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편 ~
1.명칭
-정식 국명 -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짧은 명칭 - UK 또는 영국
-영국 제도 - 최대의 섬인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는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가 위치하고 있다. 두 번 째로 큰 섬에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별개의 국가)이 위치하고 있다.
2.지 리
-국토 면적- 243,000 평방 킬로미터 (93,000 평방 마일)
-남북의 길이- 남북 간 거리는 1,000 킬로미터 (600 마일) 조금 못됨.
-가장 높은 산- 높이 1,343 미터 (4,406 피트)의 스코틀랜드 소재 벤 네비스 산
-가장 긴 강- 길이 354 킬로미터(220 마일)의 세번 강. 이 강은 웨일즈에서
발원하여 브리스틀 해협으로 흘러 들어간다.
-유럽 본토와 가장 가까운 지점- 켄트의 도버. 이 지점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국 해협의 거리는 38 킬로미터(24 마일)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채널 터널은 길이 50 킬로미터(31 마일)가 조금 넘는다.
-지형 - 남부와 동부는 주로 저지의 농경지이다.
북부는 인구 밀도가 보다 낮고 남부와 동부 보다 산이 더 많다.
영국은 그레이트 브리튼(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과 북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고 유럽 본토의 북서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영국 국토의 동서의 연장은 500 km, 남북의 연장은 1,000 km이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유럽 본토의 국가들은 프랑스와 벨기에다.
영국은 북위 50 도와 60 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인 런던은
베를린, 밴쿠버, 바르샤바와 동일한 위도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레이트 브리튼 섬은 유럽 최대의 섬인 동시에 세계에서 여덟 번 째로
큰 섬이다. 이 섬은 일본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와 거의 동일한
크기이고 아이슬랜드나 쿠바의 두 배의 크기이다.
3.기 후
영국은 한국보다 약 1,400 킬로미터(900 마일)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바다로 둘러싸여 기후가 온화하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남서풍 때문에 비가 많고 날씨가 자주 변한다.
-1 월 평균 기온 - 4.1도
-7 월 평균 기온 - 16.4도
-연평균 강수량 - 북부와 동부의 산간 지방에서는 1600 mm(60 인치) 이상.
중부와 동부에서는 800 mm(30 인치) 이하.
-비는 연중 고르게 내리지만 평균적으로 3 월부터 6 월까지가 가장
건조한 시기이고 9 월부터 1 월까지가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시기이다.
-온도 : 잉글랜드 중부지방의 월평균 온도, 1881-1910과 1968-1997 (단위:섭씨)
4.인 구
-인구- 약 7,000 만명. 잉글랜드가 인구 밀도가 가장 높고
스코틀랜드가 가장 낮다.
5.역사적 개요
'영국'(Britain)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단어 역시 처음에는 켈트어에서 유래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선사시대의 역사에서 볼 때 켈트족은 영국 제도(諸島)에 비교적 나중에
도착한 민족이었지만 켈트족의 도착과 함께 영국은 비로소
유사 시대를 맞게 된다.
'켈틱'이라는 단어는 켈트족보다 더 늦게 영국 제도에 침입한 앵글로색슨족과
그 전에 영국 제도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을 구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가 BC 55 년과 54 년에 영국에 두 번 원정을 온 이후 영국과
로마 제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다가 마침내 AD 43 년 로마군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약 409 년까지 지속된 로마의 지배 기간 동안 로마의 세력은 잉글랜드
남동부로부터 점차 세력을 확장해서 웨일즈까지 미치게 되었고 한 때는
스코틀랜드 저지 지방에까지 미치기도 했다.
가.잉글랜드
로마군이 마침내 영국에서 철수했을 때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현재의 독일 북서부에서 온 부족들)이 잉글랜드의 저지 지방을 침입해서
그곳에 정착했다.
잉글랜드란 명칭은 앵글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에는 앵글로색슨족의
작은 왕국들이 다수 건국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왕국들이 서로
병합되어 왕국들의 수는 적지만 각 국가가 넓은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남부에 있는 웨섹스 왕국이 지배적 왕국이 되었다.
그렇게 된 주된 이유는 이 왕국이 9 세기에 바이킹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924 년부터 939 년까지 이 왕국의 왕이었던 에셀스탄은 '전(全) 브리튼의 왕'
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954 년부터는 잉글랜드에는 웨섹스 왕국 한 국가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1066 년 마지막으로 외부의 군대가 잉글랜드를 침입해 성공을 거둔
사건이 일어났다.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고
윌리엄 1 세로 등극했다. 그는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라 프랑스로부터 많은 노르만인들과 다른 부족들이 영국에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3 세기 동안 프랑스어가 지배 계급의 공용어가 되었고 사법 구조와
사회 구조도 영국 해협 너머에서 시행되고 있는 구조들의 영향을 받았다.
