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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 제2 교의편
□ 제3장 사요
□ 제2절 지자본위
오늘 지자본위입니다.
원허 교우님께서 기본적으로 해주셨고, 보충해서 하겠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 진리의 위력을 네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사은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원상 위력의 진리로 사는데, 그것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근원적 은혜입니다. 첫 번째가 천지고, 두 번째 부모,
세 번째가 동포, 네 번째가 법률입니다. 이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없이는 우리는 0.1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은혜가 크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느껴서 살면
원망생활을 하기보다는 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은혜에 대한 보은의 실행. 즉, 어떻게 하면 이 은혜에 보은할
것이냐? 먼저 배워서 자력을 양성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공도자를
숭배하고 또, 내가 공도자가 되자는 것이다.
이렇게 사요의 내용이 나옵니다.
사요는 사은에 대한 구체적으로 보은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인류 사회에 대한 불공입니다. 여기에는 자타력 병진과 이 사회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평등사회가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사요는 선택이 아니라 적극적 보은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력을 양성하는 것도 적극적 보은의 방법이 되고 지자를 본위 하는
것도 적극적 보은의 방법이며 실천입니다. 그리고 타자녀 교육과 공도자
숭배도 적극적 방법이자 인류에 대한 불공이면서 평등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했던 자력 양성은 우리가 의뢰생활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신 육신 물질을 충분히 갖추어서 의뢰생활, 빚지는 생활
그만하고 오히려 주위에 은혜를 나투는 사람이 되자.
의뢰생활을 하면 자기의 권리가 없습니다. 의뢰생활을 하면 힘이
없습니다. 의뢰생활을 하면 가난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을
양성해서 자력생활을 하면 권리도 생기고 대우도 받고 연봉도 올라가고
힘도 있고 자신감도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력이 없으면 만사가 그림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력을 갖추려면 지식, 지혜, 배움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배움의 첫째는 지자를 본위 하라는 것입니다.
지자 본위 智者本位
요새 안 쓰는 말인데 근본 위치에 세운다는 말입니다. 즉, 중앙 자리에
모신다. 스승으로 모신다. 지도자로 받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자가 본위가 되면 안됩니다. 우자가 장이 되고
우자가 큰소리를 치고 우자가 스승이 되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이것을
소경이 길을 인도한다고 합니다. 소경이 길을 인도 하면 어떻게 되죠?
이면우 교수가 이야기 했는데.. 우자가 지도자가 되어 열심히 하면
더 곤란하다. 차라리 열심히 안 하는 게 좋다.
우자가 열심히 하면 더 미쳐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자를 스승 삼고, 지자를 통해서 배우는 불공을 하고
나도 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잘 배워지세요?
제가 당구를 한 200이상 칩니다. 옛날엔 300도 쳤어요. 당구 치는 것을
가만히 봤어요. 누가 당구를 제일 정성스럽게 칠까요? 하수일수록
정성스럽게 안칩니다. 50, 80, 100 치는 사람들은 생각 없이 툭툭
밀어버립니다. 그런데 잘 치는 분일수록 정성스럽게 칩니다. 쉽게
말하면 경험도 훨씬 많고 훨씬 잘 알고 또, 잘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성스럽게 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바둑을 좀 두었습니다. 제대하고는 안 두었습니다.
현대사회의 젊은 사람들에겐 맞지 않습니다. 한 게임 하면
2~3시간이에요. 진 사람이 도전하니까 한 게임 더 하고 그래서 비기면
결승전을 합니다. 그러면 하루가 다 갑니다. 그래서 제가 포기했는데.
바둑 둘 때도 제가 느낀 겁니다. 바둑을 못 두는 사람일수록 툭툭
놉니다. 장기도 마찬가집니다.
당구를 칠 때도 바둑을 둘 때도 장기를 둘 때도 잘 두는 사람은 두수
세수 앞을 봅니다. 그 분들은 몇 수 앞을 내다 보고 더 잘하고 더
정성스럽게 합니다. 설사 모르고 안 보이더라도 정성 그 자체는
다릅니다. 정성은 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력도 없는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경험도 적은 사람이 정성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 이것이 이치구나…’
이 공부방에도 마찬가지예요. 묘합니다. 우리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알려고 앉아있어야 맞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참 묘합니다.
지자본위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자일수록 본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자일수록 지자를 무시하고 비난하게 되어있습니다. 서로 비례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손바닥 양면과 같습니다. 손 바닥을 보면 손등이 안
보이잖아요? 한 쪽을 하려다 보면 다른 한 쪽은 못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자는 잘 하는 부분은 모른척하고 칭찬도 안 합니다.
그리고 잘 하는 것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못하는 부분을 보고 따집니다.
