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가 되는것은 더욱 커지는 일" - 문익환(1918.6.1 - 1994.1.18)
"이 민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도시민과 농민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자로 등등 사회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보아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주종관계를 일소하는 일을 민주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지배자-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 - 문익환 『방북 관련 재판 상고이유서』 부분
너도 껴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
성경의 구약성서는 히브리민족의 고난사이다. 억세고 강대한 주변 민족들에게 찢기고 짓밟히는 수난의 역사이고 죽음의 역사이다. 그러나 또한 그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익환 목사는 영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구약 신학자로서 1968년에서 1976년 사이에 신교와 구교의 성서공동번역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박정희 독재의 암흑이 짙게 드리운 1976년 봄, 58세의 이 천진난만한 목사는 3.1 민주구국선언문을 기초하고 서명을 받으면서 '한국민중 고난사'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찢기고 부서지는 분열의 역사를 하나되어 커짐의 역사로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첫발을 내딛자마자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구속을 각오한 서명을 받으면서 “너도 껴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라며 흥겨운 놀이를 권하듯 하였다는 3.1 민주구국선언.
그의 이런 낙천성은 사소한 생각과 노선의 차이를 넘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담당 형사와 간수까지 머리 숙이게 만들곤 하였다. 저항의 민중운동을 흥겹고 희망찬 싸움으로 만들어 가면서, 문익환 목사는 간디의 말을 빌어 “신랑이 신부 방에 들 듯이!”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찾았다.
3.1 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하여 유신헌법 비판으로 투옥,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 그리고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 89년 역사적인 방북으로 김일성 주석과 통일의 원칙 합의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92년 시위 중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 열사의 장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재수감.
이렇게 94년까지 6회에 걸친 투옥으로 11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아무리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았고, 노동자, 농민, 양심수와 청년학생, 철거민 등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들과 함께 싸우고 눈물 흘렸다.
"국경을 또 다시 휴전선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본래 남평 문씨의 전라도 피이다.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는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여 함경도로 도피하게 된다.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은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를 이룰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두만강가 종성에서 태어나고, 어머니 김신묵 여사가 회령에서 태어나니 북쪽의 변방에도 문 목사의 뿌리가 있는 셈이다. 1899년 문 목사 집안과 이웃의 세 집안이 더불어 모두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옛 고구려의 당인 북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용정 부근의 명동촌에 모여 땅을 사고, 신식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민족교육이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옛 고구려 땅에 세워진 명동촌은 마을 자체가 독립결사체였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마을을 이끌며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이 식객으로 드나드는 명동촌에서 1918년 문익환이 태어난다. 문익환은 나운규, 윤동주 등과 명동학교를 다니며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소년 문익환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난다. 명동학교에서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정재면 선생이 명동촌 어르신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기독교 도입을 주장한 것이다. 부흥전도사로 명동촌을 찾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좌익과 우익을 나눠가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민족을 하나로 엮고 민중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재면 선생의 지속적인 설득에 마침내 명동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익환 목사의 부친인 문재린을 첫번째 목사로 배출한다.
갑오농민전쟁과 육진문화, 민족교육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의 하나됨과 부활을 위한 기독신앙. 이런 토양에서 자라난 문익환 목사의 머리 속에 있는 조국은 두만강, 압록강으로 가로막힌 한반도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문익환 목사에게 우리 민족은 반도인이 아니라 반도를 끼고 있는 대륙인이었다.
89년의 평양을 방문하면서도 단 한번도 국경을 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문익환 목사. 그에게 한반도만을 민족의 땅으로 인정한다거나, 전선 이남의 좁은 땅덩어리를 조국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5년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잘려진 채로 이뤄진 8.15 해방을 그는 해방의 완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끌어내린 김부식을 원망하면서 살아왔는데, 국경을 또 다시 휴전선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국토수호에 열을 올리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좌절 그리고 전태일로 부활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던 문익환이 맞이한 첫번째 좌절은 좌익으로부터였다. 1919년 모스코바에서 열린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널)은 각국 공산당을 지부로 두는 일국일당주의 원칙을 내세운다. 이 원칙에 입각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명동촌의 명동학교를 중국공산당의 재산으로 접수한다.
문익환 목사에게 있어서 민족의 분단은 38선이 그어진 45년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나서는 길에서부터 이념의 차이로 반목하는 것을 목격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가 일제에 이어, 소련군에게서도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등 민족의 이념대립으로 문익환 목사는 참담한 좌절을 경험한다.
문익환 목사는 일제하의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두 번째 좌절을 겪는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명동촌의 신앙을 간직한 문익환은 신사참배에 앞장서는 일부 친일 기독교 인사들의 모습을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문익환, 윤동주 등은 신사참배에 거부하던 숭실중학교가 일제에 접수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일본유학을 거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문익환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도쿄의 UN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며 분열된 민족의 참상을 똑똑히 지켜보게 된다. 함께 정전협상의 통역을 맡았던 정경모 선생은 이 즈음의 문익환 목사가 유난히 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 문익환 시 "전태일" 부분
해방 후 구약 신학자로 활동하던 문익환 목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만나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문익환 목사는 불에 타버린 젊은 영혼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벌판의 히브리 민족에게서 한민족이 겪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로 자신의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한반도로, 38도선 이남으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지는 민족의 무대, 그리고 사상과 이념에 따라, 출신 지역과 종교에 따라, 사소한 의견의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핵분열하며 대립하고 갈등하며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하는 우리 민족. 그리고 그 안에서 그 모든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 문익환 목사는 이 분열과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다시 쓰기 위한 희망을 전태일에게서 찾게 된 것이다.
