❷『재악산(載岳山) 재악사(載岳寺)』 ❸『재악산(載嶽山) 영정사(靈井寺)』 ❹『재악산(載岳山) 영정사(靈井寺)』 ❺『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 ❻『재악산(載岳山) 표충사(表忠寺)』등으로 불리고 기록되고 있어, 옛날부터 산명(배산)은 변함없고, 절의 이름(寺名)만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자봉(獅子峰, 제1봉)은 1839년경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3개의 산명(山名)이 붙어 있고, 1961년도에는 정부에서 제2봉우리인 수미봉(須彌峰)을 재약산(載藥山)으로 지명고시를 하므로써 전문가가 아니면 이 산의 명칭에 대해서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으며, 특히 천황산(天皇山)은 정부와 울산(蔚山). 일제(日帝)가 주장하는 성격이 서로 달라(同名異說) 더욱 혼란을 일어키고 있어, 하루빨리 일제(日帝) 잔재 청산과 친일(親日)의 잔재를 척결하고 원래의 산명인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으로 복원시켜야 하는 민족적.국가적으로 시급하고 중대한 상황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이 산(사자봉 獅子峰, 해발 1189.2 미터)에 대한 개인과 정부.각 단체 등이 주장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❶원래부터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이다(손흥수.도재국, 수많은 역사적 증거 인용) ❷신라시대 흥덕왕(興德王) 때부터 재약산(載藥山)이다(표충사, 載藥山靈井寺古跡 인용) ❸1925년경부터 천황산(天皇山)이다 [조선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재임 시 개악(改惡), 국토지리정보원 보관 “5만분의 1 지형도”에 天皇山 최초 기록] ❹조선총독부가 임명하는 친일 주지(親日住持)가 관리하는 표충사는 일제시대부터 산문 역할을 했던 일주문(一柱門)에 “天皇山 表忠寺” 라는 현판을 달았다가 천황산(天皇山)이 일제(日帝) 잔재라는 비난을 받아 1970년대 초반에 표충사가 스스로 산문 현판을 철거하고 2017.3.11 까지 일주문(一柱門)에 산문(山門)의 현판이 없이 두었다가, 2017.3.12 일주문에 “載岳山 表忠寺”라는 현판을 달고, 2017.8.17 산문을 신축하여 ”載嶽山門”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대한불교조계종 표충사) ❺천황산(天皇山)이다 (1961년, 국립지리원 지명고시) ❻천황산(天皇山)은 민족의 산명이다 [1989년경, 울산향토사학자 이유수(李有壽) 천황산일식명설고찰(天皇山日式名說考察) 주장] ❼천황산(天皇山)이다 [근래에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산(山) 45번지 솔방마을 입구 소천봉(小天峰) 산록에 있는 한 단체가 주장하면서 “天皇山 표지석” 옆에 돌무더기로 신단(神壇)을 만들어 매년 5월 초순에 의식(儀式)을 행하고 있다] 위와 같이 일제(日帝)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과 역사적 근거가 없는 재약산(載藥山) 산명을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❶ 제1봉인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을 일제가 1925년 최초로 천황산(天皇山)으로 조작했다.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하루빨리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으로 복원해야 한다 ❷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을 정부가 최초로 재약산(載藥山)으로 지명고시했다. 같은 산군(山群) 안에 2개의 산명을 부여하면 않된다. 그래서 제2봉인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해야 한다 5. 1995년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재악산(載岳山) 산명의 결정적 증거인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출토
[ 사진 4 ] 표충사삼층석탑 [載岳山表忠寺三層石塔] [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
※ 이곳에서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가 출토되었다
1995년 무렵 표충사삼층석탑(원래 명칭은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 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이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서 기울기 시작하자 당시 표충사는 문화재 붕괴 위험의 사실을 밀양시(문화재 부문은 문화관광과 담당, 언론 부문은 문화공보실 담당, 후에 문화공보실은 문화공보담당관으로 직제 명칭 변경)에 통보를 하였고 밀양시는 표충사삼층석탑 현장조사를 한 후에 표충사삼층석탑의 붕괴 위험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를 하였다 문화재관리국은 1995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우방 학예연구실장"을 표충사삼층석탑 현장에 파견하여 조사를 한 후에, 밀양시와 표충사의 건의에 따라 삼층석탑을 전면 해체하여 보수하는 공사를 허가받아 밀양시는 1995년에 시비와 도비, 국비를 확보하여 시공사인 동신건설이 표충사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공사 과정에서 1995년 6월 2일 삼층석탑의 1층 기단부 하부에서 다량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유물은 다음과 같았다. ①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靈井寺는 1491년도 표충사 명칭, 일명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개수비(改修碑)] : 삼층석탑의 개수(改修) 내력 등을 새긴 돌 비문(碑文) 1건 1점
②다량의 불상(佛像), 기타 공양물(供養物), 유리제 구슬류, 사리함, 개수비를 포함해서 모두 45점 정도였디 ○출토 유물수량 근거 1. 밀양향토사연구회 2011년 발행, 밀양이야기 제2호(29~ 34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밀양시 자체 업무보고서(문화공보실장 → 밀양시장) - 제 목 : 표충사 3층 석탑 해체 경위 - 공사기간 : 95.5.7 - 7.28(60일간) - 공사금액 : 27,500천원(국비50%, 도비25%, 시비25%) - 시 행 자 : 표충사 - 도 급 자 : 서울 소재 동신건설 이덕희(보수 제236호) - 삼층석탑 문화재 지정일자 : 보물 제467호(68.12.19) - 해체원인 : 석탑 기단층의 침하현상으로 탑신이 심하게 기울고 있음 - 출 토 품 : 조선시대 자기 1점, 유리제 구슬 5개(청4, 백1), 청동입불상 4점(16.9 - 4.0), 음각된 석판 1점[조선 성종 22년(1491년경)] - 500년 전 중수 - 당초 건립 신라말기(1,000여 년 전) - 금후 조치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강우방의 총 지도하에 잔존탑 기단부 실측 및 정밀조사 예정 - 출토유물 보존처리코자 문화재관리국 이송 - 보 고 자 : 문화공보실장 오○○ ○출토 수량 근거 2. 무이거부스님 증언(출토유물을 통도사로부터 표충사로 반환받은 수량 45점 정도) ①1995.6.2 삼층석탑 출토수량 45점 정도 ②1995.6.2 이후 통도사로 이관수량 45점 정도 ③2002년 혜오주지스님 재직시 통도사로부터 반환수량 45점 정도 ④2017.10.30, 문화재청 보물지정수량 28건 34점(유리구슬 등 제외) ※2002년도에 통도사로부터 반환받은 “수량이 45점 정도”이므로, 그 이전인 출토수량 및 통도사 이관수량도 45점 정도로 추정함 ※ ㈜도재국 : 위 보고서는 탑신 해체 중에 출토되었고, 관련 자료와 진술 등을 종합해 보면 출토 완료 후에는 전부 45점 정도가 된 것으로 보임 ●삼층석탑에서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될 무렵인 1995년경에 표충사와 밀양시는 소위 천황산[天皇山, 해발 1189.2미터, 봉우리 명칭 사자봉(獅子峰)]을 재약산(載藥山)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고 ●도재국과 손흥수 1995년 이전부터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 이하 재악산(載嶽山)으로 칭함]으로 주장, 홍보하면서 기존에 확보한 역사적인 증거 외에도 계속해서 더 많은 재악산(載嶽山) 산명의 증거를 찾는 중이었다 ●위와 같이 밀양시와 표충사 등이 제1봉을 재약산(載藥山)으로 주장할 때, 손흥수와 도재국 등은 밀양시와 표충사의 주장과 달리 재악산(載嶽山)으로 주장하고, 울산은 또 다른 천황산(天皇山)으로 주장하는 상태에서, 1995.6.2 표충사삼층석탑 보수공사 중에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이하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라 칭함] 등 다량의 성보유물(28건 34점)이 발견되었다 밀양시는 삼층석탑에서 유물 발견 사실을 문화재관리국에 즉각 보고를 하였으며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당시 우리나라 사찰석탑의 최고 권위자로서 총책임자였던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우방 학예연구실장을 표충사삼층석탑 공사현장에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아래의 "20번 항목의 유물 목록 등과" 같은 다량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6. 국립중앙박물관 사찰석탑(寺刹石塔) 최고 권위자의 첫 탄성, “개수탑기비는 국보급이다”
당시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는 1995.6.2 공개된 출토유물에 대해서 개수탑기비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를 하였다
[ 사진 5 ]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탁본 사진( 무이거부스님 제공) ◎재질 및 규격 : ①재질(석재) ③규격(높이 68.0cm, 너비 59.0cm, 두께 10.0cm) ◎위 탁본은 도재국과 손흥수가 비문을 판독한 후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표충사에서 탁본한 것을 무이거부스님이 입수하여 2015년 5월 초에 밀양시지명심의를 하기 전에 박일호 밀양시장에게 무이거부스님이 직접 전달하고, 손흥수와 도재국도 이때 입수를 했다. 개수탑기비가 1995.6.2 출토된 직후부터 이 비(碑)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이와 동시에 載嶽山(載岳山) 산명도 표충사 등에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禁忌)시 되었고, 표충사 등으로부터도 載嶽山(載岳山) 산명이 더 심한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표충사 유물관 안에 보관된 이 비문(碑文)을 손흥수와 도재국이 판독하기 위해서 탁본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재국과 손흥수는 2002.4.5 이후에 이 비(碑)가 유물관 입구에 존치된 이후로 표충사에 수십 번을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어서 위와 같은 글자를 겨우 판독했다. 글자는 오전과 오후의 햇빛의 방향에 따라, 날씨의 맑고 흐림에 따라 보이다가 안 보이기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 비(碑)는 유리함에 넣어져 유물관 입구에 존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유물관 안으로 봉안되었다.
----------------------------------------------------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찰석탑(寺刹石塔)의 최고권위자로서 책임자인 국립중앙박물관 강우방 학예연구실장은 “개수탑기비는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석탑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국보급(國寶級) 유물이다”라고, 첫 탄성을 자아내었다 라는, 보도였다
문화재관리국은 사찰석탑 관련 최고 책임자이자 전문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우방 학예연구실장을 표충사에 파견 및 조사를 했고, 경남도청 등의 관련 부서 공무원들도 현장 조사 및 시공 감독(施工監督)에 참여했다 7. 1995년 개수탑기비 출토 무렵, 밀양시와 표충사는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추진 가. 표충사와 밀양시의 충격 1995년 개수탑기비 출토 이전부터 “제1봉인 사자봉(獅子峰)은 재약산(載藥山)이다” 라고, 주장하고, 재약산(載藥山)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표충사와 밀양시는 “제1봉이 재악산(載岳山)이다”라는, 결정적 증거인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가 표충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되자 난감함을 넘어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러한 정황적 증거는 아래와 같이 전개되었고, 결국에는 “개수탑기비의 행방 묘연(杳然)”으로 이어졌다 나. 개수탑기비 출토 무렵에 밀양의 산악회 및 민간인.밀양시.경남도가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 운동 전개
○ 1994.11.22 : 창간 5주년 기념 독자특별기고, 제언(밀양신보) : 載藥山 밀양인 이름으로 되찾자(박○○) ○ 1995년 : 천황산 천황봉(天皇山 天皇峰) 표지석 철거 → 재약산 사자봉(載藥山 獅子峰) 표석 건립(밀양군수 손현식 외 시.군민 박○○ 확인) ※도.농통합시(都農統合市) 이전에는 밀양시와 밀양군이 분리되어 있었음 ○ 1995.6.2 : 표충사삼층석탑 해체공사, 명문석(載岳山靈井寺 銘文) 발견(밀양시 공보실) ○ 경남도보(慶南道報) 모니터 광장(경남도보), 통일신라 명문석(載岳山靈井寺 銘文) 등 유물 15점 발굴, 밀양표충사 삼층석탑 해체보수 작업중(박○○ 기사제공) ○ 1995.7.18 : 우리 고유지명 변경의견(天皇山 → 載藥山) 경남도지사에게 제출함 ○ 1995.8.5 : 경남도 자연지명 변경 4건 신청(경남도보) 밀양시(天皇山 → 載藥山) ○ 1996.5.22 : 산 및 봉에 대한 질의에 대하여 (밀양 3.3산악회장 박○○, 1996년) 국립지리원장은 3.3산악회장 박○○에게 1996.5.22 회신하기를 "天皇山과 載藥山은 구별되어 있고, 통털어 載藥山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으나 자연지명의 제정, 변경은 신중히 검토.처리되어야 한다" 라고, 회신함) ○ 근거 : 밀양향토사연구회 발간 "밀양이야기 제2호(2011년 12월 발행)" 13 - 14 페이지 및 27페이지, 국립지리원 공문, 문서번호, 지도58260-381(1996.5.22) 다. 표충사삼층석탑 해체 경위 및 조사에 참여한 소속 공무원 현황 ○ 조사 경위 : 문화재관리국에서 현재의 삼층석탑의 기단부 등 외부 표면상 이완이 심하므로 95.5.17부터 해체보수 작업을 실시하게 된 것임 ○ 조사자 : ①강우방(姜友邦)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②이정섭(李廷燮) : 문화재전문위원 ③김선태(金善泰) : 학예연구관 ④이굉지(李宏址) : 경상남도 학예연구관 ⑤백찬규(건축사무관) ⑥조인규 등 ○ 근거 : 밀양이야기 제2호(2011년 12월 발행) 31페이지(밀양시문화공보실 제공 1996.6.2 언론보도자료)
[ 사진 6 ] 밀양향토사연구회 발간 “밀양이야기 제2호(2011년)” 표지 사진 라. 밀양시와 경남도, 일제가 조작한 天皇山을 역사적 근거가 없는 載藥山으로 변경 적극 추진 1) 밀양시 추진 증거(1) ○ 공문번호 : 밀양시 총무13107-1434(95.6.30) ○ 공문 제목 : 우리고유지명 변경 의견 제출 ○ 공문 요지 : 제1봉을 天皇山에서 載藥山으로 변경해 달라 ○ 발신(밀양시장) → 수신(경상남도지사)
2) 경상남도지명위원회, 당초에는 天皇山을 載岳山으로 인정 ○ 공문번호 : 경남도 지역 58214-674(95.7.18) ○ 공문 제목 : 우리고유지명 변경 의견 제출 ○ 공문 요지 : - "제1봉인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해 달라" 라는 밀양시의 보고에 - "경상남도지명위원회가 天皇山을 載岳山으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하다" 라는, 의견이므로 - "이에 밀양시장의 의견을 듣고자하니, 본 위원회가 심의과정에서 제시한 관련사료(史料)를 참고해서 1995.7.19까지 경남도에 의견을 보고하라" ○ 발신(경상남도지사) → 수신(밀양시장) ※ 필자(도재국)가 당시 경상남도지명위원회가 심의한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본 위원회가 제시한 "역사적인 載岳山의 증거"는 많았으나, 밀양시가 제출한 載藥山의 역사적인 증거는 없었고, 다만 창건설화를 근거로 한 주장이었는데, 명백한 역사적인 증거가 수없이 많은 상태에서는 "창건설화"는 증거능력으로 인정될 수 없음
