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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21일(주일) 주일낮예배♣
성경:고린도전서13:4(신279P)
제목:사랑의 갈림길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서론
2월14일(한국시간)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벌어진 남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전은 일종의 ‘반전 드라마’였습니다.
111.12m 트랙 위를 13.5바퀴 도는 이날 경기에서 마지막 코너를 도는 시점에 이정수(단국대).성시백(용인시청). 이호석(고양시청)이 나란히 1~3위를 기록하며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금.은.동 싹쓸이’가 연출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점을 코 앞에 두고 이호석이 끼어들기를 시도하다 임피딩(밀치기) 반칙으로 성시백과 함께 넘어지는 바람에 이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까? 바로 이것이 시기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시리즈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1.What:사랑이 가서는 안될 길은 시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할 때 ‘~하지 아니 하며’ 라는 식으로 부정형으로 정의 하는 것이 8개이고, ‘~하며’ 라고 긍정형으로 정의하는 것이 7개입니다. 사랑엔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예.’ 사랑은 온유합니다. ‘예.’ 사랑은 투기합니다. ‘아니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아니오.’ 사랑은 교만합니다. ‘아니오.’ 우리는 예와 아니오를 잘 구분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 예스가 아니라, 사랑이 아닌 것을 버릴 줄 알아야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부정형의 첫번째인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입니다.
원 번역으로는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 15개의 사랑의 정의는 다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기하다"의 단어는 ‘젤로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가 오묘합니다. 두 개의 어찌보면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 의미로 열정적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나 대상을 향해서 뜨겁게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zeal(열정)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열심당이라는 당파가 있었습니다. AD 70년의 유대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당파입니다. 이 열심당이란 당파를 젤롯이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부정적 의미로 시기하다, 투기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jealousy(시기)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번째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들처럼 사랑도 갈림길에 있습니다. 열정적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시기하는 사랑은 좋지 못합니다. 바울은 사랑장에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시기로 발전하지 말고 아름다운 열정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인지 잘못된 시기의 사랑인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Why:왜 사랑이 가서는 안될 길이 시기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의 이 시기는 사랑과 열정이 없는 부정적 의미의 ‘시기’입니다. 오히려 차가운 ‘시기’입니다.
차가운 시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엇을 사랑하거나,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 ‘시기’를 정의하기를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성취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는 사랑의 반대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시기심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엇만을 사랑합니다. 형제간에 다투고 시기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가진 부모의 인정이 탐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 명절에도 어느 가정은 자녀들이 모였는데 기쁘고 즐거운 명절이 아니라 우울하고 걱정스런 명절이었다는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신데 부모님 모시는 문제라든가 부모님 돌아가시면 부모님의 재산 나누는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부모님 재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싸우고 급기야는 법정까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바로 이것이 부모님의 재산이나 보고 사랑하였다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친구 간에 시기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지혜나 힘, 또는 물질이나 명예가 탐이 나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1등 할 때 시기심이 나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낙담하게 됩니다. 친구가 상을 받거나 자기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때 배가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목회자에게도 다른 목회자가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한다고 하면 은근히 배가 아프고 화가나는 것도 시기입니다. 그런가하면 목회자가 교인들의 반대로 교회에서 밀려나오면 은근히 좋아하는 목회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는 자기가 아는 목회자를 그 교회에 목회하도록 하기 위해 장로들을 부축이고 목사님을 반대하는데 앞장서는 목회자들도 보았습니다.이것도 시기심 때문인 것입니다.
예화)
어떤 수도사가 사막에서 고행하고 금식하며 수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귀가 그 수도사를 넘어뜨리려고 달라붙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로 유혹했습니다. 수도사는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먹을 것으로 유혹했습니다. 역시 수도사는 까딱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물질 등 그 외에 수많은 것을 가지고 유혹했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마귀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낙심된 상태로 돌아오던 도중 한 늙은 마귀를 만났습니다. “자네! 왜 이렇게 낙심되었나?” 젊은 마귀가 말했습니다.