1976년 성서번역작업을 차마 다 마치지 못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의 해맑은 투쟁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분열하는 자들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땀 흘리며 하나되는 길을 개척하는 '발바닥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에게 친구이자 스승이고 하나님이었다.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고통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농민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함평 고구마 투쟁*'으로, 철거촌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꽃다운 청춘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곧바로! 노동자 세 명이 강연을 부탁해도 달려가고, '발바닥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정치적인 상황이 어찌 되었건 곧장 달려갔다는 문익환 목사였다.
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 소속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 되어 떠난 것이다.
나는 통일을 보았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종교와 이념과 성(性)과 계급, 계층과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발바닥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호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89년 1월 북한당국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고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민주 인사들을 초청하는 방송을 한다. 그리고 89년 3월 25일…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6.15 공동선언 중에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진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포함되어 있는 이 통일방안 합의 내용은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남과 북이 마련한 통일방안을 합의해 놓아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문익환 목사의 지론과 그의 고난에 찬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이다.
89년 방북 당시에는 반통일분열주의자들이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음은 물론, 재야운동세력 내에서도 영웅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처럼 힘겹고 외로운 방북을 통해 문익환 목사는 이미 통일을 보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38선이 그어지기도 전에 민족의 분단을 경험하였던 그가 이제는 휴전선이 걷히기도 전에 통일의 실마리를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을 점점 왜소하게 만든 대립과 분열 그리고 정신적 분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북한의 사전에서는 ‘종교’와 ‘목사’의 말뜻이 바뀌었다. 종교도 민족의 편에 서면 인민의 아편이 아닌 것이다. 남한에서는 기형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임수경 학생,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이 이어지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분열을 빌미로 이 땅에서 주인인 양 행패를 일삼으면서도 고마운 나라로 칭송받던 외세는 이제 남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방북사건 재판정에 선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장점을 칭찬해 주고, 서로의 의견에 동조해야 통일이 된다면서,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과의 회합, 찬양, 고무, 동조를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문익환 목사는 또다시 차디찬 감방으로 가야만 했다.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들듯이!” 말이다.
통일의 집
91년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는 출소 후 평생의 숙원이었던 듯 ‘칠천만겨레 통일맞이 운동’을 위해 뛰어다녔다. 다가오는 통일을 특정 세력이 아닌 민(民)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맞이하자는 통일맞이 운동은 문익환 목사 생의 결정체였다.
그러던 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열고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문익환 목사는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다. 1976년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래로 한번도 자신을 돌볼 틈이 없던 그의 심장은 너무도 허무하게 멎어 버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말 그대로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다. 재야는 물론 정계와 학계, 종교계의 조문이 잇따랐으며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 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문익환 목사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됩니다"라는 조전을 직접 보내왔다.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든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가 묻히는 날, 해고 노동자들이 말없이 그의 상여를 메고 언덕을 올랐다.
쌀쌀한 겨울 저녁에 불쑥 ‘통일의 집**’을 찾았다.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박용길 장로님께서 불청객을 반갑게도 맞이하신다. "통일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와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야"
염치없게도 맛있는 저녁밥을 얻어 먹고 문익환 목사님의 흔적이 가득한 통일의 집을 둘러보았다. 낡은 흑백 사진들, 누군가가 그려서 보냈을 그림들, 6차례의 수감생활로 얻은 수의와 수번을 비롯해 길고 긴 민주화 투쟁 과정의 유품들, 주변의 후배나 동료들이 보낸 선물들… 한국신학대학 제자들이 그려 보냈다는 ‘남남북녀’ 그림에도 통일의 염원이 가득 담겨있다.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수를 놓아 보냈다는 “최후의 만찬”도 눈에 띈다.
문익환 목사의 평생 애인이자 동지였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민(民)이 주인 된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대표를 맡는 등 문익환 목사를 대신하여 통일운동에 앞장 선다.
그리고 95년 “문익환 목사의 장례에 예를 갖춰주셨던 김 주석의 1주기를 맞아 조문키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615선언 이후에는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남쪽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가해 결성한 통일운동 상설협의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으로 남북공동행사를 이끌기도 하였다.
박용길 장로의 집이자 고 문익환 목사의 기념관이기도 한 ‘통일의 집’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님
이제 당신은 나에게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밤쯤에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 꽃밭에 유난히 큰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었거든요, 그 청초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당신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요 며칠 전 꿈에 본 해바라기의 푹 수그린 탐스러운 모습...... 정말 성숙한 인간성, 그러면서도 당신처럼 언제나 겸허한 모습.
