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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전쟁사
Ⅰ. 당의 건국과 당 태종의 등극
고(高)·당(唐) 전쟁은 그 규모로서도 당대 최고였으며 참가한 나라의 숫자를 헤아려도 가히 세계대전이라 불릴만한 전쟁이었다. 수나라는 내부분열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침공에 나섰지만, 당나라는 우선 내부반란에 완전히 진압을 마치고 내정을 튼튼히 안정시킨 뒤 서방과 북방을 점령시킨 후에 마지막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벌였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제 2차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으로 의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진압은 뒤로 미룬채, 다시금 제 3차 고구려원정을 단행하였다.그러자 영양왕은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고구려로 망명와 있던 곡사정(斛斯政)을 수나라로 보내 전쟁을 피하려 하였고, 수 양제또한 내부의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고 곡사정의 소환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수 양제가 돌아가는 동안 태원지방에서 농민군의 습격을 받는 등 이미 왕조말기의 현상은 나타나기 시작한다.
616년 수 양제는 강도(양주揚州)로 가서 머물다가 반란이 진압되지 않자, 단양(남경南京)천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수 양제를 따르던 병사들은 북방의 병사였기 때문에 남쪽지방에 있었던 수 양제에 대해 불만이 많이 쌓였고, 결국은 618년 우문화급(宇文化及:우문술의 아들)에 의해 수 양제는 살해당하고 만다. 이 당시 관롱(關 )출신이며 수 양제의 이종사촌으로서 또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이(李)씨 가문의 ‘연(淵)’은 당국공(唐國公)이라는 명예적인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연은 거병하기 전 동돌궐과 협약을 맺고 관중(關中)을 근거지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리고 우문화급의 수 양제 살해를 들은 후에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당(唐)이라 정하였고 10여년간 각지의 호족세력들과 반란세력들에 대한 평정을 하였으며 태종대에는 국내반란의 진압과 더불어 북방 유목국가, 서역의 오아시스국가들과도 전쟁을 벌여 대 내외적인 팽창을 하였다.
<당 고조 때의 국내호족들에 대한 진압>
618년 6월∼11월 경주(涇州)의 설거(薛擧)·설인고(薛仁 )
618년 12월 도림(桃林) 이밀(李密)
618년 9월∼619년 2월 위주(魏州)의 우문화급(宇文化及)
619년 2월∼620년 4월 병주(幷州)의 유무주(劉武周)
619년 4월∼620년 7월 포주(蒲州)의 왕세충(王世充)
621년 3월∼5월 영주(營州)의 두건덕(竇建德)
621년 7월∼622년 12월 장남( 南)의 유흑위(劉黑 )
622년 3월∼624년 2월 역주(易州)의 고개도(高開道)
623년 8월∼624년 3월 난양(丹陽)의 보공석(輔公 )
<당 태종 때의 북방유목국가에 대한 정벌과 서역의 진출>
630년 이정(李靖)의 동돌궐(東突厥)정벌과 힐리가한( 利可汗) 생포
634년∼635년 이정의 토욕혼 정벌
634년 티벳과의 통교
640년 고창국(高昌國) 정복
641년 설연타(薛延陀) 제압
당나라 최고의 라이벌이자 가장 중국을 위협하였던 돌궐을 정벌, 북방을 안정시키고 서방의 토욕혼과 고창국을 정벌하면서 서북방의 위협을 일축시켰다.
그런만큼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한 당나라와 만주권에서 자주권을 지키고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치열했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고구려를 총 9번 공격하여 왔고, 그 마지막 9번째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하여 당나라는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아시아의 유일한 맹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의 창업자 고조 이연은 왕세충과 두덕건의 무리들을 없애고 당의 중국통일에 성공을 하지만 626년 차자(次子) 이세민이 현무문에 미리 배치해 놓은 병사들에 의해 장자(長子) 이건성(李建成)과 그의 동생 이원길(李元吉)은 죽고 그 후로부터 2개월후 고조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오르니 그가 당 태종(太宗)이다.
