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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막7장 그리고 그 후
홍정욱 지음
위즈덤하우스/2003년 11월/302쪽/8,800원
▣ 저 자 홍정욱
1970년 서울 생. 구정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케네디 모교인 초우트 로즈마리 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조기 특차전형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 하여 동북아지역학을 전공했다. 졸업 당시 논문 「신기능주의적 관계 : 한·중 외교 데탕트」로 최우수 사회과학 논문상과 토머스 훕스 상을 수상하였다. 1995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법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국적 투자금융기업인 리만브라더스에서 인수합병 전문가로 근무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2002년 12월 (주)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하여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의 발행인으로서 지식정보기업 창출에 힘을 쏟고 있다.
▣ Short Summary
1993년 출간되어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7막 7장』의 개정 증보판.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7막 7장』과 더불어 헤럴드 미디어의 젊은 CEO로 우뚝서기까지의 그후 10년 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불어 재즈 카페를 오픈했다가 실패한 이야기, 군복무 중 미래에 대한 엄청난 불안을 느꼈다는 이야기 등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홍정욱과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서른 셋의 나이에 '코리아헤럴드'를 인수한 이유와 인수 배경, 자금출처 등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인수를 준비하는 몇 달 간의 긴장감 넘치는 생활, 헤럴드미디어에 거는 CEO의 당찬 포부 등이 생생하게 담겨 계속해서 도전하고 전진해가는 젊음의 열정이 전해진다.
▣ 차 례
1막1장 내 운명의 주인으로
1막2장 초우트, 그리고 어머니
1막3장 자아와의 타협
1막4장 젊은 삶, 젊은 초상
2막1장 꺼져가는 불빛에 맞서
2막2장 생의 순간순간을 숨쉬며
2막3장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2막4장 지성인의 반열에 서서
그 후, 검증의 삶으로
7막7장 그리고 그 후
홍정욱 지음
위즈덤하우스/2003년 11월/302쪽/8,800원
1막1장 내 운명의 주인으로
나는 꿈 하나에 매달려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느 때처럼 학교 앞에 있는 서점에 들러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익은 책들 사이로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이 있었다. 『무서운 아이들』. 그것은 젊은이들의 유학 체험담이었다. 그리고 그 첫 장은 김병국 씨의 하버드 유학 수기였다. 나는 글을 읽으며 꿈을 되찾은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하버드는 내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해 주위의 모든 분들이 유학을 반대하셨다. 당시만 해도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는 예가 드물었고, 조기 유학이 성공한 예는 더욱 드물었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을 부모님은 나를 설득하라는 주위의 압력에 시달리셨고, 부모님 또한 그분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셨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희 학교에서는 이 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초우트 로즈마리 홀(Chote Rosemary Hall) 입학처장은 정중한 태도로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긴 당연한 대답이었다. 몇 마디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비행기 속에서 열심히 암기한 문장 하나가 자신 있게 구사할 수 있는 영어의 전부였던 내게 입학이 허락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유창한 영어가 빛을 발하여 근 한 시간이 넘는 설득작업을 진행한 결과, 입학처장은 “우선 영어부터 익히도록 하십시오. 제가 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서머스쿨에서 영어과목 모두를 A학점 받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합시다.” 마치 대단한 인심이라도 쓰는 듯 말하면서 그의 얼굴은 ‘불가능’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초우트 입학처장이 추천한 학교는 로드아일랜드의 구석에 깊숙이 숨어 있는 남학생들만의 학교인 포츠머스 애비 스쿨(Portsmouth Abbey School)이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를 지켜본 애비 스쿨 지도교사의 첫 반응이었다. 어머니는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나에게 짧은 격려의 말씀을 남기고는 뉴욕으로 떠나셨다.