※ 위와 같은 과정에서 경남도는 경남도지명위원회의 당초 의견과는 다르게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확정하여 국립지리원에 통보
3)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 제1봉 載藥山 불인정하고, 기존 天皇山 인정 ○ 공문번호 : 국립지리원 지도 58260-837(95.117.9) ○ 공문 제목 : 중앙지명위원회 개최결과 통보 ○ 공문 요지 : - 제1봉을 天皇山에서 載藥山으로 변경해 달라는 밀양시와 경남도의 신청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므로 載藥山으로 결정하는 것을 유보(留保)하고 기존대로 天皇山으로 유지한다 ○ 발신(국립지리원장) → 수신(경상남도지사, 밀양시장)
※ ㈜도재국 : ❶당초에 밀양시가 경남도에 제1봉을 天皇山에서 載藥山으로 변경해 달라고 하였을 때 "경남도지명위원회는 天皇山이 아니고 載岳山이 타당하다" 면서, 밀양시장에게 본 위원회가 제시하는 역사적인 사료(史料 ; 이 사료는 載岳山에 대한 많은 사료였음)를 참고하여,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으나, ❷밀양시는 載岳山의 수많은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애써 외면하고 ❸밀양시는 다시 載藥山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경남도에 보고를 했고, ❹이에 따라 경남도는 (경남도지명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위원들로 하여금 載藥山으로 심의하도록 하여) 결국은 載藥山으로 하여 ❺국립지리원(지금은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 변경)에 보고를 했으나, 국립지리원은 산하 중앙지명위원회(지금은 국가지명위원회로 명칭 변경)는 밀양시와 경남도의 요구를 “사실상 기각(인정하지 않고)”하고 ❻울산측의 요구대로 "天皇山이 맞다" 라고, 결정하여 그 결과를 경남도와 밀양시에 통보를 하였다. ❼이때 국립지리원은 “사실상의 기각”을 완만한 표현인 “유보(留保) 결정“ 이라는 명칭을 써서 경남도와 밀양시에 공문을 내려 보냈다. ❽그런데 이러한 국립지리원으로부터 ”유보 결정“의 공문이 밀양시와 경남도에 시달된 후부터 밀양지역에서는 ”밀양시가 天皇山을 載藥山으로 변경해 달라고 경남도와 국립지리원에 신청을 하여 載藥山으로 변경하였다“ 라고, 대대적으로 거짓말 소문이 퍼졌다. 이러한 소문은 24년째가 되는 2018년 지금까지도 들리고 있다. 소위 요즘으로 치면 심각한 “가짜뉴스”였다. ❾이에 손흥수와 도재국 등은 어느 집단과 단체가 이런 “가짜뉴스”를 전파시키는지를 정황상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고 또 심한 분노감을 느꼈다. 역사적 근거와 증거를 무시한 ①국립지리원의 중앙지명위원과 ②울산측의 天皇山 주장과, ③역사적 근거가 없는 載藥山을 주장하는 밀양측의 가짜뉴스 전파자와 전파 단체, 기관등”이 더 이상 역사 및 사실의 왜곡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8. 출토된 성보유물 중 “불상(佛像) 등 45점(點)”을 통도사 성보박물관으로 이관(봉안) 가. 표충사삼층석탑 출토유물 45점 정도 1995년경 통도사 이관 1995.6.2경 표충사삼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는 개수탑기비를 비롯한 불상과 유리구슬. 사리함, 철편, 기타 공양물 등 45점 정도가 출토되자 귀중한 성보유물로서 국가급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소중한 보물이었기에, 유물 보관시설이 미흡한 표충사에 수장(收藏) 할 상황이 못되어, 표충사에서 바로 『통도사 성보박물관』으로 이관, 봉안되었다 이때 개수탑기비는 통도사로 이관하지 않고 표충사에 남겨두었다가 숨겨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 1995년 여름부터 손흥수와 도재국, 개수탑기비를 계속 찾았다 훗날 무이거부스님이 개수탑기비를 원통당(圓通堂) 부근 담장 아래 땅속에서 발견하기 전 까지는(무이거부스님이 표충사에 오기 이전까지는) 표충사에서는 개수탑기비를 통도사에 보관해 두었다고 했으나, 손흥수와 도재국은 “그런 말은 신빙성이 없다” 라고 생각하고, 표충사 안밖을 무려 8여년 동안 계속 찾아 헤매었다 9. 1995.6.2 출토 후, 개수탑기비의 행방 묘연(杳然) 위와 같이 1995.6.2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개수탑기비는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국보급(國寶級)이라고 말한 것을 인용보도한 신문보도(국제신문과 부산일보 1995.6.2경 보도기사)와 1995.6.2 밀양시 문화공보실이 언론기관에 보도자료로 제공한 공문에도 “ ~ 前略. 명문석(銘文石, 개수탑기비 改修塔記碑를 말함) 은 현재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탑의 건립 경위 등은 이 명문석의 판독 후에 규명될 것으로 알려졌다. 後略 ~ ” 라고, 보도했다 ※ 근거 : 밀양향토사연구회 년보(年報) 밀양이야기(제2호, 2011년 11월 발행) 31페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1995.6.2 출토 후부터 비(碑)가 행방(行方)이 묘연해졌였다 그후 손흥수와 도재국은 오랜 세월동안 다음과 같이 개수탑기비를 찾아 헤매었다 ○ 두 사람은 확인 가능한 표충사의 대부분의 전각(殿閣) 안밖을 다 살폈다 ○ 표충사 주변의 모든 대밭 속도 다 살펴보았다 ○ 표충사 주변 모든 계곡을 다 살펴보았다 ○ 인터넷에도 "개수탑기비의 행방을 찾는다" 라고, 많은 곳에 글을 올렸다 ○ 시중에도 관심을 가져볼만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개수탑기비를 찾아야 한다" 라고, 말을 했다 ○ 일반적인 모임에 가서도 "개수탑기비를 찾는다. 협조해 달라" 라고, 이야기 했다 ○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강우방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개수탑기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국보급(國寶級) 유물이다” 라고, 신문에 난 이야기를 거의 다 하여, 일반인의 관심을 유도시켰다 ○ 그러나 손흥수와 도재국은 7년 가까이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찾아 헤매었으나,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이 2002년 4월 5일 식목일에 표충사 원통당(圓通堂) 옆 담장 아래에 꽃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다가 개수탑기비를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비(碑)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10. 손흥수.도재국, 표충사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에서 또 하나의 재악산(載岳山) 증거 발견 손흥수와 도재국은 개수탑기비를 찾기위해 수십 번을 표충사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모든 전각(殿閣)과 비문(碑文). 대밭. 골짜기 등을 조사, 확인하던 중에 일주문(一柱門) 뒷편 비림(碑琳)에서 경자갑보월비 [庚子甲補月碑, 지금은 효봉대종사사리탑 뒤편으로 이건(移建)되어 있음] 에 새겨진 "영좌밀양재악산영정사(嶺左密陽裁岳山靈井寺) " 라는, 재악산(載岳山) 산명의 또 하나의 결정적 증거를 발견하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사자평에서 표충사 도감스님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즉, 사자평습지에서 낙동강환경유역청과 표충사주지스님, 시청 직원들이 공동조사와 브리핑 등을 할 때 필자(도재국)는 습지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때 도감스님을 만나 산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표충사에 내려가시면 경자갑보월비 앞에서 만나자 하고, 내려와서 도감스님에게 비문의 글자를 보여드렸더니, 그 스님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이제까지 제1봉을 載藥山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이 비문 보니 정말 載岳山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하셨다 필자(도재국)가 도감 스님에게 비문을 보여드린 이유는 표충사가 載嶽山 산명에 대해서 이제는 터놓고 우리들(손흥수와 도재국)과 대화를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였으나, 그 이후에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도감스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고 본다
[ 사진 7 ]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 (앞면)
[ 사진 8 ]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 (뒷면)
※ 손흥수와 도재국이 비문(碑文)을 확인하고 있다
◎원래 이 비(碑)는 일주문(一柱門) 바로 뒤의 신도비 등이 있는 비림(碑林)에 같이 있었는데, 손흥수와 도재국이 개수탑기비를 한창 찾고 있을 때부터 이 비문 내용을 도재국은 인터넷 등에 수없이 전파를 시켰다. 그 이후 어찌된 일인지 이 비만 뽑아서 효봉대종사사리탑 뒤로 옮겨버렸다. 우리가 보기로는 이런 비는 표충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비(碑)이므로 만인이 잘 볼 수 있는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세워두어야 하는데, 이 비만 쏙 뽑아서 외진 곳으로 옮겨놓으므로써 여러 사람이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못 볼 수 있게 되었다. ◎위 판독문은 도재국과 손흥수가 개수탑기비가 1995.6.2 출토된 직후에 확인, 판독한 것이다. 1995.6.2 이후부터 개수탑기비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이와 동시에 載嶽山(載岳山) 산명도 표충사 등에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禁忌)시 되었고, 표충사 등으로부터도 載嶽山(載岳山) 산명이 더 심한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표충사의 허락을 받아 탁본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재국과 손흥수는 표충사에 수십 번을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어서 위와 같은 글자를 겨우 판독했다. 글자는 오전과 오후의 햇빛의 방향에 따라, 날씨의 맑고 흐림에 따라 보이다가 안 보이기를 반복했다. 얼마 후 이 비(碑)는 유리함에 넣어져 유물관 입구에 존치되었다가 수년 후에 유물관 안으로 봉안되었다. ◎표충사에서 위 비문의 탁본을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탁본을 하기 위해 먹물과 문종이 등을 항상 차에 싣고 다녔다. ----------------------------------------------------
경자갑보월비에는 “영좌밀양재악산영정사(嶺左密陽載岳山靈井寺)”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즉, 상세한 설명을 붙여 번역(飜譯)을 하면 다음과 같다 “문경새재(조령 鳥嶺)에서 먼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낙동강의 좌안(左岸)에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요즘으로 치면 密陽市)가 있고, 그곳에 재악산(載岳山)이 있고, 재악산(載岳山)에 영정사(靈井寺, 지금의 표충사를 말함)가 있다” 라는, 문장이다 11.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 표충사 이석(移錫)과 사라진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발견
가.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 “덕숭산(德崇山)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에서 2001.5.23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 이석(移錫) ◎무이거부(無二據芙)은 법명(法名)은 거부(巨芙)요, 강호(講號)는 무이(無二) 로 강백(講伯)이시다 ◎무이거부(無二據芙)스님은 범어사(梵魚寺) 강원(講院)을 졸업하시고, 범어사 강원(講院)에서 강의(講義)하셨으며 ◎“덕숭산(德崇山)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로 이석(移錫)하여 초대(初代) 강사(講師)로 강원(講院)을 개당(開堂)하여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강원교재(講院敎材)로 강의(講義)하시면서 초발심(初發心)부터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까지 강원교재를 완간하셨다 ◎2011.5.23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에 이석(移錫)하여 주석(住錫)하면서 사명대사(四溟大師) 유품(遺品)을 열람하시다가 목판본 판각을 발견, 정리하셨다 ◎1612년도 판각한 목판본은 2005년 3월에 사명대사어록(四溟大師語錄)을 주해(註解)로 발간하시고 ◎1738년도 판각한 목판본은 2006년 3월에 사명대사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을 발간하셨으며 ◎2017년 5월과 11월에 표충비각(表忠碑閣) 일명 “땀흐르는 비”를 여러 해 준비하셔서 삼대성사 표충비각(三大聖師表忠碑閣)을 발간하셨다 4면(四面)의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①남면(南面) : 사명대사비명(四溟大師碑銘) ②서면(西面) : 표충사사적(表忠祠事績) ③북면(北面) :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④동면(東面) : 음기(陰記) 불사인명(佛事人名) ⑤표충비각 사면(表忠碑閣四面) : 문화재청 제공으로 재판 ⑥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2018년 5월에 사명대사 일대기(四溟大師一代記)를 신도들이 알기쉽게 발간하셨다 ◎현재는 무이거부(無二巨芙) 강백(講伯) 스님은 굴택(窟宅)에 주석(住錫)하시면서 승가(僧家)에서 도제양성(徒弟養成)에 전념하시다가 ◎인재양성(人才養成)을 위하여 무이장학회(無二獎學會)를 구성하여 초.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9회로 109명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였다 하셨다 나. 2002.4.5 식목일,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발견 ◎천년보찰(千年寶刹) 표충사 호국성지(護國聖地)로 이석(移錫)하신 후, 원통당(圓通堂)에서 정진하시던 스님은
◎수덕사로부터 표충사 이석 후, 2002.4.5 첫 식목일을 맞아 원통당 옆 담장 아래에 꽃나무를 옮겨 심어시다가 땅속에 제법 이상한 돌을 발견하시어, 괭이로 파내어보시니 심상찮은 돌이었다
◎그 돌을 원통당(圓通堂) 앞 수돗물에 정성들여 씻어보시니, 그 돌이 바로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였다
[ 사진 9 ] 재악산(載岳山)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 (글자 판독 사진) ◎재질 및 규격 : ①재질(석재) ③규격(높이 68.0cm, 너비 59.0cm, 두께 10.0cm) ◎위 비문을 손흥수와 도재국이 판독한 글자이다. 상세한 판독이 더 필요하다 ◎위 판독문 2003.4.5 이후부터 도재국과 손흥수가 표충사에 수십번을 들어가서 판독한 것이다. 개수탑기비가 1995.6.2 출토된 직후부터 이 비(碑)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이와 동시에 載嶽山(載岳山) 산명도 표충사 등에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禁忌)시 되었고, 표충사 등으로부터도 載嶽山(載岳山) 산명이 더 심한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2003.4.5 발견하여 표충사가 일반에 공개한 이후에도 유물관 안에 보관된 이 비문(碑文)을 손흥수와 도재국이 판독하기 위해서 탁본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재국과 손흥수는 2002.4.5 이후에, 이 비(碑)가 유물관 입구에 존치된 이후로 표충사에 수십 번을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더듬어서 위와 같은 글자를 겨우 판독했다. 글자는 오전과 오후의 햇빛의 방향에 따라, 날씨의 맑고 흐림에 따라 보이다가 안 보이기를 반복했다. 얼마 후 이 비(碑)는 유리함에 넣어져 유물관 입구에 존치되었다가 수년 후에 유물관 안으로 봉안되었다.
