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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거절
-로마서 10장-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현재의 거절에 대해 다룬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왜 현재의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1. 거절의 이유(10:1-13)
핵심 단어는 의(義)이다. 유대인들은 의를 원하였으나 그릇된 방법으로 얻고자하였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묘사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무지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적인 사람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보고서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두 종류의 의를 언급한다. 즉, 율법을 순종하여 얻는 행위 의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 의이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의에 순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믿음에서 맹목적인 종교로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율법에 매달렸으며,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길을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율법의 지배를 종식시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모세의 율법은 더이상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로 인간을 다루신다. 율법의 의는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되어 있으며, 믿음의 의는 신명기 30장 12-14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 신명기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도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것임과, 그리스도가 죄인들 가까이 계셔서 구원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된다. 6-8절은 바울이 신약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구약의 구절들을 사용한 좋은 예이다.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율법이 그들에게서 멀다고 말하지 않도록, 특히 이스라엘이 나라들 가운데 흩어지게 될 때에 적용하여(신 32:1-55)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러 하늘에 가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입술과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바울은 이것을 곧 말씀(요 1:1)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다시 하늘에서 불러오거나 또는 지하 세계에서 끌어 올릴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에 있어서, 믿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마음에 믿을 때에 오며,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고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대의 어떤 유대인들은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요 12:42-43).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공개적으로 그를 고백할 때에 그의 믿음이 증명되며 의의 선물을 받는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 28장 16절(롬 9:33 참조)을 인용한다. 본래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는데, 성령은 그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하실 것이라고 뜻을 부연하신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3절에서 바울은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유대인만이 아닌 것이다 ! “차별이 없다.“"
롬 10:14-17
2. 거절에 대한 치료책(10:14-17)
여기서 순서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전도자가 파송을 받고 주의 말씀을 전파하며, 죄인들이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죄인이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구원을 받는다 ! 여기서의 논점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7절).
15절에서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설립될 때 완전히 성취될 구절이다. 그들의 메시야가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에 이스라엘이 누릴 기쁨을 생각해 보라 ! 바울은 평화의 복음을 오늘날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것으로 적용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이다(엡 2:13-17).
우리는 선교사들을 이방 나라들에 보내는 근거로 로마서 10장 14-15절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물론 잘하는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복음을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전파하는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파하는 이유는 로마서 1장 16절 때문이 아니라(“첫째는 유대인에게“) 로마서 10장 14-15절 때문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부담감을 나누어 진다면 복음을 그들과 함께나누고 싶을 것이다. 이방인이건 또는 유대인이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태도는 어떠한가? 이사야 53장 1절에서 말하듯 “누가 믿었는가?“의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날에(요 12:37-38), 그리고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동안에 불신앙으로 돌아섰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오늘날 불신앙 가운데 정착하게 되었다. 바울은 18절에서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자연을 통한 말씀조차) 온 세계에 미쳤으며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핑계할 수 없음을 밝힌다."
3. 거절의 결과(10:18-21)
이스라엘이 거절한 결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향하셨으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불러내시게 되었다(행 15장 참조). 그러나,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명기 42장 21절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시기가 나게 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사용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6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것이며, 이방인들은 그를 발견하고 그의 구원을 찾게 될 것임을 알리셨다.
구약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수준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 구절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리고, 두 부류 출신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곳도 없다. 구약에서의 계획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흥왕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에 왕국을 건설함으로써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자비가 이방인들에게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11:11).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다고 판단하시며, 은혜로써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려는 방법이 갈보리의 일로 가능하게 되었다(11:32).
로마서 10장 21절은 오늘날도 해당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민족이 맹목과 불신앙 가운데 버림받았으나(고후 3:15-4:6/롬 11:25), 잃어버린 이방인들에게 그러하듯이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찾으신다.