원래 앙주 출신인 헨리 2 세의 치세(1154 년 - 89 년)에는 그의 '앙즈벵'
('앙주 왕가'라는 뜻) 제국은 스코틀랜드 국경의 트위드강(江)에서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과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왕이 프랑스에 보유하고 있었던 영토의 대부분은
중세 시대 후반에 소실되었다.
1215 년 남작들이 집단을 이루어 존 왕의 자의적인 행동에 대한 보장책으로
자유 헌장의 제정을 요구했다. 반군이 런던을 점령하자 왕은 협상에 동의했다.
그는 마침내 그들의 요구 사항을 허락하는 문서에 봉인을 찍었고 그 결과로
나온 왕의 공식 칙허장은 마그나 카르타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 헌장에서는 "우리는 권리나 정의를 그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지연시키지도 않는다"라는
조항도 약속되어 있다.
이 헌장은 왕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중요한 헌법적 원칙을
확립한 것이다.
1642 년 잉글랜드에서 발발해서 마침내 찰스 1 세의 체포와 처형에까지
이르렀던 내전(찰스 1 세와 의회와의 분쟁)은 군주와 의회 사이의 세력
균형에 지속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정치가는 올리버 크롬웰(1599 - 1658)이었다. 그는
찰스 2 세가 등극하여 왕정을 복고할 때까지의 공석 기간 중 1653 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호민관으로서 의회와 국책 회의와 연계하여 최고의
입법 행정적 권한을 누렸다.
의회의 개혁은 18 세기와 19 세기에 거듭 거론된 쟁점이었다.
'1832 개혁법'에 따라 낡은 의회 제도를 벗어버리고 참정권을 확대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한편 1867 년과 1884 년의 '개혁법'들은 선거권을 점차 더 광범위한
인구에게까지 확대해 주었다. 20 세기에는 '국민 대표법'이 입법되어
선거권을 갖는 인구의 폭이 더욱 더 확대되었다.
1918 년에는 30 세 이상의 여성들이 선거권을 부여받았고 1928 년에는
'동등 선거법'의 입법으로 여성의 투표 연령이 21 세로 낮아졌다.
자격을 갖춘 18 세 이상의 모든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보통 선거권은
1969 년에 부여되었다.
나.북아일랜드
잉글랜드의 헨리 2 세는 1169 년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그는 잉글랜드
출신의 교황 아드리아누스 4 세에 의해 아일랜드의 대군주로 임명되었다.
아드리아누스 4 세는 아일랜드 교회가 로마에 완전히 복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동안 노르만계 영국인 귀족들이 이 나라의 일부를
지배했지만 잉글랜드에서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튜더 왕조의 군주들은 아일랜드의 내정에 그보다 훨씬 더 깊이 관여하는
경향이 있었고 엘리자베스 1 세 여왕 치세에는 이곳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몇 번의 시도도 있었다.
북부 지방인 얼스터는 특히 소요가 잦은 곳이었지만 1607 년 반군
지도자들이 패배를 당하고 도주한 후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신교도 이주민들이 그곳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다.
찰스 1 세와 의회와의 투쟁이었던 잉글랜드의 내전이 일어났던
1642 년부터 1651 년까지의 시기에는 아일랜드에서도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이 이 반란을 진압했다. 1688 년 가톨릭 교도였던
제임스 2 세를 잉글랜드의 왕좌에서 몰아낸 후에는 더 많은 투쟁이
일어났다. 보인 전투(1690 년)에서 신교도였던 오렌지공(公) 윌리엄
(후에 윌리엄 3 세)이, 아일랜드에 있는 권력 기반을 이용해 잉글랜드의
왕좌를 탈환하려던 제임스 2 세의 군대를 물리쳤다.
1782 년에는 런던의 정부가 아일랜드 의회에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입법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이 아일랜드 의회는 소수 집단인
잉글랜드 출신 아일랜드인들만을 대표하고 있었다.
1798 년 울프 톤의 연합 아일랜드인 운동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후에는
영국이 1800 년의 '연합법'에 따라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아일랜드 의회는 1801 년 폐지되었고 아일랜드의 권익은 영국 의회의
상 하원에 앉아있는 의원들이 대표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자치'의 문제는 영국의 정치에서 주요한 쟁점들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1910 년 런던의 진보당 정부는 정치적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지에 의존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몇몇 연합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사적인 군대를 편성함에
따라 갈등이 심화되었다. 1914 년 '아일랜드 정부법'에서 아일랜드 자치가
승인되었지만 1차 세계 대전 때문에 그 시행이 잠시 보류되었다.