이것은 철저한 무념입니다. 이것이 약자 되는 지름길 입니다.
이 우자는 잘하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놔두고 칭찬도 안 해주고
어두운 부분을 따집니다. 이 음양의 이치를 모르고 막 따져요.
철저한 무념이죠. 약자 되는 지름길입니다.
지자는 지력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본위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제가 오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설사 지자가
아니더라도, 본위의 마음 즉, 배우려는 마음. 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성은 들일 수 있지 않느냐?
물론 야구를 할 때도, 선수와 게임 룰을 알면 훨씬 재미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면 야구가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원불교
공부를 한 분은 훨씬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불교를 잘 모르는 분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원불교 공부는 마음공부라고 합니다. 문자공부를 넘어섭니다.
물론 문자공부가 필요합니다만 요새 문자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마음공부는 생활공부입니다. 생활불교이기 때문에 내가 쓰는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지? 내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내가 어떻게 이것을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내 세계와 별개의 색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나에게 가치 있고 가장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구두가 반짝 반짝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부지런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것을 처다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멋 내고 있네..’
멋 내는 것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교당 생활도 게으른 사람은 못 할
것입니다. 참 힘듭니다. 배우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배우기 어렵습니다.
저는 오늘
기차를 타고 총부에 도착해서
법문도 받들고 점심 먹고 수덕회 하다가 기차를 타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에이 화요공부방 괜히 해가지고.. 하기 싫어 죽겠네..’,
‘나 보다 안 바쁜 사람도 빠질 텐데…’,
‘나보다 건강한 사람도 빠질 텐데…’,
‘내가 이 고생한다고 누가 알아 주나..?’
제가 정말로 중생이죠? 교무가 그런 맘 먹으면 안되죠?
그 마음이 날 때 공부하는 것이 교무지 그 마음이 안 나는 것이 교무는
아닙니다. 저도 사람이라.. 무슨 말씀인지 이해 하시겠어요?
솔직히 인간적으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나도 항상 건강해서 놀다가
강단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저도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저녁에 종로와 명동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낮에
안 보이는 간판들에 불이 붉은 색으로 반짝 반짝 빛났습니다. 그 곳의
사람들의 눈빛을 봤습니다. 그 중에는 지인들과 어찌다 한번 모임에
나와서 술 한잔 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일 주일에 반
이상을 저녁 마다 그렇게 술을 먹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재미있잖아요. 한 잔하고 돌아다녀보세요? 안 재미있어요?
궁짝 궁짝 하면서 호객행위를 하고.. 조명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미어터지는데.. 전 어지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군대 가기 전에 충장로 우체국(편집자 주: 일명 우다방^^)
앞에 서있다가.
‘어 누구 왔냐?’
저도 우리 친구들과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야 토요일 저녁에 배운다고, 마음공부 한다고 교당에
오고 화요일 저녁에 여기 오시는 거.. 참 정말 엄청난 사람들이구나.’
‘우리 법회에 오고 공부방에 오는 교도님들은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구나.. 정말 착한 분들이구나.. 정말 소중한 분들이구나..’
누구나 즐거운 것, 편안한 것, 단 것 좋아하는데 누가 고생스럽고
힘들고 쓴 것 좋아합니까? 당장 눈 앞에 편안하고 즐거운 것 찾으러
다니는데.. 여기엔 저보다 더 피곤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운다고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서로를 위해서 우리 한 번 박수를 쳐
드릴까요?
< 짝짝짝.. x 모두들. >
그러죠? 우리끼리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박수치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세상에 자기의 지혜를 밝히겠다. 자신의
영혼을 좀더 맑혀보겠다.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보겠다. 그리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보겠다는 이 배움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에 한 자력양성을 복습하면, 자력양성은 의뢰생활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권 평등이라고 했습니다. 권리가 평등해진다.
사람으로 대우를 받습니다. 자력이 없으면 사람 대접 못 받습니다.
그래서 정신, 육신, 물질 면에서 자주력, 자활력, 자립력을 길러 나가자.
그러면 가난해지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자본위는 배우지 않는 것, 무식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 평등의 사회가 되고,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할 타자녀 교육도 무식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잘 배워서 무식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 평등을 이뤄내자.
그 다음 주는 공도자 숭배입니다. 이건 이기주의를 놓자. 그래서
공도주의로 가서 생활 평등의 사회를 이루자. 공도자가 나와야 우리의
삶이 편해집니다. 공도자 숭배가 왜 생활 평등인지 잘 이해를 못합니다.
공도자는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분입니다. 공무원이 있어야 길이
깨끗해지고 발명가가 발명해 주니까 우리 생활이 편해집니다.
스승님이 있어서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사람답게 살아 갑니다.
