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증오, 분노 - 1
어깨에 상처를 입은 채 11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던 허열이 백수웅을 없애 버리겠다며 다시 뛰쳐나갔고,
노옥진은 넋잃은 사람처럼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미국으로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백수웅 증발 소식을 1년이나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미국서 1년간의 신혼 생활이 건조했던 것이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기 미라에게 무서운 집념을 갖기 시작했다.
미라에 대한 광적인 집착만이 그녀의 외로운 영혼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돌파구였으며,
그것만이 백수웅을 잊게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때로는 백수웅에 대한 죄책감에 떨어 대기도 했지만,
그런 아프디아픈 기억도 그녀의 뇌리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미라는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고 있고, 남편 허열도 미라에게만은 있는 정 없는 정 모두 쏟아부었다.
허열과의 애정은 끝내 결합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마치 두 줄의 철로처럼 마주 보며 끝없이 살아가야만 했다.
이런 평행선 같은 균형이 깨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수웅의 느닷없는 출현 때문이었다.
"백수웅?"
그녀는 백수웅이 과연 옛날의 그였는가를 자문하고 있었다.
'남편이 제거하려는 테러리스트가 옛날 나의 전부였던 백수웅이라니
도대체 하늘은 나를 가운데 놓고 어쩌자는 거야.'
2층 서재에서 미라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노옥진은 자신의 운명적인 불행을 한없이 슬퍼했다.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던 백수웅 출현 소식을 들은 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녀는 침대에 누운채 도무지 일어날 기력을 차리지 못했다.
허열은 그 동안 두 번 정도 들렀다.
그러나 내의를 갈아 입고 미라를 안아 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었다.
가정부만이 안타깝게 노옥진의 건강을 보살펴 주었지만, 그것이 위안이 될 일도 아니었다.
백수웅, 허열, 아버지 노범호의 얼굴과 이름이 어지럽게 머리를 헤집고 다녔지만,
딱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걸레처럼 해졌고, 영혼은 아득한 나락으로 한없이 굴러 떨어져 가고 있었다.
오늘도 미라는 2층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상념에 빠져 있던 노옥진의 머리는 미라의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미라가 있어. 내게는 미라가 있어. 일어나야지. 뭔가를 해야 돼,
더 이상 내가 파괴되어서는 안 돼. 이제는 쓰러지지 않아.'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지러움증에 잠시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 입고, 화장을 하고, 가정부를 불러 이것저것 잔일을 시켰고. 운전 기사를 대기시켜 놓았다.
노옥진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2층 미라에게로 올라갔다.
"엄마!"
미라는 엄마를 보자, 벌떡 일어나 품에 덥석 안겼다.
"인제 안 아파?"
"그럼, 다 나았어. 미라야, 외할아버지 댁에 다녀올게, 아줌마말씀 잘 듣고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걱정 마. 엄마나 조심해서 다녀와!"
똘망똘망하고 예쁘고 영리한 아이였다. 내 자식이라는 편견 때문이 아니라,
일곱 살 아이로는 징그러울 만큼 총명했다.
미라를 남겨 두고 삼선동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젠 따져 볼 것이다. 모든 걸 체념하고 잊고 버티며 살아 왔지만,
도대체 백수웅이 왜 서울서 갑자기 증발되었는지,
또 어떻게해서 일본에서 테러리스트가 되어 돌아왔는지,
왜 대통령과 아버지가 테러의 목표인지(노옥진은 남편의 말대로 테러의 목표가
대통령과 아버지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또 왜 하필이면 남편을 체포 책임자로
임명했는지를 따져 볼 것이다.
만일 아버지에게서조차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한다면, 자신이 직접 백수웅을 찾아볼 작정이다.
'이것저것 안 되면 내가 직접 찾아 나설 거야. 그리고 백수웅을 만나 용서를 구할 거야.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니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빌 거야, 떠나 달라고.
아버지도 나도 남편도 모두 용서하고 떠나라고, 떠나 떠나라고 '
울컥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떠나 달라고 말하려 하다니 백수웅은 , 나 때문에 그 고통을 다 당했는데'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멈추어 주지 않았다.
자동차는 어느새 삼선동 아버지의 대저택 앞에 멈추었다.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노범호는 이 날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방 시찰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휴전선 가까이 있는 O O 이 사단 '필승 부대'를 방문해 전방을 시찰하고
오찬과 브리핑을 받은 뒤 두 시간 동안 CPX 작전 훈련을 참관토록 스케줄이 짜여져 있었다.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육군본부 고급 참모 몇몇을 대동한 채 헬기로 전방을 향해 떠났고,
노범호는 잔무를 마친 뒤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주력 사업체인 한국 건설은 확장 일로에 있고,
몇 개의 군수품 공장은 월남전을 치르는 동안 엄청난 돈을 벌어 주어 한국 물산은 가히
국제적인 기업으로 착실히 기반을 닦아 나가고 있었다.