8년 동안의 미국 체류 기간 중 가장 고된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혼자서 식사하고, 혼자서 기숙사로 돌아와, 혼자서 책을 읽다가는 잠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연히 공부밖에 없었다. 아침 7시에 눈을 뜨면 수업이 시작되는 9시까지 예습을 했다. 그리고 9시에서 오후 2시까지 수업, 3시에서 6시까지는 축구 연습(운동은 필수 과목이었다), 6시에서 7시까지 저녁식사, 7시에서 9시까지는 자율학습시간, 그리고 9시가 지나서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면 매일 밤 1∼2시까지 복습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한 페이지에서 모르는 단어가 무려 100여 개나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문법, 작문, 회화. 초우트에서는 그 세 과목에서 모두 A를 받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자고 했는데, 내 실력으로는 A는커녕 교과서를 읽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 내가 갖고 있던 사전은 영영사전이었다. 한국에서 도대체 누가 영어는 영영사전을 보며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던가? 한 페이지를 읽기 위해 100번도 넘게 사전을 펴들며 나는 그 사람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문법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작문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쓴 나의 첫 번째 리포트는 원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작문 리포트를 돌려받으면서 선생님의 코멘트 하나하나, 단어 용법 하나하나를 모두 암기해 절대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애비 스쿨에서 영어 세 코스를 모두 마친 나는 초우트 학교에 애비 스쿨 성적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SSAT(미국 고입학력고사) 성적을 추가로 제출하라고 요청하더니, 마감 이틀 전에 초우트 측에서 SSAT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명실상부한 ‘합격 통지서’였다. 실력 면에서는 뒤떨어지지만 ‘이렇게 빨리 영어 실력이 향상된 학생을 본 적이 없다’는 애비 스쿨 지도교사의 평가에 담겨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초우트 합격이 결정된 후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으셨다.
1막2장 초우트, 그리고 어머니
“나는 한국에서 온 홍정욱, 영어 이름은 라이언 홍입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합니다. 많은 도움 부탁합니다.”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초면의 동양 소년을 이모저모 뜯어보던 서양 아이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교실은 수군대는 속삭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를 꽉 물었다.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오냐, 웃어라. 언젠가 너희들 모두 무릎 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초우트에서의 첫 수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우트의 학생 대부분은 가정 형편이 좋은 백인 상류층의 자녀들이다. 미국의 상류층 자녀들은 대부분 사립 중·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는 대학입시를 도울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받을 교육을 미리 시행한다는 차원에서 예비학교(preparatory school), 혹은 줄여서 프렙스쿨(prep school)이라고도 불린다. 초우트는 미국에서 상위 10개 안에 드는 사립 고등학교였다.
기숙사는 밤 10시 30분이면 완전히 소등을 했다. 나는 기숙사 사감의 순시가 시작되는 11시까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순시가 끝나면 일어나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장소인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밤 1시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때로는 꼬박 밤을 새우면서 새벽 3∼4시가 될 때까지 화장실을 지키곤 했는데, 그러다가 4시에 청소부가 들어오면 할 수 없이 옆의 샤워실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샤워를 하면서 책을 들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 때는 공부한 것을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리며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초우트에서의 첫 학기에 내가 택한 과목은 수학, 영어, 불어, 역사였다. 수학은 한국 학생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쉽게 A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역사와 영어, 그 중에서도 영어였다. 거의 밤을 새워가며 악착같이 공부하고, 리포트 표지에 정성스럽게 장식까지 해서 제출했는데도 중간고사 결과는 C가 나왔다. B 이하의 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하버드에 입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데, 첫 학기부터 C라니, 학기말 시험을 잘 봐서 B학점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방법은 무조건적인 암기였다. 1학년 첫 학기에는 신약성경과 그리스 신화를 주로 공부했다. 논문식으로 시험 답안을 작성해야 했는데, 당시의 내 작문 실력으로는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신약전서 300페이지를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매일 밤마다 외우고 외우다 보니 300페이지를 거의 모두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학기말 시험이 되었다. 나는 문제를 한 번 보고는 거기에 관련된 내가 아는 모든 구절과 정보를 일사천리로 답안지에 적어 내려갔다. 물론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 때 내가 암기하여 써 내려간 답안지의 분량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공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답안지였다. 결국 영어 교사였던 포스터 선생은 내게 B학점을 주었다. 아마도 내 노력에 대한 일종의 ‘감투상’이었던 것 같다.
초우트 각 학년의 학생회장 선거는 2차에 걸쳐 치러진다. 1차 투표에서 10명의 다(多)득표자가 결정되면, 정견 발표를 듣고 최종 투표를 하게 된다. 학생회장은 운동부 주장, 교지 편집장의 직책과 함께 하버드 대학 합격을 위해 필요한 내 목표 중의 하나였다. 그런 내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1차 투표에서 2학년 회장 후보 1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뉴욕 갑부의 아들인 앤디, 테니스와 축구 대표로 발탁된 수잔, 1학년 때 회장이었던 존, 동급생들의 우상인 알렉스, 이 4명의 스타들 사이에 내가 낄 틈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학교 전체가 선거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앤디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연필과 T셔츠를 돌렸고, 알렉스는 매일 밤 피자 파티를 열었다. 철저한 선거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장한 탓인지 선거운동을 펼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고 자연스러웠다. 물량 공세와 언변, 정책 토론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들을 대적할 수 있는 분야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전략은 선거 당일 가장 인상적인 연설을 함으로써 역전을 노린다는 계획 아닌 계획뿐이었다.