1916 년 더블린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되었고 주모자들은
처형을 당했다. 그로부터 2 년 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페인당이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의 대다수를 얻어 영국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 당의 의원들은 영국 하원에 출석하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더블린에
자신들의 의회인 돌 에런을 결성했다. 1919 년에는 아일랜드 공화군(IRA)이
영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작전을 개시했다.
1920 년에는 '신아일랜드 정부법'의 입법으로 북아일랜드와 남부
아일랜드에 각각 별도의 의회를 두고 그 의회들이 영국 의회에
종속되게 하였다.
이 법은 1921 년 북아일랜드에서 시행되었고 그에 따라 얼스터 지방의
9 개 주(州) 가운데 6 개 주에 자체의 의회가 설립되어 내정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남부 아일랜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1922 년 마침내 남부 아일랜드의 26 개 주가
영국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1921 년부터 1972 년까지 북아일랜드는 자체의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의회는 주로 신교도 사회를 대표하는 연합주의자들이 항구적으로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지역 정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수 집단인 민족주의자들은 사실상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에서 배제되었다.
1960 년대 말과 1970 년대 초에는 민권 운동과 그에 대한 반발로 공동체간의
심각한 폭동이 초래되었고 그 결과 1969 년에는 북아일랜드 경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이 파병되기도 했다.
테러와 폭력이 극에 달했던 1972 년 영국 정부는 법과 질서를 유지할 직접적
책임을 되찾기로 결정했다. 북아일랜드 연합주의 정부는 그에 대한 항의로
사임했고 지역 정부가 폐지되었으며 영국 의회의 직접적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999 년 12 월 양도되었던 권한이 북 아일랜드 의회로 다시
이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스코틀랜드
현재의 스코틀랜드에 인간이 처음 정착했다는 증거는 BC 3000 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군이 영국을 침공했을 무렵에는 이 지역에 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군은 이들을 지배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까지 그 지배를 항구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 세기에는 아일랜드에서 온 켈트족인 스코트족이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북서 해안 지방에 정착함으로써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지방에 그 이름을
부여해주었다.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중세 시대 동안 자주 전쟁을 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 세가 1296 년 스코틀랜드를 직접 지배하려고
했을 때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은 영국의
에드워드 3 세가 반군의 지도자인 로버트 더 브루스를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 세로 인정한 1328 년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고 자녀도 없었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 세
여왕의 후계자로 1603 년 가장 가까운 상속권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 세 왕이 즉위했다. 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 세가 됨으로써 잉글랜드의
왕좌와 스코틀랜드의 왕좌가 그 한 사람을 통해 통합되었다.
1745 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아름다운 찰스 왕자', 또는 '왕위를
요구하는 젊은이'라고도 알려짐)가 스튜어트 왕가를 위해 영국의 왕조를
재탈환하려는 시도를 했다.
헤브리디즈 제도에 상륙한 그는 프레스톤팬스에서 정부군을 무찌르고
에딘버러를 향해 진격해갔다. 그는 잉글랜드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칼라일을 점령했지만 더비에서 퇴각을 당하고 마침내 1746 년 4 월
인버네스의 북동쪽에 있는 쿨로덴의 전투에서 패했다.
정치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650 년대에 올리버 크롬웰의
강요에 의한 연합 시기를 제외하고는 17 세기 동안에는 분리되어 있었다.
1707 년에야 비로소 영국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가 그레이트 브리튼
단일 의회로 런던의 영국 의회에서 의사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로부터 약 300 년 후인 1999 년 7 월 권한 이양에 의해 스코틀랜드
내정을 집행하는 권한이 신설된 스코틀랜드 의회로 반환되었다.
라.웨일즈
웨일즈는 로마군이 영국을 떠난 후부터 잉글랜드의 영향 아래 군주가
다스리는 켈트족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1282 년 에드워드 1 세는 웨일즈를 잉글랜드의 지배 아래 종속시켰고
그가 웨일즈 북부에 세운 성들은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적 기
념물들로 아직도 남아 있다.
에드워드 1 세의 맏아들인 후의 에드워드 2 세가 1284 년 케어나폰에서
출생했는데 그는 1301 년 제 1 대 영국 웨일즈공(公)으로 봉해졌다.
그때부터 재위 군주의 맏아들은 웨일즈공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고
찰스 왕세자는 1969 년 웨일즈공으로 봉해졌다.
15 세기 초 잉글랜드의 부당한 법과 정치에 대한 웨일즈인들의 분노와
만연된 경제적 불만의 결과 민족주의적 지도자인 오웨인 글린드 워가
잉글랜드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지만 실패에 그쳤다.
1485 년부터 1603 년까지는 웨일즈인을 선조로 하는 튜더 왕조가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연합법'(1536 년과 1542 년에 제정)에 따라
잉글랜드와 웨일즈가 행정적, 정치적, 법적으로 통합된 것은 바로
이 시기 동안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권한 이양에 의해 웨일즈 국민 의회가 웨일즈 특유의
필요에 따른 이차적 입법을 할 수 있는 특정한 권한을 부여받은
1999 년 7 월까지 계속되었다.