오늘날 말씀을 듣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교회가 올리워 간 후 환란 기간이 시작되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교만과, 영적으로 눈멀었음을 비판하는 대신, 그들이 우리에게 성경과 구세주를 주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 실천적인 교훈
1)구원은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하나님의 말씀이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제시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며,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이다. 영화, 전도지, 노래 등 이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역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전파된 말씀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3)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 행위의 의와 믿음의 의의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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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영접
-로마서 11장-
본 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논하고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영속적으로 버려 두실 것인가, 또는 이 민족을 위한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장래가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1. 개인적인 증거(11:1)
“이스라엘 사람인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의 회심(사도행전에 세 번나옴)은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오늘날 이방인이 개심하는 형식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죄인들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거나,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거나 3일간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오실 때, 이스라엘이 회심하게되는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그들은 믿지 않으며 반역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박해했던 분을 보게 될 것이며(슥 12:10/계 1:7),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보기 수천 년 전에 그가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보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2. 역사적인 증거(11:2-10)
바울은 열왕기상 19장 10-28절로 돌아가, 하나님은 불신앙이 극도에 달한 시대에도 충성된 남은 자들을 반드시 남겨 두셨음을 보여 준다. 사실상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축복하신 사람들은 남겨진 자들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사 1:9 참조).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대다수가 언제나 믿음에 실패하고 개혁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취하여 다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5절은 하나님께는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몸된“ 교회라고 진술한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몸 가운데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적인 특징들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이 눈멀어 있을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계신다면 이스라엘이 다시금 무대에 등장할 때는 얼마나 더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는 이 교회 시대 동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민족적으로 다루지는 않으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에베소서 2장 14-17절에 의하면 성경적인 것이 못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한 그룹을 하나님이 선택한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8-10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눈먼 것은 이사야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에 예언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마 13:14-15/사 6:9-10 비교). 9-10절에서 그는 시편 69편 22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들을 저주로 바꾸실 것을 약속하셨다."
3. 경륜적인 증거(11:11-24)
바울은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을 논하고 있으며, 죄인 개개인들이나 성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뒤에 경륜적인 뜻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증거한다. 그 뜻이란 이른바 이방인의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정죄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도 있으시다 !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만일 유대인의 타락이 세상에 이처럼 축복을 가져왔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에는 그 축복이 어떠할 것인가를 논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떻게 세상에 부활을 가져올 것인가(15절) ! 다른 말로 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빛을 보게 될 미래가 있음을 확신한다.
오늘날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구약의 왕국 약속들은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방법“으로 성취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바울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영접을 받아 축복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감람나무의 비유는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민족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한 감람나무이다. 하나님은 가지들 중의 더러를 쳐서 이방인, 곧 “돌감람나무“를 접붙히셨다. 이것은 “자연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24절). 왜냐하면 좋은 가지를 보다 못한 줄기에 접붙히는 것이 실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한 이방인들을 종교적인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줄기에 접붙히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잘라 내시는 엄격하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방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감히 자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도 역시 잘라버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 민족들이 “세계 교회“에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할 이 시대의 종말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참된 교회를 부르시며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하신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제는 민족적이지 개인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원에서 “잘라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롬 8:35-39).
오늘날 교회는 주로 이방인이며, 우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유익을 받고 있다(감람나무의 풍성한 수액).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민족적인 면으로 볼 때 우리는 이방인들이며, 함께 나눌 것은 아무것도 없다."
4. 구약의 증거(11:25-36)
물론 바울은 이 세 장에서 구약 성경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이사야 59장 20-21절, 27장 9절과 시편 14편 7절을 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회복하실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이 눈멀었던 “비밀“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감추어진 진리였으나 신약에서는 온전히 계시된 비밀이다. “이방인의 충만함“이란 이 교회 시대에 구원을 받게 될 이방인의 수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때 주님은 교회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실 것이며, 그 후에 지상에는 7년 대환란 곧 “야곱의 역경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시대의 종말에 구원자가 올 것이며, 남은 자는 자신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란 말은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날에 모두 구원을 받게 되어 구속받고 중생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이 인용되어 있다(렘 31:31-34). 이 “새로운 언약“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믿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킬 때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여전히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들 때문이다. 인간들은 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으며, 자신의 약속을 변경시키거나 취소하실 수 없다(29절).
마지막 단락에서(30-32절) 바울은 이방인들이 한 때는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나(롬 1:18-)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있듯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지만 어느 날 자비를 받을 것임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에 불신앙과 죄 가운데 있다고 결론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둘 다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재고찰한 후에 이러한 놀라운 찬양의 노래를 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33-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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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행실
-로마서 12장-
본 장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섬김 / 12-16장)을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배운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말한다. 본 장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 가지 상징을 말한다.
1. 제단의 희생제물(12:1-2)
참된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생활은 주님께 대한 개인적인 헌신으로 시작된다.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를 거절하여 제단에서 먼저 실패한 사람이다. 사울왕은 제단에서 실패하였으며(삼상 13:8/삼상 15:10-) 이 일은 자기의 왕국을 내놓게 했다.