----------------------------------------------------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일이 흐른 후에 표충사 주지(住持) 혜오(慧悟)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에게 알아보신 결과, 이 비석(碑石)은 약7년 전인 1995년 6월 2일 표충사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던 중에 그 탑(塔) 속에서 사십오(四十五) 점(點)의 불상과 구슬 등의 유물과 함께 출토된 것을 알아셨고, 주지(住持)이신 혜오(慧悟)스님과 의논하시어 표충사유물관에 보존하셨다 얼마 후, 표충사에서 공개하기로 결정하여, 유리함(琉璃函)에 넣어 표충사유물관(表忠寺遺物館) 입구(入口)에 봉안(奉安)토록 하셨다 12. 도재국과 손흥수,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를 찾아 천지사방을 헤맨 세월 가. 도재국, 2002년 여름에 표충사유물관 안(內) 유물전시대 아래에서 개수탑기비 발견 ❶무이거부 스님이 2002.4.5 식목일에 원통당 옆 담장 아래에서 개수탑기를 발견하시고서도 표충사는 대외적으로는 바로 발견 사실을 공표를 안했기에 손흥수와 도재국은 진작에는 그 사실을 몰랐고, 계속해서 개수탑기비를 찾고 있었다 ❷즉, 표충사가 개수탑기비를 표충사유물관(表忠寺遺物館) 입구(入口)에 봉안(奉安)하기 직전 무렵까지도 손흥수와 필자(도재국)는 개수탑기비를 찾아 다녔다. 그해 늦은 여름(초가을?) 어느 날 오후에 필자(도재국)는 수년동안 하던 그대로 표충사 안을 헤매어 다니던 중에 표충사 유물관 안의 유물전시대(遺物展示臺) 위의 고문헌(古文獻)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유물전시대 아래를 보니까 그렇게도 찾아헤매던 “개수탑기비(우리들은 그 碑를 약칭으로 ”개수비 改修碑“라 불렀음)”가 놓여 있는 것을 최초로 발견하고, (흥분한 상태에서) 즉시 손흥수 선생에게 전화를 하여 ●도재국 : 지경(地耕, 손흥수 선생의 號) 선생님! 드디어 개수비(改修塔記碑)를 찾았습니다 ●손흥수 선생 : 개수비(개수탑기비)가 어디에 있더노? ●도재국 : 지금, 표충사유물관 안의 유물전시대 아래에 있습니다 ※ 1995.6.2 이후 개수탑기비(약칭 改修碑)가 행방이 묘연해지자, 표충사에 행방을 물어보았더니 “통도사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했으나, 우리들(손흥수,도재국)은 표충사의 그 말을 믿지 않았고, 1995.6.2 이후 행방이 묘연한 개수탑기비를 계속해서 찾아 도재국과 손흥수는 7여년를 헤맨 결과 그날(2002년 여름(초가을?) 드디어 찾았으니, 감격의 순간이었다. 필자(도재국)가 1995년 개수비 출토 보도기사를 복사하기 위해서 바로 부산일보사와 국제신문사까지 달려가서 신문을 복사해 와서 가지고 있던 신문기사에 실려있던 그 “개수탑기비 사진”의 실물(實物)이었다. 당시 두 신문사의 직원은 나의 신문기사 복사, 수집 목적을 묻길레, 그간의 사정을 시간 관계상 다 이야기는 못하고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십니다” 하면서, 복사비용도 받지않고 복사를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1995년 6월 2일 이후에 표충사가 “통도사에 개수탑기비를 보냈다” 라고, 한 말을 우리들(손흥수.도재국)이 믿지 않았던 이유는 “1995년 6월 2일 개수탑기비가 출토되고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에 표충사 및 밀양시가 같이 제1봉인 사자봉의 산명을 재약산(載藥山)으로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있었고, 그 당시 밀양시와 표충사에 함께 사자봉을 재약산(載藥山)으로 꾸준하게 주장하던 어느 관변 향토사학자는 향토신문에 본 건을 기고문으로 작성하여 보도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 개수탑기비 출토 당시 관변 향토사학자 신문 기고문 요약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재약산(載藥山)의 증거가 되는 명문석(銘文石 = 개수탑기비를 말함)이 출토되었다”
❶재악산(載岳山)의 증거가 되는 명문석(銘文石 = 개수탑기비)이 출토되었는데, ❷"재약산(載藥山)의 증거가 되는 명문석(銘文石 = 개수탑기비)이 출토되었다” 라고 왜곡 기고하여, 보도하게 하였다
2002년 여름(초가을?) 경에 필자(도재국)가 개수탑기비(銘文石)를 발견한 순간, 사진을 촬영하려고 당시 유물관 안에 상주(常駐) 근무하던 여자 직원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았다 ●도재국 : 이 비(개수탑기비)를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습니까? ●유물관 근무 직원 : 그 것(개수탑기비) 찍어면 주지스님께 큰 야단을 맞습니다 ●도재국 : 왜 야단을 맞습니까? ●유물관 근무 직원 : 그 비문석(碑文石, 銘文石, 개수탑기비)을 찍어면 카메라 불빛으로 인해서 비문석이 손상을 입습니다. 그래서 사진 찍어면 안됩니다 ※ 표충사 유물관 직원의 이러한 반응은 앞의 국제신문사와 부산일보사의 직원의 협조와는 대조적이었다. 7여년간 땅속에 묻혀있던 개수탑기비가 세상에 불쑥 드러난 2002년 당시에 표충사도 몹시 당황하고 있었을 때라 생각하니 표충사의 입장도 수긍이 않되는 것은 아니었다 ※ 8년여를 헤매어 극적으로 찾은 개수탑기비를 앞에 두고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고, 그 다음날 필자(도재국)는 손흥수 선생을 승용차에 모셔 개수탑기비의 실물을 보여드렸다. 참으로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3.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의 표충사삼층석탑 출토 성보유물을 표충사로 반환 추진과 박물관 정비 노력 무이거부(無二巨芙) 스님에 의하면 ◎옛 유물관(遺物館)은 현재의 종무소(宗務所) 위치이며, 지은주지 스님이 오시자마자 지었고 ◎지금 유물관은 시청에 확인해 보니 1988년도에 5계년계획으로 지었다 (※표충사 주지 지은스님 재임기간 : 1982.12.3 ~ 1994.11.8) ◎표충사 주지 혜오(慧悟)스님은 재임(在任) 시(時)에 양산 통도사(通道謝)로부터 성보유물(聖寶遺物) 45점을 모시고 온 공로(功勞)가 매우 지대(至大)하시다 ◎성보유물 반환 당시 통도사 주지(住持)는 현문스님이셨다. 라고, 하셨다 가. 표충사의 보물(寶物, 聖寶遺物)이 통도사로 이관, 봉안되다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등이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되었을 당시에는 표충사에는 이러한 귀중한 유물을 수장(收藏)할 만한 마땅한 성보유물박물관이 없었고, 또 그러한 유물이 비록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등으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 훌륭한 가치로 보아서 매우 소중하게 보관, 수장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개수탑기비를 제외한 출토 유물 전부(45점)를 통도사로 이관, 봉안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나.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 주지(住持) 혜오(慧悟)스님께 보물 반환 건의 1)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의 표충사 애사심(愛寺心) ◎2001.5.23 충청도 “덕숭총림 수덕사(德崇叢林修德寺)”에서 표충사로 오신 무이거부스님은 표충사에 큰 애사심(愛寺心)을 가지고 수행정진(修行精進)을 하고 계셨고,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등 표충사에 주석(住錫)하셨던 호국승의 역사적 고문헌(古文獻)과 판각(板刻) 등을 살피시고, 봄이 되면 전각(殿閣)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기위해 틈틈이 꽃나무도 심어시면서 위와 같이 우연히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를 발견하시고, 그러한 게기로 표충사삼층석탑에서 1995.6.2 많은 유물이 출토된 사실도 주변의 스님 등으로부터 들어들어 아시게 되었다.
◎무이거부스님은 표충사의 보물이 통도사로 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므로 표충사로 모시고 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셨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공론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야기조차 꺼집어내는 사람도 없었다. 하셨다 ◎무이거부스님은 여러 날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던 끝에 드디어 큰 용기를 내시어 어느 날 저녁에 당시 표충사 주지(住持)이셨던 혜오(慧悟)스님을 면담하시면서 통도사로부터 보물을 돌려받아 표충사(表忠寺)로 모시자는 말씀을 건의하셨다. ◎2002.4.5 식목일,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이 부처님과 표충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나무를 심어시지 않아셨다면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일명 개수탑기비 또는 개수비)는 영원히 땅속에서 잠자고 있었을 것이다 ◎2003년 4월 5일 이후 어느 여름날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이 주지(住持)이신 혜오(慧悟)스님에게 통도사로 가져간 보물 45점을 돌려받기를 건의드리시지 않아셨다면 아직도 통도사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에 봉안되어 있을 것이고, 통도사는 기득권을 주장하여 표충사에 영원히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이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를 발견하시지 못하고, 또 통도사로부터 유물 45점을 돌려받자고 건의하시지 않아셨다면 표충사에서 보물지정 신청도 못했을 것이고, 또 2017.10.30 보물 제1944호로 지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이거부(無二巨芙) 스님은 “표충사 주지 혜오(慧悟)스님에게 표충사삼층석탑 출토 성보유물 45점 반환을 건의하시어 유물을 표충사로 모셔오는데 주지(住持)이신 혜오(慧悟)스님의 공로(功勞)가 지대(至大)하시다” 라고, 강조하셨다 2) 표충사 일주문과 산문의 재악산(載岳山, 載嶽山) 현판 편액의 증거가 되는 성보유물들
지금 표충사 일주문(一柱門)과 산문(山門)에는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의 수많은 역사적 근거와 증거를 바탕으로 표충사를 지키는 載岳山과 載嶽山門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그러한 근거와 증거 중에서 으뜸의 증거는 수백년 전에 표충사(영정사) 경내(境內)에서 간행된 불교경전인 『묘법연화경(일명 법화경)』과 『원각경』에 새겨진 載岳山과 표충사 경내에 수백년의 비바람에도 표충사 사적을 보전하는 개수탑기비와 경자갑보월비이고, 그 비문에 표충사의 배산이 "載岳山"이라고 새겨져 있다
3) 출토유물과 보물지정유물의 수량(數量) 차이에 대해서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이 2002년 표충사 주지(住持) 혜오(慧悟)스님에게 보물 반환건의 및 반환 시(時) 수량과 돌려받은 수량과 2017년 보물지정 시에 수량의 차이가 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1995년 당시 출토유물은 불상과 유리구슬 등을 포함해서 전부 45점 정도였다 ◎무이거부 스님의 표충사삼층석탑 출토유물 반환 건의 결과, 통도사로부터 반환된 유물도 45점 정도였다 ◎2017.10.30 보물로 지정된 수량은 전체 28건 34점이었다 ◎필자(도재국)가 보아서는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사리함, 백자, 유리구슬 등이 보물지정에서 빠져있어 그런 것으로 보여진다 다. 표충사 주지 혜오(慧悟)스님, 통도사 주지(住持) 현문스님에게 보물 반환 요청 ◎앞에서도 설명을 했지만, 무이거부스님이 2001년 (陽)5월 23일 수덕사로부터 표충사로 이석(移錫)하신 후에 2002년 4월 5일(식목일) 개수탑기비를 발견하셨다 ◎무이거부스님이 표충사로 이석하시기 전인 1995.6.2 표충사삼층석탑에서 개수탑기를 비롯한 유물 45점 정도가 출토되었다 ◎무이거부스님은 출토 당시에 표충사에 수장(보관)할 마땅한 수장고가 없어, 귀중한 유물을 통도사로 이관, 봉안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시고서 ◎2002년 여름 어느날 저녁에 무이거부스님은 당시 표충사 주지 혜오(慧悟)주지스님을 찾아 통도사(通度寺)에 있는 성보유물 45점을 표충사로 반환해 올 것을 건의 드렸다 ◎무이거부스님의 건의를 받아드리신 혜오주지스님은 당시 통도사 현문주지스님에게 건의를 드리시어 표충사 유물 45점을 반환받기를 약속 받으셨다 라.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 표충사 박물관 정비 건의 ◎통도사 현문주지스님으로부터 표충사유물을 돌려받기로 약속을 받아 내시었지만, 당시 표충사는 귀중한 성보유물을 수장(收藏) 및 전시(展示)할 마땅한 박물관이 없었다 ◎이에 무이거부스님은 혜오주지스님에게 건의를 하시어, 밀양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지금의 유물관을 정비하여 박물관으로 하여 통도사에 있는 "유물 45점"을 수장, 전시토록 준비하셨다 마.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의 노력으로 보물 45점 드디어 표충사 반환 ◎ 위와 같이 표충사박물관이 정비, 완공되고, 또 규정상 박물관장이 임명되어야 했다. 그래서 무이거부스님이 초대 표충사박물관장으로 임명되신 후에 당시 표충사 종무소(宗務所) 이모(李某)사무장 등이 통도사에 가서 되돌려 받아온 표충사삼층석탑 출토유물이 대략 45점이 되었다 바. 무이거부(無二巨芙)스님, 초대 표충사박물관장 역임 표충사 전각(殿閣) 아래 땅에 묻혔던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가 발견, 박물관에 봉안되고 , 또 통도사로 가져간 유물 45점이 표충사로 되돌아오자 무이거부스님은 박물관장(博物館長)의 자격으로 정성을 다하시어 고승(高僧)의 향취(香臭)가 배어있는 수많은 유물을 살피시고 관리하시고 특히 돌려받으신 보물 45점과 더불어 호국의승(護國義僧) 삼대사(三大師) 등에 관한 고문헌의 귀중한 원전(元典)인 판각(板刻) 등에 관심을 가지시면서 뒷날 호국성지(護國聖地) 삼대사(三大師) 어록(語錄) 번역 및 발간의 토대를 만들어 가셨다 [ 사진 10 ] 표충사 박물관(유물관 遺物館) 사진
※ 유물관 입구 왼쪽의 유리상자 안에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가 전시(展示) 중이다 ※ 이 비(碑)는 2018년 11월 10일 현재 유물관(遺物館) 안쪽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14. 무이거부스님, 호국성지 삼대사 선양(宣揚)사업 전개
가. 무이거부스님의 표충사 주석(住錫) 시, 삼대사(三大師) 관련 어록 발간 1)『사명대사어록(四溟大師語錄)』역주(譯註).발간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임진왜란 때 "바람 앞에 등불"처럼 왜적에 국가가 난국에 처했을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신 사명대사의 고문서를 정리, 주해하여 2005년 3월에 『사명대사어록(四溟大師語錄)』을 역주(譯註), 발간하셨다. 이러한 사업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서산대사.기허대사의 신위(神位)를 향사하는 밀양의 유림 단체와 향토문화업무를 담당하는 밀양시와 표충서원을 관리하는 표충사, 밀양문화원 등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사명대사의 고문(古文)을 정리, 주해하여 책을 발간하여야 하나, 무이거부스님이 많은 사비를 들이시어 책을 발간하시어 밀양은 물론 전국에 배부하시고 계신다.
