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장난꾸러기였다. 세 사람이 속골목 떡집에서 떡을 먹다가도 그는 쟁반 채 들고 도망치기도 하고, 가정집 대문을 발로 차서 주인이 욕을 하며 달려오면 깔깔 웃으며 내달렸다. 으슥한 골목에서 아가씨를 만나면 강제로 입을 맞추는 불순한 행동을 예사로 했다. 나와 내 친구 상태는 그의 지나친 장난에 당황스러웠지만 흥미를 느낄 때도 있었다. 좀 심한 일은 그가 서점에서 점원 아가씨와 희닥거리를 하는 동안에 상호와 나는 '고등대수와 해석기하'에 관한 참고서 한 권씩 슬쩍해온 일도 있었다. 미리 장난을 계획한 일이었지만 그 후로는 서점 주인을 바로 볼 수 없어서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
문제학생으로 지목된 병호와 내가 한 방에서 지내게 된 것은 고교 2 년 때였다. 말썽꾸러기 아들을 둔 병호 아버지가 담임선생에게 부탁하기를 모범학생 한 사람을 소개해주면 병호와 함께 기거케하여 병호의 본보기로 삼겠다고 하자, 담임선생께서 나를 천거했다. 그 때 담임선생은 후에 국문학 학자로 유명해진 남광우선생이었다. 남선생님은 나는 공부 밖에 모르는 위인이고 병호는 깡패기질이 농후한 문제학생이니 둘이 한 방에서 지내면 극과 극이 중화를 이루어 두 사람이 다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하며 교육자 다운 말을 하셨다. 내겐 하숙비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며 적극 권유하셨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보다도 근검 절약으로 자수성가하신 아버님의 가훈인 절약정신이 나를 옭아매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님은 비싼 하숙비가 아까워서 반대금만 주고 친척집에 위탁하셨다. 나는 오랜 동안 친척집을 전전하는 반대금 하숙생활이 지겹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궁여책으로 하숙비도 안 내도 된다는 병호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나는 명목상으로 병호의 후견인처럼 그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힘으로써나 기질로써 그를 가르치거나 당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충고도 용납되지 않았다. 전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험기간에 어디로 도망치지 않고 내가 시험공부를 하면 그는 김내성과 방인근 작품인 소설 '청춘극장'이나 '마도의 향불'과 같은 것을 읽고 재미있는 구절을 발췌해서 일기장에 적는 정도였다. 뒤에 담임 선생께서 병호의 일기장을 점검하면서 병호가 문학에는 다분히 소질이 있다고 하시며 나와 함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하셨다. 나로서는 당치도 않고 체면이 서질 아니하여 하숙비는 반대금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웃에 하숙하고 있는 친구 상태와 함께 병호의 깡페기질인 싸움질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병호는 어디서 얼마를 맞았는지 얼굴이 부어서 돌아올 때도 있었고 정강이가 찢어져 피를 흘리며 상쳐가 나있었다. 병호의 말은 상대방이 박치기하려고 머리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두발 뛰기로 상대방의 얼굴을 정강이로 박아서 생긴 잇발 자국이라고 했다. 그 당시는 킥복싱이라는 스포츠 종목이 없었는데 뒷골목 싸움꾼들에게는 유행했던 것 같았다. 상태와 나는 병호가 싸움질 할때의 비호 같이 빠르고 사나운 동작에 가까이서 보고 놀랄 뿐이었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가 여고생 F와 연애질 할 때만해도 상태와 나는 옆방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킥킥거리기만 했다. 언감생심 그의 연애질을 막을 수는 없는 일. 단 들러리를 서준 꼴이었다.
병호와 일 년을 같이 지내면서 나는 그를 본받아 곤봉과 아령이며 역기로 매일 운동을 했고 싸우는 몸짓을 하며 권투 연습을 했다. 내 몸매는 소포츠형으로 닮아갔지만 학업성적은 별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누구나 타고난 소질이라 할까 타고난 팔자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깡패 같은 병호와 같이 지내면서도 싸움이나 연애질은 좀처럼 배울 수 없었던 것처럼 병호도 공부하는 내 소질을 닮을 수 없었다. 그는 성적이 별로 향상되지 않았고 병호 어머니는 여전히 얼굴을 펴지 못하고 울상이었다. 나는 병호 어머니를 볼 때면 양심상 가책이 되어 오래 있을 수 없어서 졸업을 팔개 월 앞두고 병호와는 결별을 했다.