내< |
자력 양성 - 의뢰x - 인권 |
━━━ |
┓ |
지자 본위 - 무식x – 지식 |
>무지 |
가난 | |
대타< |
타자녀 교육– 무식x – 교육 | ||
공도자 숭배- 이기x – 생활 |
━━━ |
┛ |
자력양성, 지자본위는 내가 하는 것이고 타자녀 교육과 공도자 숭배는
대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력 양성하고 내가 지자 본위를 해서
대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쳐주고 공도자를 받들고 숭배하여 지식
평등과 교육 평등으로 무지를 해결하고 지식 평등과 생활 평등으로
가난을 해결합니다. 공도자가 있어야 가난이 해결됩니다. 자력이
양성되어야 가난이 해결 됩니다. 이렇게 무지와 질병과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설명은 이렇게 네 가지로 하지만 실제로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지자가 공도자입니다. 잘 배우는 것은 가르쳐야 진짜 배우는
것입니다. 지자가 자력이 있는 것입니다. 같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 아무리 잘 하는 것 보다 같이 잘해야 합니다.
우리 자식만 좋은 학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밥을 할 때도 밥을
조금 하면 밥이 잘 안됩니다. 콩도 같이 볶아야 잘 볶아집니다.
나만 잘하지 말고 같이 잘하자.
여러분 어느 회사, 교당, 가정, 집단에서 이 사요가 되면 그 사회는
낙원사회입니다. 그런데 지자 본위가 얼마나 됩니까? 우자가 큰소리
빵빵 치고 지자는 숨어버립니다. 공도자 숭배도 네가 하라고 앉혀놓고
밑에서 욕합니다. 자기는 뽑을 때 안 하려고 도망가면서 세워 놓은
사람을 뒤에서 욕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연 한 번씩 시킵니다. 제 스스로 강단에 서 봐야
이 자리가 아무나 서고 그냥 하는 곳인가를 알고 고마움을 느낍니다.
안 해본 사람들이 더 비난 하고 더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자 본위를 누가 하는가? 자기가 치열하게 공부한 사람은 지자본위를
더 잘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공익에 봉사 한 사람이 공도자를 받들 줄
압니다. 이기적으로 산 사람은 공도자 숭배가 안 됩니다. 왜? 안 해보고
할 줄 모르니까 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은 지자를 받들 줄
모릅니다. 우자는 지자가 되기 위해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알까요?
지자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공생한 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자 본위가 안 됩니다.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과를 배워야 악업에서 벗어납니다.
인과를 모르니까 악업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배우지 않아서 모르니까
고마움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다입니다.
대종사님은 사요가 이 사회를 제도하는 것이고, 자기 제도되는 것이고,
이 안에 교법의 원리가 다 들어가있습니다. 지자 안에서도 지자가 여러
가지로 나눔이 있습니다. 도덕의 지자 스승님, 과학의 지자, 상식의 지자,
생활의 지자, 정사의 지자, 삼대력의 지자, 인사 덕행의 지자.
다 나뉩니다. 자타력 병진, 이사병행, 이 안에 영육쌍전이 들어가
있습니다. 도학•과학 병진이 들어 있습니다. 이 안에 교법의 원리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이 사요를 공부하면서 대종사님께 탄복을 했습니다.
‘야 우리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사요를 체계적으로 내놓으셨구나.
역시 성자시구나.’
그럼 지자 구분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우자가 있고 지자가 있습니다. 지자에서도 나뉩니다. 도학의 지자,
과학의 지자. 생활의 지자. 상식의 지자. 그런데 도학에서도 법위에
따라서 나뉩니다. 항마위•출가위•여래위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자가 있고,
성자 중에서도 주세불이 있습니다. 진짜 지자는 도덕의 지자인
주세불입니다. 이 분을 핵심으로 잡고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자본위는 사회사람들이 볼 때는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교수님께 잘해야겠구나’, ‘장관이 똘똘하면 거기다 잘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는데 훨씬 넘어서서 성자들이 있습니다.
과학 분야의 지자가 인과와 영생에 대해서 아시겠어요? 잘 모릅니다.
그 분은 과학 분야의 지자일 뿐입니다. 과학자이면서 인과와 영생을
믿거나 깨쳤다면 정말로 도학과 과학을 병행 한 지자입니다.
도학•과학을 병행해서 원불교의 삼대력을 갖춘 그런 분을 우리가 지자로
삼고 그 구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가 지자로 삼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자인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우자 인 사람 손 들어보세요.
예.. 제 말에 넘어간 사람이 있군요.
지자와 우자는 원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또 있습니다.
원래는 없는데 분명히 지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참 희한합니다.
