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시 편 50:14-23
본 시편은 아삽이 지은 시입니다.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 시대의 찬양대 대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임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삽은 성도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5).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교인’과 ‘성도’는 같은 말 같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교인’은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자를 말합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아야 법적으로 교인이라고 합니다.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성도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출19:5,6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이 맺어주신 언약을 지키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언약을 지키는 자 입니다.
우리가 성도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불자’, ‘보살’이라고 하며 다른 종교에서는 ‘신도’ 또는 ‘신자’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은 성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기독교에서만 ‘성도’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된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성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부르셔서(1)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나의 성도들”이라고 하셨습니다(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들에게 ‘나의 성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성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나의 성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도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나의 성도’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된 나와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나 높은 어떤 존재가 나를 보고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가 나를 보고 성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나의 성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성도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성도’는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 맺은 자입니다. 5절에 ‘성도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주시므로 ‘성도’가 된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제사로 언약한 이들’이란 말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시고 ‘제사로 언약한 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로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혀 주시므로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 주셨습니다(창3:21).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은 양을 잡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를 덮어주시려고 양을 잡았습니다. 양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 주신 것입니다. 양이 제사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제사의 제도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된 말씀은 없지만 아담과 하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의 아들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잡아 제물로 바친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로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사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아무런 제물로 제사를 드려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결코 형식적으로 제물만 드리고 감사가 없는 제사는 원치 않으심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송아지나 양을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말씀은 당시 백성들은 짐승들을 잡아 열심히 제사를 지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신들에게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송아지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자기 신들에 대해 생각하듯 여호와 하나님을 인간이 바친 제물을 먹거나 소유하는 분으로 잘못 알고 예배하는 자들의 그릇된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들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미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제사로 언약을 맺은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14절에 성도들의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감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성도’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를 드리는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 제물로 드린 것은 자신의 죄사함 받음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땅의 소산물을 제물로 제사를 지낸 것은 죄사함에 대한 감사가 없는 제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의 예배도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가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우리의 예배가 감사가 없는 가인의 제사와 같은 예배를 드리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벨과 같은 진정한 감사함으로 추수감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자입니다.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감사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는 행위를 옳게 하는 자입니다.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예배가 성도의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자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란 말씀에서 감사는 개인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는 개인적이라야 합니다. 남편이 하니까 아내는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하니까 자녀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도 송아지나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리기도 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나 밀가루 한 움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예물이 많고 작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정성껏 준비한 예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23절을 다시 봅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말씀을 보아도 구원은 개인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남편의 믿음으로 아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때문에 자녀들이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감사는 개인적이라야 합니다. 불자들은 예물을 바칠 때 전 가족 이름으로 바칩니다. 대표적인 감사는 형식적인 감사일 수가 있습니다. 가족 대표가 하는 감사는 다른 가족들에게 감사 할 수 있는 믿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감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될 뿐 아니라 구원까지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감사함으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스스로 감사할 것을 깨닫고 감사를 할 때 올바른 믿음이 될 수가 있고 복 받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감사를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는 개인적인 것도 있고, 농사나 사업을 한다면 가족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자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입니다.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 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보다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있는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의 예배만이 여호와께서 받으십니다.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로서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교훈입니다.
서울에 어느 교회는 베이비 박스를 만들어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는 산모가 박스 안에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한 것 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중에 아이를 박스 안에 두고 가면 교회가 그 아이를 키우고 입양하여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합니다. 버려진 아이를 입양해서 잘 키우게 하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국내 입양을 하도록 하지만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외국에 입양된 아이가 좋은 양부모를 만나 훌륭하게 자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이 자라서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경찰서를 찾고 자신을 입양했던 고아원에서 자신이 어디에 버려진 것과 누군가에 의해서 고아원에 오게 되었다는 기록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나 출생한 날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낳아 준 부모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낳은 부모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버리게 된 것도 이해를 하고 다만 자신을 낳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부모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를 꼭 만나서 자신을 낳아 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는 말을 방송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된 것은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사함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