나는 타 후보들이 득표 활동에 여념이 없을 때 방에 틀어박혀 연설문 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세련되고 간결한 어투와 여유 있는 제스처를 습득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강렬한 연설 구절을 찾기 위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집을 뒤졌고, 케네디 연설을 녹음한 테이프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선거일 아침,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연설문을 한 번 낭독한 뒤 유세장으로 향했다.
첫 후보가 박수를 받으며 연단으로 올라섰다. 덤덤한 연설의 톤과 시큰둥한 청중의 반응이 감지되었다. 연설 전의 박수가 연설 후의 박수보다 우렁찼다. 평소의 인기에 비해 연설이 신통치 않다는 증거였다. 나는 다시 한 번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어 나는 연단에 올라섰다. 타 후보에 비해 형편없는 청중의 반응이 느껴졌다. 하지만 연설을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청중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이고, 내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연설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호를 들으며 나는 내가 해냈음을 확신했다.
그 날은 마침 금요일이었다. 나는 뉴욕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리고는 3시 반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학생회관으로부터 같은 기숙사에 묵고 있는 제이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언! 라이언!”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이를 기다렸다. “네가 됐어! 회장이야!”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통지받은 기분이었다. 기쁨보다는 하버드 입학을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을 이제 하나 통과했다는 홀가분함이 밀려왔다.
1막3장 자아와의 타협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에서는 운동이 학업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사교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학업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초우트의 축구장은 초록의 잔디들로 젊은 나를 늘 유혹하곤 했다. 초우트에는 대표팀인 V팀, JV팀, JVR팀, 3-4 A팀, 3-4 B팀, 그리고 4개의 레크리에이션 팀 등 9개의 축구팀이 있었다. 매년 가을학기 초에 소속팀을 결정하는 테스트가 있었는데, 첫해 나는 3-4 A팀으로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3-4 A팀이라면 레크리에이션 팀을 제외하고 끝에서 두 번째 팀인 것이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은 나는 문자 그대로 와신상담의 의미를 되새겼다. 2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축구에만 전심전력하기로 결심하고 캔터베리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일주일 동안의 축구 캠프에 참여했다. 캠프의 일정은 지옥 훈련을 방불케 했다. 아침 7시에 기상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식사 시간과 오후의 휴식 시간도 쉬지 않고 축구 연습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축구 연습을 마치고 나면 발바닥에는 온통 물집이 생겨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캠프를 마친 나는 또다시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과 가벼운 공 놀림으로 체력과 감각을 키워나갔다. 이 같은 훈련에 힘입어 나의 축구 실력은 월등히 향상되었고 체력도 놀라울 정도로 보강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개학과 동시에 JV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해 나는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었다. 최종 수비수인 스위퍼가 내 포지션이었는데 경기의 전반적 흐름을 뒤에서 관망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자리였다.
3학년 봄 학기가 시작된 4월 초순이었다. 티믈린 선생이 한 가지 중대 발표를 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한 가지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겠다. 모두들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라는 엘리엇의 시를 알고 있겠지? 그 시를 모두 암송하는 학생에게는 A와 같은 비중의 가산 점수를 주겠다.” 순간 우리는 분노 섞인 실망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 시는 엘리엇 특유의 난해한 문체로 쓰여진 무려 131행이나 되는 장시였다.
티믈린 선생은 잔인한 미소를 띤 채 무력한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야!” 교실을 나오자마자 친구들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비한 티믈린 자식!” “우릴 놀리는 거지 뭐야?” 그러나 나에게는 이 문제가 한 번 욕하고 말 성질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2년 반 동안 화장실에서 날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했어도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영어 과목의 A였다. 덕분에 번번이 스트레이트 A를 놓치지 않았던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131행의 길고 복잡한 시를 완전히 외우는 데는 꼬박 48시간이 걸렸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티믈린 선생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프루프록의 연가’를 막히거나 틀리는 곳 없이 완벽하게 암송했다. 티믈린 선생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나를 그 거만한 선생이 문밖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티믈린 선생의 뒷모습이 방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내가 영어에서 A를 받게 된 것이었다. 티믈린 선생은 내 학기말 성적표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라이언은 놀라운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학기말 시험에서 평균 점수보다 11점이 높은 95점을 맞아 나를 놀라게 했다. 헤밍웨이에 관한 그의 에세이는 이해력, 조직력, 표현력, 통찰력 등 모든 면에서 그가 이 클래스 학생들 중 최고의 작가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놀라운 일은 가산점을 주겠다는 내 도전에 응해 그가 빚어낸 완벽한 성과이다. 라이언은 내가 지난 7년 동안 시도해 온 이 시험에서 합격한 두 번째 학생이다.”