삼성 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에게 많은 사업 지원을 해 주었고,
이들은 노범호의 한국 물산을 마치 자신 사업체처럼 알뜰히 보살펴 주고,
자신이 청와대로 들어온 뒤에도 산하의 각 기업체들은 매끄럽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최고의 건설업체인 현대 그룹과의 마찰을 피해 도로 건설이나 대형 기업 빌딩은 현대에게 양보했고,
자신은 항만 건설, 공항 확장, 정부 청사 건설 등을 말아 왔다. 3차 산업인 관광업에도 관심을 표해 왔지만,
그건 이후락 정보부장이 반대했다.
오후에는 대한 항공의 조중훈 회장과 커피 타임을 갖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조중훈 회장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건 국제 관광 공사 소속 워커힐 민영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를 일반 기업체에 불하하기로 결재가 났는데,
그가 끈질기게 인수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커힐은 끝내 대한 항공이 소유하지 못했다.
섬유 사업으로 급부상한 새 실력가 최종건(崔鍾健) 회장에게 넘기기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미도파 옆의 KAL 호텔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노하우의 이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워커힐을 빼앗긴 조 회장은 몹시 섭섭하게 생각했다,
노범호는 조 회장에게 제주도에 KAL 호텔 신축을 적극 추천하고 있었다.
"지금 제주도에 자리잡아 놓으면 5-6년 내에 틀림없이 레저붐이 일어
크게 이익을 볼 것이다." 라고 전망한 것이다.
사업과 경제에는 귀신 갈은 노범호였기 때문에 조 회장은 기꺼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오늘 커피나 마시며 사업 이야기나 하자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이 딸 옥진이 때문에 깨져 버렸다.
세상 없어도 오후에 서너 시간 만나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이었다, 말투가 너무나 차가워 섬뜩한 기분이 들어
조 회장과의 커피 타임 약속을 일요일로 미루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섬뜩한 기분과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된 것은 백수웅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위 허열이 옥진이에게 말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급한 일이 생기면 삼선동 자택으로 연락하라는 지시를 비서들에게 남기고 청와대를 빠져나왔다.
열흘 넘게 집을 비운 채 백수웅 뒤를 쫓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옥진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 상황을 옥진이가 모두 알아 버렸다면 다소 난감한 마음이었다.
설명해 줄 수도, 그렇다고 입 다물고 버틸 수도 없다,
어릴 때처럼 매로 다스릴 나이도 이젠 아니다.
청와대 정문을 벗어난 검은색 시보레 대형 승용차는 한국일보사앞을 지나 원남동 로터리,
창경원을 거쳐 삼선동 자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집에 이르는 동안 노범호는 내내 사위인 허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동안 도쿄에 있는 CIA 극동 책임자인 브라운 대령으로부터 두 차례나 연락이 왔었다.
"절대 백수웅을 과소 평가하지 말아라.
만일 그 어리석은 사내의 생각대로 박성철, 이후락이 서울에서 테러를 당한다면,
이것은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미.소 문제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전쟁 아니면 엄청난 정치적인 손실을 감당해야할 것이다." 라는 충고였다.
브라운이 처음 서울에 나타나 백수웅의 테러 공작 정보를 제공 했을 때는
백수웅은 이미 죽은 인물이라며 일축해 버렸지만, 브라운은 여러 가지 자료와 정보를 보내 주었고,
끝내 노범호도 '백수웅의 국내 잠입"을 시인하게 된 것이다.
노범호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면 오직 백수웅 문제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노범호는 허열을 믿고 있었다. 또 허열을 믿지 않을수도 없었다.
허열은 반드시 백수웅을 제거할 것이며, 회담은 남북 쌍방이 원하는 대로 원만히 끝날 것이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통령과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누누이 강조해 왔다.
까짓 애숭이 사내 하나 없애는 데 무슨 큰 어려움이 있겠느냐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모험이었고 노범호의 도박이었다.
생각대로 허열이 백수웅을 무난히 제거시켜 준다면,
노범호는 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라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려갈 것이다.
물론 허열에게는 목숨이 달린 투자였지만, 또 그만한 위험쯤 이겨 내지 못하고,
그만한 위기쯤 관리하지 못한다면 장래를 어떻게 설계할 수 있겠느냐는 치밀한 계산도 생각한 것이다.
