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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비밀 요 1:14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 오기도 해요. 한국에 있을때는 이 때쯤이면 거의 매일 저녁 교회를 갔습니다. 겨울날씨가 춥잖아요. 난로가 있는데 거의 톱밥 난로였습니다. 성가대만 있으니까 다 피우지는 못하고 성가대 가까이 있는것만 피우니 얼마나 추운지를 몰라요. 그래도 손을 호호 불면서 메시야나 칸타타 연습하는데 그게 12월의 참 큰 기쁨이었습니다. 난로위에는 큰 주전자가 놓였는데 생강차가 막 끊습니다. 쉬는 시간에 호빵하고 같이 먹으면 정말 기가 막혀요. 오늘 성탄찬양예배 연습들 하시죠? 생강차도 없고 호빵도 없지만 연습가운데 성탄을 준비하는 큰 은혜의 기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몇일전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선물가계에 들렸어요. 그런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여진 카드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 였습니다. 대부분이 Happy Holiday였습니다. 사탄의 계교에 사람들이 넘어가는거에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 탄생자체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 제외하고는,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이 날이 무엇때문에 Holiday인지 모르게 될것 같아요. 그저 선물 주고 받고 모여서 먹고 마시고 놀고, 그런 날로 바뀌어 버리는거에요.
믿음좋은 신실한 우리 후손들이 미국의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빨리 되어야겠다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망하고 말아요. 하나님이 기초가 되고 성경이 기초가 된 나라였거든요. 러시아가 망했을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그거였어요. 하나님을 버리니까, 하나님을 떠나니까 망했다는거에요. 여러분 우리 자손들과 미국의 미래를 위하여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탄절의 가징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육신이에요.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오셨어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니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채찍맞고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으심으로……….. 그것 때문에 오신거에요.
이 사실을 깨닫고 가슴에 품고 있다면 성탄의 기쁨,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보통 느끼는 그런 크리스마스의 감정적인 기쁨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감동의 기쁨이 있는것입니다. 감격의 기쁨이 넘치게 되는거에요. 성탄의 기쁨이 그거에요. 그럴때에 크리스마스가 진정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는것이죠. 이번 성탄절이 이런 진정한 기쁨의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데 그날에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그 날을 제정을 했어요. 그리고 이름을 라틴어로 “나탈리스”라고 붙혔습니다. 탄생이란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탄생 하신 기념일을 정한거죠. 그리고 기독교가 전파가 되면서 각 나라들이 자기네 말로 그 이름을 다시 부쳤습니다.
영어에서는 Christmas, 그리스도의 날, 또는 그리스도를 경배함 이런 뜻이에요. 불어는 “노엘” 새로운 소식, 스페인어에서는 탄생이란 뜻의 “나비다드”, 한국에서는 거룩한 탄생이란 “성탄절” 그렇게 붙힌것입니다. 모두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거에요.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탄생의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라고요? Incarnation, 성육신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매” 짦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속에 엄청난 비밀의 역사가 들어 있어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초가 되는 사건이 설명이 되고 있는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요. “우리가 알지 못했을때 이미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으로부터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이 성탄이란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 이 성육신의 사건이 아니라면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마호메트나 석가탄생일 같이 한 성인의 탄생으로 끝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도 의미가 없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지도자가 기득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역사의 한 페이밖에 될 수 없는거에요. 부활도 그래요. 성육신이 없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의 사건으로 밖에 안되는거에요.
그렇다면 당연히 구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도 타 종교와 다를게 아무것도 없게되는거에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그런 저급종교의 하나밖에 될 수가 없었을거에요. 그리고 조금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착하게 살아라. 선을 행하라.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너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코 영원한 구원이 있을 수 없는, 사변적인 종교로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한 여인의 뱃속에서 산고의 아픔을 깨고 탄생하신거에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하여……….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이 그 말이에요. “말씀”이란 단어는 참 복잡한 의미를 안고 있어요.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을 했어요.
이 로고스란 단어는 헬라철학에서 많이 쓰이던 말인데 원뜻이 말, 이성, 논리 이런 뜻을 나타내는 단어 입니다. 학교 다닐때 한번씩은 다 들어 보았을 거에요. 그래서 영어성경은 대문자 W를 쓴 Word로, 우리성경은 말씀으로 번역을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란게 엄청난 논리와 이성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이때 말씀이란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무슨 요술같이 말 한마디 하니까 뚝딱 생기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모든 우주 만물, 시간과 공간, 그 실제와 원리 법칙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움직이게 하신다는 말이에요. 과학이란게 그것을 눈꼽만큼이나마 밝혀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엄청난 논리, 하나님의 엄청난 이성, 그 것의 결정체가 Logos말씀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어요.
구약에서 말하는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에요. 구약성경에는 “다바르”라고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이 말은Logos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구약 곳곳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가라사대는 말씀하시되 라는 말이죠? 그 말을 히브리인들이 이해 할때에는요, 단순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음성적인 말로만 여긴게 아니에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신 엘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실제로 여긴거에요.