당신과 같이 길을 가는데, 그것도 서울 거리를, 잘 익은 커다란 해바라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웃음으로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러던 차에 접견실에 들어서는 당신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 그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시를 지었던 거요. 그래서 "내 얼굴에서 피어나는 당신 / 해바라기 웃음이어라 / 해바라기 마음이 되어"로 그 시를 끝맺음했던 거죠.
해바라기가 내 마음에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 9월의 아침이었죠. 내 이름도 늦봄에서 '갈테야'로 바꾸면 어떨까요? 학생들이 나를 '갈테야'목사 라고 부른다니까. 오늘 북에 동조했다는 동조죄가 떨어졌군요. 고무 찬양죄도 당연히 떨어져야지요. 나는 정주영씨처럼 북을 찬양하지 못했으니까. 정주영씨가 고무 찬양죄에 안 걸린다면 나야 당연히 안 걸리는 거죠.
북쪽의 연방제 통일안에 동조함으로 북을 이롭게 했다는 건데, 동조죄가 떨어지면 이적 행위죄도 당연히 떨어지는 거죠. 그 대신 통일원이 구상하던 체제 연합 쪽으로 북을 끌어오고, 실행 가능한 교류부터 하자던 남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했고, 노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만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내가 이롭게 했다면 남쪽 을 크게 이롭게 한 건데.......
그러나 나는 이 죄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게 좀 아쉽군요. 나는 서로 고무 찬양해야, 서로 동조해야,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려고 안달을 해야 통일이 된다는 사람입니다.
검사의 항소 이유서를 보면 내가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거거든요. 서로 헐뜯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서로 엇먹기만 해야, 콩 심자면 팥 심자고 하고 팥 심자면 콩 심자고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제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면서 동조하게 되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해코지할 생각만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면서 일을 도모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내가 만난 사람은 북괴의 괴수이고 노 대통령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말하는 것이 궤변인가, 아니면 내가 만난 사람도 노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다름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하는 것이 궤변인가요?
광화문 네거리를 막아 서서 가고 오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 봤으며 좋으련만....... 항소 이유서를 쓸 때는 두통이 한창 심할 때여서 간단히 쓰고는 법정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이번 상고 이유서는 역사에 남긴다는 심정으로 성의껏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오. 내일 한빛교회 당신 옆에 가 있을게요. 해바라기 웃음 보러 나는 갈 테야.
1990.2.10
옥중에서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편지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먼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건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 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 첫새벽,
문익환
"이 민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도시민과 농민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자로 등등 사회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보아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주종관계를 일소하는 일을 민주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지배자-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 - 문익환 『방북 관련 재판 상고이유서』 부분
너도 껴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
성경의 구약성서는 히브리민족의 고난사이다. 억세고 강대한 주변 민족들에게 찢기고 짓밟히는 수난의 역사이고 죽음의 역사이다. 그러나 또한 그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익환 목사는 영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구약 신학자로서 1968년에서 1976년 사이에 신교와 구교의 성서공동번역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박정희 독재의 암흑이 짙게 드리운 1976년 봄, 58세의 이 천진난만한 목사는 3.1 민주구국선언문을 기초하고 서명을 받으면서 '한국민중 고난사'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찢기고 부서지는 분열의 역사를 하나되어 커짐의 역사로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첫발을 내딛자마자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구속을 각오한 서명을 받으면서 “너도 껴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라며 흥겨운 놀이를 권하듯 하였다는 3.1 민주구국선언.
그의 이런 낙천성은 사소한 생각과 노선의 차이를 넘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담당 형사와 간수까지 머리 숙이게 만들곤 하였다. 저항의 민중운동을 흥겹고 희망찬 싸움으로 만들어 가면서, 문익환 목사는 간디의 말을 빌어 “신랑이 신부 방에 들 듯이!”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찾았다.
3.1 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하여 유신헌법 비판으로 투옥,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 그리고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 89년 역사적인 방북으로 김일성 주석과 통일의 원칙 합의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92년 시위 중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 열사의 장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재수감.
이렇게 94년까지 6회에 걸친 투옥으로 11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아무리 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았고, 노동자, 농민, 양심수와 청년학생, 철거민 등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들과 함께 싸우고 눈물 흘렸다.
"국경을 또 다시 휴전선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본래 남평 문씨의 전라도 피이다.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는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여 함경도로 도피하게 된다.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은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를 이룰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두만강가 종성에서 태어나고, 어머니 김신묵 여사가 회령에서 태어나니 북쪽의 변방에도 문 목사의 뿌리가 있는 셈이다. 1899년 문 목사 집안과 이웃의 세 집안이 더불어 모두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옛 고구려의 당인 북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용정 부근의 명동촌에 모여 땅을 사고, 신식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민족교육이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옛 고구려 땅에 세워진 명동촌은 마을 자체가 독립결사체였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마을을 이끌며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이 식객으로 드나드는 명동촌에서 1918년 문익환이 태어난다. 문익환은 나운규, 윤동주 등과 명동학교를 다니며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소년 문익환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난다. 명동학교에서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정재면 선생이 명동촌 어르신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기독교 도입을 주장한 것이다. 부흥전도사로 명동촌을 찾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좌익과 우익을 나눠가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민족을 하나로 엮고 민중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재면 선생의 지속적인 설득에 마침내 명동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익환 목사의 부친인 문재린을 첫번째 목사로 배출한다.