무찔렀습니다. 분명히 지자입니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지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자와 우자는
교육을 통해서 나오고 또, 변화합니다. 본래 지자와 우자는 없는데
분명히 현실 속에서는 지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지자 우자가 본래 없으면서 어떤 분야에서는 지자고 어떤 분야에서는
우자이다. 그리고 현재는 우자지만 지자가 될 수 있고, 현재 지자지만
우자가 될 수 있다. 강급하면 우자입니다. 배우는 것을 멈추면 강급하게
됩니다.
순류문 順流門
역류문 逆流門
죄 지을 때는 순류문, 순하게 같이 흘러갑니다. 죄 지을 때는 대단히
편합니다. 복 지을 때는 역류문이라. 공부할 때도 역류문입니다.
정말 진급은 그렇게 어려울까? 강급은 한 순간인데..
사람이 용두사미가 되면 안 되요. 큰소리 치다가 어느새 꼬리 내리고
뱀꼬리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배움이 중간에 끊긴 것입니다. 마음이
죽어버렸다. 즉, 무념이 가득 차다. 지자본위는 어느 한때 젊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하는 것입니다, 노소를 떠나서 계속 하는 것이다.
왜? 우리의 육신은 계속 편한 걸 요구합니다. 육신은 쓴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단 것만 원합니다. 육신은 계속 즐거움만 쫓아갑니다. 불편한
것 싫어합니다. 여기서 공양으로 사과를 나눠주면 막 받으러 옵니다.
반대로 사과를 공양하라고 하면 다 도망갑니다.
한 때 아무리 잘해도 배움이 멈추면 강급해 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은 90%가 배움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과거와 좀
다릅니다. 과거에는 공간이 작고 정적인 시대고 어두운 시대잖아요.
그래서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번 배운 것 조금씩
가르쳐주면서 일생 풀어 먹어도 됩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들어가면
더 많은 정보가 나옵니다.
정적인 시대요. 어두운 시대라. 그렇게 뭐 통신이 발달되고 지역적으로
넓게 활동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책만 하나 주고 풀어먹어도 선생 하면 되죠.
과거에는 이 정시 공부, 즉 서당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 정시를 통해 배운 것을 일생 써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시대이기 때문에 동정을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꼭 어디 가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에 앉아서
스승님을 모시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대상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 어떤 동학의 제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식을 넓히오리까?’
‘나는 당신을 만나서 동학을 배우고 있다.’ 라고 답했습니다.
대종사님이야 말로, 서당을 제대로 다녔습니까? 사서삼경을 배웠습니까?
무식한 양반입니다. 정산종사님은 문장이 수려합니다. 게송을 보세요
기가막힙니다. ‘한울안 한이치..’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대종사님은
정시 공부를 제대로 안 했을 뿐이지 동시 공부를 기가 막히게 하신
분입니다. 일동일정을 전부 공부 삼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배워서
이치를 꿰뚫어 버린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지도자를 뽑는데 인사팀이 힘들어 합니다. 토익 점수는
되는데 정작 영어는 못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영어회화테스트로
제도를 바꿉니다. 마찬가지로 점수는 잘 받았는데 인간성이 안 좋거나
안 할 소리를 하고 다니거나 서로 이간질 시킵니다. 이런 것들은 처음에
면접할 때 알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더 중요한 응용력과 직관력을
테스트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기간직을 쓰지만 내가 회사 사장이라면 기간직
씁니다. 뭐 하러 정규직 뽑습니까? 기간직을 써서 정말 이 사람이
인격적으로 지자 본위를 하는 배우는 사람인가? 직관력과 유연성이
있는가? 순간 순간 배우려는 마음이 있는가? 앞으로 클 사람인가를 봐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학벌보고 점수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각각인 것 같습니다.
저도 교무를 하고 있습니다만, 학벌 좋은 교무님이 교화를 잘 할 것
같죠? 평균을 따지면 묘하게 반대입니다. 학벌 좋은 교무님은 오히려
교화를 잘 못 합니다. 저는 그것에서 느낀 것은 교화는 종합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성도 있어야 하고, 따뜻함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있어야
하고, 서원도 있어야 합니다, 아까 학벌하고는 관계없는 그것이
있습니다.
지자본위, 배움이라 하는 것은 정말로 다양한 것 같습니다. 저도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T.V에서 저에게 나오라고 합니다.