그 동안의 보고에 따르면, 녀석이 어찌나 신출귀목하는지 애로가 한두 가지 아니지만,
이미 녀석은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고, 체포나 사살은 시간 문제일 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밝은 전망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엉뚱한 데서 터진 것이다. 딸 옥진이의 말투 나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알아 버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노범호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진 것이다.
자동차가 멈추어 서고 집으로 들어서기까지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으나,
거실로 들어선 노범호는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 아이를 이겨 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투쟁심이 꿈틀대며 살아 오르기 시작했다.
"바쁜 아버지를 왜 오라가라 야단이야!"
고함을 지르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시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다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바쁘다면 바쁜 줄 알아야지. 내가 어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이냐?
컸으면 철이 좀 들어야지. 돈이 필요하냐?"
"아버지."
의외로 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과정이 신경 과민 때문인가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버지, 꼭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노범호의 시선이 옥진이의 얼굴을 스쳐 갔다. 딸의 얼굴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아버지!' 하고 불러 놓고도 노옥진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노범호는 시거를 입에 문 채 정원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옥진은 주름 투성이인 아버지의 옆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또 다른 슬픔이 몰려왔다.
지난 초여름 병약하시던 어머니가 기어이 돌아가셨고,
이후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사업과 정치에 폴두해 있었지만,
가련해 못 볼 만큼 쓸쓸해 보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친일파'. '매국노'. '재벌 정치가'등이 소위 의식파들이 부르는 아버지의 상징 이름이지만,
노옥진에게는 자랑하고 사랑스럽고 고맙기 그지없는 아버지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술 마시는 날이 더욱 많아진 것도 알고 있고
해서 우이동으로 들어오시라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미가 정붙였던 집인데 여길 떠나? 싫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니고."
"왜 불러 놓고 말이 없냐."
처음의 퉁명스럽던 말투가 다시 다정해졌다. 언제나 그랬다.
금호동 백수웅의 집에 숨어 있다가 돌아왔을 때 머리를 잘라 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난리 피우던 아버지가,
이틀이 지난 뒤에는 노옥진이 좋아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전집으로 사 주었고,
시집을 열 권이나 들여다 놓았다.
허열과 결혼식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사흘이 멀다않고
국제 전화를 걸어 주기도 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
노옥진이 재차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는 가슴이 메어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말하라니까."
"아버지, 저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로 키워 주신 건 잘 알아요. 이런 말 꺼내기도 싫구요.
하지만 오늘은 기어이 알아야 만 할 게 있어요.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 "
"1964년 12월 "
노범호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때 제가 결혼하던 12월 24일, 금호동에서 한 학생이 실종되었어요.
그 때만 해도 저는 그 학생이 스스로 몸을 감춘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잊어버렸죠.
그 사실을 안 것이 제가 미국서 돌아온 1년 뒤의 일이었으니까요. 그 학생을 찾지 않기로 작정을 했었어요."
" "
"제가 그 때 왜 허열 씨와의 결혼을 승낙했는지 아세요? 만일 제가 허열 씨와 결혼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그 학생을 정말 귀신도 모르게 없애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전 백수웅이라는 그 똑똑한 남학생을 사랑했었거든요."
"백수웅"
노범호외 입에서 백수웅의 이름이 고통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백수웅이 그 동안 일본에 있었나 봐요. 그가 돌아왔어요."
노범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노옥진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그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겠대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 사람 손에 죽어서는 안 돼요.
아버지를 죽게 할 수는 없어요.으흐흐 "
마침내 노옥진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버렸다.
엎드려 흐느끼던 노옥진이 머리를 들어 아버지 노범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잔뜩 질려 있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범이 그러더냐?"
노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1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과의 다툼 끝에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가정과 아버지를 지킬 거예요. 그러나 백수웅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어요.
그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어요. 아버지, 말해 주세요.
그 동안 백수웅이 어디서 무얼 하며 살았는지, 또 그의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노범호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도 들려 줄 게 없다. 이 아버지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거라곤 한 마디뿐이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 이번 일은 네가 나설 일이 못 돼
나도 하나 묻자. 너, 지금도 그 아일 사랑하고 있니?"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해요. 하지만 만나 보고 싶어요. 그리고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남편, 나 모두 잊고 돌아가라고요."
"그럼 됐어. 백수웅일은 나와 애비(허열)한데 맡겨."
"죽여선 안 돼요."