마.해협 제도와 맨 섬
해협 제도(저지, 건지, 앨더니, 사크 등의 섬들이 이 제도의 섬들 중 큰
섬들이다)는 10 세기와 11 세기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일부였는데 1204 년
프랑스에 노르망디 본토를 빼앗긴 후부터는 잉글랜드에 속하게 되었다.
맨섬은 1266 년까지는 노르웨이의 명목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1765 년
영국이 이곳을 7 만 파운드에 구입함으로써 마침내 영국의 직접적
관리를 받게 되었다.
1,000여 년 전에 설립된 맨섬의 의회인 틴월드는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 온 가장 오래된 입법부이다.
오늘날 이 영토들은 그들 자체의 입법 의회와 사법 제도와 자체의
과세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 영토들의 국제 관계와
방위만을 책임지고 있다.
영국은 유럽 연합의 15 개 회원국들 중 하나이지만 해협 제도와 맨섬은
그들 자체로는 EU 회원국도 아니고 영국의 회원국도 아니다.
광범위하게 말하면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한 EU의 명령과 EU의
공동 농업 정책은 해협 제도에도 적용이 되지만 서비스나 개인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한 명령은 적용되지 않는다.
해협 제도의 주민들은 그들이 영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개인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한 규정이 주는 혜택을 입을 수 있다.
6.영국의 종교
영국은 모든 사람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 다종교 사회이다.
종교 단체나 집단은 종교적 의식을 집전하고 법의 한계 내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고 자산을 소유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그 밖의 다양한
자선 활동을 수행할 수가 있다.
영국의 주된 종교는 기독교이지만 세계의 종교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신봉되고 있다.
영국에는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를 믿는 대규모의 공동체들이
있고 바하이교,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규모의 공동체들도
있으며 신흥 종교들의 추종자들도 있다.
반면에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 인도주의 협회나 영국 현세 협회 같은 단체들은
모든 형태의 종교를 거부하는 관점을 대표하고 있다.
종교 퍼센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국 국교/성공회 29
가톨릭 11
다른 기독교 14
기타 종교 4
없음 41
답변 거부/답변 않음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국의 종교적 전통
흔히 '공동체에 속함'과 '능동적 참여'에 대한 구분을 하고 있다. 전자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어떤 종교나 종교적 윤리와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영국에는 종교 단체에 능동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성인의 수가 790 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된다. 위기를 맞았을 때나 출생, 결혼, 사망 등의 인생의
중요한 행사 때만 공식적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다.
2001 년도 인구 조사에는 영국에서는 1851 년 이래 처음으로 종교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분석되면 영국민의 종교적
정체성의 양식에 대한 광범위한 공식적 정보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표를 통해 영국민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개요를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표를 보면 인구의 절반을 조금 넘는 비율(54 %)이 자신들을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있고 41 %가 자신들이 어떤 종교에도 속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와 사회
영국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영향은 항상 조직적이고 사적인
예배라는 좁은 범주를 훨씬 넘는 영역에까지 확대되어 왔다. 교회나
성당이나 그 밖의 예배 장소들은 영국의 건축물들의 형태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해 왔다.
종교 단체들은 자원 봉사 활동과 사회적 봉사의 제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많은 학교들과 병원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크
게 받은 남성이나 여성에 의해 설립된 바 있다.
기독교 달력에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연중 행사들인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는 영국에서도 연중 주요한 공휴일이다.
다른 종교들이 준수하는 축제들이나 다른 행사들, 즉 힌두교의 디왈리와
홀리, 유대교의 로시 하샤나와 욤 키푸르, 이슬람교의 라마단과 에이드,
시크의 바이사키 등은 오늘날 영국인의 생활에 가시적인 다양성을
더해주고 있다.
7.주거문화
건축되는 주택의 유형은 지난 세기 동안 변화를 거듭해 왔다. 1 차 세계
대전 전에는 테라스 하우스(연립 주택)가 일반적이어서 현존하는 연립 주
택들의 3 분의 1은 1919 년 이전에 건축된 것들이다.
1919 년부터 1944 년까지는 두 가구 연립 주택(두 가구의 한쪽 벽이 서로
붙어있는 형태의 주택)의 수가 증가했다.
1965 년 이후에는 민간 부문이 더 많은 단독 주택들을 짓기 시작한 반면
공공 부문에서는 특정 목적을 위한 다수의 플랫식 주택(각층에 한 가구가
살게 만든 아파트)이 공급되었다.