안 나간다고 했습니다. 언어도 거칠고 실력도 없고 박사 학위 있는 것도
아니고 두렵기도 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사은의 은혜를 밝혀준
주세불이고 우리의 법이 이 세상이 발전 할수록 더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동정간에 밝혀 놓은 수행의 방법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너는 얼마나 실행적으로 잘 하느냐?’ 라고 물으면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그 사람이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현재
그 사람이 학벌이 있느냐? 없느냐? 현재 그 사람이 원불교를 얼마나
다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배우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느냐? 극진한가? 저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필요 없습니다. 핑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 뒤에 앉아계시는
탔는데. 제가
서있지도 못하는데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교무님 나 아파서 공부방에 못 가’ 천명이면 열 명 정도 빼고 다
그 핑계 댈 것입니다. 저 정도 아프면 다 핑계 댑니다. 그래도 악착
같이 오십니다. 세상에 아침 새벽에 교당에 와서 서 있지도 못하면서
헌배한다고 하고 선 한다고 앉아 있습니다.
되셨는데 내생에 정말 큰 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보는 사람 아니에요? 지금 현재 뭐가 부족하고 조금 약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극진한 배움의 마음이 있다면 달라질 것이다. 학벌, 인물,
재산 필요 없습니다. 정말 배울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력이 양성
될 것이고 그 사람은 공도자가 되어서 어디서나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배움에는 과학적인 기능과 기술을 배우는 것과 함께 도학과 인간 교육,
마음 교육, 심성 교육이 같이 병행 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과학 분야의 교육이 잘 이뤄지는 것 같은데 도학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당은 평생 교육장이요 평생 학습장인
것입니다.
아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다시 반복 반복해서 몸이
바뀌더라도 즉, 죽어서라도 그것이 저신(貯身) 저골(貯骨)이 되어서
배움이 습관화되고 지혜가 무의식 세계까지 밝혀진다면 그 사람은
내생에도 무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생에 제대로 배워서 깨쳐보세요.
그러면 내생도 빨리 깨칩니다.
육조 대사는 체격이 조그만 하고 무식하고 못생겼고 시골의 촌놈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한 마디를 듣고 탁
깨쳤습니다. 그것은 전생에 수양을 했던 사람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육조 대사는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에디슨도
전생에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생에 터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못 배웠다고 때를 놓쳤다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원불교야 말로 지혜를 가장 밝힐 수 있습니다. 지혜는 지식을
포함합니다. 지식은 채우는 것입니다. 지혜는 채우면서 밝히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궁무진한 응용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어는 한 분야에만 밝습니다. 전자 분야의 박사는 전자 분야만
압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는 제대로 깨쳐서 원리를 알아서 저신
저골이 돼서 무의식 세계까지 저장이 되면, 내생에는 정말로 잘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공도자로서 확실한 자력을 양성해서 스스로 사은에
보은하고 이 대사회에, 인류에 불공 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지자본위입니다.
자 원문 보겠습니다.
1. 지자본위의 강령.
본위라는 말은 지자를 선도한다는 말입니다, 즉, 지자가 끌고 간다.
지자가 존경을 받는다. 지자가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 지자가 가르친다.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자 본위를 따지면 평등을 따집니다.
‘교무님 저 사람이나 나나 같은 인간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종사님은 지자와 우자는 평등하지 않으니 철저히
차별하라 했습니다.
우자가 지자의 자리에 앉고 사장을 하고 임원을 차지하고 간부를 하고
단장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평등이고 죄악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나이도 떠나고, 돈과 인물을 떠나서 그 사람이 그 분야에
지자라면 그 사람이 앞서서 끌고 가야 한다.
정산종사님은 18세에 대종사님을 만나서 중앙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당시에 8인 제자는 정산종사님보다 먼저 방언 공사하고 금주금연하고
저축조합 하면서 고생하셨습니다. 정산종사님은 나이도 제일 어리고
고생 제일 안 했습니다. 가장 멀리 경산도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대종사님은 정산종사님을 지자 본위에 앉히셨습니다. 우리 삼산
선생님이 출가해서 총부에 처음 오자마자 바로 부장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주위에서 시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다고 부장자리에 앉히십니까?’
대종사님께서는 ‘겪어봐라, 겪어보면 알 것이다.
평등이 좋은 것 같지만 지자와 우자는 차별이 평등입니다. 그래서
우자는 나이를 떠나서 지자를 받들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도
깨치면 조실 자리를 차지 합니다. 정강 선생님은 28살에 조실에
앉혔습니다. 28살에 조실 스님이었습니다. 나이 훨씬 많은 스님들이
그 분을 조실 스님으로 스승으로 받들었습니다. 그것이 지자 본위입니다.
원불교 지혜의 세계에는 나이 필요 없는 거예요. 마음 공부하고 정기
훈련 나는 데 나이가 무슨 필요 있어요? 체력과 피부탄력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혜엔 차이가 없습니다.
[ 지자는 우자를 가르치고 우자는 지자에게 배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당연한 일이니, ]
원칙적으로 당연합니까? 평등을 주장하십니까?
[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
이것은 어떠한 차별이 있든지 그 말입니다.
