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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3월 12일 ((음)2월 3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戶西南面) 모전리(茅田里)에서 부친 박지수(朴芝洙)와 모친 정선동(鄭仙洞)의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초명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렀고, 호적에는 박준식(朴準植)으로 되어 있다.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노선에 따라 일왕과 일본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려다 체포되어 22년 2개월이란 세계 최장의 수형을 받은 혁명가이다. 광복 후에는 재일한인들의 단체인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립하여 초대단장을 역임한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태어난지 몇 해 되지 않아 가족 모두 마성면(麻城面) 오천리(梧泉里) 샘골로 이주해 살았다.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전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한다. 맏형 정식(庭植)과 둘째형 두식(斗植)은 오천리 마을 구장을 맡아보며 인근 산지의 삼림보호와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星山組合, 1919년 권농조합으로 개칭)을 이끄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7세인 1908년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咸昌)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한국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일본교사는 경찰의 형사”라고 말하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경복궁 근처 소격동에서 하숙하며 재학하던 중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이른바 ‘대역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학교 재학 중 1919년 만세운동을 맞아 시위에 참여했는데, 일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4월 초부터 중순까지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에 끌려간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취체 경험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1919년 10월경 부산에서 도쿄(東京)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 행상 등 노동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반제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재일유학생들을 만났고 우연히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사상 공감에 이어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도쿄 최대의 한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유학생인 김약수(金若水)·백무(白武)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교육을 위한 야학활동도 벌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주최하는 여명회(黎明會)·코스모구락부·자유인연맹 등 각종 사상단체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반제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또한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 후에 철권단(鐵拳團)·혈권단(血拳團)·박살단(撲殺團)으로 개칭)을 조직해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거나 집단 구타하여 응징하였다.
1921년 11월 29일 원종린(元鍾麟)·김약수 등 유학생들과 함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아 1922년 7월 10일자 창간호와 8월 10일자 2호를 발간하고, 니카다현(新潟縣) 나가쓰가와(中津川)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에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흑도회는 9월 7일 학우회와 함께 도쿄 YMCA에서 이 사건의 진상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천여 명이 모인 이 행사에서 일본 약탈체제의 근본적 파괴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학살조사를 국내에 보고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김한(金翰) 등 의열단 간부들을 비밀리에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백무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여 1922년 12월 홍진유(洪鎭裕)·장상중(張祥重) 등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 가네코와 함께 기관지 『후데이센징(太い鮮人)』과 『현사회』, 『민중운동』 등 항일 잡지를 발간하였다.
또 일본 및 한인 사회단체들과 함께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 반대운동을 벌이고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일본 지식인을 초청하는 등 연대활동을 펼쳤다. 1923년 4월 중순경 자택에서 한인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를 별도로 조직해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 참가 등의 대중활동을 펼쳤다.
1923년부터는 의열투쟁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폭탄유입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외국에서 폭탄을 유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를 실험하는 한편, 의열단 국내 책임자인 김한(金翰)에게 폭탄 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하지만 의열단 내의 정보혼란으로 폭탄 확보가 중단되고 일제의 계략으로 압수당하자, 고교 동창이며 동지인 김중한(金重漢)을 통해 폭탄을 구입하려 하였다.
한편으로 불령사 회원 최영환(崔英煥)을 통해 중국의 한인 의열단체인 다물단(多勿團)으로부터 폭탄을 건네받았다. 유입된 폭탄은 1923년 10월 중 예정된 일본 히로히토(裕仁) 태자의 결혼식에 투척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한인 폭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6천여 명의 한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6,200여 명이 강제 연행될 때,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9월 3일 새벽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과 사형선고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해 도쿄와 주요 도시들이 쑥대밭이 된다. 일본인들은 자연재해로 입은 피해와 분노를 분출할 창구로 조선인들을 지목한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있거나 방화를 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앞장서서 주도한 것이었다. 대재해를 틈타 일본의 사회주의자, 조선 독립운동가 등 이른바 사회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조선인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민간 일본인들 또한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들을 말 그대로 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대량 학살도 서슴지 않고 자행되었다. 이 때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검속(구속)되며,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이것이 관동대지진 직후의 피비린내나는 관동대학살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불령(不逞)이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칭하던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는 단어를 비꼬는 것이었으며, 사(社)라는 단어는 비밀결사가 아니라 대중적인 항일운동을 기획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또한 관동대학살이 벌어지던 당시 일본 경찰에게 검속된다. 이때의 검속 명목은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비밀결사의 금지’였다.