가. 주택의 구조
단독주택을 "Detached House" 또는 그냥 "House"라고 부른다. 옆집과
떨어져 있고 보통 나무 담장으로 감추어진 뒷 뜰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이 "Semi-detached House" 인데 두 집이 붙어 있다. 어떻게 보면
집 한 채를 두 채로 나누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똑 같은 형태의
집 두 채를 붙여 지은 것이다.
집 여러 채가 일렬로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테라스 하우스이다.
테라스 형태에서 가운데 있는 집은 바깥쪽에 있는 집보다 다소 값이 싸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주택은 모두 이층집이 기본인데 일층에는 거실과 부엌,
이층에 침실이 있는 것이 기본형이다. 일층만으로 된 집이 있는데 이를
방갈로 (bungalow) 라고 부른다. 노인용 주택 등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것이 "Flat(플랫)"인데, 규모에 관계없이
우리의 고층 아파트에서부터 소규모 연립 주택까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flat"이라고 부르는 이유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지붕이 평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층집이 일반적인 영국 주택 형태에
빗대어 아파트는 내부가 단층으로 평평하므로 flat으로 부른다는 설이다.
flat은 일반적으로 서민주택, 공공 임대 주택이 많다.
나.주택의 유형별로 본 영국의 가구. 2000/01
-두 가구 연립 주택 31%
-테라스 하우스 28%
-단독 주택 21%
-특정 목적을 위한 플랫식 주택 또는 상하층 공용 복식 아파트 15%
-기타 4%
2001 년 영국에서 매매된 주거용 주택의 평균 가격은 11 만 2,835 파운드였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현저한 편차를 보여 런던과 남동부에서 구매한 사람들이
가장 높은 주택 가격을 지불했다. 주택의 가격은 또 주택의 유형에 따라서도
편차를 보였는데, 단독 주택이 가장 비쌌다.
다. 적절한 주택의 표준
잉글랜드에서 사회적으로 적절한 주택을 향한 발전 양상을 확립하고
점검하기 위해 전(前) 영국 교통지방정부지역부(DTLR)는 적절한 주택에
대한 기준을 확립한 바 있다. 거주에 적절한 주택이란,
- 현행 법정 최저 주택 기준에 부합되는 주택이다. 법정 최저 주택 기준은
“적합성의 기준”이라고 불린다.
- 적당히 수리된 상태에 있는 주택이다.
- 적절히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주택이다.
- 효과적인 단열과 효율적인 난방을 통해 적당한 정도로 따뜻하고
편안한 주택이다.
라. 주택 소유
1981 년부터 2001 년까지 영국에서는 소유자가 거주하고 있는 주택의
수가 40 % 이상 증가했고 임차 주택의 수는 약 15 % 감소했다.
2001 년까지의 조사 결과를 보면 1,700여 만 채의 주택이 소유자거주
주택으로 800 만 채를 기록한 임차 주택의 수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마. 주택 담보 대출
영국의 주택 소유 현황의 한 특징은 주택 담보 대출을 통해 구입된
주택의 비율이 비교적 높다는 점이다. 주택 구입 건수의 약 4 분의 3이
주택 담보 대출 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2001 년에는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의 77 %가 은행을 통한 것이고 18 %는 주택 조합을
통한 것이었으며 5 %는 다른 대출 기관을 통한 것이었다.
바.임차 주택
소유주가 거주하는 주택이 증가함에 따라 임차 주택의 수는 감소되었다.
2001 년에는 영국 가구의 21 %가 사회 부문(지자체나 RSL)에서 임차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고 10 %는 개인적으로 주택을 임차해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가 사회 부문의 주택에 지출하는 비용의 대부분은, 영국 내에서
약 370 만 채에 이르는, 지방 의회에서 임대해주는 주택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지방자치체가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으로 제공되고 있다.
대부분이 RSL인 2,000여 개의 주택 조합들도 사회 부문에서 주택을
제공하고 있다.
바. 주택 재고와 주택 건설
1951 년에는 영국에 1,400 만 채의 주택이 있었다. 2001 년에는 그 수가
2,500 만 채로 증가했다.
영국에서 주택 건설의 절정기는 1968 년으로 이 때 완공된 주택의 총수는
42 만 6,000 채에 이르렀다.
그 중 22 만 6,000 채는 민간 기업이 완공한 것이었고 20 만 채는 공공 부문,
주로 지자체들이 완공한 것이었다.
2000/01 년도에는 영국에서 17 만 8,000 채의 주택이 완공되었다. 이제는
지자체들이 새로운 택지 개발을 주도하는 주요한 주체는 아니지만
지자체들은 아직도 임대의 주체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RSL(주로 주택 조합)은 이른바 현재의 사회 부문에서의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2000/01 년도에는 민간 부문 기업이 완공된 총 주택수의
86 %를 담당했다.