1막4장 젊은 삶, 젊은 초상
3학년 3학기를 마친 나는 좋은 성적과 함께 우수한 SAT 점수를 따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심적인 여유가 생기자 내 머릿속은 병마와 싸우시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차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88 올림픽’이 한국에서 치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올림픽을 취재할 예정인 NBC에 이력서를 냈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열망해 온 내게 올림픽 기간 동안 유일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NBC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올림픽이 중반으로 치달을 즈음 밤새워 올림픽 주 경기장을 지키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했던 적이 있었다. 선배와의 술 약속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던 나는 무단으로 사무실을 비웠고, 그런 나에게 문책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후 늦게 출근한 내게 한 여직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제 미국 본사에서 급한 연락을 취했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 담당직원을 물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해고는 겨우 면하게 되었다.
석 달 간 서울에서의 경험을 뒤로 하고 뉴욕 행 비행기를 탄 나는 하버드 대학의 조기입학제에 지원할 결심을 굳혔다. 조기 입학은 특차 전형과 같은 것으로 한 학기 일찍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기 전형에서 탈락하면 일반 전형에는 응시할 수 없는 위험부담이 큰 일종의 도박과도 같았다.
나는 유일하게 하버드에만 원서를 냈다. 전형은 학교 성적 외에도 SAT와 TOEFL 점수, 과외 활동 기록, 직업 경험, 교사 추천서, 그리고 7∼8개의 에세이가 포함된 원서 등이 필요했다. 하버드에 들어가려면 우선 성적이 우수해야 했다. TOEFL은 만점에 가까워야 했고, SAT 성적이 높아야 함은 물론, 학교 성적 또한 최상위권에 속해야 했다. 각종 서클 활동과 운동 실력, 직업 경험 등의 과외 활동 또한 매우 중요했다. 공부만 잘하면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 초우트에서 쌓은 다양한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신문사 편집장, 국제학생협회 회장, 학생회장, 운동부 주장, 기숙사 사감 등의 활동과 NBC 및 변호사 사무실에서의 직장 경험, 그리고 각종 수상 이력은 충분히 화려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잘 포장하느냐가 중요했다. 부모님이 나에 관한 소개서를 책자로 만들어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셨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나의 일기장, 성적표, 상장, 사진, 그림 등을 부모님이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놓으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자료를 짜임새 있게 편집하고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The First Act’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1막‘이라는 뜻의 제목은 이제 내 인생의 한 막이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발표 날이 다가오자 점차 자신감이 없어졌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왠지 초조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발표일은 12월 16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15일 오후 하버드에 전화를 걸었다. “겁나면 내가 걸어줄까?” 수화기를 든 채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제이슨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할게.” 다이얼을 돌려서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했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컴퓨터 두드리는 소기가 났고,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Ryan?” 전화 저쪽의 음성이 나를 불렀다. “Yes, I'm here.” “Welcome to Harvard!” 나는 그 이후의 말을 듣지 못했다. "Welcome to Harvard!"란 말을 듣는 동시에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뛰어나갔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화사한 6월 아침, 잔디밭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삶의 한 계단을 오르는 아들을 지켜보시기 위해 먼 길을 건너오신 부모님 앞에서 나는 쿰 라우디(영예 졸업, 미국 고등학교는 보통 졸업과 영예 졸업으로 나눔)로 졸업을 했다. 성장의 행로를 뒤돌아볼 틈조차 없이 질주해 온 4년, 하버드 합격이란 목표를 이룸으로써 일단락을 맺게 된 것이었다. 이제 나는 내 삶의 2막을 열 때가 온 것이다.