그런데 일본경찰은 취조를 통해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박열이 폭탄을 구해 테러를 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실제 박열은 외국에서 폭탄을 구입하거나 직접 만들고자 했으며, 의열단을 통해 폭탄을 구하려 시도하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대역사건’이라고 명명하고, 대지진을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이 있었다며 선전했다.
이 때의 ‘대역사건’은 일왕에게 해를 끼치려 한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일본 역사상 단 4번밖에 존재하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중요도로 비교해보자면, 조선의 반정이나 우리나라의 쿠데타와 맞먹는 정도의 대형사건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26년 3월, 박열(오른쪽)과 가네코 후미코(왼쪽)
그는 훗날 박열과 함께 체포되던 길에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그들은 1922년부터 동거를 시작합니다.
검찰 조사 도중 폭탄 구입 사실이 알려졌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경찰은 이를 ‘대진재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 검찰은 관련자 진술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자, 1924년 2월 15일 박열·가네코 후미코·김중한 세 사람만을 추가 기소하였고,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일본 검찰에 기소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혹심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일체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과 조선 예복의 착용,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을 낭독하게 할 것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수감된 채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습다.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려고 했다고 서슴없이 밝히는 한편, 심지어 재판부에게 자신의 요구를 거침없이 말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①나는 피고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조선주권을 강탈한 일본대표와 담판하는 위치에 있다.
②좌석은 재판장과 대등한 높이의 좌석으로 한다.
③나는 조선예복으로 정장하고 조선국어를 사용한다.
④재판 전에는 조선민족 대표로서 선언문을 낭독한다’ 였다.
일본 사법부가 이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의 사대관모와 관복을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일왕의 죄를 밝혔다. 그리고 옥중에서 작성한 선언문인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권력자계급에게 준다」 등 4편의 글을 낭독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6년 3월 25일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일제는 10일 만에 특별 감형을 요청하였고,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형 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 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이별해야 했는데, 이에 4월 6일 이감되자마자 은사전달에 저항하며 약 10일 동안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가네코는 가혹한 자신의 상처와 항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뜨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렵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1926년 3월, 일본 사법부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들은 바로 이틀 전에 서류상으로 혼인수속까지 밟아놓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박열은 재판부에게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라고 말했으며,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나를 한 교수대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달라. 그리고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 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10일 후에 일왕의 결정으로 사형선고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증오스러워 화가 미친다고 말했던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찢어버렸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었고, 일본 경찰과의 충돌과 우여곡절 속에서 4개월 만인 11월 5일 가까스로 박열의 고향 선산인 경북 문경 팔령산(八靈山)에 묻혔다.
한편 1926년 9월초에는 옥중에 수감 중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괴사진’이 일본 언론에 의해 알려짐에 따라 큰 파장이 일었다. 문제의 사건은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예심판사가 박열과 환담하던 중, 마침 옆방에 온 후미코를 동석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을 ‘사법권의 문란’으로 본 우익과 야당 인사들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였는데, 이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고 담당 사법관이 파면당하는 등 정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36년 8월 고스게(小菅)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3년 8월 도쿄에서 먼 동북지방의 해안가인 아키다(秋田)의 형무소로 옮겼다. 이후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 최장기간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꾸준히 사상전향을 강요해 모두 5편의 전향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제시된 전향선언서는 문장구성과 내용이 이전과 지나치게 다르고, 주변인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를 출옥시키거나 감형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작되었다고 여겨진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었으나,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 27일까지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먼저 출옥한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김천해金(天海)이 1945년 10월 15일 박열의 석방을 요구하며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탄원서를 제출하였다. 1945년 10월 홋카이도(北海道) 변방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1945년 12월 6일 도쿄에서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옥중에서 박열을 감시했던 형무소 주임인 후지시다 이사부로(藤下伊一郞)가 나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사죄의 뜻으로 아들을 양자로 바치고, 자신의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버려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범우파 단체들과 통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이때 초대 단장을 맡았다. 민단은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항일 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이다.
이후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이승만 정부도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지지 방침은 민단 내부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결국 1948년 2월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과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듬해 5월 영구 귀국을 결심하고 서울로 돌아와 머물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였고, 사흘 뒤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압송 당하였다. 납북 이후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안재홍·엄항섭·김약수 등 민족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헌영 등과 함께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상무위원과 최고위원, 회장 등을 맡아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73세 나이에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