8.예술
영국은 다양한 문화 유산을 지닌 나라로서 많은 유명 예술가들과
공연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미술×음악×드라마×문학, 또 최근에는
TV×영화×라디오 등 분야의 풍요로운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해 왔다.
해외의 많은 관광객들이 영국의 문화예술을 이유로 영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영국의 박물관들과 미술관들에 소장된 작품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 박물관과 미술관
1,800 곳에 이르는 영국 전역의 등록된 박물관들과 미술관들의 연간 총 관람
건수는 7,700여 만 건에 이른다.
이 박물관들과 미술관들에는 대영 박물관을 비롯한 주요한 국립 박물관들,
약 600 곳의 독립 박물관들, 지자체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500 곳의
박물관들, 또 대학이나 군(軍)이나 내셔널 트러스트나 잉글리시 헤리티지
등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수집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외에도
한시적인 전시회도 개최한다.
그 중 최대 규모의 전시회들은 수 십 만 명의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박물관의 수는 1980 년에는 800 곳밖에 안되었지만 그 이후부터 크게
증가해 왔다.
나. 공예
공예 위원회는 잉글랜드의 공예품들을 관리하는 공식 기구이다. 이 위원회의
목표는 잉글랜드와 해외에서 공예품들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과 장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예 관련 경제 체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공예 위원회는 이 위원회가 보유한 런던 행사장에서 연례적인 첼시
공예 박람회와 다른 여러 가지 행사들을 개최하며 국제 박람회들에
참가하는 영국 참가단의 활동을 지원한다. 크라프트 포럼 웨일즈
(Craft Forum Wales)는 웨일즈의 공예인 단체들을 지원한다.
독립된 공사인 크라프트웍스(Craftworks)는 북아일랜드의 공예 개발
기관이다. 북아일랜드 예술 위원회는 공예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예술 위원회에 설치된 공예부가
공예의 발전을 촉진하고 공예가들을 지원한다.
다. 건축과 디자인
약 2,8000 명의 회원을 보유한 왕립 영국 건축가 협회는 1837 년 왕의
칙허장을 수여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건축의 중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또 패션, 영화, 컴퓨터, 제조 산업, 그 밖의 분야들에서 더 우수한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은 영국 디자인 위원회가 지원×권장하고 있다.
영국 디자인 위원회는 디자인의 효과적인 이용을 고무하고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기업, 교육, 정부 등 분야의 협력 기관들과 제휴하고 있는
독립 기구이다.
라.문화 행사
- 축제
영국에서는 매년 약 500 여 종의 전문적 예술 축제들이 열린다. 이 축제들의
종류는 점점 더 다양해 져서 예전에는 음악 축제라면 고전 음악이
지배적이었지만 지금은 재즈, 민요, 대중 음악, 록, 세계의 음악, 또 초기
음악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는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시(詩) 축제만 해도 약 60 종이 있고 그 밖에도 리버풀 비엔날레 같은
시각 미술 축제들도 있다.
거리의 행사들을 비롯해 매우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펼쳐지는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는 주요 행사들과 나란히 열린다.
영화제들 중에는 연례적인 런던 영화제도 포함되며 리즈 아동 영화제나
브리스틀에서 열리는 ‘짧은 만남’(Brief Encounters) 단편 영화제처럼
신설된 축제들도 있다.
- 예술 센터
영국에 있는 약 200여 곳의 예술 센터들이 국민들에게 다양한 예술 형태를
구경하거나 예술 활동, 특히 교육에 도움을 주는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예술 센터들은 거의 모두 전문가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자원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오크니의 스트롬니스에 있는 피어 예술
센터와 던디 현대 예술 센터(미술관 두 곳, 영화관 두 곳, 인쇄소,
작업실 등이 있다)는 스코틀랜드 예술 위원회가 재정을 지원하는
많은 센터들 중 두 곳에 불과하다.
웨일즈 예술 위원회가 재정을 지원하는 센터들 중에는 카디프의 챕터
예술 센터와 협동 작업을 장려하고 국제적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애버리스트위스 예술 센터가 포함된다.
9. 스포츠
스포츠는 인기 있는 여가 활동이다. ONS UK 2000의 시간 이용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인 들이 즐기는 세 가지 신체 단련 운동은 걷기(12 %),
수영(9 %), 헬스(7 %) 등이다.
조사 대상자들의 시간 이용 일정을 보면 텔레비전으로 스포츠를 시청한
시간 (하루 4 분)보다 실제로 스포츠나 신체 활동을 한 시간
(하루 평균 16 분)이 더 길었다.
영국의 남녀 스포츠 선수들은 육상 경기, 프로 복싱, 장거리 자동차 경주,
조정, 요트 경기, 스누커, 스쿼시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50 여 개의
세계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2001 년에는 세계적 선수권 대회와 유럽의 각종 선수권 대회에서 건장한
영국의 선수들이 76 개의 메달을 따냈고 장애인 선수들도 그러한
대회들에서 167 개의 메달을 따냈다.