2막1장 꺼져가는 불빛에 맞서
초우트와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 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주는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의 첫인상은 낯설기만 했다. 첫날 나는 차가운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하버드라는 거대한 성에 들어온 벅찬 감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드 대학에는 입학식이 따로 없다. 간단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기숙사 방을 배정받으면 바로 대학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기숙사 내의 신입생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버드에 입학한 후 뚜렷했던 삶의 행로가 걷잡을 수 없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10년 간 이곳에 서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오랜 꿈의 흔적. 난 케임브리지의 한 벽돌 건물 속에 둥지를 틀고 앉아 가슴속을 파고드는 실의의 정체를 스스로에게 캐묻고 있었다. 삶의 한 계단을 오르고 난 후 찾아온 허무와 상실감, 다음 계단을 찾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무력감에 한없이 실망하고 있었다.
또다시 내게는 젊음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식은 피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노력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중간고사 성적 또한 나의 허무감을 부채질했다. 고교 시절 닦아 놓은 기초 때문인지, 아니면 행운인지, 기숙사 친구들이 밤을 새워야 받을까 말까 한 A를 나는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이제 학원은 더 이상 내게 도전의 고난과 승리의 기쁨을 주지 못했다.
나는 결국 휴학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휴학 소식을 말씀드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저 학교 잠시 쉬고 싶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았느냐?” “네.” “그래, 그렇다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한국으로 오너라.” 의외였다. 아버지는 단 한 마디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결정에 대한 나의 책임감만을 재확인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믿음이 고마웠다. 아버지는 비행기표도 좋은 자리로 예약해 주셨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얼마 안 되는 여비를 들고 동해로 떠났다. 홀로 여행을 떠나 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겠지만 생각을 위한 여행이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자유와 해방의 희열도 잠깐, 곧 권태와 혼돈이 밀려들고 생각 그 자체에 진력이 나게 된다. 나 역시 일주일 만에 여행에 대한 환상을 잃고, 오히려 ‘사색을 위한 여행’이 사색하는 능력을 마비시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여행의 결론마저 맺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서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엉켜 있는 실존의 고민들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영어 경제 주간지를 발행하는 비즈니스코리아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비즈니스코리아에서는 ‘비즈니스코리아 연감’이라는 통계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자료를 조사하는 인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직장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점차 나는 표면적으로나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강퍅하고 불안한 정신의 위기는 생활이라는 공간 속에 파묻혔으며, 나는 정신적인 방황을 망각한 채로 살아갔다.
9월의 하버드에는 어느 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6개월 전 나를 괴롭혀 끝내는 서울로 떠나게까지 했던 고통스러운 질문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내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중국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우선 중국의 광대한 대륙과 고전 속의 영웅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며, 중국인들의 당당함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또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확인하고 싶었으며, 중국이 아직 하버드에서는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겨운 수업을 소화해 내기 위해 학기 중에는 잡념에 사로잡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고 서서히 학업의 부담이 사라지면 또다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며,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목적지 없는 항해가 불가능하듯 지향하는 바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1990년 교환학생으로 편입해 한국을 경험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당장 서울로 다이얼을 돌렸다. 아버지는 바쁜 업무를 제쳐두시고 서울대 편입 과정을 알아보셨고, 곧 내게 긍정적인 대답을 주셨다. “성적표와 서류들을 즉시 팩스로 보내거라.”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는 한 걸음에 학교로 달려가 서류들을 준비한 뒤 그날로 모든 편입 신청을 마쳤다.
2막2장 생의 순간순간을 살아 숨쉬며
서울대에서 공부한 1년은 나의 대학 시절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편입한 나는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으로 혼자서 다니며, 혼자서 공부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잔디밭에 앉아서 바라보는 생면부지의 학생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졌다. 서울대에는 하버드와는 다른 독특한 지성의 냄새가 있었다. 막걸리향의 순수라고나 할까?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드디어 나는 몇 명의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만난 중학교 동창들과 정치학과의 선후배들이 그들이다. 그들을 통해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던 정치학과의 국외자 노릇을 청산하고, 관악산과 신촌, 동숭동으로 이어지는 대학생의 일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민중운동’이라는 충격적인 세계를 단편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친분이 두터운 비즈니스코리아 사로부터 설악산에서 열릴 세계 잼버리대회의 소식지인 「설악데일리」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스카우트 운동에 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던 나에게 잼버리대회란 아이들의 행사쯤으로 여겨졌던 반면 부모님은 그 제의에 관심을 보이셨다. 서울에 있어 봐야 별다른 할 일도 없을 테니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영어 신문의 전체적인 편성을 도울 뿐, 한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설악산에 도착한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아침 8시경에 일과를 시작해서 밤 10시나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온종일 마감을 의식해야 하는 숨가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파견 인원과 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을 감안한다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이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자질을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2학기가 시작된 무렵, 한 선배가 교정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정욱아! 너 졸업여행에 함께 가지 않을래? 네가 가면 모두 좋아할 거야.”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의 강요에 못 이겨 뒤늦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합류하게 되었다. 졸업여행 중 나는 여러 명의 좋은 친구, 선배들을 사귈 수 있었다. 후에 늘 도서관에서 내 자리를 맡아주었던 친구도 졸업여행에서 사귀게 된 벗이었다.