갑오농민전쟁과 육진문화, 민족교육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의 하나됨과 부활을 위한 기독신앙. 이런 토양에서 자라난 문익환 목사의 머리 속에 있는 조국은 두만강, 압록강으로 가로막힌 한반도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문익환 목사에게 우리 민족은 반도인이 아니라 반도를 끼고 있는 대륙인이었다.
89년의 평양을 방문하면서도 단 한번도 국경을 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문익환 목사. 그에게 한반도만을 민족의 땅으로 인정한다거나, 전선 이남의 좁은 땅덩어리를 조국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45년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잘려진 채로 이뤄진 8.15 해방을 그는 해방의 완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끌어내린 김부식을 원망하면서 살아왔는데, 국경을 또 다시 휴전선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국토수호에 열을 올리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좌절 그리고 전태일로 부활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던 문익환이 맞이한 첫번째 좌절은 좌익으로부터였다. 1919년 모스코바에서 열린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널)은 각국 공산당을 지부로 두는 일국일당주의 원칙을 내세운다. 이 원칙에 입각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명동촌의 명동학교를 중국공산당의 재산으로 접수한다.
문익환 목사에게 있어서 민족의 분단은 38선이 그어진 45년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나서는 길에서부터 이념의 차이로 반목하는 것을 목격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가 일제에 이어, 소련군에게서도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등 민족의 이념대립으로 문익환 목사는 참담한 좌절을 경험한다.
문익환 목사는 일제하의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두 번째 좌절을 겪는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명동촌의 신앙을 간직한 문익환은 신사참배에 앞장서는 일부 친일 기독교 인사들의 모습을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문익환, 윤동주 등은 신사참배에 거부하던 숭실중학교가 일제에 접수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일본유학을 거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문익환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도쿄의 UN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며 분열된 민족의 참상을 똑똑히 지켜보게 된다. 함께 정전협상의 통역을 맡았던 정경모 선생은 이 즈음의 문익환 목사가 유난히 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 문익환 시 "전태일" 부분
해방 후 구약 신학자로 활동하던 문익환 목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만나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문익환 목사는 불에 타버린 젊은 영혼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벌판의 히브리 민족에게서 한민족이 겪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로 자신의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한반도로, 38도선 이남으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지는 민족의 무대, 그리고 사상과 이념에 따라, 출신 지역과 종교에 따라, 사소한 의견의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핵분열하며 대립하고 갈등하며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하는 우리 민족. 그리고 그 안에서 그 모든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 문익환 목사는 이 분열과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다시 쓰기 위한 희망을 전태일에게서 찾게 된 것이다.
1976년 성서번역작업을 차마 다 마치지 못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의 해맑은 투쟁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분열하는 자들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땀 흘리며 하나되는 길을 개척하는 '발바닥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에게 친구이자 스승이고 하나님이었다.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고통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농민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함평 고구마 투쟁*'으로, 철거촌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꽃다운 청춘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곧바로! 노동자 세 명이 강연을 부탁해도 달려가고, '발바닥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정치적인 상황이 어찌 되었건 곧장 달려갔다는 문익환 목사였다.
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 소속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 되어 떠난 것이다.
나는 통일을 보았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종교와 이념과 성(性)과 계급, 계층과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발바닥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호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89년 1월 북한당국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고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민주 인사들을 초청하는 방송을 한다. 그리고 89년 3월 25일…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6.15 공동선언 중에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진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포함되어 있는 이 통일방안 합의 내용은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남과 북이 마련한 통일방안을 합의해 놓아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문익환 목사의 지론과 그의 고난에 찬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이다.
89년 방북 당시에는 반통일분열주의자들이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음은 물론, 재야운동세력 내에서도 영웅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처럼 힘겹고 외로운 방북을 통해 문익환 목사는 이미 통일을 보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38선이 그어지기도 전에 민족의 분단을 경험하였던 그가 이제는 휴전선이 걷히기도 전에 통일의 실마리를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을 점점 왜소하게 만든 대립과 분열 그리고 정신적 분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북한의 사전에서는 ‘종교’와 ‘목사’의 말뜻이 바뀌었다. 종교도 민족의 편에 서면 인민의 아편이 아닌 것이다. 남한에서는 기형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임수경 학생,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이 이어지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분열을 빌미로 이 땅에서 주인인 양 행패를 일삼으면서도 고마운 나라로 칭송받던 외세는 이제 남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방북사건 재판정에 선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장점을 칭찬해 주고, 서로의 의견에 동조해야 통일이 된다면서,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과의 회합, 찬양, 고무, 동조를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문익환 목사는 또다시 차디찬 감방으로 가야만 했다.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들듯이!” 말이다.