Ⅱ. 당과 고구려와의 초기 관계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최초 접촉은 영류왕2년(619년: 당 고조 무덕2년)이었다. 영류왕은 수와의 전쟁의 뒤처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급적 당과의 전쟁을 피하려 하였고, 당 또한 통일은 하였으나 아직까지 잔존해 있는 세력들에 대한 마무리 작업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정책은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고구려와 당과의 이러한 사정은 영류왕 5년 당나라는 자국 내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사람들을 돌려보냈고 고구려또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이들을 돌려보내는 이른바 포로교환으로 이어졌고, 영류왕 7년(624년: 당 고조 무덕7년)에는 당의 도사가 고구려로 와서 「노자」를 강연하였고, 고구려는 그 답례로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내었다. 이처럼 당 고조 때에는 고·당 사이의 관계가 한참 완화 되었지만, 태종 이세민이 등극하면서부터 고구려에 대한 강경노선이 펄쳐짐에 따라 두 나라사이는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된다.
당과 고구려사이의 긴장이 시작되자 관계개선을 위해 당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계기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고 더불어 고구려의 국경선이 그려진 봉역도(封域圖)를 보내줌으로서 고구려와 당의 경계를 확실히 정해 더 이상 전쟁을 하지말자는 의사를 내비추었다.
그리고 12년에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의 상황을 살피는 한편 가급적 전쟁을 피하여 하였으나, 현무문의 변으로 인해 황제로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의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으로 인해 당 고조때 성립되었던 화친 분위기는 깨어지고 두 국가 간에 긴장상태가 고조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 태종은 630년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고 이에 영류왕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면서부터 고구려와 당의 긴장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영류왕 23년에 태자 환권(桓權)을 당의 국학에 보내 입학하기를 청하였는데,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긴장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당나라와 화친을 위한 것이 아닌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당나라 국학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고창과 토번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국학입학을 계기로 화친을 칭하기 위해 보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고조된 분위기를 본다면 태자를 당나라에 보낸 것은 당의 상황을 공식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전쟁대비책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며 그러한 예는 고구려와 전연(前燕)과의 전쟁전에서도 나타난다. 고국원왕 5년 신성(新城)을 쌓는다. 이 때 신성의 의미는 전연의 침공을 대비한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고국원왕 9년에는 전연과의 전쟁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해에 세자를 연왕 모용황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세자를 연나라에 보내고 2년후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이 때의 세자예방은 두 나라간의 화친을 위해 간 것이 아닌 화친을 빙자한 정보수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영류왕때의 태자 국학입학도 이때와 상황이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아 왕에게 가장 믿을수 있는 존재인 태자를 공식적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부여해 준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일련의 사건들을 종합해 추측해 본다면 영류왕은 당의 강경론에 대응하여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자 국학입학에 대한 답례로 당태종은 영류왕 24년 직방부(職方部) 최고 수장인 직방낭중(職方郎中- 지도(地圖), 성곽(城郭), 군영(軍營), 봉수(烽燧)등 군사시설을 관장하는 관직)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로 보내었다. 직방낭중이라는 벼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신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정보수집을 위해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로 파견한 고위첩자였다.
삼국사기나 신·구당서에서는 고구려로 파견된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와 실을 파악한 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고구려내에 거주하고 있던 병사들까지 만나는 등 여유로움을 보이지만 고구려에서는 그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본다면 진대덕은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고등간첩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은 당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Ⅲ.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 시해사건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혹은 東部大人)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관리 180명과 영류왕을 시해한후 보장왕을 옹립시켰다. 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통설에 의하면 강경파를 대표하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굴욕적인 대당외교에 불만을 가져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영류왕은 이미 전쟁준비 돌입하고 있었고, 당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류왕은 이때 까지 알려진 바 대로 온건파가 아니었단 말인가?
서병국교수는 <고구려제국사>에서 영류왕이 강경파이고 연개소문이 온건파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의 온건파입장에서 영류왕의 전쟁준비가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한다. 과연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외교적 입장이 그런 것 일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류왕은 온건파도 강경파도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왕이 펼치는 외교술에 유화책만으로 기울 수는 없고, 강경한 정책만으로도 흘러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교란 어느한 방향으로만 흘러갈 수 없다.