[ 사진 11 ] 사명대사어록 (四溟大師語錄) 표지 또 임진왜란 당시의 난중일기와 선조 임금께 올린 상소문. 재상들과 주고받은 서간. 전별시. 왜장들과 주고받은 서찰 등이 실려있는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을 정리하시어 주해를 달아시어 『사명대사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을 발간하시어 밀양과 전국에 무료로 배부하시고 계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사명대사(四溟大師)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에서 본 사명대사 일대기
다음의 내용은 무이거부 스임이 역주(譯註)한 “사명대사어록”에 소개된 내용이다 허균[許筠, 1569.12.10일(음11.3) - 1618.10.12(음8.24]은 조선중기 문인.학자.작가.정치가.시인으로 “사명대사(四溟大師)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을 작성하고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석장비명(四溟大師石藏碑銘)의 비문을 지었다
◎ 사명대사(四溟大師) 문집(文集)의 서문(序文) 지난 병술(1586)년 여름에 나는 중형(仲氏 : 許均의 仲兄)을 모시고 서울 한강을 배로 건너 봉은사(奉恩寺) 아래에 도착하니, 어떤 한 운수납자(雲水衲子)가 부지런히 오시더니 선창가 뱃머리에서 인사를 하지 않겠는가? 그 법체가 훤출하고 그 용안이 엄숙함이로다. 그 앞에 나아가 그와 더불어 자리를 함께 하여 이야기를 나눈 즉, 말씀은 간략함이나 뜻은 매우 깊고 원대함이로다. 그에게 법호를 여쭈었더니 종봉(鍾峰)이요 유정(惟政)이라 말씀함이로다. 나는 마음속으로 진실로 훌륭한 스님으로 생각하고 그날 밤에는 매당(梅堂)에서 유숙함이로다. 또한 그 스님은 게송(偈頌)을 맑은 거문고 소리처럼 읊으니 나의 중형이신 하곡(荷谷)께서도 격문(檄文)이 높음에 지극한 칭찬을 아끼지 않음이로다. 그 스님을 당나라 아홉 승려(九僧, 큰 법회에 여러 승려를 거느리는 아홉 사람)와 나란히 할 수 있음이로다. 그때에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 오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혼자의 식견(識見)으로 모두 마음속에 감히 잊지 못함이로다.
그후 어언 삼년이 지나서 저의 중형 하곡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시고 사명대사(四溟大師)께서는 오대산에 계시다가 오셔서 슬피 울며 조곡(弔哭)을 하시고 또한 만사(輓詞)를 게송으로 지어 주시면서 매우 괴롭고 애처러워 하는 모습과 슬픈 뜻을 깃들여 만사를 지어 줌이로다. 마치 사람의 생사에 즈음하여 석연하지 않은 것과 같음이로다. 나는 가만히 의심하기를, 사명대사(惟政)의 도가 아직 상승법(上乘法, 註解:대승법이라고 한다. 이상경 理想境에 도달하는 교법 가운데 교리와 교설과 수행과 그 이상 목적이 크고 깊은 것을 말한다)을 깨닫지 못하셨는가? 그리하지 않으면 구차하게 세속 사람들의 기뻐하고 슬퍼함을 본받겠는가? 하고 의심함이로다. 그 후 임진(1592)년 겨울에 저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여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의 옛 지명)로 가서 들으니 사명대사(惟政)께서는 의병을 일어켜 국란을 구하며, 그 스승이신 휴정 서산대사(休靜 西山大師)를 대신하여 사명대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몇 번씩이나 악마(惡魔)의 적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나도 또한 뛸 듯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고 그후 사명대사(惟政)는 임금의 명령(命令)을 받들고 왜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왜병을 타이르고 달래어 현저한 공적을 쌓았다는 말을 들음이로다. 나는 그 사명대사를 수승한 스승이라 생각하면서 또한 가히 만날 수 없음을 스스로 안타까워함이로다. 병신(1596)년 겨울에 나는 괴원(槐院, 註解 대신들이 있는 곳)에 벼슬로써 나라의 일로 영의정(領議政)이신 서애상공(西厓相公, 柳成龍,1542-1607)을 찾아가 뵙게 됨이로다. 그 때 사명대사(惟政)는 좋은 의관(衣冠)에 긴 수염을 늘이고 그 법좌(法座)에 앉아 있음이로다. 나는 사명대사의 손을 잡고 기뻐하면서 이에 옛날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의병의 객사로 같이 돌아와 당시의 여러 가지 할 일들을 의론함이로다. 사명대사는 원통하고 분개(憤慨)해서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그리며 이해(利害)를 따짐이 마치 선인(先人)들의 절개(節槪)와 호협(豪俠)한 기상을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나는 말안장(鞍裝)을 어루만지면서 뒤를 돌아보니 그의 맑은 뜻은 요사스런 왜적을 쓸어버리는데 있어서 또한 우렁찬 늙은 장수와 같음이로다. 그래서 나는 사명대사를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이로다. “그의 선시문(禪詩文)은 특히 여사(餘事)이며, 그의 재능은 어려운 시국(時局)을 널리 구제함에 가히 아끼지 않으며 또한 애석하게도 불문에 발을 그릇 들여놓았구나” 함이로다 계묘(1603)년 가을에 사명대사(惟政)께서는 조정의 벼슬을 하직하고 걸사(乞士)의 몸으로 상원암(上院庵) 옛 사찰로 돌아와서 이때에 감호(鑑湖)의 야외로 나를 급히 방문하여 주심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때 나는 세상에 버린 사람이 되어 겨우 내전(佛典)을 취하여 읽어면서 젊은 마음을 달래지 않을 수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불가에서 마음을 밝히고 자기 성품이 있는 곳을 봄에 미혹하나마 관견(管見)으로 보는 바가 있음이로다. 시험 삼아 한두 가지를 얘를 들어 물어 보았더니, 사명대사(惟政)께서 자세히 이해하고 꿰뚫어 통달함을 초월해서 분명히 깨달은 바가 있어 육조해능(六祖慧能, 曹溪 曹溪山의 준말이다. 禪宗의 六祖 慧能大師를 말한다. 初祖 達摩로부터 六대째 祖師이므로 六祖라 한다)와 五祖 홍인대사(五祖弘忍,註解:黃梅:五祖 弘忍大師를 말한다)의 가풍을 확실히 증득한 바가 있음이로다. 이에 나는 비로소 그가 참되고 오묘한 종지(宗旨)를 바르게 깨닫고 꽃(념화拈花,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드시자 가섭존자가 그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한다)을 들어 전법(傳法)하신 뜻을 바로 이어받고, 그 세상을 어렵게 구제하는 것은 또한 그 한 실마리에서 나온 것을 비로소 알게 됨이로다. 그는 수 일 동안 오묘하고 유익한 불교의 진리를 이야기하므로 나는 일찍이 듣지 못한 바를 더욱 많이 듣게 됨이로다. 이로부터 사명대사(惟政)께서 서울에 오시면 언제나 서로 왕래하면서 서로 늦게 알게 됨을 한탄함이로다. 경술(1610)년 9월에 나는 사명대사(惟政)께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만사(輓詞)로써 조상(弔喪)을 하고 또한 선시(禪詩)로써 사명대사의 그윽한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을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한탄함이로다. 이때 나는 비로소 사명대사(惟政)께서 우리 중형 하곡(荷谷)을 생각하여 슬퍼하는 그 마음이 또한 내가 오늘 사명대사를 잊지 못하며 슬퍼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됨이로다. 정이란 것은 무슨 물건인가? 금년에 사명대사(惟政)의 문도 중에 제자이신 혜구(惠球) 스님이 스승이신 사명대사의 옥고(玉稿)와 어록(語錄)을 가지고 와서 서문(序文)을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 사명대사께서 저술하신 바의 게송은 여러 천수(千首)가 되어 일찍이 공(公)의 중형 허봉(許篈)에게 있었는데 그 게송이 병화(兵火)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이 어록은 근일에 수집하여 전체를 태산에 비하면 한 올의 털끝과 같음이로다. 우리들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음으로써 소실되지 않은 글들을 모아 편집해서 이제 출판하려 함이로다.
우리 사명대사께서는 그 게송(偈頌)이 고하(高下)나 그 도(道)의 깊고 얕음을 알면서도 그리고 친분이 좋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는 이는 공(公)과 같은 분이 없음이로다. 한 말씀을 주시어 이 어록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썩지도 않기를 바라며 사명대사에게 큰 은혜가 되기를 서원함이로다.” 용렬한 내가 말하기를 아아! 슬프고 슬픔이로다. 내가 차마 어찌 사명대사의 어록에 서문을 서술하겠는가? 사명대사의 그 게송은 이미 사림(詞林, 시인과 문인들의 세계 즉, 문단 文壇)에서 전파되어 칭찬이 자자했고 사명대사의 그 공덕은 또한 국가를 거듭 회복함에 있으며 사명대사의 그 도(道)는 이미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며 어찌 용렬한 저의 말을 기다려 후일에 사명대사를 더욱 빛나게 하겠는가 함이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건댄 민첩하지 못한 우리 형제는 진실로 사명대사와 함께 불가분의 관계가 아름다움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비루(鄙陋)하고 용렬(庸劣)한 문장(文章)이라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서열과 시종(始終)을 서술하여 그 청하는 바에 보답하고 아울러 깊은 감회를 생각으로 나타내는 바이로다
만력(萬曆) 임자(1612)년 정월(正月)에 교산(蛟山) 허단보(許端甫) 삼가 서술하다 註解:허균(許筠):1509-1618,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엽(許曄)의 셋째 아들로서 字는 단보(端甫)이며 호(號)는 교산(蛟山)이다. 홍길동전(洪吉童傳)과 교산시화(蛟山詩話)와 비한정록(秘閑情錄)과 학산초록(鶴山樵錄) 등을 저술했다. 허봉(許篈)과 허균(許筠) 형제는 사명대사를 극진히 존경하고 사모(思慕)하였다] 3)『사명대사어록』에 가야산 해인사의『사명대사 석장비명』소개
◎가야산 해인사의 사명송운대사 석장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파괴하다 경상남도(慶尙南道) 밀양시(密陽市) 무안면(武安面) 무안리(武安里)에는 홍제사(弘濟寺)가 있고, 경내에는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일명 “땀 흐르는 비(碑)“다. 이 비(碑)의 남면(南面)에는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竝序)로 시작하는 사명대사에 대한 기록이 있고, 서면(西面)에는 표충사적비(表忠事績碑) 북면(北面)에는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동면(東面)에는 음기(陰記) 불사인명(佛事人名)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濟庵)에도 사명대사 관련 비(碑)가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어, 무이거부 스님의 각별한 노력으로 발간한 『사명대사어록』에 수록된 『유명 조선국 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명 병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사명대사 석장비(四溟大師石藏碑)”는 일제(日帝) 경찰서장에 의해 네 동강나 깨어져 있었다 친일파인 해인사 주지가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게 석장비(石藏碑)에 1604년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토(加藤)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물었고, 사명대사가 당당하게 “지금 조선(朝鮮)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寶物)은 바로 당신 목이오”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이 있다고 알려, 다케우라(竹浦)가 석장비(石藏碑)를 네 조각으로 쪼개게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 사진 12 ] 보물 제1301호,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海印寺四溟大師浮屠)
[ 사진 13 ] 보물 제1301호,- 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 (海印寺四溟大師石藏碑)
일제시대(1943년)에,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 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大師)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출처] 보물 제1301호 - 해인사사명대사부도및석장비[海印寺四溟大師浮屠및石藏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kshn&logNo=60056729501