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진학하여 아버님의 절약정신을 살려서 자취를 했다. 요리 솜씨가 없는 나는 콩나물 소금국과 두부를 먹고 일 년을 지냈다.
아버지는 내가 신문을 보면 신문 값을 아까워할 정도로 집안 식구들에게는 무척 인색한 편이었지만 남들에게는 아주 후하셨다. 동네에서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빠짐없이 금일봉을 주셨고 남 잘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나 또래의 누가 조그만한 성공이라도 한 것을 아시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셔서 자식인 내가 샘이 날 정도였다. 생계가 어려웠던 큰댁을 돌봐주셨고 선령에 대한 이력과 접빈객에는 정성을 다하셨다. 제사를 모신 뒤에 남은 설적과 전은 건조시켜 두었다가 손님 반찬으로 쓰셨다. 종교단체에도 논마지기를 희사하는 등 의로운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불의의 돈은 쓸 줄을 모르셨다. 지방의회 의장의 소임을 맡았을 때였다. 신문기자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며 종일 귀찮게 굴자 "기자들은 모두 도둑놈들 아닌가?"하면서 고함을 질러 돌려보냈다. 그 후 기자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제기했다. 아버지는 대구 검찰청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데, 심문하는 검사가 웃으며 "기자들을 다 도둑놈이라 하면 전라도 기자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기자들도 고소하려들 터인데…" "앞으로는 욕을 하지 마십시오" 하며, 한마디로 범죄 구성요건 흠결로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아버님을 돌려보냈다.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돈 한 푼 안 주신 아버지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아버님을 존경하여 마지않는다. 보통사람이 지니기 어려운 남 잘 되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과 조금이나마 실천하여 보여주신 이웃 사랑하는 마음씨가 내 심금에 울려오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날 굶주리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은 오로지 부모님의 은덕인 것을 잘 아는 나에게 무슨 할말이 더 필요하리요.
절약을 신조로 하는 아버님의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는 나에게는 생활비가 얼마 들지 않는다. 체질적으로 채식주의이므로 비싼 돈을 주고 육미를 사먹는 일은 거의 없고 입성에도 별로 돈을 들이지 않는다. 내가 입고 다니는 정장 중에는 거짓말로 들릴테지만 단돈 2천원 주고 산 것이 두벌 있고 만원 주고 산 방한복과 만오천 원 주고 산 두꺼운 겨울 코트며 남들은 사치품이라고 말하는 3 만원(시가는 30 만원 정도)주고 산 밍크 코트가 있다. 어디서 공으로 주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나는 이 옷들을 3 년 전에 세일하는 데 다니며 산 것들이다. 세일에서 산 것을 단추 구멍을 내서 단추를 새로 달거나 등어리가 우는 것을 세탁소에 가서 약간씩 수선을 하니 몇 십만 원 짜리 정장과 별 차이가 없었다.
헐값으로 치장한 내 풍모가 그리 허술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름대로 멋을 낸다고 자부하는데, 이웃에 사는 김사장은 언젠가 말하기를 "권선생은 돌봐주는 옷비서라도 두고 있는지 멋있는 옷은 혼자 다 입고 다닌다" 고 했다.
내 아이들은 나의 생활 태도에 한때 반기를 올렸지만 직장에 다니면서부터 역시 조상 전래의 가풍을 닮아가고 있다. 값싼 와이셔츠를 사는 것을 보고 '헐값이 비지떡이라'하며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리고 절약 끝에는 반드시 이웃을 배려할 것을 강조하고 옷 몇 벌을 보시함(절에 비치해 있음)에 넣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세일이 많아 절약하여 살기에 좋고, 절약하여 넉넉해진 마음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 편리하고 고마운 나라이다.