[ 배울 것을 구할 때에는 불합리한 차별에 끌릴 것이 아니라 ]
이 소리는 불합리한 차별이 있더라도 그것을 따져서 배우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라.
대종사님께서는 옹기장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옹기 장수는 옹기를 지고 장에 오고 지게 장수는 지게를 지고 장에
왔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반대로 옹기 장수를 지게를 지고 지게 장수는
옹기를 지고 갑니다. 그러면서 그 밑에 법문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옹기 사러 장에 갔다가 옹기 장수가 건방지다고 그냥
빈 손으로 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시장에 옹기 장수가
예의가 바른지 아닌지 시험하러 왔습니까? 지게 장수가 인물이 좋은지
안 좋은지 그것 보러 왔어요? 옹기 사러 갔으면 옹기 장수가 기분
나쁘게 하든 말든 옹기만 사오면 됩니다. 기분 나쁘게 한 그 옹기
장수는 장사가 안 될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내 것만 사오면 됩니다.
[ 오직 구하는 사람의 목적만 당하자는 것이니라. ]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학생이 저한테 그래요. 교수님이 기분
나쁘다고 교수님 욕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 분야에 대해서 교수보다 잘 아느냐?’
아무리 못난 교수라도 너 보단 그 분야에 낫다.
박사 아무나 따는 것 아니다. 교수 아무나 되는 것 아니다.’
오직 구하는 사람의 목적을 구하는 것이다. 원불교에 뭐 하러 왔습니까?
대우 받으러 왔습니까? 아까 옹기 장수에게 성질 내고 그냥 간 사람은
대우 받으러 장에 온 것입니다. 실속 있는 사람은 옹기만 사오면 됩니다.
왜? 대우 받으려고 해요? 대우는 해 주면 좋고 안 해주면 마는 것입니다.
실속 있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오직 구하는 사람의 목적만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쓰면 틀린 답이죠. 그러나
이것은 정답입니다. 그만큼 강조하셨습니다.
과거 불합리한 차별제도의 조목입니다. 지우 차별은 합리적 차별이다.
그런데 다섯 가지의 불합리한 차별이 있다. 한국 조선사회를 보고
내놓으신 게 많습니다.
첫 번째 반상의 차별이다. 그때는 양반 상놈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멍청해도 양반이라고 윗자리를 차지하고 똘똘해도 서자라고 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반상의 차별은 유교에서 왜 했느냐? 공신전이라고 유공인을
양반으로 한 것입니다. 국가를 세울 때 유공인들은 양반이 되고
공신전이라는 논이나 밭을 받고 지위가 올라 가고 전쟁의 포로나 공이
없는 사람들은 낮은 계급으로 된 것입니다. 분명히 차별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내려오면서 계급이 형성 되어서 양반 상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지우 차별은 합리다.
그러나 반상의 차별은 불합리다.
여러분 돈 내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통과 안 되었죠? 그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자 본위와 안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죠. 돈을
내면 그 돈으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 더 뽑아서 가르치면 괜찮지 않냐?
아주 자본주의적 사고입니다. 불합리한 차별이죠. 실력도 없는데 왜?
대학에 입학해? 돈 있다고? 이건 아니다.
두 번째는 적서의 차별입니다. 적서에 왜 차별을 두었을까요?
두 살림하지 마란 소리입니다. 두 살림하면 너희 자식은 차별한다
그 소리입니다. 국가를 세우기 위한 유교적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원적 차별이 된 것이다. 이것이 불합리한 차별이다.
세 번째는 노소의 차별이다. 이것은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경험이 많고 살아온 인품에 대해 존경하라는 것인데 반대로 차별이 된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한 차별이다.
그다음, 노소의 차별이죠. 이건 왜 둔거죠? 노인을 공경하라, 경험이
축적되고 살아왔던 고생 인품 존경하라는 것인데 반대로 차별이 된다.
불합리한 차별이다. 노소의 차별이란 연조로 말 할 수 있다. 연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지우가 더 중요하지 연조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당에 보면 법위가 빨리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법강항마위를
수여 하고 나면 꼭 탈이 일어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먼저 왔는데 저 사람에게 왜 법호를 주느냐?
저 사람에게 왜 항마위를 주느냐?’ 하면서 꼴아 있습니다.
지우 차별입니다. 우자는 못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점수가 낮은 우자가
대학 들어가는 것 봤습니까? 점수 낮으면 대학 떨어지는 것과 똑
같습니다. 진급을 할 때 공덕이 적으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불합리한 차별입니다.
남녀의 차별, 원래 남녀는 성격이 다른 것을 구분 하는 것인데 오히려
여자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기업에서는 여자의 급여가 남자보다
반이 적답니다. 아니죠. 애경 같은 회사를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지금 경원대학교 인수하신 분입니다.