만약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외교를 한다면 고구려는 영류왕이전 이미 망했을 것이다. 영류왕 이전에도 전쟁을 하다가도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조공이라고 하기보단 전쟁에 대한 소기의 성과가 이루워져 더 이상의 전쟁이 필요없을 때나 적을 다독거릴 유화책으로 사신을 보내어 선물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류왕의 외교책(사신교환같은 온건책과 천리장성축조의 강경책 그리고 태자의 국학입학과 조공을 빙자한 사신파견등의 정보수집)은 군주가 지녀야 할 지극히 정상적인 정책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연개소문도 마찬가지이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장왕을 옹립시킨 그 이듬해(643년)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확실히 그 전대왕인 영류왕의 정책과는 다른 온건적인 색깔을 띤다. 나는 영류왕시해 사건 직후 연개소문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의 영류왕시해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영류왕의 강경책이후 연개소문의 집권과 어울러 온건정책으로 변했다는 것은 연개소문과 영류왕과의 전쟁에 대한 시기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영류왕과 함께 죽인 180명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입장적 차이가 아닌 귀족들 간의 입장 차이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영류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영류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죽인 것 사건이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 사건이라로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당시가 비상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영류왕과 왕을 따르는 귀족들과 연개소문을 대표로 하는 반대파 귀족들의 대립에서 파생된 것이 피 비린내 나는 시해사건으로 결말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도교수입은 고구려인에게 정신적 구심점을 새로이 만들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을 연장시키기 위한 정책 중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당의 전쟁준비(644년)
644년 7월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에 대한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3년전인 보장왕 원년(642년)에는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수입하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도교라는 종교를 수입함으로 백성들에게 새로운 구심점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좋은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당나라는 도교전파를 위한 도사(道士)와 숙달(叔達) 여덟명을 보냄으로서 종교전파를 빙자한 당나라의 공식적인 간첩을 보냈다.
삼국유사 권3에는 당에서 온 도사들이 국내에 유명한 산천을 진압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포교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국을 떠돌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을 연장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라를 공격하였고 고구려에 대한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당과 신라의 접촉을 막았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664년 1월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에 사농승 상리(司農丞相里) 현장(玄奬)을 사신으로 보냈다. 사신파견의 명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중재를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침략을 구실로 한 당의 고구려침략의 명분을 또 하나 만들기 위한 사신파견에 불과한 것이었다. 현장과 대면한 연개소문은 현장의 요구조건인 신라에 대한 침공중지에 대한 것을 일축하고 사실상 당에게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현장의 보고를 받은 당 태종은 고구려 침략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둔위병조참군 장엄(蔣儼)을 고구려에대한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보낸다. 장엄은 연개소문에게 강경한 어투로 “남의 나라를 침공하지 말라”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연개소문은 장엄을 토굴속에 가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전쟁준비에 돌입하지만 여러 대신들은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당 태종의 결정에 반대하며 나선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楮遂良)은 “이미 천하는 안정되었는데, 굳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정벌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펼쳤다. 그러나 당나라 군 수뇌부 최고의 장군이었던 이적은“예전에 위징(魏徵)의 건의로 인해 설연타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는데, 지금 설연타가 커져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만약에 그 때 공격을 했다면 북방은 평정되었을 것이다”라는 논리를 피며 당 태종의 고구려정벌에 찬성하였고 당 태종 또한 이적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에 저수량은 또다시 “2∼3명의 맹장과 4∼5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간다면 충분히 평정할 수는 있겠지만, 안전한 곳을 버리고 험(險)을 천자가 간다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라며 반대를 하였으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폭정으로 인해 고구려의 백성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쳐 군대를 출병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7월 23일 수장작대감( 將作大監) 염인덕(閻立德)을 시켜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의 3개 주에 선박 4백 척을 만들게 하고, 소경(小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영주(營州)와 고대인성(古代人城)에 군량창고를 만들어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7월 26일에는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에게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군사들과 해(奚)·거란(契丹)·말갈(靺鞨)등의 호군(胡軍)을 이끌고 요동의 형세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7월에 출발한 장검군은 장마에 의해 불어난 요하 때문에 군사들을 요수 건너편으로 보내지 못하고 소수의 별동대만을 파견하여 요동의 지리와 형세를 살피는 등 약 5개월동안을 요동에 대한 정보에 시간을 보내고 11월 하순 태종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돌아가 요동의 자세한 지형과 방어 실태에 대해 보고하였고 보고를 들은 당 태종 또한 만족하였다고 한다.