통일의 집
91년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는 출소 후 평생의 숙원이었던 듯 ‘칠천만겨레 통일맞이 운동’을 위해 뛰어다녔다. 다가오는 통일을 특정 세력이 아닌 민(民)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맞이하자는 통일맞이 운동은 문익환 목사 생의 결정체였다.
그러던 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열고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문익환 목사는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다. 1976년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래로 한번도 자신을 돌볼 틈이 없던 그의 심장은 너무도 허무하게 멎어 버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말 그대로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다. 재야는 물론 정계와 학계, 종교계의 조문이 잇따랐으며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 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문익환 목사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됩니다"라는 조전을 직접 보내왔다.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든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가 묻히는 날, 해고 노동자들이 말없이 그의 상여를 메고 언덕을 올랐다.
쌀쌀한 겨울 저녁에 불쑥 ‘통일의 집**’을 찾았다.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박용길 장로님께서 불청객을 반갑게도 맞이하신다. "통일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와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야"
염치없게도 맛있는 저녁밥을 얻어 먹고 문익환 목사님의 흔적이 가득한 통일의 집을 둘러보았다. 낡은 흑백 사진들, 누군가가 그려서 보냈을 그림들, 6차례의 수감생활로 얻은 수의와 수번을 비롯해 길고 긴 민주화 투쟁 과정의 유품들, 주변의 후배나 동료들이 보낸 선물들… 한국신학대학 제자들이 그려 보냈다는 ‘남남북녀’ 그림에도 통일의 염원이 가득 담겨있다.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수를 놓아 보냈다는 “최후의 만찬”도 눈에 띈다.
문익환 목사의 평생 애인이자 동지였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민(民)이 주인 된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대표를 맡는 등 문익환 목사를 대신하여 통일운동에 앞장 선다.
그리고 95년 “문익환 목사의 장례에 예를 갖춰주셨던 김 주석의 1주기를 맞아 조문키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615선언 이후에는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남쪽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가해 결성한 통일운동 상설협의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으로 남북공동행사를 이끌기도 하였다.
박용길 장로의 집이자 고 문익환 목사의 기념관이기도 한 ‘통일의 집’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님
이제 당신은 나에게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밤쯤에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 꽃밭에 유난히 큰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었거든요, 그 청초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당신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요 며칠 전 꿈에 본 해바라기의 푹 수그린 탐스러운 모습...... 정말 성숙한 인간성, 그러면서도 당신처럼 언제나 겸허한 모습.
당신과 같이 길을 가는데, 그것도 서울 거리를, 잘 익은 커다란 해바라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웃음으로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러던 차에 접견실에 들어서는 당신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 그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시를 지었던 거요. 그래서 "내 얼굴에서 피어나는 당신 / 해바라기 웃음이어라 / 해바라기 마음이 되어"로 그 시를 끝맺음했던 거죠.
해바라기가 내 마음에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 9월의 아침이었죠. 내 이름도 늦봄에서 '갈테야'로 바꾸면 어떨까요? 학생들이 나를 '갈테야'목사 라고 부른다니까. 오늘 북에 동조했다는 동조죄가 떨어졌군요. 고무 찬양죄도 당연히 떨어져야지요. 나는 정주영씨처럼 북을 찬양하지 못했으니까. 정주영씨가 고무 찬양죄에 안 걸린다면 나야 당연히 안 걸리는 거죠.
북쪽의 연방제 통일안에 동조함으로 북을 이롭게 했다는 건데, 동조죄가 떨어지면 이적 행위죄도 당연히 떨어지는 거죠. 그 대신 통일원이 구상하던 체제 연합 쪽으로 북을 끌어오고, 실행 가능한 교류부터 하자던 남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했고, 노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만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내가 이롭게 했다면 남쪽 을 크게 이롭게 한 건데.......
그러나 나는 이 죄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게 좀 아쉽군요. 나는 서로 고무 찬양해야, 서로 동조해야,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려고 안달을 해야 통일이 된다는 사람입니다.
검사의 항소 이유서를 보면 내가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거거든요. 서로 헐뜯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서로 엇먹기만 해야, 콩 심자면 팥 심자고 하고 팥 심자면 콩 심자고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제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면서 동조하게 되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해코지할 생각만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면서 일을 도모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내가 만난 사람은 북괴의 괴수이고 노 대통령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말하는 것이 궤변인가, 아니면 내가 만난 사람도 노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다름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하는 것이 궤변인가요?
광화문 네거리를 막아 서서 가고 오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 봤으며 좋으련만....... 항소 이유서를 쓸 때는 두통이 한창 심할 때여서 간단히 쓰고는 법정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이번 상고 이유서는 역사에 남긴다는 심정으로 성의껏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오. 내일 한빛교회 당신 옆에 가 있을게요. 해바라기 웃음 보러 나는 갈 테야.
1990.2.10
옥중에서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편지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먼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건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 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 첫새벽,
문익환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 문익환 시 "전태일" 부분
해방 후 구약 신학자로 활동하던 문익환 목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만나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문익환 목사는 불에 타버린 젊은 영혼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벌판의 히브리 민족에게서 한민족이 겪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로 자신의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한반도로, 38도선 이남으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지는 민족의 무대, 그리고 사상과 이념에 따라, 출신 지역과 종교에 따라, 사소한 의견의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핵분열하며 대립하고 갈등하며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하는 우리 민족. 그리고 그 안에서 그 모든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 문익환 목사는 이 분열과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다시 쓰기 위한 희망을 전태일에게서 찾게 된 것이다.