호국성지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를 두고 있는 우리 밀양인은 해인사 홍제암에도 사명대사의 비(碑)가 있고, 그 내용에 사명대사의 깊은 불심과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과 생(生)의 전(全) 과정이 행장(行狀)처럼 들어 있어, 이를 보면 사명대사의 탄생부터 열반까지를 파노라마처럼 눈에 선하게 표현되어,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무이거부(無二巨芙) 스님이 역주.주해를 하시어 발간하신 『사명대사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발췌하여 옮긴다 ◎『유명 조선국 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명 병서』 ◎『有明 朝鮮國 慈通弘濟尊者(1) 四溟松雲大師 石藏碑銘 竝序』 불교(佛敎)가 동쪽으로부터 삼한(三韓)에 들어옴이로다. 또한 교법(敎法)과 계율(戒律)을 아울러 모두 주창(主唱)하고 원점(圓漸)(2)이 서로 나누어져서 수천 년(數千年) 이래로 가사(袈裟)를 입고 여장(黎杖)을 짚은 자가 사람마다 각각 자기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보배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여 옴이로다. 하지만 오직 목우(牧牛)(3)와 강월(江月)(4)이 홀로 황매(黃梅)(5)의 종지(宗旨)를 얻어 높다랗게 선문(禪門)상수(上首)가 됨이로다. 그들이 겸추(鉗鎚)를 한번 떨치면 일만 사람이 쓰러짐이로다 그리하여 열반묘심(涅槃妙心=不生不滅의 眞理)(6)과 정법안장(正法眼藏)(7)들이 청정한 비구(比丘)의 영역(靈域)에 비밀히 전수(傳授)하였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랴 하리오. 보제(普濟)(8)에서 다섯 번이나 전(傳)하여 부용영관(婦容靈觀)(9)이 됨이로다 청허노사(淸虛老師)의 입실제자라 칭하고 그 지혜(智慧)스러운 눈과 오묘한 깨달음은 전배(前輩)들보다 수승(殊勝)함이 있으니 시로 작금의 임제(臨濟)요 조동(曹洞)(10)이로다. 그 후로 그 법맥(法脈)을 계승(繼承)하고자 하는 자는 없지 않았으나 불문(佛門)에서는 모두 사명대사를 융성하게 추대하여 가히 서산대사의 전법(傳法)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하니 그럴 듯한 말이라 하겠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11)이며 자(字)는 이환(離幻)이요, 그 자호(自號)는 사명(四溟)이다. 그 선비(先妣)(12)는 사명대사가 태어나던 날 꿈에 흰구름을 타고 누른 두건을 쓴 금인(金人)(13)을 이끌고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언덕에 올라갔더니 어떤 신선(神仙)이신 한 늙은이가 그 위에 걸터앉아 있음이로다. 이에 이마를 땅에 대고 절과 예경(禮敬)을 하다가 깨고 나서 이내 사명대사께서 탄생함이로다 사명대사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그러나 우뚝하게 뛰어나 보통아이들과는 같이 않음이로다. 점점 자라서 장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여러 아이들과 냇가에 나가 놀 때에는 혹은 모래를 모아 탑(塔)을 만들고 혹은 돌을 세워 부처도 만들었다 함이로다. 그리고는 꽃을 꺾고 밤을 주워다가 거기에 공양을 올렸다 함이로다 어느 날 어떤 그물질하는 어부가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 사명대사는 밤을 가져다가 그 값으로 주고 사서 저수지에 놓아주니 이것을 본 여러 아이들은 모두 감동하여 자기들의 밤을 사명대사 앞에 갖다 놓음이로다. 그러나 대사는 이것을 고루 나누어 여러 아이들에게 주고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감이로다. 이것을 보고 모든 시골 노인들은 이상하게 여김이로다 사명대사께서 일곱 살때 그 조부이신 종원(宗元)(14)께서 역사를 가르쳐서 배움이로다. 사명대사는 묻기를 『학자의 업(業)은 귀(貴)한 것입니까? 천한 것입니까? 만약 귀하다면 마땅히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배우겠습니다』라고 함이로다. 그의 조부께서는 “이 세상의 여러 일 중에 학문(學文)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고금(古今)의 성현들은 모두 이로 말미암아 학문을 배워서 이루어진 것이로다. 그러니 감히 소홀히 할 수 있으랴” 말씀함이로다 “만약 선현(先賢)의 마음으로 업을 삼는다면 그것은 귀하지만 이것을 어긴다면 곧 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말이 많고 사람을 만드는 교훈은 적습니다. 그런데도 학문은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조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해친다는 것은 헛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마음이 착하거나 착(善)하지 않음에 있음이로다. 그러하니 너의 말이 옳구나”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사명대사는 힘써 배움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명대사의 나이 十三세가 되자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15)에게 맹자(孟子)를 배움이로다. 어느 날 저녁에 대사는 책을 덮고 탄식(歎息)하기를 “세속 학문은 비루(鄙陋)해서 세상의 인연(因緣)에 얽매였다. 그러니 조금도 빈틈이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만 하라” 하고, 이내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로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16)을 애경(愛敬)으로 찾아뵙고 머리를 삭발함이로다. 사명대사는 처음에는 전등록(傳燈錄)(17)을 아직 다 익히지 못했으나 이미 오묘한 깊은 뜻을 깨달음이로다. 그리하여 여러 노장(老長)들도 모두 대사에게 나아가 질문함이로다 신유(辛酉)년(18) 선과(禪科)에 급제하시었다. 이로부터 그의 빛나는 이름이 점점 커져서 당시 학사(學士) 대부들과 시인(詩人)들로서 사암(思庵) 박순(朴淳)(19)과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20)와 제봉(齊峰) 고경명(高敬命)(21)과 최가운(崔駕運)과 허미숙(許美淑)과 임자순(林子順)(22)과 이익지(李益之)(23)와 같은 그 사람들이 모두 대사와 더불어 시(詩)를 읊고 창으로 화답하였다 이때에 시문(詩文)은 모든 사림(士林)에 전하여 퍼졌는데 사람들은 이것으로써 아름다운 미담(美談)으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사명대사는 하곡(荷谷) 허봉(許篈)(24)과 한퇴지(韓退之)의 문장(文章) 중에서 제일 긴 문장을 한번 열람하고서 이내 외우기로 내기를 했다고 함이로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그것을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음이로다. 이에 하곡(荷谷) 허봉(許봉)은 손수 사본(寫本)한 기이한 책 한권을 사명대사에게 보상(報償)을 하였다고 함이로다. 제봉(齊峰) 고경명(高敬命)과 기대승(奇大升)(25)은 사명대사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이 일을 믿고 스스로 만족한다면 학문은 반드시 전진(前進)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연히 힘만 허비하고 공(功)을 그르치니 가히 아까움이로다” 라고 함이로다. 대사는 이 교훈(교훈)을 황송스럽게 듣고 부지런히 힘써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고 함이로다. 그리고는 이내 사자(四子)(26)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27) 정승에게 배우고 또한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28)의 시(詩)도 배움이로다. 이로부터 그의 문장(文章)은 날로 전진(前進)해서 내전(內典)의 천(千) 상자 책을 또한 모두 다 읽음이로다. 이에 당시 승려로서 불경(佛經)을 배우려는 자들이 마치 그름처럼 산문(山門)에 모여 모여듦이로다. 을해(乙亥)년(29)에는 불문(佛門)의 여러 대종들은 선종(禪宗)의 주지(住持)를 맡아주기를 추천하였으나 사명대사께서는 이것을 고사(告辭)하고 석장(錫杖)을 짚고 떠나갔다. 이에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비로소 청허대사(淸虛大師)의 문하(門下)에서 배움을 받음이로다. 노사(老師) 청허대사(淸虛大師)께서는 그의 마음을 깨우쳐 주면서 바로 성종(性宗)을 가르침이로다. 사명대사는 청허대사의 말씀을 듣고 언하(言下)에 크게 깨달아 곧 지저분한 여러 말들을 쓸어버리고 부질없는 습관을 끊고 지금까지 하던 문장(文章)은 하나의 유희(遊戲)와 같이 여겨 오직 비단 같은 하나의 말이라고 이를 참회(懺悔)하고 한결같이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성품(性品)을 안정하게 하는 데 뜻을 둠이로다. 이에 삼년 동안 고행(苦行)한 끝에 그 정법(正法)을 모두 얻음이로다 무인(戊寅)년(30)에는 노사(老師) 청허대사를 작별하고 풍악(楓嶽)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보덕사(報德寺)에서 세 번 하안거(夏安居)(31)를 마치시고 다시 남쪽으로 팔공산(八公山)과 청량산(淸凉山)과 태백산(太白山) 등 아름다운 여러 산에서 주석(住錫)함이로다 병술(丙戌)년(32) 봄에는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庵)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에 소나기가 심히 내려 뜰에 피어 있던 꽃들이 다 떨어짐을 보시고 사명대사께서는 홀연히 무상(無常)이라는 진리(眞理)를 깨달음이로다. 이튿날 대사께서는 제자(弟子)들을 운집(雲集)하여 말씀하시기를 어제는 꽃이 피더니 오늘은 빈 가지만 남았구나 사람과 세상의 변화하는 것도 또한 이처럼 반복함이로다 부평초와 같은 인생살이 마치 하루살이와 같음이고 그리고 세월은 헛되이 지나가고 있으니 실로 애석함이로다 너희들은 각각 신령스러운 성품을 갖추고 있음이니 어찌하여 반성을 구하지 않고 일대사 큰일을 종료함이로다 부처님께서도 나의 마음속에 있는데 어찌하여 마음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헛되이 시일을 보냄이로다 대사께서는 즉시 문도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선실(禪室)로 들어가서 입을 봉하고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아서 열흘이 되어도 밖에 나오지 않음이로다. 이에 밖에서 선실(禪室)을 엿보니 대사께서는 우뚝하게 앉아 있음이 마치 소인(塑人)(33)과 같음이로다. 기축(己丑)년(34)에는 오대산(五臺山) 영감난야(靈鑑蘭若)에 주석(住錫)하다가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강릉부(江陵府)(35)로 구속(拘束)되었다. 이때에 유생(儒生)들이 대사께서 죄가 없음을 호소(呼訴)하여 그 원통하고 억울함을 면하여 풀려남이로다 경인(庚寅)년(36)에는 풍악(楓嶽)에 가서 삼(三) 하안거(夏安居)를 주석하고 계시는데 임진(壬辰)년(37) 여름에 왜적(倭賊)이 영동(嶺東) 지방으로 몰려 들어와서 유점사(楡岾寺)에 까지 이르렀다는 소식(消息)이 들음이로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倭賊)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는 말을 듣고 사명대사께서는 “만약 왜적이라면 글을 써서 달래기가 어렵겠지만 그 속에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면 곧 타일러서 이해시켜 깨우칠 수가 있음이로다” 하고 십여 명의 제자(弟子)를 거느리고 바로 산문(山門)으로 들어감이로다 이때 왜적(倭賊)들이 달려들어 제자들을 모두 결박(結縛했다. 그러나 사명대사께서는 혼자서 태연히 걸어가서 곧 중당(中堂)으로 들어감이로다. 왜적(倭賊)의 우두머리는 그가 비상(非常)한 인물임을 알고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어 대접(待接)하니 묶었던 제자(弟子)들도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사명대사께서는 글로 써서 의견(意見)을 교환하면서 그들을 달랬더니 모든 왜적들은 공경(恭敬)하고 탄복(歎服)하여 산속 깊은 곳을 가리켜 사명대사를 보내주었다. 대사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여래(如來)가 세상에 나오신 것은 원래 중생들을 구호하기 위함이다. 이 왜적들은 성질이 사나우니 우리 백성들을 몹시 해칠까 걱정이 됨이로다. 마땅히 내가 가서 저 미친 도둑떼를 달래서 그들로 하여금 흉악(凶惡)한 무기를 쓰지 않도록 말하면 그들도 아마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가르침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함이로다 사명대사께서는 즉시 석장(錫杖)을 날려 고성(古城)으로 들어가니 적장(賊將) 세 사람이 모두 예의(禮儀)를 다하여 대사를 예우(禮遇)하였다. 이에 대사께서는 글로 써서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전했더니 일본 왜적의 장수(將帥)는 삼명 모두 공경히 착수(着手)하여 계율(戒律)을 받들어 들으니 그들은 대사를 만류하여 삼일 동안 공양을 하게 하고 그리고 성(城) 밖에 대사를 전송해 줌이로다. 당시 아홉 고을 사람들이 죽음을 면(免)하여 대개 이것은 사명대사의 공적(功績)이라 함이로다 선조(宣祖)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播遷) 길을 떠나자 의리(義理)로써 왜적에게 항거(抗拒)하려고 분연히 일어나 여러 승려들에게 말씀하기를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나서 먹고 쉬고 놀면서 여러 해 동안 지나 온 것은 모두가 임금의 원력(願力)인 것이로다. 그러니 이렇게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어찌 차마 앉아서 구경만 하고 또 구경만 한단 말이오” 하고, 즉시 수백 명의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가니 여러 의승(義僧)들이 모두 사방에서 모여들어 승병(僧兵)은 수천 명이 됨이로다 이때에 청허대사(淸虛大師)께서는 나라의 명령(命令)으로 여러 도(道)의 승병(僧兵)들을 총섭(總攝)하라고 했으나 청허대사는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辭讓)하고 사명대사(四溟大師)를 추천하여 가기를 대신하게 했다. 드디어 사명대사는 승병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인 유공성룡(柳公成龍)(38)을 따라서 명(明)나라 장수(將帥)와 협동하여 그 이듬해 정월에 평양(平壤)의 왜적(倭賊)을 무찌르고 행장(行長)(39)을 쫓음이로다 사명대사는 도원수(都元帥) 권공율(權公慄)(40)을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의령(宜寧)에 군사를 주둔(駐屯)하고 왜적의 병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은 일이 많음이로다. 이에 임금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제수(除授)함이로다. 갑오(甲午)년(41) 봄에 총병(總兵) 유정(劉綎)(42)이 송운대사(松雲大師)에게 명(命)하여 부산(釜山)의 왜적(倭賊) 진영(陣營)에 들어가서 청정(淸正)을 타이르도록 했다. 이에 대사께서는 세 번이나 왕반(往返)하여 왜적의 정세(情勢)를 다 알아왔다. 이때에 청정(淸正)은 “조선에는 무슨 보물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사는 말이 끝나자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 보배가 있다” 하니,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너희들의 머리를 보배로 보고 있다. 그러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함이로다. 이런 말을 듣자 청정(淸正)(43)은 놀라고 탄식함이로다 이런 일이 있는 후에 선조 임금께서 사명대사(松雲)를 대궐로 불러 평생의 일을 일일이 묻고 이에 하교(下敎)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 중국의 유병충(劉秉忠)(44)과 요광효(姚廣孝)(45)는 모두 산 사람(山人)으로서 수승(殊勝)한 공적을 세우고 이름을 후세에 전함이로다. 지금 나라 형세가 이와 같은데 만약 그대가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백리의 땅을 다스릴 책임을 맡기고 삼군(三軍)을 거느릴 힘을 줄 것이니라” 하시었다. 그러나 사명대사께서는 감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사양(辭讓)하고 퇴궐함이로다. 이에 임금은 무기 창고에 있는 갑옷과 무기를 내어오라 하여 그에게 줌이로다 사명대사께서는 영남(嶺南)으로 돌아와 군사들과 머물면서 군사를 뽑아 왜적과 싸우며 계속하여 용기(龍起)와 팔공(八公)과 금오(金烏) 등 여러 산성(山城)을 쌓아 완전히 군사를 보장(保障)하게 함이로다