졸업여행을 통해 ‘운동권’에 대한 나의 그릇된 선입관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직접 대할 수 있었던 운동권 학생들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태도는 NBC 시절 시위 현장을 목격하면서 가지게 되었던 그간의 편견을 치유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독선과 폭력을 발견할 수 없었다. 졸업여행 후, 캠퍼스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2막3장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1년 동안의 서울대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는 다시 하버드로 돌아왔다. 하버드에서는 보통 한 학기에 4과목을 수강하지만, 나는 1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5과목을 신청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우선 수업이 시작하는 9시까지 공부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르망 도서관으로 직행해 밤 12시 30분까지 공부에 몰두했다. 오후 2∼3시면 대개 수업이 끝나므로 하루에 보통 9∼10시간씩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켰던 것인데,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3학년 봄 학기부터는 대학원 입시, 혹은 취직을 앞두고 누구나 다 초인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그 흔한 파티도 한 번 없었고, 심지어 친구들끼리 외식하는 일도 드물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거의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지저분한 몰골에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 대부분인데, 그때는 그런 흉한 모습에 대해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하버드 전체가 미쳐가는 시간, 1년에 두 차례 찾아오는 3주일, 그곳에서 혈색 좋은 인간이라곤 단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배수진을 친 기분으로 3주를 버텼다. 이렇게 시험 기간 내내 지옥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했던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다.
어렵게 보낸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나는 드디어 성적표를 받아 보았다. 시간과 정력, 마음까지 모두 공부에 최선을 다한 학기였으므로 그 결과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봤더니 A, A, A, A, A. 다섯 과목 모두 A였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뿌듯한 만족감이 차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지낸 인고의 시간, 거기에 바쳐진 내 젊음의 열정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3학년 2학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졸업 논문이었다. 나는 현대의 한중(韓中)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분야는 제대로 된 연구가 드문 미개척 분야였다. 기존의 연구 결과가 없기에 직접 중국으로 가서 발로 뛰면서 자료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염려하시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인천항에서 중국행 여객선에 올랐다.
나는 주로 중국과 한국의 경제 교류, 그리고 그것에 의해 유발되는 정치적 변화에 대한 자료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 수많은 정보기관과 한국 관련 회사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지도교수가 써준 추천서, 웨이하이 시 시장 소개서, 화교 대표단 소개서에도 불구하고 자료 수집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3주 반 사이에 120명 정도를 인터뷰했으니 하루에 줄잡아 10∼20명은 만난 셈이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 내 논문은 논문위원회의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제출된 논문을 최우수, 우수, 준우수, 영예, 그리고 보통의 다섯 단계로 평가하는 과정이었다. 잘된 논문은 영예 졸업의 영광을 누리며 등급에 따라 하버드 서고에 영구히 보관되지만, 그렇지 못한 논문은 아예 헛수고로 끝날 수도 있다. 초조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나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행운이 나에게 계속되었다. 내 논문이 최우수 등급을 취득했으며, 이어 ‘과학과 인문 분야에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보여준 학생’에게 주어지는, 학부생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토머스 훕스 상의 명예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며칠 후 새벽 3시, 나는 KBS 제2라디오에서 걸려온 인터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엉겁결에 나는 수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튿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평소 한두 통의 메시지밖에 남겨져 있지 않은 자동응답기에 무려 30여 통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2막4장 지성인의 반열에 서서
언론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동응답기의 30분짜리 테이프가 한두 시간 만에 가득 찼으며, 전화는 거의 2∼3분마다 한 통씩 24시간 내내 울려댔다. 언론의 힘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언론과의 인터뷰가 흥미로웠던 것도 잠깐, 나는 도대체 서울에서 나에 대해 어떤 기사가 게재되고 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계속 걸려오는 한국 언론으로부터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수상 소식을 다시 한 번 정확히 정리해 준 나는 곧 전화번호를 바꾸고 평소의 일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학과가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서 소일했으며, 저녁엔 홀로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며 졸업을 기다렸다.
