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원이 일본 정원보다 나았다.
나는 지금 베를린 시가 “세계의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은 “마찬 정원” (Marzahn)에 와 있다. “마찬 정원”이란 본래 구 동독지역이었으나, 독일이 통일을 한 이후, 베를린 시가 옛날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구 동독 지역의 개발사업을 서두리고 있는 사업 중의 하나였다. 나는 Duesselberg 에서 오늘 아침에 떠났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본래 간호요원으로 송출되었었나 추후에, 핏덩이 같은 아들을 데리고 와서 교육을 시켜, 박사학위를 곧 수여 받을, 얼마 전에 타계한 분의 아들이었던 김OO씨 내외가 마중을 하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반가웠다. 김OO씨는 온 갓, 고생 끝에 대사관 영사 과에서 근무 한다고 하였으며, 벌써 아들 딸의 아버지라고도 하였다. 김OO씨의 부인 곽OO씨는 대학 졸업 후, KGIT(한. 독 미디어 대학원대학교)에서 근무하던, 모두가 알아주던 인재였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나는 골동품 벼룩시장(fleamarket)으로 직행, 1900년대의 그림과 맥주잔을 샀다.
그리고 베를린에 도착하여 내가 있을 때인 과거에는 없었던 문화원 (Koreanisches Kulturzentrum) 이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우리나라 작가들의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여 흐뭇하게 느꼈고, 이곳에서 근무하며 베를린에서 태어난 조OO씨의 도움으로 “마찬 정원”에 오게 된 것이다. 특히나 금번 베를린의 나의 방문을 위하여 조OO씨를 이번 기회에 동원하여준 윤OO문화원장에게 감사하였다. 윤 원장은 바로 “2005 한국의 해” 프로그램이 진행 중 일 때, 내가 전화하여도 일주일 동안 전화를 안 받다가 결국은 우연한 기회에 “대사 전화다 받지 마라. 대사 전화다 받지 마라” 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수신전화기 벨에 데가 맞추어 놓은 것이 발각된, 머리가 반짝 빤짝 돌고, 또한 이동전화기 등 현대식 기계를 잘 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OO씨는 부친이 96년에 타계하였다는데, 고인은 식당 업을 하시던 원로교포 지도자였다. 나는 조OO씨 부친과는 잘 아는 사이로, 나의 95년 독일 이임 후 1년 만에 맞은 고인의 죽음에 대하여 처음으로 들어 알게 댔으므로, 그 동안 조화라도 보낼 것을 하고 나의 무심함을 힐책하였다. 그리고 나는 고인의 미망인과 통화하였다. 정말이지 나는 그렇게까지 늦게 철이 드는 사람이었다.
마찬(Marzahn) 정원에 와 보니, 우리 정원은 “서울정원”이라는 한식목제대문으로 시작하여 독특한 색과 형식으로 담과 기와가 구성되었고, 8각 정과 큰 정자 등과 함께 언덕을 이루고, 이로부터 폭포와 물의 조화를 이룸으로서 보는 사람들의 감찬 사를 연발하게 하였다. 일본 정원은 대나무를 포함, 우리 정원의 모든 정원수와 돌 등과 같이 일본에서 가져온 듯 보였으나, 일본의 주택을 정원에다가 지어놓지 않아, 휭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정원이란 다다미가 있는 주택을 상상하기 때문에 정원만 갔다 놓는 것은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조OO씨는 이러한 나의 기분을 알았는지, 용의주도하게 나를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서울정원, 일본 정원 순으로 안내하고, 두 정원 사이에 찻집도 들림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제고시켰다. 이어서 있는 중국 정원은 중국차를 파는 등 스케일 면에서는 컸고 나머지 정원들은 비슷한 사이즈로 이태리의 르네상스 정원과 영국 정원,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정원들이 국제 정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전임 대통령께서는 동 정원에 참여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어떻게 됐느냐 등 그 이후에 한마디의 질문도 없으셨던 배포에 놀라, 나는 시와 줄다리기를 함으로써 한국사람이면 입장료 없이 동 정원에 입장할 수 있게 하여, 한국적인 분위기와 교민처우 등을 고려하였던 일 등을 주마 등처럼 기억되었다. 동 한국사람들의 무료 입장관계는 추후 이태리 대사가 베를린 시와 동건 논의 시, 생각을 못하였으며 이태리 교민들로부터 들었다고 실토한바 있었다.
내일이면 베를린 시를 떠난다. 나는 과거에 대사관저구입시, 김OO 공사(추후 주 세르비아 대사 역임)가 이를 사자고 조르던 생각이 나서 혼자 씩 웃었다. 추후에 통일을 이룩하였고 한때는 같았던 분단국 대사로서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입안한” 동 관저 구입시” 통일운동은 대한민국 대사로서 절반은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을 상기하던 김 공사의 생각이 난 것이다. 정말이지 같이 있던 직원들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주장하는 직원들은 많지가 않았다.
그리고 애틀랜타를 거쳐, 노르웨이 및 덴마크를 거쳐 나의 경우, 독일 같은 큰 나라에 오려고 노력 함으로서 이미 다 지쳐 피곤하여 오게 되어 있었는데 김 대사는 미국 근무 후, 오랜 기간 동안 남들이 그렇게도 부러워하는 차관 보로서 근무한 이후, 단번에 첫 해외임지로서 주 독일대사로 오는 것을 보니, 차기 장관은 맡아 놓았다고 농담을 하였다. 그와 같은 김 대사의 정감 있는 말 등 때문에 하루 저녁이라도 관저에서 자고 내일 나가자고 결정하고는 오늘 오후에는 김 대사의 관저로 들러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내일이면 베를린을 떠나 화란으로 가서, 현재 간호협회장을 맡고 있는 윤행자 여사 내외분과 어떻게 국민을 가르치고 또한 화란이 물을 관리하는지를 배울 예정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음을 신께서 도와주신 결과였다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