가.주요 스포츠 행사
영국에서는 매년 중요한 스포츠 행사들이 열린다. 그 중에는 윔블던
테니스 선수권 대회, FA 컵 결승전,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 그랜드
내셔널 장애물 경마 대회 등도 포함된다.
2002 년 영국에서 열린 주요한 행사들로는 맨체스터에서 열린 영연방
경기 대회와 스코틀랜드의 국립 축구 경기장인 햄덴에서 열린 유럽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있다.
2003 년 영국에서 열린 국제적 스포츠 행사들로는 세계 실내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와 세계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가 있는데 이 두 대회는
모두 버밍엄에서 열렸다.
-육상
영국의 육상 경기에는 트랙과 필드 종목, 크로스컨트리 경주, 도로 달리기,
경보, 산과 언덕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라톤과
하프 마라톤 등 대중이 참가하는 행사는 매우 인기가 높다.
영국 최대의 마라톤 행사는 매년 4 월 열리는 런던 마라톤으로 2002 년
도에는 32,000 명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육상 경기의 운영 단체는 영국 육상 경기 협회(www.ukathletics.net)이다.
이 단체는 세계 실내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를 비롯해 주요한 대회들을 영국에
유치하는 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배드민턴
배드민턴이라는 명칭은 보포트공(公)의 시골 별장이었던 배드민턴
하우스에서 유래한다. 이 별장에서 19 세기에 배드민턴이 맨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기는 잉글랜드 배드민턴 협회와 스코틀랜드×웨일즈×아일랜드의
각 배드민턴 연합이 관장한다. 잉글랜드 배드민턴 협회(www.baofe.co.uk)
에는 모든 수준의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코치들을 육성하기 위한 코치
교육 제도가 마련되어 있고 시간제로 일하는 각 군의 개발 담당관들로
구성된 조직을 갖춘 개발부도 있다.
-축구
어소시에이션 풋볼은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의
각 축구 협회가 관장한다. 잉글랜드에는 314 개 구단이 영국 축구협회
(FA, www.thefa.com)에 소속되어 있고 약 42,000 개의 축구단이 지역
축구 협회나 주 자치구 축구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
1863 년 조직된 FA와 1888 년 조직된 영국 축구 연맹
(www.footballleague.co.uk)은 이러한 종류의 단체로서는 세계
최초의 단체들이다.
잉글랜드에는 FA 프리미어 리그에 20 개 구단이 참가하고 있고 또 72 개의
프로 축구단이 축구 연맹이 운영하는 3 등급의 주요 디비전들에 소속되어
경기를 하고 있다.
-럭비 연합(Rugby Union)
럭비 연합이 운영하는 축구(한 팀이 15 명의 선수로 구성되어 경기함)는
19 세기 초반 럭비 스쿨에서 시작되었다.
이 스포츠는 잉글랜드에서는 럭비 풋볼 연합(RFU, www.rfu.com)이
관장하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국제 럭비 풋볼 연맹(International Rugby
Board)이 관장하고 있으며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도 각각 그와
유사한 단체들이 있다.
-테니스
현대적 경기인 테니스는 1873 년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어 최초의 선수권
대회가 1877 년 윔블든에서 열렸다. 영국의 테니스를 관장하는 단체는
영국 테니스 협회(LTA, www.lta.org.uk)이며 테니스 웨일즈와 테니스
스코틀랜드가 이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 테니스 인 노던 아일랜드는 테니스
아일랜드 얼스터 지부의 관리 아래 있다.
올 잉글랜드 클럽의 구장에서 열리는 윔블든 테니스 선수권 대회는 네 개의
주요한 그랜드 슬램 선수권 대회들 중 하나다.
-골프
1897 년부터 골프의 규칙은 미국과 멕시코만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세인트 앤드루즈에 소재한 로열 앤 에인션트 골프 클럽(R & A, www.randa.org)
의 관리를 받아 왔다.
클럽 프로페셔널 골프는 프로 골퍼 협회(PGA, www.pga.org.uk)가 관장하고
토너먼트 골프는 유럽 PGA 투어와 유럽 여성 프로 골퍼 협회가 관장한다.
영국에는 2,000여 곳의 골프장이 있고 가장 유명한 곳은 세인트 앤드루즈에
있는 올드 코스이다. 그 밖에도 로열 리섬 앤 세인트 앤즈, 로열 버크데일,
뮤어필드 등의 유명 골프장들이 있다.
뮤어필드 골프장에서는 2002 년도 오픈 선수권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0.여왕과 황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임 기간 동안 군주국인 영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는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고 또 영국 사회 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왕이 1952년 즉위했을 때에는 영국은 50여 개의 해외 보호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중 대부분이 여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영연방의 독립 회원국이 되어 있다.