각각 전쟁준비를 갖춘 연후에 곧 인수(印綬)와 전마(戰馬)를 바치고 또한 척적(尺籍)(46)을 비국(備局)(47)에 바침이로다. 그리고 글을 올려 대사는 조용한 산으로 들어가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돈독(敦篤)하게 회유하고 허락하지 않음이로다 정유(丁酉)년(48)겨울에는 제독(提督) 마귀(麻貴)(49)를 따라 울산(蔚山) 도산성(島山城)에 들어감이로다 무술(戊戌)년(50)에는 또 유제독(劉提督)을 따라 예교(曳橋)에 들어가 모두 제일가는 곳에 세움이로다. 이때까지 그가 저축한 군량은 사천여 석(四千餘石)이나 됨이요. 병기는 모두 만 개나 됨이로다. 이에 선조 임금은 그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가선(嘉善)의 품계(品階)에 승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제수(除授)함이로다 신축(辛丑)년(51)에는 부산성(釜山城)을 쌓고 내은산(內隱山)으로 돌아옴이로다 계묘(癸卯)년(52)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갑진(甲辰)년(53)에는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갔었다. 모든 왜인(倭人)들이 사명대사를 보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보배 이야기를 하던 화상(和尙)인가” 했다. 대사는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왜인들의 서울에 이르렀다. 이 때 그들의 여러 장수(將帥)들은 모두 사명대사를 믿고 약속을 지켰다. 일본 스님들이 많이 몰려와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다. 사명대사는 이들을 일일이 지도(指導)하니 그들은 모두 정례(頂禮)하면서 대사를 부처님이라 불렀다 이에 사명대사는 가강(家康)(54)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우리 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 도탄(塗炭)에 빠졌기로 나는 그대들을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왔노라 했다. 가강(家康)도 역시 마음으로는 불교에 귀의(歸依)한 사람이라, 이 말씀을 듣자 신심(信心)을 내어 사명대사를 부처님처럼 공경(恭敬)히 모시고 극희 강화(講和)를 했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돌아오게 됨이로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남녀 삼천오백(三千五百) 명을 데리고 오면서 사명대사께서는 준비한 곡식을 먹이면서 바다를 건너 을사(乙巳)년(55)에 귀환(歸還)의 복명(復命)을 함이로다 이에 선조 임금은 그 노고(勞苦)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品階)와 어마(御馬)와 모시 옷 한 벌을 하사(下賜)하여 그 공로(功勞)를 장려함이로다. 이때에 청허대사(淸虛大師)께서는 이미 시적(示寂)(56)하시고 사명대사는 이에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그의 영정(影幀)과 탑(塔)에 예배하고 이에 보현사(普賢寺)에서 계속하여 상례(喪禮)로 영정(影幀)을 지킴이로다. 병오(丙午)년(57) 여름에 사명대사께서는 영선군(營繕軍)(58)을 거느리고 궁궐짓는 부역에 나아갔으며 이때 삼강동(三江洞)에 초막(草幕)을 지음이로다. 정미(丁未)년(59) 가을에 벼슬을 내놓고 치악산(雉嶽山)으로 돌아옴이로다. 무신(戊申)년(60)에 선조(宣祖)의 휘음(諱音)을 듣고 서울로 가서 배곡(拜哭)하고 이에 병을 얻어 몹시 괴롭게 지냄이로다. 광해주(光海主)가 사명대사로 하여금 서쪽 오랑캐를 막어라 명령하였으나 그 명령을 따르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고 조리하니 이즈음에 광해 임금께서는 여러 번 약을 하사(下賜)함이로다 경술(庚戌)년(61) 가을에 임금께서는 사명대사를 걱정하여 서울에 와서 의원(醫院)에게 병을 치료하게 하려고 그 고을 방백(方伯)(62)으로 하여금 공손히 보내도록 명령함이로다. 그해 팔월 이십육일 사명대사께서는 큰 법회(法會)를 열어 수행(修行)하는 모든 문도(門徒)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시되, “사대(四大 : 地水火風)로 구성된 이 몸은 장차 그 진리로 돌아감이니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왔다갔다하여 환과 같은 몸뚱이를 수고롭게 하리요. 나는 장차 불생불멸함에 들어가서 큰 변화에 순응함이로다” 라는 말씀을 마치시고 대사께서는 드디어 가부좌(跏趺坐)로 앉아서 유연히 열반(涅槃)으로 입적(逝去)함이로다. 十월 十일 문도(門徒)와 제자들은 사명대사(松雲)의 법구(法軀)를 모셔다가 서쪽 기슭에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하니 이때에 상서로운 불빛은 하늘에 뻗치고 날아가는 새들도 놀라서 지저귐이로다. 이에 동참한 무리들이 정수리 뼈(頂珠)(63) 하나를 받들어 모셔다가 석종(石鐘)을 만들어 나무 숲속에 안장(安葬)하고 그곳에 탑(塔)을 세움이로다 사명대사(松雲)의 속성(俗姓)은 임씨(任氏)이요 풍천(豊川)의 망족(望族)(64)이로다. 그의 증조고(曾祖考)의 휘(諱)는 효곤(孝昆)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하시어 일찍이 대구의 원으로 계시니 그로 인하여 가옥(家屋)은 밀양(密陽)에 우거(寓居)하여 살기 시작함이로다. 증조고(曾祖考)(65)께서는 유학(幼學)(66)과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宗元)(67)은 교생(校生)(68)과 수성(守成)(69)을 낳음이로다. 수성(守成)은 달성서씨(達城徐氏) 부인(婦人)을 맞이했다. 가정(嘉靖)(70) 갑진(甲辰)년(71) 十월 十七일에 사명대사께서 탄생하시었다. 사명대사의 세수(世壽)는 육십칠세요 밥랍(法臘)(72)은 五十三(五十七)세요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사(下賜)받음이로다 사명대사는 젊었을 때에 저술(著述)한 바가 많았으나 나의 중형(仲兄) 하곡(荷谷)에게 있던 것은 모두 병화(兵火)에 불타 없어지고 다만 그 문인(門人)들이 전하는 것을 수집해서 모두 칠권(七卷)으로 만들어 전할 뿐이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 문장(文章)이 맑고 풍부함을 말함이로다. 아아! 사명대사께서 탄생할 당시는 두루 어지러운 시대이니 사명대사는 전쟁에 신음하는 국가와 더불어 거친 왜적(倭賊)을 막느라고 불법(佛法)을 선양(宣揚)하여 어리석은 무리들을 모두 깨우칠 겨를이 없음이로다. 사명대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혹 불교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한갓 세상을 구하기에 바빴다고 탓하는 자가 많음이로다. 대저 어찌 악마(惡魔)를 죽여 어려움을 구제함이 바로 이것이 불가(佛家)의 공덕(功德)인 줄 알겠는가? 마힐(摩詰)은 말이 없이 바로 불이(不二)의 법문(法門)에 들어감이어늘 또한 어찌 시끄럽게 잔소리로 교훈(敎訓)하여 아첨하지 않음이로다. 나는 비록 유가(儒家)이기는 하지만 사명대사와는 형제와 같은 교분이 있어서 대사를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음이로다. 시험삼아 물어보니 지금 세상에서 목우자(牧牛子)와 강월(江月)의 도맥(道脈)을 계승할 사람이 우리 대사가 아니면 또한 누가 있겠는가? 이후에 반드시 이것을 분별할 사람이 있을 것이로다. 이에 계속하여 명왈(銘曰)을 쓰다 엎드려 생각하건댄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불법을 주장하니 열반(涅槃)의 오묘한 심등(心燈)으로써 등불을 전함이로다 진단(眞丹)의 동쪽에서 우리 삼한(三韓)에까지 미쳐 오니 이것을 계승할 영명(永明)과 강월(江月)함이 홀로 원만함이로다 그 다음을 이어서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가장 먼저 앞섰고 지혜의 횃불을 새벽에 밝히고 슬기로운 거울은 밤에 비춤이로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많아 백 명이요 또한 천 명이 됨이니 다만 종봉(鍾峰)이가 나루터를 건네주는 땟목이 됨이로다 종봉(鍾峰)의 가르침은 널리 제도하고 무변(無邊)하여 여러 선함을 닦아 구비하니 아무런 인연에도 물들지 않음이로다 이런 생각을 가슴에 간직하면 병과 발우가 쓸쓸하지만 그러나 밖에 내어 사용하면 깃대와 창이 앞에 있음과 같음이로다 악마를 없애고 괴로움을 구제함과 같이 나라가 병들지 않고 수포(獸袍)(73)와 금장(金章)(74)과 같은 임금의 사랑도 뜬구름 같음이로다 망망한 바다와 같이 동쪽 오랑캐가 침입하여 올 때에 우리는 자비의 배를 띄워 그 사나운 무리들을 감동하게 함이로다 둘러서서 보는 훼복(卉服)(75)들은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음과 같으니 꿇어앉아 약속을 지키니 임금의 계획이 손조롭게 이룸이로다 국가의 난리가 겨우 평정되자 돌아갈 마음이 더욱 일어나니 물러가기를 청하여 환과 같은 남은 세월에 수양했다고 함이로다 법궁(法宮)(76)에서 군사를 조련하던 중 질병으로 말미암아 편안한 곳에 돌아가니 감우(紺宇)(77)에 일없이 놀아 청련복(靑蓮服)을 입고 쉼이로다 그가 만약 오래 생존하셨으면 더욱 깊은 법을 전수하리니 어찌 저 쌍수(雙樹)에 사람과 하늘이 갑자기 운집함이로다 단특(檀特)(78)에 산이 무너지고 니련(泥連)(79)에 강물이 마르니 경호가 광채를 감추고 금상(金相)이 고운 모습 없음이로다 적멸(寂滅)로 즐거움을 삼으니 모르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고 부처님의 문도들이 교화하여 비단과 돈을 시주 받아 모음이로다 탑과 사당을 세워 보답함은 대사의 은혜요 부처님의 은혜이니 홍류동(紅流洞) 저 언덕에 상설(象設)을 일으킴이로다 원력의 넓은 바이니 겁(劫)(80)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으며 노래와 칭송이 또한 그치지 않으니 아름다운 옥에 이것을 글로 새김이로다 두타(頭陀)가 미소하고 마힐(摩詰)은 말이 없으니 세워진 교훈과 나타난 교화와 두 가지 모두 제전(蹄筌)(81)이로다 다툼 없는 삼매(三昧)에 들어가니 실(實)도 권(權)도 됨이니 저 밝고 밝은 해와 달은 만고에 길이길이 아름다움이로다(82) ◎ 주해(註解)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1) : 사명대사의 탑호(塔號)이다 ○원점(圓漸)(2) : 원교(圓敎)와 점교(漸敎)이다. 원교는 원만한 교법이라는 뜻이다 ○목우(牧牛)(3) : 고려 니눌(知訥)스님의 법호(法號)이다 ○강월(江月)(4) : 고려 나옹(懶翁)스님의 법호(法號)이다 ○황매(黃梅)(5) : 오조(五祖) 홍인(弘忍)스님께서 주석하시던 중국의 산이름이다 ○열반묘심(涅槃妙心)(6) :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명(不生不滅)의 진리(眞理)이 이름이다 ○정법안장(正法眼藏)(7) : 불생불명(不生不滅)의 진리(眞理)이 이름이다 ○보제(普濟)(8) : 나옹화상(懶翁和尙)을 말한다 ○부용영관(婦容靈觀)(9) : 부용은 우리나라 스님으로 영관은 법호이다 ○임제(臨濟). 조동(曹洞)(10) : 모두 중국 스님이다 ○유정(惟政)(11) : 사명대사는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대사의 조부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임공(任公) 종원(宗元)이시고 조모는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시다. 대사의 생부(生父)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임공(任公) 수성(守成)이시고, 생모(生母)는 정부인(貞夫人) 달성서씨(達城徐氏)이시다 ○선비(先妣)(12) : 선비는 사명대사의 어머니이시다 ○금인(金人)(13) : 불상(佛像) 또는 부처님을 말한다 ○종원(宗元)(14) : 조부는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임공(任公)이시고 조모는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시다 ○황여헌(黃汝獻)(15) : 이조 중종 때 문관. 본관은 장수황씨(長水黃氏)로 황월헌(黃月軒)과 황맹헌(黃孟獻)의 아우이다. 자(字)는 헌지(獻之)요, 호(號)는 유촌(柳村)이다. 1533년 사건으로 금산옥에 구속되었다가 도망하고 다시 체포되었으나 전도사 정공청(鄭公淸)의 투서로 감형을 받았다. 필법과 문장이 높아 정사용(鄭士龍)과 소세양(蘇世讓)에게 격찬을 받았다 ○신묵화상(信默和尙)(16) : 우리나라 스님으로 사명대사의 은사(恩師)이시다 ○전등록(傳燈錄)(17) : 송(宋)나라 도원(道源)이 저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三권 ○신유(辛酉)년(18) : 서기 1561년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19) : 생몰년(1523-1589) 이조 선조 때 재상(宰相) 본관은 충주박씨(忠州朴氏)로 박우(朴祐)의 아들이다. 자는 화숙(和叔)이요, 호는 사암(思庵)으로 1579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기도 했다. 율곡(栗谷)을 도와 서인(西人)의 주목을 받았다. 동서(東西) 분당이 심하자 영평 백운산(永平白雲山)에 숨어 살았다.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의 제자가 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20) : 생몰년(1539-1609) 본관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이지번(李之番)의 아들이다. 자는 여수(汝受) ○제봉(齊峰) 고경명(高敬命)(21) : 생몰년(1533-1592) 선조 때 의병장, 본관은 장흥고씨(長興高氏)h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자는 이순(耳順)호는 제봉(霽峰) ○임자순(林子順)(22) : 생몰년(1549-1587) 선조 때 文人, 본관은 나주임씨(羅州林氏)로 임진(林晉)의 아들이다. 자는 자순(子順)이요, 호는 백호(白湖)이다.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의 동서 당파싸움에 개탄하여 명산을 찾아다니며 비분강개(悲憤慷慨) 속에 요절했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이익지(李益之)(23) : 본관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자는 익지(益之)호는 손곡(孫谷), 이조 중기의 시인(詩人)으로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등과 같이 삼당(三唐)이라 불렀다 ○하곡(荷谷) 허봉(許篈)(24) : 생몰년(1551-1588) 이조 중기 문인, 본관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허엽(허엽)의 아들이다. 자는 미숙(美叔)이요, 호는 하곡(荷谷), 허균(許筠)의 중형(仲兄)이다, 1583년 창원부사가 되었으나 이이(李珥)를 논하다가 갑산(甲山)에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그 뒤 백운산 등지로 방랑하다가 사명대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1588년 금화군(金化郡) 생창역(生昌驛)에서 객사하였다 ○기대승(奇大升)(25) : 생몰년(1527-1572) 선조 때 성리학자, 본관은 행주기씨(幸州奇氏)로 기진(奇進)의 아들이다. 