1976년 성서번역작업을 차마 다 마치지 못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의 해맑은 투쟁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분열하는 자들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땀 흘리며 하나되는 길을 개척하는 '발바닥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에게 친구이자 스승이고 하나님이었다.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고통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농민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함평 고구마 투쟁*'으로, 철거촌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꽃다운 청춘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곧바로! 노동자 세 명이 강연을 부탁해도 달려가고, '발바닥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정치적인 상황이 어찌 되었건 곧장 달려갔다는 문익환 목사였다.
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 소속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 되어 떠난 것이다.
나는 통일을 보았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종교와 이념과 성(性)과 계급, 계층과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발바닥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호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89년 1월 북한당국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고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민주 인사들을 초청하는 방송을 한다. 그리고 89년 3월 25일…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6.15 공동선언 중에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진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포함되어 있는 이 통일방안 합의 내용은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남과 북이 마련한 통일방안을 합의해 놓아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문익환 목사의 지론과 그의 고난에 찬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이다.
89년 방북 당시에는 반통일분열주의자들이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음은 물론, 재야운동세력 내에서도 영웅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처럼 힘겹고 외로운 방북을 통해 문익환 목사는 이미 통일을 보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38선이 그어지기도 전에 민족의 분단을 경험하였던 그가 이제는 휴전선이 걷히기도 전에 통일의 실마리를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을 점점 왜소하게 만든 대립과 분열 그리고 정신적 분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북한의 사전에서는 ‘종교’와 ‘목사’의 말뜻이 바뀌었다. 종교도 민족의 편에 서면 인민의 아편이 아닌 것이다. 남한에서는 기형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임수경 학생,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이 이어지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분열을 빌미로 이 땅에서 주인인 양 행패를 일삼으면서도 고마운 나라로 칭송받던 외세는 이제 남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방북사건 재판정에 선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장점을 칭찬해 주고, 서로의 의견에 동조해야 통일이 된다면서,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과의 회합, 찬양, 고무, 동조를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문익환 목사는 또다시 차디찬 감방으로 가야만 했다.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들듯이!” 말이다.
통일의 집
91년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는 출소 후 평생의 숙원이었던 듯 ‘칠천만겨레 통일맞이 운동’을 위해 뛰어다녔다. 다가오는 통일을 특정 세력이 아닌 민(民)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맞이하자는 통일맞이 운동은 문익환 목사 생의 결정체였다.
그러던 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열고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문익환 목사는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다. 1976년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래로 한번도 자신을 돌볼 틈이 없던 그의 심장은 너무도 허무하게 멎어 버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말 그대로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다. 재야는 물론 정계와 학계, 종교계의 조문이 잇따랐으며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 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문익환 목사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됩니다"라는 조전을 직접 보내왔다.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든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가 묻히는 날, 해고 노동자들이 말없이 그의 상여를 메고 언덕을 올랐다.
쌀쌀한 겨울 저녁에 불쑥 ‘통일의 집**’을 찾았다.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박용길 장로님께서 불청객을 반갑게도 맞이하신다. "통일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와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야"
염치없게도 맛있는 저녁밥을 얻어 먹고 문익환 목사님의 흔적이 가득한 통일의 집을 둘러보았다. 낡은 흑백 사진들, 누군가가 그려서 보냈을 그림들, 6차례의 수감생활로 얻은 수의와 수번을 비롯해 길고 긴 민주화 투쟁 과정의 유품들, 주변의 후배나 동료들이 보낸 선물들… 한국신학대학 제자들이 그려 보냈다는 ‘남남북녀’ 그림에도 통일의 염원이 가득 담겨있다.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수를 놓아 보냈다는 “최후의 만찬”도 눈에 띈다.
문익환 목사의 평생 애인이자 동지였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민(民)이 주인 된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대표를 맡는 등 문익환 목사를 대신하여 통일운동에 앞장 선다.
그리고 95년 “문익환 목사의 장례에 예를 갖춰주셨던 김 주석의 1주기를 맞아 조문키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615선언 이후에는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남쪽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가해 결성한 통일운동 상설협의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으로 남북공동행사를 이끌기도 하였다.
박용길 장로의 집이자 고 문익환 목사의 기념관이기도 한 ‘통일의 집’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님
이제 당신은 나에게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밤쯤에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 꽃밭에 유난히 큰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었거든요, 그 청초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당신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요 며칠 전 꿈에 본 해바라기의 푹 수그린 탐스러운 모습...... 정말 성숙한 인간성, 그러면서도 당신처럼 언제나 겸허한 모습.
당신과 같이 길을 가는데, 그것도 서울 거리를, 잘 익은 커다란 해바라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웃음으로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러던 차에 접견실에 들어서는 당신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 그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시를 지었던 거요. 그래서 "내 얼굴에서 피어나는 당신 / 해바라기 웃음이어라 / 해바라기 마음이 되어"로 그 시를 끝맺음했던 거죠.