또 다른 의미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마치 신학교 박사과정 강의 같은데 저는 우리교회 식구들이 이 정도 수준은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부를때 망령되이 그 이름을 부르게 될까봐 다른 이름으로 불렀어요.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란 말을 썼어요.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란 말을 차마 못하고 “다바르” 말씀이라고도 했던거에요. 그래서 이 Logos란 단어도 마찬가지에요. 그 속에 말이란 뜻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로 쓰일때는 마찬가지로 이런 뉘앙스, “하나님”이란 의미가 같이 실려 있는거에요.
결국 종합헤 보면 말씀이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의 본체중 한분이시고,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는 이성과 논리의 본체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인것입니다. 또 실제로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데 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구약은 오실 예수님,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잖아요. 말씀이 예수인거에요.
여러분, 이렇게 살펴 보니까 “말씀”이란 의미가 좀더 새롭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산다는 의미도 달라지는거에요. 포괄적이고 우주적이고 그러면서도 아주 실제적인것입니다. 이 말씀의 충만함이 여러분 속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어요.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란 이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신거에요. 여러분 왜 그러셔야만 했습니까?
전도폭발 공부하신 분들은 다 들어보셨어요. 성육신에 관하여 이런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어느 추운겨울 날입니다. 한 과학자가 창 밖을 보니 참새 한 마리가 추위에 오돌 오돌 떨고 있습니다. 금방 얼어 죽을것 같아요. 그래서 문을 열고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오게할려고 합니다. 살릴려는 거죠. 그런데 그만 새가 날라가 버리고 말아요. 너무추워 날개짓도 잘 못합니다. 멀리도 못가요. 그냥 두면 죽을 수 밖에 없어요. 너무나 가슴이 안타깝습니다. 너는 그냥 그렇게 있으면 죽는다 내 손을 붇들어라 여기로 들어오너라 말하고 싶은데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새가 될 수만 있다면……
여러분 이 과학자는 새가 될 수가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왜요? 그 길 밖에는 인간을 구원 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 길외에는 인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벽을 깨트리셨어요.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성탄을 Break-In으로 표현합니다.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 오셨다는 거에요. 우리에게 손 내미시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을 깨트리시고 친히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구원 받을려면 죄가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괴 빛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죄있는 채로는 그분과 함게 거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티끝만치도 죄가 없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구원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것입니다.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나니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결국 누가 그 죄짐을 대신해서 져야만 합니다. 죄의 삵은 사망이기에 죄없는 누군가가 죽음으로서 대신 죄값을 치루어야만 하는거에요.
하나님의 해결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죄 없으신 성자 예수님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거에요. 육신을 입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 죄값을 대신 치르게 게획하신거에요. 죄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결국 죄가 없으신 하나님만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시면서 이는“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할 자다” 말씀 하신거에요.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 이름을 구주로 영접하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어떤 종류의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느끼신다는 거에요. 구세주가 그냥 되신게 아니고 그 모든 아픔을 공유 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아픔, 고스란이 다 느끼셨어요. 십자가에서 당장이라도 내려 오실 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 완전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십자가의 그 아픔 고스란히 느끼신거에요. 그러기에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이론적인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거에요.
그뿐 아닙니다. 욱신을 입으셨기에 우리의 모든 아픔도 같이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체휼이란 단어는 긍휼을 체험하다 하는거죠. 영어성경을 보면 단순히 Sympathize 긍휼히 여기다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체휼이란 단어의 원어를 보면 그 뜻이 명확합니다. 이 말은 “함께” 라는 “쉼”과 고통당하다” 라는 “파스코”라는 말이 합쳐져서 나온 말이에요.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을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이 단순히 감정적인 긍휼이 아니라는거에요. 여러분의 육신이 병으로 아픕니까? 예수님도 똑 같이 아프시다는거에요. 여러분에게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도 똑 같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다는 거에요. 우리의 모든 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그 약함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신거에요. 어떻게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
여러분 약함을 느낄때에 같이 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눈물 흘릴때에 같이 눈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어느 누구의 위로 없어도 우리는 그 분의 위로만 있으면 됩니다. 설사 세상 어느 누구 같이 눈믈 흘려 줄 수 없어도 예수님의 눈물망 있으면 우리는 넉넉한줄 믿습니다.
마지막 성육신의 의미는 임마누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다라는 말은 스케네오란 단어인데 이 말은 “텐트를 치다. 장막을 치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먼저 생각 나십니까? Tabernacle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쳤던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에요.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 하신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우리 가운데 치셨다는 거에요. 성육신의 사건으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속에, 우리의 삶속에, 우리의 관계속에,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되셨다는 거에요. 임마누엘 된 예수 그 이름의 비밀을 우리가 경험하며 살도록 하신것입니다. 광야생활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광야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여전히 임재하시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에요. 메마른 광야같은 우리의 이민생활에 촉촉히 내리는 단비같이 임하시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냥 가만히 옆에만 계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모든것을 살피십니다.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능력의 손길을 펼치신다는 거에요. 먼 하늘에서 멀찌감치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에요. 보혜사 성령으로서 바로 우리와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의 실존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줄 믿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 이름을 통하여 우리와 더불어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엄청난 비밀의 능력이 늘 체험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측별히 이번 성탄절 기간이 진정한 성육신의 감동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육신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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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육신묘에서 멀지않고 현충원 듸로 넘어 멀지않은 곳에 사는데 생육신 사육신만 기억하다가 웬 성육신하니 또 성스럴 성도 아니고 성적의미의 성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치니 이런 머리를 우짤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