자는 명언(明彦)이요, 호는 고봉(高峰)이다. 선조 때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귀향(歸鄕)하다가 고부(古阜)에서 객사했다 ○사자(四子)(26) : 노자(老子), 장자(莊子), 열자(列子) 문자(文子)를 말한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27) : 생몰년(1515-1590) 명종과 선조 때 명신, 본관은 광주노씨(光州盧氏)로 노홍(盧鴻)의 아들이다. 자는 과회(寡悔)요, 호는 소재(蘇齋)이다. 1545년에 이기(李芑)를 파면시키고 명종이 즉위하자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으로부터 파면당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이두(李杜)(28) :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를 말한다 ○을해(乙亥)년(29) : 서기 1575년이다 ○무인(戊寅)년(30) : 서기 1578년이다 ○안거(安居)(31) : 불교에서 승려들이 한 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안거(夏安居)는 음력 四월 十五일부터 七월 十五일까지이고, 동안거(冬安居)는 음력 十월 十五일부터 정월 十五일까지이다 ○병술(丙戌)년(32) : 서기 1586년이다 ○소인(塑人)(33) : 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양을 말한다. 또는 소상(塑像)이라고도 한다 ○기축(己丑)년(34) : 서기 1589년이다 ○영감난야(靈鑑蘭若)(35) : 사찰 이름으로 오대산 월정사 위에 있다 ○경인(庚寅)년(36) : 서기 1590년이다 ○임진(壬辰)년(37) : 서기 1592년이다 ○유공성룡(柳公成龍)(38) : 선조 때 명상(名相) 본관은 풍산류씨(豊山柳氏),로 류중영(柳仲郢)의 아들이다. 자는 이견(而見)이요, 호는 서애(西厓)이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申磼)의 말에 의하여 사퇴하였다. 그후 또 영의정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무고로 다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행장(行長)(39) : 일본의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을 말한다 ○권율(權慄)(40) : 생몰년(1537-1599) 선조 때 도원수(都元帥) 본관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1592년 임란 때 광주(廣州) 목사(牧使)로 군병을 모집, 곽영(郭嶸)에 속하여 용인(龍仁) 싸움에서 패했으나 남원(南原) 싸움에서 대파하고 나주(羅州) 목사(牧使)가 되어 수원 독산(禿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다. 그후 행주산성(幸州山城) 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전군(全軍)을 지휘하였다.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갑오(甲午)년(41) : 서기 1594년이다 ○유정(劉綎)(42) : 중국에서 온 장수이다 ○청정(淸正)(43) : 일본의 장수 가등청정(加籐淸正)이다 ○유병충(劉秉忠)(44) : 원(元)나라 때 형주(邢州) 사람으로 이름은 간(侃)이요, 자는 중회(仲晦)이다. 후에 불교를 따라 자총(子聰)이라 하며 관직을 받고 병충(秉忠)이라 고쳤다 ○요광효(姚廣孝)(45) : 중국 승려인데 속명은 요광효(姚廣孝)이며 十四세에 출가. 법명은 도연(道衍)이요, 호는 천희(天禧)로 도허노인(道虛老人)이나 독암노인(禿庵老人)으로 불렀다. 시화(詩畫)에 능하고 음양술도 높았다. 홍무(洪武) 고승으로 뽑혀 연왕(燕王)을 따라 경수사(慶壽寺)에 주석, 후에 연왕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어키게 하여 연왕이 황제(皇帝)가 되어 태자소사(太子少師) 배하고 성(姓)을 복구하여 이름을 강효(廣孝)라 하였다 ○척적(尺籍)(46) : 군대의 명령을 기록한 판자이다. 또는 적군의 목을 벤 공을 기록한 판자란 말로 쓴다 ○비국(備局)(47) : 중국에서 온 장수다 ○정유(丁酉)(48) : 서기 1597년이다 ○마귀(麻貴)(49) : 중국에서 온 장수다 ○무술(戊戌)년(50) : 서기 1598년이다 ○신축(辛丑)년(51) : 서기 1601년이다 ○계묘(癸卯)년(52) : 서기 1603년이다 ○갑진(甲辰)년(53) : 서기 1604년이다 ○가강(家康)(54) : 일본의 장수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말한다 ○을사(乙巳)년(55) : 서기 1605년이다 ○시적(示寂)(56) : 승려의 죽음을 입적(入寂) 또는 시적(示寂)이라 한다 ○병오(丙午)년(57) : 서기 1606년이다 ○영선군(營繕軍)(58) : 왕실(王室) 관계 건물의 수리나 신축을 맡은 군사를 말한다 ○정미(丁未)년(59) : 서기 1607년이다 ○무신(戊申)년(60) : 서기 1608년이다 ○경술(庚戌)년(61) : 서기 1610년이다 ○방백(方伯)(62) : 지방의 장관을 말한다 ○정주(頂珠)(63) : 불타의 정수리에 살상투가 솟아 둥근 구슬을 얻은 것과 같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 三十二相의 하나이다 ○증조고(曾祖考)(65) :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이다 ○유학(幼學)(66) : 벼슬하지 않은 유학자를 말한다 ○종원(宗元)(67) :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교생(校生)(68) :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을 말한다 ○수성(守成)(69) :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가정(嘉靖)(70) : 중국 명나라 세종(世宗) 때의 연호이다 ○갑진(甲辰)(71) : 서기 1544년이다 ○법랍(法臘)(72) : 불교에서 득도(得道)한 날로부터 입적(入寂)할 때까지의 연령을 말한다. 사명대사의 법랍은 57세는 오기이며, 53세로 바로잡는다 ○수포(獸袍)(73) : 짐승의 모양을 넣어 짠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말한다 ○금장(金章)(74) : 금으로 만든 도장을 말한다 ○훼복(卉服)(75) : 오량캐의 복장이다. 여기에는 왜적을 말한다 ○법궁(法宮)(76) : 임금이 나가서 조회를 받는 궁전을 말한다 ○감우(紺宇)(77) : 사찰의 이름이다 ○단특(檀特)(78) : 사찰의 이름이다 ○니련(泥連)(79) : 인도에 있는 산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보살행을 닦은 곳이다 ○겁(劫)(80) : 劫이 원문에는 刧(刂가 아닌, 刀변)으로 표기되어 있어 음은 같으나 의미상으로 보아 劫이 맞기에 바꾸었다 ○제전(蹄筌)(81) : 석가모니께서 고행(苦行) 하신 후 목욕했던 강물이다 ○아름다움이로다.(82) : 비문(碑文) 제호(題號)에 “허균찬(許筠撰)”이라는 말과 문장 끝에 “만력사십년 십이월(萬曆四十年 十二月, 光海 四年 一六一二年 十二月)”이란 문장이 목판에 없다 □ (주)도재국 : 병서(竝序) ○비석(碑石)은 두전(頭篆)과 비문(碑文 = 陰記)으로 구성된다 ○두전(頭篆)은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전서(篆書)이다 ○비문(碑文 = 陰記)에는 망자(亡者)의 기록인 서(序)와 음운(音韻) 형식인 명(銘)을 붙이는데, 이 序와 銘을 함께 쓴 것을 竝書라 한다
4)『사명대사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발간 무이거부스님, 2006년 3월 29일 사명대사난중어록 발간하셨다
[ 사진 14 ] 사명대사난중어록 (四溟大師亂中語錄) 표지 ◎『사명대사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 머리말
사명대사(四溟大師)는 갑진년(1544, 甲辰) 10월 17일 경남(慶南) 밀양군(密陽郡) 무안면(武安面) 고라리(古羅里)에서 풍천임씨(豊川任氏)의 후예로서 부(父) 수성(守成)씨와 모(母)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의 인연으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응규(應奎)요, 자(字)는 이환(離幻)이며, 1558년 15세에 직지사(直指寺) 신묵화상(信黙和尙)을 은사(恩師)로 득도(得道)하였으며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요 법호(法號)는 송운(松雲). 종봉(鍾峰). 사명당(四溟堂)이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시다 을해년(1575, 乙亥) 32세에는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 주지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 주석(住錫)하고 계시는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찾아뵙고 선리(禪理)를 참구하는 법제자(法弟子)가 되었다. 그후 강원도 금강산과 오대산(五臺山) 각림사(覺林寺) 등에서 두루 주석하였으며 특히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주석하면서 오(五)년 동안의 월정사(月精寺) 복원불사(復元佛事) 중에 기축년(1589. 己丑)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강릉부(江陵府)의 옥에 갇혔으나 지방 유생들이 그 억울함을 상소하여 무고로 풀려나서 경인년(1590, 庚寅)에 월정사(月精寺)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회향(廻向)하였다. 임진년(1592, 壬辰) 사(四)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천년보찰(千年寶刹)에 주석하여 수행정진(修行精進)하던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 등 전국 각지의 의승(義僧)이 호국승병(護國僧兵)으로 동참하였으며, 또한 사명대사는 은사 서산대사의 천거로 선조임금으로부터 “선교양종(禪敎兩宗)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제수받았다. 정유년(1597, 丁酉) 왜장(倭將) 가등청정(加籐淸正)이 “조선(朝鮮)에 국보(國寶)가 있느냐”고 묻자, 가등청정 당신의 목이 바로 조선민족의 국보라고 “할(喝,꾸짖음)”을 하여 적장(敵將)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갑진년(1604, 甲辰) 二월 오대산에서 스승이신 휴정 서산대사께서 一월 二三일에 입적하셨다는 부음(訃音)을 받고 화급(火急)히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으로 가던 중, 선조의 국서를 받들고 그해 八월 일본으로 가서, 八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다음해 四월에 포로(捕虜)로 잡혀간 우리 동포 3천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여 그 해 六월에 선조(宣祖)에게 복명(復命)하니, 임금께서 그의 품계를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시키고 석장(錫杖)과 옷감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해 十月에서야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영전(靈前)을 찾아가 곡배(哭拜)하였다. 이후에 대사께서는 나이가 더욱 많아지자 사직하고 치악산(雉嶽山)에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로 이석(移錫), 수행정진하시었다. 경술년(1610, 庚戌) 팔월 二十六일 입적(入寂)했으니 세납(世臘)은 六十七세(歲)요, 법랍(法臘)은 五十三세(歲)이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시다. 최근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총사(表忠寺)에 머물면서 우연히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의 목판본을 열람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여러 조사어록(祖師語錄)이 많고 많으나 사명대사집(四溟大師集)과 같이 그 내용이 오묘하고 풍부한 것도 드물 것이다 승병(僧兵)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소회(所懷)와 충정(忠情), 도반들과의 애틋한 마음이나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아련함이 잘 나타나 있는 대사(大師)의 어록(語錄)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비록 용렬(庸劣)한 산승(山僧)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미력(微力)하나마 사명당대사집(四暝堂大師集)을 그대로 정리하여 옮기면서 주해(註解)를 달고 제호(題號)를 사명대사어록(四溟大師語錄)으로 붙여 여러 대중들과 함께 하고자 일차(一次) 발간(發刊)을 하였다 뒤이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선조(宣祖)임금께 올린 상소문(上疏文), 그리고 재상(宰相)들과 주고받은 서간(書簡)과 전별시(戰別詩). 왜장(倭將)들과 주고받은 서찰(書札) 등이 실려있는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을 정리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사명대사 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으로 제호를 붙여 이차(二次) 발간(發刊)을 하게 되었다 표충사(表忠寺)와 인연(因緣)을 맺으면서 사명대사(四溟大師)와도 인연(因緣)이 닿았고, 또 수승(殊勝)한 대사(大師)의 어록(語錄)을 보게 되었다. 이 인연(因緣)이 헛되지 않기를 서원(誓願)하면서, 표충사(表忠寺)의 사부대중(四部大衆)과 밀양시청 관계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 덕분에 사명대사 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이 이렇게 빛을 보게 되었다. 이에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리면서 인연(因緣)의 공덕(功德)으로 성불(成佛)하시기를 발원(發願)하는 바이다 ※ 책 발간에 밀양시로부터 일부 보조를 받음 불기 2550(2006, 乙酉) 二月 載嶽山 表忠寺 圓通堂에서 海東沙門 無二 巨芙 謹香 5)『서산대사어록(西山大師語錄)』역주(譯註), 발간 영변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 주석하셨던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의 스승이시다 임진왜란 때 바람 앞에 등불인양 왜적에 국가 난국에 처했을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신 사명대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 관련 묘향산 수충사 1794년 판각본 청허당집(淸虛堂集)을 입수해 주해로 정리하여『서산대사어록(西山大師語錄)』발간하셨다.
