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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9 [1947년] 여운형 피살
← 항일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해방당시 국내 정국을 주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한지근에 의해 피살됐다. 향년 61세였다.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1889~90년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901년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했으며, 1902년 관립우체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수학을 단념하고, 1906년 농사를 지으면서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907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으며,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고향인 양평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다. 1908년 국채보상 단연동맹(國債報償斷煙同盟)을 조직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설했으며, 초당의숙(草堂義塾)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11년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군호를 안 쓴다고 강릉으로 퇴거 명령을 받았다. 1913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및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면서 조국 광복의 웅지를 펼치다가 중국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1917년 졸업했다.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1월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조선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여운형은 '정부'의 구성에 반대했지만, 임시정부의 제1차 내각의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하라[原敬]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일본 조야는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921년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여 한국독립과 중국혁명과의 유기적인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5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고, 제3 인터내셔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등 활발한 국외활동을 펼쳤다. 1929년 상하이복단대학[上海復旦大學] 축구단을 인솔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정책을 통렬히 비난했다. 같은 해 7월 상하이 랴오둥[遼東] 운동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930년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32년 7월 출옥했다. 이후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는데, 국외에서와는 달리 합법적인 활동과 비합법적인 활동의 험난한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후 〈조선중앙일보〉의 본사와 각 지부에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배치하여 활동하게 했다. 또한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보도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일장기말소사건). 여운형은 1940년 일본 도쿄로 세계정세를 포착하고 유학생을 규합하여 해방될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다가,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43년 집행유예로 출옥한 후 은거하며 청년 지도에 진력했다.
1944년에는 해방에 대비하고자 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조직했고, 해방 후에는 이를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어 인민당 당수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피살되었다.
[1898년] 독립운동가 강두영(姜斗永) 출생
1898. 7.19~1960.10. 8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북내면(北內面)에서 이원기(李元基)·원필희(元弼喜)·조경호(趙經鎬) 등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현암리(峴岩里)·장암리(長岩里)·덕산리(德山里)·와룡리(臥龍里) 등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규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후, 당우리(堂隅里)의 공북학교(拱北學校)에 모인 8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동년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897년] 독립운동가 이치모(李致模) 출생
1897. 7. 19 평남 강동~1960. 12. 27.
호는 치암(致庵).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동금융조합 서기로 강동군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해 9월 표영준(表永俊)·이석돈(李錫敦)·이성규(李成奎) 등과 함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1920년 8월 이환욱(李桓郁)·이득수(李得洙)·이성규·이석돈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농민단(農民團)을 조직했다. 주로 농민과 탄광부를 중심으로 결성된 농민단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같은 해 9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광복군총영으로부터 평양·강동·겸이포 등지의 일제 중요기관과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9월 18일 광산용 다이나마이트로 폭탄을 만들어 이성규·이근배(李根培) 외 10여 명과 같이 야간을 이용하여 강동경찰서를 습격하고 일본 경찰 수명을 살상했다. 또한 30일에는 이근배·이득수·최인택(崔仁澤)·서달선(徐達善)·최선식(崔善植) 등과 함께 관내 부호인 이관식(李寬植)으로부터 군자금 142원을 모금했으며, 10월 9일 서상목(徐相穆)으로부터 100원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주력했다. 1920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31년 만 11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출옥 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65년] 이승만(李承晩, 1875.3.26~1965) 전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남 이승만! 1965년 오늘 망명지 하와이에서 아흔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해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이다.
그의 유해는 타계한 지 나흘 만인 7월 23일 미국 공군수송기에 실려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효상 국회의장 등 3부 요인과 외교사절 등이 유해를 맞이했다. 그의 유해는 3군 의장대에 의해 세종로를 거쳐 그가 거처했던 이화장으로 운구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
← 레닌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식 모습. 왼쪽으로 사람들로 수놓아진 대회 마스코트 미샤가 보인다.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 비스마르크(1880)
1870년 7월 19일 보불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을 격파함으로써 황제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하려고 했다.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했으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바젠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야전군을 요새에 가둠으로써 전쟁은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마크 마옹 원수가 지휘하고 나폴레옹 황제가 가담한 프랑스의 주력부대가 바젠 구출작전을 펼쳤던 스당 전투는 프랑스 군대의 항복으로 끝났다. 결국 휴전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됨으로써 비스마르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는 확고해졌다.