또한 영연방 회원국들 중 다수는 여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하고 있다.
현대적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왕은 과거의 어느 군주보다도 더 많은
해외 순방을 수행할 수가 있었으며 텔레비전의 발달로 왕실 가족들이
영국이나 해외에서 보통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됨으로써 왕족들은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실 가족들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군주국인 영국의 역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가적 화합과 영연방의
화합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군주국인 영국의 특수한 한 특징은 형식적인 면과 격식을 차리지
않는 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의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나란히 모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의 직접적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왕족들이 거리를 걸어 다니며 서민들과 접촉하는 일은 영국 왕족들이
영국이나 해외를 순방하는 동안 그들의 일정에서 주요한 국면이 되어 있다.
여왕의 즉위 25 주년 기념 축제와 50 주년 기념 축제, 왕실 가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은 무수한 군중을 군집시키는 주요한 의전 행사들이며 이러한
행사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경우에는 수 억의 시청자들이 그것을
시청하게 된다
변화하는 상황에 비추어볼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임 기간 동안
군주국으로서의 영국의 역할에 일어난 변화는 오랜 기간에 걸친 영국의
발전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한 실례에 불과하다.
적어도 9 세기에 시작된 군주국의 형태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통치
제도이다. 군주국이라는 형태는 입법부인 의회보다 4 세기나 먼저,
사법부보다 3 세기나 먼저 시작된 정부 형태이다.
여왕은 829 년 잉글랜드를 통일시킨 에그렛 왕의 직계 후손이다.
이 군주국의 역사가 중단되었던 시기는 단 한 번밖에 없다. 그것은
1649 년부터 1660 년까지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아들 리처드
(둘 다 호민관이라는 칭호로 불림)가 통치했던 공화정 시대였다.
직계 왕위 계승 전통의 일시적 중단에도 불구하고 군주국인 영국의 세습
원칙은 줄곧 지켜져 왔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위탄, 즉 추밀원에서
왕족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했었다. 1066 년 노르만 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 노르만 왕이 즉위하고 처음 몇 대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이러한 선출
원칙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준수되어 왕의 선출은 노르만 왕조에 와서
위탄의 후신으로 조직된 커몬 카운슬(국가 평의회)의 ‘승인’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그 후 곧 왕위 세습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긴 했지만 승인이라는 절차는
현대에 와서도 영국 왕의 대관식 도중 치러지는 한 중요한 절차로
자리잡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영국의 군주는 최고의 행정•입법•사법권을
직접 행사했었다. 그러다가 이러한 관행은 의회와 사법부의 발달과 함께
쇠퇴했다.
17 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왕과 의회 사이의 투쟁의 결과 1688-89 년
영국은 입헌 군주 정치 체제를 갖춘 국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18 세기에 와서도 왕은 계속해서 상당한 행정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19 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행정 책임을 띤 행정부와 현대적
정당 제도의 확립과 함께 정치면에서 군주의 능동적 역할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영국의 정부는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 각료들은 투표로
선출된 다수당의 지지 없이는 정무를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각료들은 또 자신들이 여왕에게 하는 조언에 대해 책임을 진다. 따라서
여왕이 취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정치적 결정은 각료들이
하고 여왕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국가 원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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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이드가 Narrate한 부분을 정리하여 여행기를 정리하려하니 부족하여 상기의 참고자료를 이용하였으며 이는 키위아나님들께서 유럽여행 전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유럽여행 참고자료도 좋지만 끝까지 읽다가는 숨 꼴깍 하겠데이...사람 죽일일 있어유..?두번 다시 이런 긴 글 올리면 강퇴다..하하하하하하
헉헉헉헉!!! 아이고 숨차다 주인님!~~ 유럽여행 가기도전에 기절해버리겠시유! 1 2 3 4 ....시리즈로 올리시면 좋겠구만유..ㅠㅠ다른건 몰라도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인줄은 몰랐네요..좋은자료임에는 틀림없는데...에구 힘들어~~^^* ㅋㅋ
나도 헉헉헉!! 숨이차네..이렇게 긴글을...역시 죠다쉬님이야!..다음엔 좀 짧게 해주세요^^
엥.. 내 댓글 지워졌넹.. 좀 길긴 하지만 상세한 정보에 감사드려요..이궁 모두들 헉헉 거리시네, 난 아직도 괜찮은데... 메롱~~~~
봉봉아..ㅎㅎㅎㅎ
ㅎㅎㅎ..역시 봉봉..
정말 수고 많으셨네유.땀과 땀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 합니다.긴 시간동안 자료수집과 정리를 했을 걸 생각하니...흠흠흠.냄새 안나나....여기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