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普賢行願)의 개요 (강의록)
종교의 목적은 인간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부처를 이루어 생사를 해탈하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깨달음이 부처를 이루는 길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깨달음과 수행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인생을 다 바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 이룬 것이라 할 것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그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 곁의 수행자들은
삶의 질이나 행복함보다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중생의 고통을 외면한 깨달음으로 인해
불교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깨달아 성불하는 방법의 문제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가 바로 부처이며
부처자리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바로 수행이라 할 수 있다
* 보현행원의 내용
우리나라에서는 옛 부터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켜서
이 한 품을 별도 책으로 간행, 유포시켰다.
그 내용은 부처의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행원을 닦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
먼저 보현보살의 10대원이,
①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
② 부처를 찬탄하는 것,
③ 널리 공양(供養)하는 것,
④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것,
⑤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
⑥ 설법하여 주기를 청하는 것,
⑦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
⑧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
⑨ 항상 중생을 수순(隨順)하는 것,
⑩ 지은 바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것임을 밝힌다.
그런 후에 이들 열 가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하나씩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즉 예배 · 찬탄 · 공양 · 참회 등 어느 하나를 행할지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행하되 허공계(虛空界)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衆生業)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행하여야 하며,
그 생각이 끊어짐이 없을 뿐 아니라
몸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 수행이 잘 안 되는 이유 *
1. 업장이 너무 두꺼울 때... 진언 등으로 업장을 녹이며 수행
2. 수행의 택 법이 잘못되어 자신과 맞지 않을 때...근기에 따라
3. 수행 자체가 평소에 우리가 하는 행동과 다를 때
...요가. 결가부좌의 자세. 잠 안자고 하는 용맹정진
* 현대수행 자체의 문제점 *
전문가 출가자 프로를 위한 수행이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때, 도량이 필요하고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나 참스승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는 불자가 더 많다
이런 조건과 제약으로 바쁜 현대생활에서는 수행을 하기가 참 어렵다
그리고 수행이 나의 문제 나의 깨달음 나의 명상에만 집착하여
남에게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
즉 수행은 지혜와 자비가 동시에 밝아져서
나의 수행이 타인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지혜 완성에만 치우친 것이 현실에서의 수행의 문제다.
현실속의 재가자가 세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면서
할 수 있는 수행을 부처님께서는 대승의 수행 즉 염불 사무량심
사섭법 육바라밀 등을 통해 밝혀 놓으셨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보현행원 수행법이다.
보현보살이 53선지식을 만나고 온 선재동자에게 일러주신
누구나 다 알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열 가지 가르침이
바로 보현행원이며 이것이 화두 절과 같은 수행인 줄을
우리는 몰랐던 것이다
이렇듯 보현행원은 배울 필요도 없으며 스승이 굳이 필요도 없다
내 주위에 나를 좋아하고 환영하는 자가 많으면
내 공부가 잘 되어 가는 것이고
내 주위에 시비 거는 자가 있고 싫어하는 자가 있으면
내 공부가 잘 안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현행원의 기본인 공경 칭찬 찬탄의 공덕은 즉각적이다
닦아서 오는 먼 훗날의 과보에 의한 공덕이 아니고
한 사람의 보현행자와 더불어 같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는 즉각적인 공덕을 받는다.
즉 잘난 소수의 사람에 의해 못난 다수의 사람이
함께 더불어 행복해 지는 사회 건전하고 건강한 선진사회와 같다.
이처럼 보현행원은 보현행자 한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행복하고 해탈로 가는 진정한 수행인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하심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 혼자의 성불로 끝내지 않으시고
일체중생을 함께 부처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보현행원이 바로 나와 남이 함께
성불의 길로 가는 위대한 수행인 것이다.』
보현행원의 공덕은 올바른 수행으로 인하여
즉각적으로 바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보현행원은 긍정적이고 구체적이며 저절로 되어지는 수행이다
* 보현행원은
1. 밝은 수행이다
공경함은 올려다보는 것이고 확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경을 하게 되면 하심은 저절로 된다.
2. 구체적인 수행이다
칭찬하고 공경하고 공양하고 바쳐라는 아주 쉽고 구체적이다
모든 수행은 부처님이 종착점이고 또 재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부처님으로 시작은 못 해도 부처님으로 끝나는 수행이어야 하며
또한 부처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완벽한 수행이다
보현행원은 부처님으로 시작하고 부처님으로 끝나는 완벽한 수행이다
보현행원은 깨달음을 뛰어 넘은 행이다
돈을 벌어 잘 쓰던 못 쓰던 쓰야 하는데
애써 벌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는 사람이 있다.
깨달음도 이와 같다.
우리는 깨달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해탈의 삶을 이 자리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심우도에서 산속에서 소를 찾아 헤메다가
결국 중생의 사회로 내려와 함께 어울려 같이 사는 삶이
바로 깨달음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경하고 찬탄하고 섬기는 것은 깨달음 후에 나오는 행이다
부처님이 바로 그 증명자이시다
그러므로 깨친 자는 반드시
섬기고 공양하고 찬탄하는 보현행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 처럼...