“저 동굴 속에 있는 수도사는 정말 지독하네요. 아무리해도 넘어뜨리지 못하겠어요.” 그때 늙은 마귀가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 비법을 하나 가르쳐주겠네. 그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해보게” 하고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젊은 마귀가 늙은 마귀의 충고대로 그 수도사에게 돌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사님! 당신의 친구가 며칠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답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시기심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Love is not jealousy."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먼저 사랑이 가야할 길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오래 참음의 길입니다. 온유의 길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서는 안되는 길이 있습니다. 투기의 길입니다. 질투의 길입니다. 사랑이 그 길로 가게 되면 걸려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사단이 와서 유혹을 합니다.
"괜찮아, 따먹어!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마음 속에 질투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만 유독 선악을 아셔야 되는 거야?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하와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어떻게 생각하면 시기심의 발로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두 형제가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의 제사는 열납지 아니하셨습니다. 동생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형은 동생에 대해서 시기했습니다. 결국은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가인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결국은 시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에 대해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까? 바로 가인과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아버지가 동생만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에게만 채색옷을 지어서 입혔기 때문입니다. 결국 형들은 동생을 시기했습니다.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동생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새로 등록한 성도가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그리고 목사님이 그분을 인정하고 칭찬하면 새로 등록한 새신자를 미워하고 시기하여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분들은 없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자기보다도 자기 신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신하에게는 만만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기심 때문에 자기 신하를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쫓아다녔습니다. 그가 누구였
습니까?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었습니다.
부교역자가 설교를 잘하고 성도들이 그 목사님을 따르고 좋아할 때 담임목사님이 마음에 시기심이 나는 것은 사울왕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을 위해서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형은 자기 동생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즐겨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탕자의 형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고 교도소에 들락날락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왔을 때 환영해 주고 기뻐하기보다는 경계하고 언제 또 옛날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하면서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탕자의 형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은사들이 다 있었습니다.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서로 시기했습니다. 은사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상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에 대한 시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시고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었을 때 모두가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심은 그들의 하나님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심은 미워하고 죽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시기가 생기고 사랑하면 시기심을 이길 수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How:시기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삶에서 어떻게 시기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경은 아래의 다섯 가지 단계를 통하여 시기심을 제거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1).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교하는 것이 시기의 뿌리입니다. 비교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남이 나보다 잘하는 것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남보다 잘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성경은 비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어느 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은 어떠한 죽음을 당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의 일은 너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 21:2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데 힘쓰지 남의 사명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갈 6:4)
이 말씀을 자녀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해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만족하고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무슨 점수를 받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상을 받든지 안 받든지 그런 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경쟁 중심의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시기심에 가득차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시기심은 실상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시기심을 느낄 수 있고 비교하지 않고 시기심을 안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다른 목회자와 교회를 비교하기 때문에 시기심이 발생하고 이것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예화)
옛날 영국 런던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 세분이 계셨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님인 F.B 마이어라는 분이며,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젼 목사님이며,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세 분 중에서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서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기도하기 좋았는데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깐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속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옵소서" 아무리 기도해도 그 시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이어 목사님께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의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음성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과 캠벨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메워지도록 해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시옵소서," 이 세분은 아름답게 주를 위해서 사역했으며, 이 세 교회는 다함께 성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이해에 피해가 없는 경우에는 그를 위해 기도하지만 그에게서 시기와 질투를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앞의 목사님과 같이 기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내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박는 자를 위해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2). 나의 장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께서 내 장을 지으시고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시 139:13)
하나님께서는 나를 독특하게 만드셨습니다. 시기심은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시기심은 불안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독특한가를 인식하지 못할 때에 시기심이 일어납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기심을 이기는 비결은 나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시 139:15)
하나님께서 나를 독특하게 만드셨을 뿐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삶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한 계획을 깨닫게 될 때에 시기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특별한 계획을 깨달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키가 조금 더 크게 만드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를 한국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주셨습니다. 남을 시기하지 말고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 빛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내가 좀더 가져야만 행복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남들과 같아져야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질을 더 소유해야 행복해지리라고 믿기 시작하면 내가 물질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나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물질을 더 얻고자 하는 욕심이 나의 삶을 삼켜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주라고 하신 물건에 애착이 있어서 내가 붙들고 있으면 내가 그 물건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물건이 나를 소유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5)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을 즐기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내가 내 자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즐기고 가지지 않은 것들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내가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절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만족의 학교에 입학해야 합니다. 우리가 첫번째로 배워야 할 제목이 “내가 가져야 할 가치 있는 것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만족이란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신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일이나 어제가 아니라 지금 만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4).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사랑은 시기 질투의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시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9).“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자연적으로 그렇게 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가 쉽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현 세상이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현재 최고로 잘 팔리는 책이 이 점을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배울 수가 있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
시기심은 우리를 정반대로 행하게 합니다. 시기심은 우리를 남이 실수할 때에 기뻐하게 하고 남이 성공할 때에 울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이 기뻐할 때에 기뻐하고 남이 울 때에 웁니다.