해바라기가 내 마음에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 9월의 아침이었죠. 내 이름도 늦봄에서 '갈테야'로 바꾸면 어떨까요? 학생들이 나를 '갈테야'목사 라고 부른다니까. 오늘 북에 동조했다는 동조죄가 떨어졌군요. 고무 찬양죄도 당연히 떨어져야지요. 나는 정주영씨처럼 북을 찬양하지 못했으니까. 정주영씨가 고무 찬양죄에 안 걸린다면 나야 당연히 안 걸리는 거죠.
북쪽의 연방제 통일안에 동조함으로 북을 이롭게 했다는 건데, 동조죄가 떨어지면 이적 행위죄도 당연히 떨어지는 거죠. 그 대신 통일원이 구상하던 체제 연합 쪽으로 북을 끌어오고, 실행 가능한 교류부터 하자던 남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했고, 노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만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내가 이롭게 했다면 남쪽 을 크게 이롭게 한 건데.......
그러나 나는 이 죄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게 좀 아쉽군요. 나는 서로 고무 찬양해야, 서로 동조해야,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려고 안달을 해야 통일이 된다는 사람입니다.
검사의 항소 이유서를 보면 내가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거거든요. 서로 헐뜯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서로 엇먹기만 해야, 콩 심자면 팥 심자고 하고 팥 심자면 콩 심자고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제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면서 동조하게 되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해코지할 생각만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면서 일을 도모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내가 만난 사람은 북괴의 괴수이고 노 대통령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말하는 것이 궤변인가, 아니면 내가 만난 사람도 노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다름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하는 것이 궤변인가요?
광화문 네거리를 막아 서서 가고 오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 봤으며 좋으련만....... 항소 이유서를 쓸 때는 두통이 한창 심할 때여서 간단히 쓰고는 법정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이번 상고 이유서는 역사에 남긴다는 심정으로 성의껏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오. 내일 한빛교회 당신 옆에 가 있을게요. 해바라기 웃음 보러 나는 갈 테야.
1990.2.10
옥중에서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편지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먼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건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 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 첫새벽,
문익환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 문익환 시 "전태일" 부분
해방 후 구약 신학자로 활동하던 문익환 목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만나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문익환 목사는 불에 타버린 젊은 영혼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벌판의 히브리 민족에게서 한민족이 겪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로 자신의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한반도로, 38도선 이남으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지는 민족의 무대, 그리고 사상과 이념에 따라, 출신 지역과 종교에 따라, 사소한 의견의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핵분열하며 대립하고 갈등하며 강대국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하는 우리 민족. 그리고 그 안에서 그 모든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 문익환 목사는 이 분열과 죽음의 역사를 삶의 역사로 다시 쓰기 위한 희망을 전태일에게서 찾게 된 것이다.
1976년 성서번역작업을 차마 다 마치지 못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의 해맑은 투쟁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분열하는 자들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땀 흘리며 하나되는 길을 개척하는 '발바닥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에게 친구이자 스승이고 하나님이었다.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고통 받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농민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함평 고구마 투쟁*'으로, 철거촌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꽃다운 청춘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곧바로! 노동자 세 명이 강연을 부탁해도 달려가고, '발바닥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정치적인 상황이 어찌 되었건 곧장 달려갔다는 문익환 목사였다.
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 소속의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 되어 떠난 것이다.
나는 통일을 보았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종교와 이념과 성(性)과 계급, 계층과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었다. '발바닥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호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89년 1월 북한당국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고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민주 인사들을 초청하는 방송을 한다. 그리고 89년 3월 25일…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6.15 공동선언 중에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진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포함되어 있는 이 통일방안 합의 내용은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남과 북이 마련한 통일방안을 합의해 놓아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문익환 목사의 지론과 그의 고난에 찬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것이다.
89년 방북 당시에는 반통일분열주의자들이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음은 물론, 재야운동세력 내에서도 영웅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처럼 힘겹고 외로운 방북을 통해 문익환 목사는 이미 통일을 보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38선이 그어지기도 전에 민족의 분단을 경험하였던 그가 이제는 휴전선이 걷히기도 전에 통일의 실마리를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을 점점 왜소하게 만든 대립과 분열 그리고 정신적 분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북한의 사전에서는 ‘종교’와 ‘목사’의 말뜻이 바뀌었다. 종교도 민족의 편에 서면 인민의 아편이 아닌 것이다. 남한에서는 기형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임수경 학생,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이 이어지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분열을 빌미로 이 땅에서 주인인 양 행패를 일삼으면서도 고마운 나라로 칭송받던 외세는 이제 남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방북사건 재판정에 선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장점을 칭찬해 주고, 서로의 의견에 동조해야 통일이 된다면서,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과의 회합, 찬양, 고무, 동조를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문익환 목사는 또다시 차디찬 감방으로 가야만 했다.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들듯이!” 말이다.