1)헌신의 동기-헌신의 동기는 사랑이다. 바울은 “내가 명하노니“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로 인하여 권하노니“라고 했다. 우리는 자비를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자비를 얻었으며(3:21-8:39),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2)헌신의 요건-참된 헌신은 날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 헌신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또는 캠프 파이어에 장작을 넣는 것 정도가 아니다. 헌신이란 말씀으로 새로워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와 순종을 통하여 의지를 굴복시키며 그분께 매일 몸을 드리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살며 세상을 닮아 순응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변화되는 사람, 둘 중의 하나이다(“변화되다“는 마 17:2 의 “변형되다“는 말과 같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령을 받아들일 때에 변화된다(변형된다)고 말한다.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할 때에만 그는 그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세 가지 뜻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감사하는 가운데 성장해 가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선하다(good)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종한다. 그리고 그들은 징계를 두려워한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기뻐하실 만하기(acceptable) 때문에 순종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헌신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며 그 뜻이 온전하다(perfect)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벧전 2:5). 하나님께서 원하는 첫번째 희생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의지, 곧 하나님께 대한전적인 순종이다."
2. 몸의 지체(12:3-8)
고린도전서 12장은 이러한 구절들과 똑같은 진리를 제시한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는 세례(침례)를 받고 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은사를 받게 된다. 오순절로부터 휴거될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Body)가 있다. 또한 “지교회“(local body)가 있으며, 이를 통하여 신자는 주님께 봉사를 하게 된다. 교회에 대한 112회의 신약 구절들 가운데 대부분은 세례(침례)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지교회를 지칭한다.
지교회에서의 봉사는 개인적인 헌신으로 시작하여(1-2절) 다음으로는 그 신자가 소유한 영적인 은사들에 대해 정직하게 평가한다(3절). 바울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가진 영적인 은사가 보장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높이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회자가 되도록 소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써 그가 소명을 받았음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의 은사들은 다르지만 모두 성령으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엡 2:8-9)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믿음의 분량“과 “받은 은혜에 따라서“(6절)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일곱 가지 봉사 사역을 열거한다.
-예언-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정의되어 있다.
-섬기는 일-“집사의 일을 하는 것“ 또는 집사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가르침-디모데후서 2장 1-2절에 따르는 중요한 책임이다.
-권위(권고)-사람들에게 주님을 섬기고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권하는 일이다.
-구제-순수한 동기로 마음으로부터의 순전함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행 5장 참조).
-다스림-지교회를 치리하는 데 관계된 일이다(딤전 3:4/딤전 3:12).
-긍휼(자비)을 베풂-필요한(가난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개인적인 사역이다.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받은 사람들을 제시하며,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은 지교회에 있는 신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자신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거절하는 것도 역시 비극이다(딤후 1:6).
사도행전 19장 1-7절에 나오는 열 두 사람들은 성령과 그의 은사에 대하여 무지하였으며, 사도행전 19장 13-16절에 나오는 일곱 사람들은 그들이 받지않은 은사를 가짜로 흉내내려고 하였다. 그 두 가지 모두 실패로 끝났다."
3. 가족 안에서 한 형제됨(12:9-13)
신자마다 이룩해야 할 영적인 봉사 사역이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해 준다. 사랑은 정직해야 하고 위선이 없어야 한다(요일 3:18).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고수해야 한다(시 97:10).
사랑은 친절과 겸손, 일에 있어서의 충성스러움, 영적인 일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도해 간다(여기서 “열심“이란 “끓는, 능력으로 불타다“의 뜻). 이 부분에서 언급된 특성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주어진 성령의 열매와 비슷하다는 점에 유의하자.
지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돌보며 서로 나누어야 한다. 12절에서의 기도가 어떻게 13절의 돌보는 태도로 이끌어 가는지를 주목해 보라. “대접하다“는 것은 직역하면 “사람들을 찾아 대접하기를 힘쓴다“는 뜻이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집을 개방할 때 불평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신령하지 못한 접대의 경우가 잠언 23장 6-8절에 나와 있다(눅 14:12-14/딤전 3:2/딤전 5:10/히 13:2)"
4. 전투 중에 있는 병사(12:14-2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축복을 누리고 있는 만큼 전투상황도 겪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한다(마 5:10-12). 물론, 그릇된 생활(벧전 2:11-25)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는 신자들이 있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동정심(12:15)과 겸손함(12:16)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기심과 교만은 나쁜 의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여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나 장래의 심판에서 “갚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19절).
“모든 사람의 면전에서 열심으로 쓸 것들을 공급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만인 앞에 드러난 “유리집“에 살고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자세히 보고 있음에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는 내 삶을 살겠다“는 태도는 로마서 14장 7-8절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악된 태도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므로,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죄와 타협해서는 안되며, 또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누리자“는 태도를 가져서도 안된다. 마태복음 5장 38-48절의 태도와 정신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마 5:9).