[1834년] 프랑스 화가 드가 (Hilaire-Germain-)Edgar Degas 출생
← 드가가 종이에 그린 파스텔화 <기다림>(1882경), 48.2×61cm
1834년 7월 19일 태어남 / 1917년 9월 17일 죽음
드가는 발레리나들의 그림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프랑스의 화가이다. 은행가이면서 미술 애호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1855년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1854년 이탈리아에 가서 정교한 인물 소묘로 유명한 안드레아 만테냐, 산드로 보티첼리, 한스 홀바인, 니콜라 푸생 등의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에 돌아와 친구들의 초상과 역사적인 주제를 주로 그렸다. 1862년 클로드 마네를 만나고 카페 게르보아를 출입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곡예사', '세탁부', '무희', '말'과 같이 움직이는 소재를 뛰어난 데생에 의거해 사실적으로 표현한 소묘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말년에는 시력을 잃어 촉각에 의존해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1859년] 언더우드 (미국 선교사) [Underwood, Horace Grant] 출생
1859. 7. 19 영국 런던~1916. 10. 12 미국 애틀랜틱시티.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교육자, 성서번역가.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거쳐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했다. 1890년 뉴욕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12년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884년 7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이듬해 감리교 목사인 H. G.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1886년 한국 최초의 고아학교(고아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경신학교의 전신이다.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89년 한국예수교성교서회를 창설하여 문서를 통한 선교실무를 관장했으며 〈한국어문법〉을 편찬·간행했다. 1897년 〈그리스도 신문〉 창간, 1900년 기독교청년회 조직,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설치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에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세브란스 의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평양 장로교신학교 등의 설립에 주도 역할을 했으며, 성서번역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여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했다. 주요저서로는 〈한영사전〉·〈영한사전〉(1890)·〈한국의 소명 The Call of Korea〉(1908) 등이 있다.
[1981년]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전 우승
1981년에는 청소년들이 다시 최고봉에 올라 명실상부하게 야구에 관한 한 세계 최고수준에 오르게 됐다. 미국 오하이오주 뉴워크에서 벌어진 제1회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동열 김건우가 앞장선 한국은 3전2선승제로 벌어진 결승전에서 미국을 연파하고 영광의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1979년] 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1977년] 중국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복권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1947년]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 아웅산(Aung San, 1915.2.13~1947) 암살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縣)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鈴木] 대좌(大佐)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海南]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反)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1799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발견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 전략요충지 로제타에서 요새 터 파기를 하던 중, 한 장교가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가로 72㎝·세로 114㎝ 크기의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돌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와 이를 번역한 이집트 상형문자, 서민들이 즐겨쓰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중요한 돌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건만 2년 뒤 영국군에 패배하는 바람에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때까지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은 터라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샹폴리옹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해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형문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표의(表意)문자라고 생각한 데 반해 샹폴리옹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表音)문자일 수 있다며 주류와는 다른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돌에 쓰여진 그리스 문자는 돌이 기원전 196년에 제작됐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비임을 확인해주었다. 상형문자에도 반드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들어있을 것으로 믿은 샹폴리옹은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한 기호에 주목했다. 어렵게 해독한 결과 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린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도 찾아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이집트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나게 됐다.
샹폴리옹의 발음기호 찾기는 1822년이 되어서야 27개 파라오(왕)의 이름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이집트 5000년의 신비가 풀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밖에
2001년 헌법재판소, 전국구 선출방식 위헌 결정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그룹해체 시작)
1992년 김달현 북한 부총리, 판문점 경유 서울도착
1989년 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선출
1988년 납북-월북작가 1백여명의 해방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해금)
1985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개통 (동래구 청룡동∼부산진구 범7동 광장간)
1982년 한국-자메이카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킹스턴)
1981년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0년 은행-보험-증권기관 임직원 431명 숙정
1967년 김도연 박사 별세
1962년 미국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가상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요격 성공
1962년 美 건물 13층 높이의 ‘맘모스’기구 발사에 성공
1957년 미국 네바다서 원자로케트탄 첫 실험
1956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 등의 유엔가입 촉구에 관해 언급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5명에 사형 판결 (8월13일 집행)
1950년 미국 국무성, 한국사태에 미국정책(한국백서) 발표
1949년 프랑스, 라오스 독립 승인
1938년 최초의 우리말 사전(문세영) 발간
1933년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4년 조선일보, 편집방침을 변경(1면에 뉴스를 게재)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세계대회 개최
1907년 고종 강제퇴위(양위조칙 발표)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의 함락으로 태평천국의 난 종식
1848년 美 뉴욕주 세니카폴스서 ‘여성권리대회’ 개막
1846년 최초의 광도성표인 하버드 광도측정법을 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 피커링 출생
1840년 칠레의 대통령(1889-91) 발마세다 출생
1455년 세조, 단종 폐위하고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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