이길녀 여사인데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우리나라의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어떻게 남녀를 차별합니까?
종족의 차별. 제가 인도를 가니까 세상에 죽었어도 끝까지 차별해요.
자기들끼리는 서로의 신분을 압니다. 브라만인지 천민인지
불가촉천민인지.. 이처럼 종족의 차별을 둘 것이 아니라 지우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설사 종족이 낮더라도 지자면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 여자 수상이 있는데 그 분은 불가촉천민
출신입니다. 제가 그 말 듣고 놀랬습니다.
그 다음은 지자본위의 조목입니다.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박사 따거나 돈이 많거나 정치적인 권력이 있으면 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솔성의 도와 인사의 덕행이라 했습니다. 솔성의 도는
삼학공부를 말합니다. 인사의 덕행은 우리 사은사요를 실행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솔성의 도는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이고, 인사덕행은
대타 관리를 잘 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성의 도가 있는 사람은
빈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인사의 덕행 있는 사람은 공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자기 이상이 되고 보면 스승으로 알아라.
스승이라고 아십니까?
‘어허 우리 아들뻘이여, 딸 뻘이야’ 이러면 안 됩니다.
‘어허. 여자가 단상에 섰네.’ 이러면 안됩니다.
저기 안동 교당에 여자 교무님이 가면 힘듭니다.
남자 교도가 ‘어허.. 어허.. 여자가 어디 나서서 뭔 소리야..’
그런다고 합니다. 남녀 필요 없습니다. 솔서의 도와 인사의 덕행이
나보다 나으면 스승이다.
둘째, 모든 정사, 정사는 정치뿐 아니라 일을 하는걸 말합니다. 일하는
것이 자기 이상이고 보면 스승으로 알아라. 참, 우리 주무님 보세요.
얼마나 일에 밝은지 내가 스승으로 압니다. 내가 책임자로써 권한은
나한테 있지만, 어떤 분야는 그분에게 다 맡기고 오히려 내가
물어봅니다. 그것이 맞죠? 스승으로 알아야죠. 구하는데 따라
스승입니다.
셋째, 생활에 대한 지식, 우리 주무님이 감자 튀긴 것 보면 기가
막힙니다. 차 만들고 뭐 하는 거 보면 그 안에 이치가 있습니다.
그 생활에 자기 이상이 되고 보면 스승으로 알아라, 이것은 동시
공부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정시 공부가 아니라, 생활 요소
요소에서 무엇이든지 국을 잘 끓이면 물어봐라, 차를 잘 고치면
물어봐라. 디자인을 잘하면 그것도 물어봐라, 컴퓨터를 잘하면 물어봐라,
생활 속에서 어떤 것이든지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무님 설거지 하는 거 보면 보통 사람보다 다섯 배는 빨라요.
그래서 제가 더러운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생활에 대한 스승님입니다.
여기서 지자본위는 제발 물어보라는 것이다.
우리 좌산종사님께서는 정산종사님께 얼마나 물어 보았는지 주위
사람들이 ‘니가 정산종사님 전세 냈냐?’ 그랬답니다. 참, 물어봐야지..
교당에서 일반법회 끝나면 물어보라고 하는데 조용합니다.
한 번도 안 물어봅니다. 겨우 몇 분만 물어봅니다.
자. 왜 못 물어보죠? 불치하문不恥下問 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자는 아랫사람에게도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자는 그래요.
옛날에 둔촌동에 저의 고모집이 있었어요. 그때 당시 서울대 법대
다니다가 때려 치고 서울대 공대를 간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조카들
가르치려고 거기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재수할 때인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나는 모르면 무조건 묻는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 친구는 한 번도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는데 모르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도 묻는답니다. 그러니까 일등이지.
그럼 왜 묻지 않느냐? 누가 한 번 말씀해보세요. 왜 안 물어봅니까?
자존심? 창피하니까? 어둠이 드러나니까? 혹시 잘난척한다고 누가 시비
할 까봐? 한국에서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외국 학생이 우리 대학에
교환학생에 와서 놀랐답니다. 왜 질문을 안 하나? 이상하다는 겁니다.
왜 질문하지 않느냐?
대종사님 당대에도 문답시간이 있었습니다.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에도
교당에 오고 보면 지도인에게 문답하라고 했습니다. 왜 모르면서 아는
척 하냐? 왜 모르면서 그냥 지나가냐? 물어봐라. 생활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학문과 기술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상식에 대한 것도 물어봐라.