12장 19-21절에서 바울은 잠언 25장 21-22절과 신명기 32장 35절을 언급하고 있다(히 10:30 참조). 여기 나오는 원리는 신자가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12:1-2) 주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게 하며, 자기를 대신하여 싸우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다(약 1:5). 그렇지 않으면, 나쁜 간증을 남기는 한편,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번 로마의 법을 사용하였으며(행 16:35-40 참조), 더구나 몇몇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을 즐겨 하였다. 우리가 매일 로마서 12장 1-2절을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시하셔서 본 장의 남은 부분에 순종하게 하실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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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세자에 대한 의무
-로마서 13장-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지만(요 15:18/요 17:14), 그는 여전히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최선의 시민은 그리스도인 시민이다. 비록 교회가 정치에 개입되어서는 안되지만 개개의 신자들은 시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들을 당연히 사용해야 한다. 이방의 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사역을 행사할 수 있었던 요셉과 다니엘 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헌신한 신자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볼수 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인간의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 네 가지 동기를 말해 준다.
1. 진노하심을 위하여(13:1-4)
“높은 권력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해도 정부의 치리자들이다. 우리는 복음이 도시의 재무관리였던 에라스도와(롬 16:23) 네로의 몇몇 관리들과 같은 이들에게도 미칠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빌 4:22).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정부의 관리들조차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점이다. 비록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은 존중해야 한다.
치리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께 반대하는 곳에서는 사도행전 5장 29절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후에(창 8:20-9:7) 중요 형벌을 포함하여 인간의 정부를 제정하셨음을 명심하자. 검을 지니는 편은 교회가 아니라 정부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세 가지 기관만을 세우셨다. 곧, 가정(창 2장)과 교회(행 2장)와 인간의 정부(창 9장)이다. 이들의 기능은 중복되어져서는 안되며, 그렇게 되면 반드시 혼란과 문제가 생긴다."
2. 양심을 위하여(13:5-7)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는 동기가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저급한 동기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양심은 우리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의 양심에 증거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다(롬 9:1). 만일 그가 주님께순종하지 않는다면 양심을 감화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알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양심이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갖는다(딤전 1:5). 양심에 말씀하시는 성령의 증거에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더럽혀진 양심, 화인맞은 또는 굳어진 양심(딤전 4:2)이 되게 하고, 마침내는 거부당한 양심(딤전 1:19)이 되게 한다.
바울은 세금(또는 조공)을 바치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세를 지불하며 모든 관리들에게 존경을 표할 것을 권고한다(벧전 2:17 참조).
3. 사랑을 위하여(13:8-10)
이제 바울은 정부 관리들뿐 아니라 우리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도록 범위를 넓힌다. 이웃에 대한 신약의 정의는 거리의 주소나 지리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명심하자.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관원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6)에서, 예수께서는 “이 셋 중에서 누가 그의 이웃이냐?“고 질문하신다.
문제점은 “누가 내 이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며, 바울이 여기서 다루는 것도 사랑에 대한 것이다.
신자는 그 나라의 법 아래 살고 있으며, 또한 천국의 시민으로서 훨씬 높은 법, 곧 사랑의 법 아래에 살고 있다. 사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순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하루 종일 수고를 하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라고 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살인과 탐욕과 부정직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안식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자. 안식일은 사실상 유대인의 의식법의 일부이며, 이방인이나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계명 중에서 아홉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것으로 신약에 반복되고 있으나,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반복되고 있지 않다.
물론, 복음을 거절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종종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그들에게 이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논쟁을 통해서보다는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받는다. 사랑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최선의 시민이다."
4. 구세주를 위하여(13:11-14)
우리는 이제 동기들 중의 정상에 이르렀다. 양심의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를 갈구하는 양심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더 가깝다는 의미에서 볼 때, 매우 가깝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새로운 몸, 새로운 가정 등 우리가 소유할 총괄적인 축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빛에 속하였으며 낮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복음의 빛을 본 사람들로서, 깨어 있어 경계해야만 한다(고후 4장).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죄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낮이 가까워왔다“(히 10:25- 참조)
바울은 여기서 많은 지독한 죄들을 열거한다. 성도들 가운데서는 이름도 꺼낼 수 없는 죄들이다. 술취함과 부도덕은 늘 수반되며, 싸움과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술취함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는가 !
14절은 신자들의 이중적인 책임을 말해 준다. 즉,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옷입어“ 그리스도를 자기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소극적으로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반스 하브너(Vance Havner)가 말하듯 “죄를 계획한다.“ 다윗이 그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리스도가 곧 오실 빛 가운데서, 영적으로 깨끗한 근신하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마지막 때는 무법한 시대일 것이므로(딤후 3:1-/요일 3:4 참조),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간증을 유지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렵게 될 것이다. 정부들은 점점 더 성경과 그리스도를 적대할 것이며, 결국은 죄의 사람(The Man of-Sin)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사단의 제도로 연합시켜 진리를 반대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4장 5절을 읽고,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님께 충성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