보현행원의 깨달음은 닦아서 먼 미래에 과보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소식이다
그리고 보현행원은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이요,
또한 그 깨달음을 나누는 방법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소식은 한계가 있는 언어로는
비슷하게 말 할 수는 있으나
꼭 맞게 딱 떨어지는 표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성불로서 깨달음의 소식을 밝혀 주셨다.
그것은 상락아정
바로 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은 언제나 즐겁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며 완전한 부처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혹한 중생으로 살지 말고 오로지 부처로 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중생들은 밝고 찬란한 내 본성을 보지 못하고
깨달음에만 매달려 어둡고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깨치는 것이 화엄의 가르침과 보현행원의 가르침이다.
* 세간의 경계가 바로 여래의 경계다
불법은 세간에 있는 것이지 절대 따로 있지 않다
부처는 중생을 위해 설법을 하신다.
나 또한 대접받고 존중 받아야 할 부처이며
보현행원을 통해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보현행원에서 행원이란 말은 원을 행한다.
즉 원을 가지고 행한다는 말이다
즉 보현의 원을 가지고 행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행이 있어야 깨달음이 온다.
우리는 비록 업보중생이지만 행원을 하면
저절로 깨달음이 찾아와 부처님 세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보현행원은 바로 깨달은 자의 행이다.
업장을 지닌 채 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정토사상이며
이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고
업장을 지닌 채 업보중생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님처럼 원만하고 찬란하게 살아가는 가르침이요,
수행이 바로 보현행원이다.
* 모든 수행에는 꼭 원이 있어야 한다 .
발심해 보리를 구하는 자는 먼저 청정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수행에는 원이 있어야 그 수행이 원만하고 완벽하게 되고
또 그 원이 수행을 올바르게 이끌어 준다.
또한 원이 있으면 수행이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된다.
서원의 힘은 빠르고 안락하다는 말처럼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꿈을 이루게 한다
화두 염불 주력같은 수행도 원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리고 보현행원 수행자가 한결 같은 것은 바로 그 원이 있기 때문이다.
* 원과 욕심의 차이는
욕심에는 내가 있고, 구하는 어두운 맘이 있으며,
나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욕심에는 끝없는 갈애가 생기고 시기와 방해가 생기고
욕심이 비록 중생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는 하나
결국은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든다.
반면 원에는 내가 없고 부처가 있으며
구하는 마음 대신 맹세하는 마음이 있으며
부처님을 기쁘게 하고 갈애가 없고 칭찬이 따른다.
이렇듯이 욕심의 삶을 서원의 삶으로 바꾸면
고뇌가 없어지고 삶이 안락하게 된다.
1. 나의 자리에 부처님을 놓고
2. 행마다 원을 붙인다.
3. 원이 없다면 원이 생기기를 발원하라.
그러면 여태 무의미했던 일상의 행들이 나와 남을 밝히는 수행이 되고
여기에다 부처님을 세우면 바로 보현행원이 된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우리의 삶터 자체가 거대한 수행의 도량이 된다.
번뇌가 있고 고통이 있는 내 직장 내 가정이 바로 수행도량인 것이다.
무의미했던 행들을 부처님께 올리면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 되고,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보현행원이다.
보현행원의 수행은 화엄의 수행과 같이 신해행증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크게 기본행원과 응용행원으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열 가지로 표현된 부처님의 공덕이 따로따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신해행증이 자기복제와 가지치기의 프렉탈 현상을 통해 끝없이
반복중첩이 되며, 그래서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그것은 부처님은 중생의 업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보고
또 부처님으로 만드는 보현행원은 바로 견불수행이다.
내가 상대에게 부처가 되어주고
또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존중하고 공경하여 부처님으로 만드는 것이
견불수행이고 보현행원의 수행인 것이다.
* 그러면 나에게 좋은 이로 다가오는 사람을 부처로 만들기는 쉽겠으나
나에게 괴롭고 거칠게 다가오는 사람을 어떻게 부처로 볼 것인가?
1. 일체중생을 해탈시켜 행복하게 만드는 보현의 원력 즉 불력으로 보라.
2. 깊은 믿음과 지혜로 눈앞의 부처를 믿어라.
이렇게 내 공부가 일천할 때는 불력을 빌려야 한다
불교는 자력 타력의 종교가 아니고 바로 부처님의 힘,
불력의 종교인 것이다
그런 믿음에서 바로 행이 펼쳐지게 된다.
이렇게 지혜와 자비가 동시에 완벽하게 수행되는 것이
바로 보현행원의 수행인 것이다.
* 보현행원 수행의 자세
1.무유궁진.. 중생계가 끝이 없다.
내 생명이 무한하므로 나의 원과 행도 끝이 없다.
2.염념상속 무유간단...모든 수행은 생각생각 끊임없이 이어져야한다.
모든 수행은 꾸준해야 한다.
3.무유피염...피곤하다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마라.
좋다는 마음은 유한한 마음이고 그 마음이 사라지면 공덕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바보처럼 묵묵히 꾸준하게 해야 한다.
수행을 잘 하려고 하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