당신이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으면 시기심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방해함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기쁨들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이 승진할 때에 당신이 시기하게 되면 그 기쁨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때에만 기뻐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기쁨들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나 시기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에 함께 기뻐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대부분이 행복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일들이 항상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남의 기쁨을 나누면 그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아도 나를 기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남의 기쁨을 통하여 나도 기뻐지는 이익을 얻게 됩니다.
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도록 하십시오. 물질적인 것들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맙시다. 10년도 계속 되지 않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지 맙시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초점을 맞춥시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 별로 관계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시기심을 없애는 방법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나의 평생 사명을 완성하려고 열중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것
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what then:,결과
시기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창4:5~7 형제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삼상18:8~9 생명의 은인을 원수로 여깁니다.
잠14:30 뼈를 썩게 합니다
행5:17 죄없는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갈5:19~21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약3:16 악한 일이 일어납니다.
롬1:31~32 사형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시기심이 있으면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이 있으면 시기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십시다.
그는 주인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주인이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인의 아들에 대해서 전연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과 주인의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주인의 명에 따라서 주인의 고향에 가서 주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의 엘리에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적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자기의 친구를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친구를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자기의 친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다윗의 친구요,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의 정적과도 같은 사람이었지만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업적과 명성을 시기하면서 그보다도 더 나아지기 위해서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그 소식이 감옥에 있는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1:18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가 누구였습니까?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있으면 모든 시기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영화 "아바타"의 관객이 천만이 넘었다고하는데도 보지 못하였다가 설 연휴에 목사님들과 함께 아바타를 관람하였습니다.3D로 보아야 더 실감이 난다고 하는데 그냥보았습니다.
3시간의 상영시간이 언제 끝난지 모를정도로 정신을 딴데 두지 않고 보았습니다.영화에 몰입하면서 우리의 설교도 이런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습니다.
영화 내용 중에서 오늘 본문과 관계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진 제이크는 나비족의 아바타와 링크가 되어 나비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의 속 마음은 인간의 것입니다.그러나 나비족의 마을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내는데 성공하여 성인식까지 거치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도자의 딸이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제이크를 이용하여 판도라 행성의 천연자원을 빼앗아 막대한 부를 얻기 위해 첨단의 장비로 공격해 오는 인간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신뢰와 교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비족의 인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I see you(나는 당신을 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이룩하지 못한 것을 이룩한 사람이 있습니까? 시기하지 말고, 오히려 칭찬해 주고 축하해 주고 함께 더불어서 기뻐해 주십시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옛날 초등학교 도덕 책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의 경우라 할 것입니다. 두 형제가 농사를 지어 가을 추수를 끝냈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형님 댁엔 식구가 많으니까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없다”면서 깜깜한 논으로 가서 형님 몰래 많은 양을 형님 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형님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시작했으니 소용되는 곳이 많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밤중에 논으로 나가 자기의 벼를 동생의 낟가리에 갖다 쌓았다. 날이 밝아 논에 나간 형제는 낟가리의 크기에 조금도 변함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에도 형제가 지난밤처럼 서로 볏단을 옮겼지만 그 이튿날에 보니 낟가리의 크기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셋째 날 서로 볏단을 날라 주다가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는 까닭을 알고는 볏단을 내던지고 한참동안 얼싸안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꾸며낸 옛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형제의 이름을 아십니까? 이성만, 이순 형제입니다. 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으로 연산군 때 이들을 기념하는 효제비가 세워졌고, 지금 이곳엔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표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은 시기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시기와 질투가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