졸업식은 6월 8일부터 3일 동안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케임브리지는 졸업생들과 친지, 그리고 관광객들로 가득 차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고, 모든 이들의 시선에는 무언의 자긍심과 축하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하버드를 목표로 지난 8년 동안 학창시절을 보내온 나로서는 매우 감격스러운 날들이었다. 졸업식에는 어머니와 친구, 그리고 한국의 언론들이 나의 졸업식을 촬영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가진 모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나는 한국과 미국의 교육을 비교해 볼 기회를 가졌다. 물론 두 나라의 교육 이념과 제도를 비교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차이는 우리 교육이 현시점의 우열 평가에 치중한다면, 미국의 교육은 미래의 가능성을 점쳐 기대와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는 교육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던 나를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서 받아준 것은 나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그 장래에 투자하려는 학교의 믿음과 용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토머스 훕스 상의 수상 통지서에 “이 상은 당신의 실력보다도 당신의 가능성에 무한한 기대를 갖고 있는 학교의 배려”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버드의 꿈을 이루었으며, 세계의 지성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포부도 이루었으며, 미국의 엘리트 계층과 상류사회에 동양인으로서 당당히 참여해 보고 싶은 야심도 이루었다. 중국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미국인들과 강의를 들었으며, 일본인들과 술을 마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를 피부로 느끼며,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세계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절감하여 더 큰 인간이 되기 위해 정진했다.
이제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그것은 사람 위에 서고 싶은 꿈이 아니다. 사람과 함께 사람을 위해 사람의 역사를 이룩하고픈 꿈이다. 그 꿈의 제2의 누가 되고 싶은 꿈이 아니다. 나의 삶을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삶과 역사에 대한 독특한 의무를 이행하고픈 꿈이다. 그 꿈은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무엇을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하는 꿈이다. 결과의 꿈이 아닌,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꿈, 내면의 완벽을 추구하는 꿈인 것이다.
그 후, 검증의 삶으로
하버드 졸업 이후 서울에서 혼란스러운 몇 개월을 보낸 나는 예정대로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중국은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대학원에 합격한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북경 대학의 곳곳을 누볐다. 비록 낙후된 시설과 허름한 교정이었지만, 중국 지식 사회의 심장부인 북경대에서 맞이한 봄은 찬란했다. 개방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어와 실용적인 학문 탐구에 몰두하고 있는 중국의 수재들이 아름답게 여겨졌고, 자본주의를 지향하지만 경외하지는 않는 그들의 기능주의적인 시각이 놀라웠다.
그러나 법률에 관한 지식과 변호사 자격증이 내 장래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조건이라는 사실 때문에 북경에서 1년밖에는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1995년 봄, 한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법과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스탠포드 로스쿨은 학교라기보다는 취업전선이라는 말이 더 적합했다. 그만큼 치열하고 차가운 생존과 경쟁의 전장이었다. 소중한 시간과 값비싼 학비를 투자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최대치의 투자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밤낮 없이 뛰어 다녔다. 한마디로 전문 지식인의 양성소였다.
3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친 스탠포드의 JD(Juris Doctor : 법학 학사)들은 일반적으로 5∼10개 정도의 직장을 놓고 선택하는 행복한 고민을 한다. 나 역시 뉴욕과 런던, 그리고 홍콩 등지의 법률사무소들로부터 입사요청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분야는 투자금융(investment banking)이었다. 나는 다국적 투자금융기업인 리만브라더스에서 월 스트리터(Wall Streeter)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인수합병, 증권, 채권, 자산운용 등의 분야에서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등과 함께 세계의 금융시장을 움직여온 리만브라더스는 명성에 걸맞게 효율적인 경영체계와 우수한 두뇌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첨단 금융 그룹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나는 올라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사회를 다시 한 번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참 M&A 뱅커의 일상은 고달픈 것이었다. 하루에 12∼15시간씩 근무해야 함은 보통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반드시 밤을 꼬박 새야 했다. 6개월이 넘는 동안 하루도 휴일을 가져보지 못한 적도 있었으며, 수시로 출장을 다녀야 했다. 그토록 그리던 사랑하는 아내와 뉴욕에서 살게 되었지만 향기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리만브라더스에서의 경험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나는 기업들 간의 인수합병 과정에 참여하면서 숫자에 대한 기술과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통폐합을 법률적· 세무적·구조적으로 진단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내는 훈련을 받았다. 나는 리만브라더스에서 퇴사한 이후, 2년 간 스트럭시콘이란 벤처기업에서 창업주이자 CFO로서 경험을 쌓았다.