[ 사진 15 ] 서산대사어록 (西山大師語錄) 표지 이러한 사업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신위를 향사하는 밀양의 유림 단체와 향토문화업무를 담당하는 밀양시와 표충서원을 관리하는 표충사, 밀양문화원 등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서산대사의 고문(古文)을 정리, 주해하여 책을 발간하여나 하나, 무이거부스님이 사비를 들여 책을 발간하여 밀양은 물론 전국에 배부하고 계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산대사어록(西山大師語錄)』머리말
서산대사(西山大師)는 1520년(庚辰年) 3월 평안남도(平安南道) 안주(安州)에서 완산최씨(完山崔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이름은 여신(汝信)이요, 아명(兒名)은 운학(雲鶴)이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으나 어린 운학(雲鶴)의 영특함이 안주 목사(牧使) 이사증(李思曾)의 눈에 띄어 그가 서울로 갈 때 따라가 반제(泮齊)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에 지리산 각 사찰을 유람하다가 출가입산(出家入山)하여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양육사(養育師)로, 경성일선선사(敬聖一禪禪師)를 수계사(受戒師)로, 부용영관선사(芙蓉靈觀禪師)를 전법사(傳法師)로 삼대사(三大師)를 삼으니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법호(法號)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1550년(庚戌年) 30세에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으나 1556년(丙辰年) 37세에 판사직(判事職)을 사양(辭讓)하고 한 벌의 옷으로 석장(錫杖)을 휘날리며 입산(入山)하여 30여 년간 수행정지(修行精進)과 도제양성(徒弟養成)에 힘섰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1589년(을축년) 69세에 그가 향로봉(香爐峯)에서 읊은 만국의 도성은 개미굴과 같음이요/만국도성여질의(萬國都城如垤蟻)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더라/천가호걸등초계(千家豪傑等醋鷄) 라는, 게송(偈頌)으로 정여립(鄭汝立) 역모(逆謀) 사건에 연류된 요승(妖僧) 무업(無業)에 의해 제자 사명(四溟)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당시의 임금이었던 선조(宣祖)는 서산대사의 나라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 감복하여 오히려 석방할 뿐만 아니라 친히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下賜)함으로써 서산대사의 명성을 더 높혔다 서산대사는 1592(壬辰年) 왜란(倭亂) 때는 선조(宣祖)가 내린 팔도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첩(職牒)을 받고 75세의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전국 사찰에 격문(檄文)을 돌려 선포하니 금강산(金剛山)의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호남(湖南)의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 진주(晉州)의 중관당(中觀堂) 해안(海眼) 등이 각각의 의병승(義兵僧)을 모아 의주(義州)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운집하였는데 그 수(數)가 6천여 명이 넘었다 서산대사를 비롯한 이들 의병승들은 평양 탈환전(奪還戰)에서 대승(大勝)을 거두었고 선조(宣祖)가 환도(還都)할 때는 서산대사가 친히 호위(護衛)하기도 하였다. 환도 후에는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법제자(法弟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에게 후사(後事)를 맡기고 묘향산(妙香山)으로 돌아가려 하니 선조는 그 동안의 노고(勞苦)를 치하(致賀)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 라는 높은 시호(諡號)를 내렸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산으로 돌아와 수행정진(修行精進)에 힘쓰다가 1604년(甲辰年) 1월 23일 그가 주석(住錫)하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원적암(圓寂庵)에서 태연(泰然)히 종사열반(宗師涅槃)하니 세수(世壽)는 85세요, 법랍(法臘)은 67세였다 최근 표충사(表忠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사명대사의 1612년(壬子年) 제작 목판(木板)을 발견하여 오묘(奧妙)하고 풍부한 사명대사어록(四溟大師語錄)과 사명대사난중어록(四溟大師亂中語錄)을 주해(註解)로 발간하면서 사명대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행적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던 중, 1794년(甲寅年) 4월 8일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서문(序文)을 짓고 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가 스승의 행장(行狀)을 찬술(撰述)한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청허당집(淸虛堂集) 묘향산(妙香山) 판각(板刻)이 있음을 확인하고 구(求)하여 보니, 게송(偈頌)을 비롯한 서찰(書札) 그리고 기문(記文)과 비명(碑銘), 행장(行狀) 등의 심오(深奧)하고도 주옥(珠玉)같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미력(微力) 하나마 산중(山中) 소승(小僧)이 청허당집(淸虛堂集)을 정리하면서 주해(註解)를 달고 서산대사어록(西山大師語錄)이라는 제호(題號)를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발간(發刊)하게 되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제창(提唱)하신 종풍(宗風)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통합이었다. 즉,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禪心佛心),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敎是佛語)“라고, 하였다. 이는 교(敎)를 익힌 다음 선(禪)으로 가는 것이 응당(應當)하다는 불법(佛法) 수행(修行)의 강조였다. 이 책의 발간 인연공덕(因緣功德)으로 소승(小僧)을 포함한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서산대사의 이러한 정신을 일깨워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를 발원(發願)하는 바이다 불기(佛紀) 2553년(2009 乙丑年) 납월(臘月) 성도일(成道日 初八日) 해동사문(海東沙門) 무이(無二) 거부(巨芙) 근향(謹香) 나. 무이거부스님 표충사 주석 시, 정성을 다한 삼대사 향사 1) 춘추(春秋) 향사 준비 무이거부 스님은 10년 가까이 호국성지(護國聖地)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에 주석(住錫)하면서 표충사당(表忠祠堂)에 모셔진 삼대사(三大師) 신위에 춘추(春秋) 향사(享祀) 때 미리 삼대사(三大師) 신위(神位) 전에 분향의(焚香儀) 봉심(奉審), 재계(齋戒)하고, 괘포(掛脯)와 제집사 분정(諸執事分定)을 살펴보시고, 제구(祭具)를 점검하시고 제수(祭需) 장만 및 진설(陳設), 홀기(笏記)를 준비하시는 등 정성을 다하셨다 2) 삼대사(三大師) 호국정신(護國精神) 선양(宣揚)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표충사에 주석하실 때는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 삼대사의 호국(護國)의 발자취를 담은 어록(고문서)를 살피시어 ①사명대사어록 ②사명대사난중어록 ③서산대사어록을 발간하셨으며 ○토굴(土窟) 이석하신 후에도 ④ 삼대성사 표충비각(땀 흐르는 비) ⑤표충사 집례홀기 등을 주해(註解), 발간하시어 밀양과 전국에 배포하시므로써 삼대사(三大師) 호국정신도 널리 알리셨다 15. 무이거부스님『토굴(土窟)로 이석(移錫)』 가. 무이거부스님,『토굴(土窟)로 이석(移錫)』 무이거부스님은 10년 가까이 주석하셨던 호국성지(護國聖地)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寺)를 떠나시어, 2010년 3월에 토굴(土窟)로 이석(移錫) 하셨다 토굴에는 은사(恩師)이신 도광(道光) 스님의 부도(浮屠)를 봉안하고 계신다 또 불교경전연구소(佛敎經典硏究所)를 운영하시면서 호국 삼대승(護國三大僧)을 영구히 기리기시기 위해 삼대성사 표충비각(三大聖師表忠碑閣) 등을 발간하시는 등 지금까지 20여 권에 이르는 불교경전(佛敎經典)과 선사(禪師)님들의 어록을 주해. 간행하셨고 경허선사어록(鏡虛禪師語錄)을 주해, 발간하시어 법맥(法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특히 매년 춘추(春秋)로 표충사(表忠祠)에서 거행하는 삼대사(三大師)의 향사(享祀) 순서(順序)를 바로하시기 위해 『삼대성사 표충비각(三大聖師表忠碑閣)』의 후편(後篇)에 『표충사 집례홀기 번역문(表忠祠執禮笏記 飜譯文)』을 수록하시어 일반 대중에게 널리 배포하시고 계신다
또 무이장학회(無二獎學會)를 만드시어 금년(2018년) 들어 9회째 109명의 향학열이 높은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시어 인재육성에 힘을 쓰고 계신다 스님이 소장(所藏)하고 계시는 수많은 불교경전과 불교서적, 선사님들의 어록, 지명서적(地名書籍) 등은 무이정사를 방문할 때마다 필자(손흥수.도재국)에게는 경이롭게 보인다 나. 『삼대성사 표충비각(땀흐르는 비)』발간 ○무이거부 스님은 재악산(載嶽山) 표충사 주석 시에도 왜적이 강토를 침략할 때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신 삼대사(三大師)를 선양하시고 호국성지 표충사를 빛내시기 위해 사명대사어록과 사명대사난중어록, 서산대사어록 등을 발간, 널리 배부하셨다 ○토굴(土窟)로 이석(移錫)해 오신 후에도 삼대사를 선양하는 책 발간을 계속하였다 즉, 2017년 춘삼월에 『삼대성사 표충비각(땀 흐르는 비)』발간하셨다 지면(紙面) 관계상 머리말과 비문 사면(동서남북의 四面)의 소개 글을 게재를 하고, 비문의 전문(全文)은 이 책에 게재를 생략한다.
[ 사진 16 ] 삼대성사 표충비각 (三大聖師 表忠碑閣) 표지 ○일명 “땀 흐르는 사명대사 비(碑)”의 전문을 보려면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필자(도재국)가 오래 전에 구(求)한 전문(全文)을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의 사명대사게시판"에 올려져 있음을 밝혀 둔다 ◎『삼대성사 표충비각(땀흐르는 비)』머리말
경남 밀양시 무안리 홍제사(弘濟寺)에 있는 표충비각(表忠碑閣)의 영당비(影堂碑), 일명 땀흐르는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승려의 신분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어 크나큰 공을 세운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의 삼대성사(三大聖師)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742년 영조(英祖) 18년에 세워졌다
[ 사진 17 ] “땀 흐르는 비(碑)” 사진 출처 :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1291565324565
영당비의 총 높이는 3.9m이고 비신(碑身)의 높이는 2.76m이며 폭은 95cm 두께는 70cm 이며 동서남북의 4면에 총 4,138 자(字)가 새겨져 있다. ①남면(南面)은 송운대사비명(松雲大師碑銘)으로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竝序)로 대광보국숭록대부령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이 1,203자(字)의 비명(碑銘)을 지었고 ②서면(西面)은 표충사적비문(表忠事績碑文)으로 유명조선국영남밀주영취산표충사사적비(有明朝鮮國嶺南密州靈鷲山表忠祠事績碑)로 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세자우빈객(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右賓客) 이덕수(李德壽)가 704자(字)의 비문(碑文)을 지었으며 ③북면(北面)은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으로 유명조선국사국일자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有明朝鮮國賜國一紫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병서(竝序)로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 이우신(李雨臣)이 1,451자(字)로 비명(碑銘)을 지었다 ④동면(東面)은 음기(陰記)로 불사주역(佛事主役) 177명의 이름을 780자(字)로 새겼다 ※ 송운대사(松雲大師)는 사명대사를 말한다 나라의 큰 경사(慶事)나 흉사(凶事)가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리는 비(碑)로 알려져 있는 표충비각(表忠碑閣)의 영당비(影堂碑)는 삼대성사(三大聖師)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이 빚어낸 영험(靈驗)의 비(碑)로 대중(大衆)의 관심과 애정(愛情)을 받아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한문(漢文)으로 작성된 비문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앞에서 절만 하는 대중들을 보면서 한글 번역(飜譯) 작업이 시급한 일이라 생각되어 여러 자료(資料)들을 찾았으나 일괄(一括)된 자료가 부재함에 놀라 안타까워하던 차에 송광사(松廣寺) 박물관장(博物館長)이신 고경(古鏡) 스님과 인연이(因緣) 닿아 공동자료조사는 물론 비석(碑石) 동면(東面)의 정리까지 도움을 받게 되어 완성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을 인연으로 많은 대중들이 비문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의 삼대성사(三大聖師)께서 대승적(大乘的) 중생(衆生) 구제(救濟)의 정신으로 나라와 백성을 지킨 공적(功績)을 잊지 말고 오늘에 그 뜻을 이었으면 하는 것이 산승(山僧)의 서원(誓願)이다. 불기 2561(丁酉 2017)年 春三月 토굴(土窟)에서 無二 巨芙 謹香 16. 무이거부스님,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번역 발간 가. 무이거부스님, 표충사당 삼대사(三大師) 향사(享祀) 준비 정성 무이거부(無二巨芙) 스님은 표충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 해마다 춘추로 삼대사(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 향사를 올릴 때 괘포(掛脯)와 제수를 장만하여 진설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향사를 올릴 때는 밀양시에서 역대로 보관해오던 홀기(笏記) 순서대로 제일 먼저 서산대사께 전(尊)을 올리고, 두 번째로 사명대사께 올리고, 마지막으로 기허대사께 전(尊)을 올렸다 나. 2018년 가을, “제550회 표충사 삼대사(三大師) 향사 봉행” 아래에 소개하는 표충사 집례홀기는 영취산 백하난야(靈鷲山 白霞蘭若)에서 향사 이래, “載嶽山 表忠寺”로 표충사당을 이건(移建)해 온 2018년 가을 향사 수년 전까지 사용한 홀기이다 올해로 춘추 향사는 대략 275년간 550회째이다
다. 무이거부스님이 표충사 떠날 무렵 원래의 향사 순서 변경 금년(2018년) 가을에 표충사 표충서원에서 “제550회 호국대성 사명대사 춘계향사”가 봉행되었다.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향사가 봉행되었으므로 큰 난리가 나서 향사를 봉행하지 못한 몇 해를 제외하더라도 대략 275년 이상 550회의 향사(享祀)가 봉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최근에 표충사(表忠祠)에서 해마다 춘추로 향사를 올릴 때 275년 이상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님 순서로 전(尊)을 올리고 향사를 모시던 것을 무이거부스님이 2010년 봄에 표충사를 떠난 후로부터는 삼대사 향사의 순서를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순서로 변경해 버렸다 무이거부스님은 향사 순서가 종전과 다르게 바뀐 것을 아시고 “옛날부터 향사(享祀)하던 순서대로 바로 진행할 것을 여러 요로를 통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매우 안타까워하시고 계셨고, 답답한 마음으로 향사의 순서를 바로하시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밀양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영취산 백하난야(靈鷲山白霞蘭若) 표충사당(表忠祠堂)에서부터 사용된 삼대사(三大師) 향사(享祀)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원본(元文)“을 책으로 발간하시어 널리 알리시고 계신다 라. 무이거부스님,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원본』 번역 발간 무이거부 스님은 275년 이상 향사하던 순서대로 삼대사 향사를 바르게 올리도록 하기 위해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원본』을 번역하시어 『삼대성사 표충비각(땀흐르는 비)』책에 첨부하시어 밀양지역에 널리 보급하고 계신다 ◎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원본 본 집례홀기(執禮笏記)는 밀양시청 문화관광과에서 보관하면서 년년세세 삼대사 향사를 집례한 “표충사 집례홀기 원본이다”이다 본 홀기에는 집례의 순서를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 순으로 행하고 있다. 즉,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의 스승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집례를 하고(尊을 올리고), 그 다음에 사명대사에게 전(尊)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기허대사께 전(尊)을 올린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부터 표충사(表忠寺) 경내의 표충사(表忠祠)에서 봄.가을로 삼대사 향사를 할 때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순으로 전(尊)을 올리는데 이는 순서가 잘못되었다. 속세(俗世)에서도 제사(祭祀) 때는 선대(先代) 조상이 제일 윗분이 된다 삼대사(三大師)를 같이 향사(享祀)하는데 제자(弟子)가 먼저 전(尊, 술잔)을 받고, 스승(禪師)이 뒤에 전(尊)을 받는다는 것은 유교(儒敎)를 숭상하는 유림(儒林)의 법도(法道)로서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임진왜란 후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삼대사 향사가 지금 순서가 틀리게 행해지고 있는데 원래의 원본 홀기를 다음과 같이 첨부하여 순서대로 집례되기를 바란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표충사 향사 집례순서에 대해서 토굴(土窟)을 찾을 때마다 무이거부스님과 순서를 바로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를 해 오고 있다
◎ ≪표충사(表忠祠) 집례홀기(執禮笏記) 원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