영주도독 장검이 요동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파견되어 있던 시기,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白金:은)과 함께 관리 50명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신·구당서에는 있다. 왜 연개소문은 전쟁직전 당나라에 뇌물과 함께 관리를 보냈을까... 물론 여러 책에 있는 것처럼 단순한 뇌물 차원이던가, 전쟁지연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과연 전쟁의 시작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관리를 보낸 것일까? 만약 백금만을 보냈다면 뇌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50명이나 되는 관리를 궁중숙위로 보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숙위란 후국(侯國)왕들의 자제들이나 왕족들이 당나라 궁중에서 생활하면서 예식행사가 있을 때마다 황제와 함께 나아가는 직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국 사람으로 당나라의 민감한 궁중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직책중 하나가 바로 숙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이 계략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러한 명분을 내세워 당나라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일 뿐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이러한 생각을 꽤 뚫어 보고 사신을 감금시켜 버렸다. 당 태종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당 내부의 정보유출방지하기 위해 고구려 사신들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이었다. 고구려 사신들에게서 당 군사의 움직임에 대한 노출을 방지 시킨 다음 10월 중순 태자 ‘치(治)’에게 분조를 명하고 태자태부(太子太傅) 방현령(房玄齡)에게는 수도 방위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후 낙양으로 가서 정원숙(鄭元璹)에게 고구려원정에 대하여 조언을 들으려 하였으나 정원숙은“요동까지는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군량 수송에 큰 어려움이 따르며, 고구려는 수성에 강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으나, 당 태종은 “현재 우리의 국력은 수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라는 말로 정원숙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장검으로부터 요동의 방어실태와 지형파악에 대한 보고를 들은 당태종은 11월 하순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부총관(副總管)으로서 노주도독(瀘州都督) 좌난당(左難當)과 좌영군(左領軍) 상하(常何)를 임명하였고 장금수(張金樹), 염인덕( 仁德), 유영행(劉英行), 장문간(張文幹), 방효태(龐孝泰), 정명진(程名振)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아 회하(淮河)·영(嶺)·협( )의 군사 4만 명과 낙양에서 소집한 정예병 3천 명 그리고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였으며,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부총관으로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을 임명하여 그를 보좌하게 하였고 장사귀, 장검(張儉), 집실사력(執失思力), 계필하력( 苾何力),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 강행본, 국지성, 오흑달(吳黑 )을 행군총관으로 예속시켜 보기(步騎) 6만 명과 함께 산악전쟁에 익숙한 난주(蘭州: 난주는 감숙성 남부와 고란산(皐蘭山)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1500m의 고산 지방이기 때문에 산악전에 익숙하다.)와 하주(河州)지역에서 항복한 호병(胡兵)을 거느리게 하였고, 12월 초에는 유주(幽州)로 집결하게 하였고 행군총관 강행본과 구행엄(丘行淹)을 시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등을 만들게 하였고 새로운 무기들을 개발하게 하였다. 당 태종은 군사들이 집결하자 연개소문을 비방하는 조서를 발표하여 친정(親征)에 대한 명분과 승리할 수 있는 이유를 밝혔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박해하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있으며, 이제 또한 나의 명령을 위반하니 그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수양제는 백성들을 난폭하게 다룬 반면에 고구려왕은 제 백성을 사랑하였다. 수양제는 혼란한 군대로 단결된 고구려군을 공격한 까닭에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필승의 다섯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로 강대한 국력으로 약소한 나라를 치는 것이다.
둘째로 순리로써 역리를 친다는 명분이 있다.
셋째로 잘 통제된 군대로 적의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넷째로 편안한 군대로 피곤한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백성모두에게 호응을 받는 입장에서 백성의 원망을 받고 있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이기지 못할 염려가 어디 있겠는가? 이 뜻을 백성에게 공포하노니, 그 누구도 승리에 대한 의구심을 품지 않도록 하라 ”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내쫓은 당 태종의 이러한 명분은 그의 이중적인 성격과 명분자체가 얼마나 보잘 것이 없던 것인가를 반증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 태종은 645년 2월 초 낙양(洛陽)으로 가서 6군(軍)을 조직, 조서를 내려 태자‘치(治)’에게는 분조(分朝)를 명했고 태자태부(太子太傅) 방현령(房玄齡)에게는 수도 방위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후 직접 출병하려 하였으나 당 태종의 심복인 당 태종의 심복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울지경덕(蔚遲敬德 혹은 위지경덕)은 “만약 친정을 한다면 장안과 낙양의 재화와 무기창고는 빌 것이고 수비병도 없어질 것이다.
황제께서 직접 요동으로 나가게 되면 양현감(楊玄感)과 같은 이가 또 다시 나올 것이다.”하여 고구려정벌에 따른 당나라 내부의 불안이 가시화될까봐 우려하였고 방현령또한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당 태종은 오히려 울지경덕에게 좌1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에 임명하고 전쟁에 참가시켰다. 2월 12일 당 태종은 낙양을 떠나 3월 9일에 정주(定州) 도착하여 또 다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첫댓글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