나에게는 반드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언론사 경영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현대 문명의 꽃이라는 언론, 특히 권력과 공익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 온 대한민국의 언론사를 경영하고자 하는 희망은 사회적 가치와 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기업가라면 누구나 가져볼 만한 꿈이었다.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02년 8월, 오랫동안 대주주를 찾고 있던 (주)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하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서른세 살의 한 젊은이가 중앙 언론사를, 그것도 두 개의 전국지를 보유한 50년 전통의 언론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사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끊임없이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고, 수익 창출보다는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에서 투자의 대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사실, 도전이라고 칭하기에는 무모한 발상이었다. 내 주변에는 언론사 경영에 대해 자문을 해줄 사람도, 언론사에 투자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2002년 12월 4일, 나는 극적으로 헤럴드미디어의 인수에 성공했다. (주)신동방이 소유하고 있던 50%의 지분을 일괄 인수함으로써 헤럴드미디어의 대주주가 된 것이다. 그동안 배웠던 투자 및 금융 기법은 모두 내던져버리고, 가족의 투자와 대출 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인수 자금을 마련했다.
결국 2002년 12월 20일, 인수 작업을 끝마친 나는 헤럴드미디어의 대표이사 사장 겸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이제 서른 하고도 셋, 나는 ‘경험의 길’을 끝마치고 ‘검증의 길’로 들어섰다. 어떤 실수나 실패도 경험이라는 편리한 틀 속에서 미화할 수 있는 권리를 나는 남들보다 일찍 포기했다. 이제 나의 실패는 많은 사람들을 더불어 불행하게 만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결과를 의미한다. 나의 가족과 회사, 이들을 책임지지 못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대한 꿈을 저울질할 수는 없다. 우선 가정과 회사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한 후, 새로운 목표를 영위하려 한다.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한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사랑하고 내 글을 읽으며 힘을 얻는 사람들과 조언을 해주는 모든 이들이 감사하다. 그리고 헤럴드미디어, 이곳에서 펼쳐지는 나의 일상이 소중하다. 경영인의 삶이 때로는 지칠 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기내에서 「헤럴드 경제」와 「코리아헤럴드」를 읽고 있는 독자들을 볼 때, 새삼 살아 있음을 느끼고 내 젊음이 변함없이 소중함을 깨닫는다.
첫댓글 11월 23일 홍정욱씨의 강의가 있는거 아시죠? 가기전에 책을 읽고 가면 좋지만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하여 올렸습니다. 제가 저번에도 말했듯이 읽고 싶으신 책이 있으면 메일 주소와 함께 제목을 알려 주세요. 그리고 제가 여러분과 같이 보고싶은 요약본이 있다면 이곳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7막7장.. 고등학교때 읽으면서 투지를 불태우게 해줬던 책이리 기억이 각별하네요~ 다소 사변적이고 자신에 대한 어필이 강해 다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편견을 배제하고 보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LingLing~ 그리고 혹시 '자유의 미래'라는 책 있으면 올려주면 고맙겠어요~ 친구가 추천해줬는데 서울대 북코스모스에는 없는 것 같네요
10년 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으니 새롭군요.. 홍정욱씨의 여정이 눈앞에 그려지는듯 합니다. '최고가 되려면, 최고가 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해라.' 자리가 꽉 찰듯 하니 저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책은 없네요! 그래서 일단 신청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의 미래'좀 구해줄 수 있냐고요! 올라오면 바로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링링 센스 와 열정 쵝오!
ㅎㅎ~ ㅋㅋ 링링 너무 고마워요~^^
우선, 링링 내일있을 강의 전에 이런 좋은 자료를 올려줘서 고마워요. 읽는동안 홍정욱씨에 향한 감탄과 존경이 그리고 내일 있을 강의에대한 기대가 백만배 증가했습니다.ㅋㅋ!!!
ㅋㅋ 강의 들으러 같이 가요~ ㅎ
강의를 못들어서 정말 아쉽네요..^^ 좋은내용 스크랩해둬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