통일의 집
91년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는 출소 후 평생의 숙원이었던 듯 ‘칠천만겨레 통일맞이 운동’을 위해 뛰어다녔다. 다가오는 통일을 특정 세력이 아닌 민(民)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맞이하자는 통일맞이 운동은 문익환 목사 생의 결정체였다.
그러던 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열고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문익환 목사는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다. 1976년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래로 한번도 자신을 돌볼 틈이 없던 그의 심장은 너무도 허무하게 멎어 버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말 그대로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다. 재야는 물론 정계와 학계, 종교계의 조문이 잇따랐으며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 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문익환 목사를 잃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됩니다"라는 조전을 직접 보내왔다. 전태일 열사와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든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가 묻히는 날, 해고 노동자들이 말없이 그의 상여를 메고 언덕을 올랐다.
쌀쌀한 겨울 저녁에 불쑥 ‘통일의 집**’을 찾았다.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박용길 장로님께서 불청객을 반갑게도 맞이하신다. "통일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와서 밥도 먹고, 회의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야"
염치없게도 맛있는 저녁밥을 얻어 먹고 문익환 목사님의 흔적이 가득한 통일의 집을 둘러보았다. 낡은 흑백 사진들, 누군가가 그려서 보냈을 그림들, 6차례의 수감생활로 얻은 수의와 수번을 비롯해 길고 긴 민주화 투쟁 과정의 유품들, 주변의 후배나 동료들이 보낸 선물들… 한국신학대학 제자들이 그려 보냈다는 ‘남남북녀’ 그림에도 통일의 염원이 가득 담겨있다.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수를 놓아 보냈다는 “최후의 만찬”도 눈에 띈다.
문익환 목사의 평생 애인이자 동지였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민(民)이 주인 된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대표를 맡는 등 문익환 목사를 대신하여 통일운동에 앞장 선다.
그리고 95년 “문익환 목사의 장례에 예를 갖춰주셨던 김 주석의 1주기를 맞아 조문키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615선언 이후에는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남쪽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가해 결성한 통일운동 상설협의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으로 남북공동행사를 이끌기도 하였다.
박용길 장로의 집이자 고 문익환 목사의 기념관이기도 한 ‘통일의 집’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님
이제 당신은 나에게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밤쯤에 화사하게 핀 코스모스 꽃밭에 유난히 큰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었거든요, 그 청초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당신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요 며칠 전 꿈에 본 해바라기의 푹 수그린 탐스러운 모습...... 정말 성숙한 인간성, 그러면서도 당신처럼 언제나 겸허한 모습.
당신과 같이 길을 가는데, 그것도 서울 거리를, 잘 익은 커다란 해바라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웃음으로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그러던 차에 접견실에 들어서는 당신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 그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시를 지었던 거요. 그래서 "내 얼굴에서 피어나는 당신 / 해바라기 웃음이어라 / 해바라기 마음이 되어"로 그 시를 끝맺음했던 거죠.
해바라기가 내 마음에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 9월의 아침이었죠. 내 이름도 늦봄에서 '갈테야'로 바꾸면 어떨까요? 학생들이 나를 '갈테야'목사 라고 부른다니까. 오늘 북에 동조했다는 동조죄가 떨어졌군요. 고무 찬양죄도 당연히 떨어져야지요. 나는 정주영씨처럼 북을 찬양하지 못했으니까. 정주영씨가 고무 찬양죄에 안 걸린다면 나야 당연히 안 걸리는 거죠.
북쪽의 연방제 통일안에 동조함으로 북을 이롭게 했다는 건데, 동조죄가 떨어지면 이적 행위죄도 당연히 떨어지는 거죠. 그 대신 통일원이 구상하던 체제 연합 쪽으로 북을 끌어오고, 실행 가능한 교류부터 하자던 남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했고, 노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만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내가 이롭게 했다면 남쪽 을 크게 이롭게 한 건데.......
그러나 나는 이 죄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게 좀 아쉽군요. 나는 서로 고무 찬양해야, 서로 동조해야,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려고 안달을 해야 통일이 된다는 사람입니다.
검사의 항소 이유서를 보면 내가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거거든요. 서로 헐뜯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서로 엇먹기만 해야, 콩 심자면 팥 심자고 하고 팥 심자면 콩 심자고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제 주장을 굽히고 양보하면서 동조하게 되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서로 해코지할 생각만 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 아니면 서로 상대를 이롭게 하면서 일을 도모해야 통일이 된다는 게 궤변인가요?
내가 만난 사람은 북괴의 괴수이고 노 대통령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말하는 것이 궤변인가, 아니면 내가 만난 사람도 노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다름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라고 하는 것이 궤변인가요?
광화문 네거리를 막아 서서 가고 오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 봤으며 좋으련만....... 항소 이유서를 쓸 때는 두통이 한창 심할 때여서 간단히 쓰고는 법정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이번 상고 이유서는 역사에 남긴다는 심정으로 성의껏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오. 내일 한빛교회 당신 옆에 가 있을게요. 해바라기 웃음 보러 나는 갈 테야.
1990.2.10
옥중에서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편지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먼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건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 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 첫새벽,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