운전을 잘 할 사람은 운전 면허를 따기 전에 알아요. 벌써 운전하는
사람 쳐다 봅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운전 잘 할 수
있습니다. 멍하게 앉아 있으면서 기능도 모르고 길도 모르면서 난
천부적으로 운전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없고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 이상의 모든 조목에 해당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차별이 있게 할
것이 아니라, 구하는 때에 있어서 하자는 것이니라. ]
근본적인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은 평등이다.
다 일원상이다. 그런데 구하는 데 따라서는 평등이 아니라 스승 삼자.
분명히 그렇게 하자.
우리 교당을 놓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자가 숨게 만들면 안됩니다. 지자가 박수 받게 해야 합니다.
어느 교당에 교회를 다니다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교도들이
‘뭐 하러 유지비를 그렇게 많이 내. 조금만 내.’ 그러더랍니다.
그 사람은 교회 다닐 때처럼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많이
내니까 다른 사람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못 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당에 열심히 하니까 뭐 하려 열심히 하냐? 살살해라.
이것은 지자 본위가 아닙니다. 같이 우자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따라
갈지언정 내가 고맙다고 할지언정 내가 박수 쳐줄지언정 끌어내립니다.
이것은 지자 본위와 역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지자를 모른 척 해도
그것도 무념입니다. 박수 쳐줘야 합니다.
좀 전에 원허 교우님이 강연을 했으면 속으로만 애썼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만나면 때로는 찾아가서 ‘오늘 잘 들었네.’ 그것이 지자
본위입니다. 고마움의 표시이고 이것이 보은입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참 희한한 집단입니다.
까페에다 글 썼는데 아무 리플이 없습니다.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보세요. 글을 썼는데 누가 리플을 달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자기도 리플을 달아주지. 싹 씻어버립니다. 그 안에 철저한 인과가
있습니다. 리플 단 사람은 박수를 받습니다. 보은의 행위가 됩니다.
나중에 상을 받습니다. 그 사람 생일 때는 리플이 쫙 달립니다.
자. 대중이 함께 지자본위를 해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법대생이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교무님, 민주주의가 지자
본위와 배치되는 면이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질문
이었습니다. 지자는 지자를 알아봅니다. 우자는 지자를 잘 몰라봅니다.
그래서 우자가 우자를 지도자로 뽑습니다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것으로써
뽑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타자녀 교육을 해야 한다. 즉, 대중이
우자면 지자를 뽑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중은 이 사람을 지자로
원하는데 진짜 지자는 다른 사람을 원합니다. 대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처처불상이니까 대중을 따라야 합니까? 천만에 말씀, 아무리
처처불상이라고 해도 지자가 뽑은 지자가 지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잘 조화롭게 해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으면 지자가 외롭습니다. 지자가 비난 받습니다. 지자가
숨게 만듭니다. 옛날 이조 시대 때에 지자들 다 귀양 보냈습니다.
다 사약 내렸습니다. 한강의 밤섬이 옛날에 똑똑한 사람들 귀향 보내는
곳이었습니다. 더 한 사람들은 보길도나 강진, 제주도로 보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지자본위를 내놓는 것은 지자를 선도자로 임원으로 뽑으라.
돌아가며 하자는 소리 마세요. 그 사람이 커지면 그 자리에 가면 됩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가능성을 보고 뽑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이를 떠나서 핑계대지 말고..
배울 때는 정말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질화가
되면 좋겠어요. 나는 잘하는 것 하나도 없다. 단, 내가 배우려는 정성은
있다. 저는 그것이 지자 본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진급하고 반드시 기쁨이 있을 것이며 반드시 나중에
큰 일을 할 것이며 영생을 행복자로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는 자는 죄악을 짓기 쉽고 시기하기 쉽고 비난하기
쉽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엄청나게 피해를 줍니다.
자 질문해주십시오.
n 질문 과 답변 =========================================
Q_박원허: 지자 본위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동기로 타자녀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지요?
A_교무님: 할 수 있다. 말 잘 들으면 된다. 신심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신심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신심은 말 잘 듣는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이 지자본위를 잘 몰라도, 타자녀 교육도 몰라도. 그러나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지은 대로 돌아간다.
사실 우리 중생들 알고 복 짓는 사람 없어요. 몇 % 안 되요. 잘 몰라요.
그러나 지으라고 시키니까 합니다. 그 복이 큽니다. 늦게 알고 나서
하면 늦습니다. 자존심 높은 사람들이 그래서 늦는 것입니다. 고집 있는
사람들이 늦습니다. 자기가 알고 나면 하겠다는 사람들은 결국
후회합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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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종원교우님 제가 더 고맙습니다. ^^
항상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더욱 힘내겠습니다. ^^
우다방 ㅎㅎㅎ 센스있는 편집자님~ 감사합니다 ^^
우다방을 아시는 군요 ㅋㅋㅋ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ㅅ-ㅅ*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