"알아. 그러니 집에 돌아가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옥진은 몇 차례나 백수웅의 지난 8년의 과거 발자국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그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 는 말뿐이었다.
노옥진은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무거운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번 박힌 가슴의 못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더해만 갔다.
어떻게든 남편이 백수웅을 사살하거나 백수웅이 아버지나 남편을 살해하는
통한의 비극은 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 그 엄청난 일을 어디서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백수웅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보다도 먼저 찾아내 용서를 빌고 설득하여 돌려보내야 하는데,
그건 정말 노옥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던 그녀에게 며칠 후 새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노옥진을 새로운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다시 남편과 아버지를 의심하도록 충돌질했다.
신문보다도 먼저 보도된 라디오의 서지아 죽음 뉴스였다.
서지아. 그녀는 처음 무심코 들어 넘겼다. 끔찍하게 죽은 채 버려진 시체로 발견된 여인의 죽음이었다.
그의 뇌리에 섬광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서지아 , 서지아. 분명히 기억에 남는 이름이다. 서지아
이름을 몇 번이고 뇌까려 보던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고, 두 손으로 벌떡이는 심장을 눌렀다.
옛날 민속 주점의 그녀 이름이 서지아였다.
백수웅을 짝사랑한다는 무성한 소문을 냈던 그 여인이 서지아였다.
언제던가 그렇지, 풍납동 친구 집에, 그리고 금호동 백수웅 집에 또 그렇게 불쑥 나타났던 여인,
그녀가 서지아였지.
틀림없는 서지아였다. 그녀가 뺑소니차에 치여 뚝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지금 경찰 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보도였다. 노옥진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서지아의 죽음은 노옥진에게 많은 의문을 남겨 주었다.
혹 동명이인(同名異人)은 아닐까. 아니라면, 죽은 그녀가 옛날 무교동 술집 민속 주점의 그 서지아라면,
그것은 우연한 교통 사고의 죽음일까? 백수웅 출현과 그녀의 죽음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도 우연일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동 경찰서 부근에 위치한 경찰 병원으로 달려가 직접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서지아의 얼굴을 보면 어느 정도의 의문은 해소될 것이며, 만일 그녀가 옛날의 그녀라면,
어쩌면 백수웅도 거기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전용 승용차인 신형 포니를 운전 기사도 부르지 않은 채 직접 몰고 거리로 나섰다.
여러 가지 일로 몹시 지치고 흥분 된 상태라 사고를 의식해 조심조심 몰아 마침내 넓은 경찰 병원에 도착했다.
순경이 출입을 제지했지만, 가출한 지 일 주일이나 되는 언니가
소식이 없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찾아왔노라고 거짓말했다.
순경은 노옥진에게 시체 확인을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덮인 천을 들어올렸다. 얼굴은 비교적 깨끗했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흑'하는 느낌이 목으로부터 밀려왔다.
나이는 좀더 들어 보였고, 옛날보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서지아의 얼굴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손이 후들거렸고,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따라온 순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댁의 언니가 맞습니까?"
"아니에요. 언니가 아니에요."
천을 되덮어 놓는 것도 잊은 채 영안실을 뛰쳐나왔다. 또다시 현기증이 머리를 어지렵혔다.
그녀는 병원 콘크리트 벽에 의지한 채 쓰러지려는 몸을 버티고 있었다.
'맞아, 그 민속 주점의 서지아야. 왜 죽었지? 정말 교통 사고인가.'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백수웅이 그녀와 결혼해 버렸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수웅은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자신은 건조한 가정에서 박제된 새처럼 살아가고 있고,
백수웅을 사랑하던 서지아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녀의 의식은 안개 속을 해집는 것처럼 몽롱해 있었다.
한동안 벽에 기댄 채 몸을 지탱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추스르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자지러질 듯 놀라며 벽 모퉁이로 숨어 버렸다.
베이지색 런던포그 바바리를 걸쳐 입은 한 사내가 휘적휘적 영안실을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는데,
그가 바로 남편 허열이었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벽 뒤에 숨어 남편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백수웅,그리고 남펀 모두가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수웅 체포의 책임자가 서지아의 교통 사고에 개입한다는 사실이 그랬고,
시체를 들여다보면서도 마치 그녀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태연한 남편 태도가 그랬다.
표정 하나 없이 서지아의 시체를 둘러본 남편이 병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지만,
노옥진은 그를 미행할 생각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서지아의 죽음은 이미 모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든 백수웅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첫댓글 노범호, 허열 ....정말 용서못할 잔인한 인간들이네요
너무 비참한 인생을 살아온 백수웅 살수 있을까요?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